마산의 관공서 - 4
□ 마산거류민단역소(馬山居留民團役所)-신시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 소재
1899년(명치 32년) 7월에 조직된 일본거류민회의 총대(總代) 사무소가 진화한 것이며 그 후 총대를 이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사무소의 명칭은 그대로이다.
1904년(명치 37년) 5월 총대사무소는 처음으로 민간사무소 즉 민역소로 개정되어 이사는 민장(民長)으로 개명되었다. 이때 가고시마(鹿兒島) 현(縣) 사족(士族) 출신으로 한해어업조합(韓海漁業組合) 마산지부장인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가 민장으로 추천, 선임되었다.
1906년(명치 39년) 9월 1일, 일본한은 통감부의 고시에 따라 거류민 단체를 만들고 미야하라 씨를 거류민단 민단장 대리로서 사무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민단제도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은 부산거류민단사무소의 제1과장인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를 민장으로 영입할 것을 의결하였다. 마에다 민장이 착임(着任)함으로써 마산의 발달을 진심으로 도모하고자 하는 자치제도는 크게 진보한 점이 있지만 거류민이 납부하는 민세(民稅)는 더욱 증대된 것이다.
1908년도(명치 41년)는 우선 호별세, 상업세, 공업세, 잡종세의 4개 종목이었으나 다음 해부터는 가옥세도 부과하게 되었다. 마에다 민장은 효고(兵庫) 현 출신으로 영리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자치기관의 수장으로서는 다소 침착한 태도가 결여된 감이 있다.
침착성이 부족한 것이 평민들과 사귈 때는 무난하게 지나가지만 감독관청이나 다른 관리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비굴하기까지 하다. 좀 더 오기를 가지고 버틸 때는 버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종종 나온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마에다 민장은 극장장인 좌장(座長)으로서의 관록이 부족한 점이 보인다고나 할까. 이것은 결국 그 사람의 학식이 모자라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좌중을 다스리는 힘이 있으면 숨기고 있던 일이나 정체를 드러내는, 마각을 드러내 놓고 자신의 역할 정도는 감당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 마산거류민단장 / 사진은 『마산과 진해만』(1911) 에서 가져옴>
오로지 자기 자리에만 연연하여 주의 주장과 의리 인정 등의 교제에서 너무 글 읽는 식의 일방적 방식을 집어치우고 거류민의 행복을 위하여 또한 마산의 발전을 위하여 결연한 의지와 여론을 모으고 만약 이것을 철저히 해내지 못할 때에는 그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겠다는 용맹스러운 정신과 기상이 있으면 마산의 동정을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회계역(會計役)은 다수미 소지(田角宗治)로 많은 사무는 그의 수완에 의해 결정되니 민장 이상으로 더욱 노련한 사람이란 평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는 바로 판정하기 힘들다. 다수미 씨는 성실한 정신에 명석한 두뇌를 갖고서 사무를 처리하과 교제 면에서도 온화한 호인이라 하겠다. 현재 민단 사무소에 대한 여론의 일반(一斑)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민장은 고관대작인 양 집무실에 처박혀 있지 말고 창구로 나와 원활한 사무 처리를 도모할 것
* 민단 직원들은 위생의식이 확실한 자를 채용할 것
* 일본 및 한국의 관보, 통감부보(統監府報) 등도 대기석에 비치하고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할 것
* 거류민이 직접 관계된 규칙이나 공시 서류는 마치(町)마다 혹은 각 구(區)마다 대표를 정해 그 집에 교부하여 비치하도록 할 것
쓸데없는 인원과 경비를 줄인다는 것은 상투적인 말일뿐더러 말은 해도 쉽게 실행되지 않는 사정도 있을 줄 한다. 거류민의 행복과 마산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부과되는 세액이 지금의 배가 되어도 쓴 소리는 나오지 않으리라. 민회 의원도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안 된다.
장식적인 조각 같은 기관에 아무리 많이 인형 같은 인원을 앉혀 놓아도 인형 같은 의원을 몇천 개 가져다 놓아도 그야말로 경비만 증대할 뿐 마산과 거류민을 위하기에는 개똥만도 못한 것이다.
어쨌든 민단 직원이든 민회 의원이건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비열한 생각은 깨끗이 씻어 버리고 친절이란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직함의 명예는 자랑하되 그것을 이용하려는 허영적인 욕정일랑 불길 속으로 던져 버리고 일본혼(日本魂)이라든가 무사도(武士道), 공정함, 도의와 인덕, 예절 등의 간판은 양 어깨에 달고 여론을 따르게 된다면 민단 사무소의 훌륭한 건축이 가능해질 것이며 민회 의사당도 세우질 것이다.
거류민이 민세가 높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인원과 경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설치한 기관이 아무리 기름을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기관이 원만하게 운전되어 간다면 다소 이치를 아는 일본인이라면 민세가 높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 변두리 지역에 요리집으로 임차된 세집이 바로 민단 역소 맞은편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거류민으로서는 참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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