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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번창기(1908년) - 26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by 운무허정도 2022. 2. 28.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5

 

(14) 요리점과 예기, 작부

마산이사청 관내에 임대방(貸坐敷, 대좌부)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게는 없고 다 요리점이라고 한다. 요리점은 임대방의 대명사이다. 이 요리점은 공회당이기도 하고 교성을 자아내는 따뜻한 방이 되기도 한다. 작부는 예기의 대명사이며 예기란 요금을 정하고 손님과 한 이불을 쓰는 그런 예기는 공창이지만 불법 매춘부는 아니다. 예기는 모두 감찰(鑑札)을 두 장 가지고 있고 작부를 겸하고 있으며 작부와 다른 점은 같이 잘 때의 요금이 조금 비싸다는 것이다.

작부는 샤미센(三味線, 삼미선)을 치지 않지만 예기는 그 실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샤미센도 치고 북도 치고 춤도 춘다. 이부자리에서의 동작은 예기든 작부든 매 한 가지다.

이 두 업종은 원적지 혹은 소재지의 존속 어른, 존족장(尊族長)의 승인이 없을 때는 경찰서에서 허가를 하지 않는다. 일단 허가를 받으면 민단에서 과세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경찰 촉탁의사가 있는 마산공립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되어 있다.

그때 병이 있는 예기부(藝妓婦)는 수용 된다. 예기들은 이를 별장행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병실이 청결하고 거기서의 조망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별장행을 마다하기는커녕 차라리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의 출생지는 거의 오사카 서쪽 지방으로 히로시마 현을 첫째로 하고 오카야마, 야마구치가 뒤를 잇고 효고, 시코쿠 지방, 큐슈 지방 출신자도 간혹 있나 보다.

이 요리점에는 예기, 작부 외에도 나카이(仲居, 중거, 술상 차려주는 도우미)란 여자도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침실에 들지 않는 여자로 되어 있지만,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교활한 요리점에서는 작부 속에 끼게 해서 뒤로는 매음을 권한다고 한다.

요리점으로서는 신시의 망월(아래 사진), 승리루(勝利樓), 산수정(山水亭), 이로하(いろは), 봉천관(奉天館)이 있으며 마산포에는 화월(花月), 미와라시(見晴), 수월(水月), 군의도(君の都), 나니와(浪花) 등이 있다. 예기 54명, 작부 37명, 나카이 35명이 최근의 통계이다.

 

 

샤쿠산가(尺山街, 척산가) 몽고정(蒙古井)에서 서쪽으로 백 미터 정도 들어가면 융월(隆月)이라는 한인 요리점이 있다. 영업주는 한국인이라 하는데 군마(群馬) 현 출신의 나카무라 모(某)라는 사람이 실권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기생이 9명 있으며 주로 한인을 상대로 한다는데 한국 기생의 방사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해서 유흥에 젖는 일인도 적지 않다. 이들 역시 예기, 작부와 같이 매주 검사를 받고 별장행 신세가 되는 이도 있다.

기생이란 관기와 갈보 사이에 위치하는 공창이며 그 출생지 부윤 혹은 군수로부터 기생면허증을 받지 않으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자격이 없는 자는 영업을 못하고 영업이 안되는 자는 갈보가 되어 비밀리에 매음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갈보 중에는 서방을 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은 성병을 앓는 자가 많으니 일인들은 섣불리 손대면 아니 된다. 당장 병세가 나서 간단히 치료가 되지 않을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관기(官妓)는 공창인데 아주 고상하고 지방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다 경성에 살며 옛날에는 자유로이 궁궐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일본에 비유하면 궁중의 여관(女官)이라 하겠다. 관기는 궁궐의 연희에서 그 춤과 재주를 보여주고 대관(大官)이 원한다면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도 했다 한다.

 

(15) 마산의 집세

마산이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세간의 일반적인 불경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 그래도 불이 다 꺼진 것과 같은 양상은 아니다. 마산포에서는 항상 한국인의 돈을 흡수하고 있을뿐더러 미곡이 수확되었을 때는 일본에 수출되는 그 금액만으로도 70만 원이라는 거금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해산물도 해마다 8,90만 원의 돈을 흡수하고 있다. 그 외에 생우(生牛), 우피(牛皮) 등이 수출되어 들어오는 운전 자본은 막대한 것이다. 또한 신시에는 때때로 함대가 출입할 뿐만 아니라 중포병영의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으니 돈의 유동은 아주 원활하다.

어업에 관해서는 내외의 돈을 흡수하는 규모가 크므로 불경기라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주나 가옥주 가운데 욕심이 많아 집세를 내려줄 줄을 모르며, 도리어 남이 어려움을 비웃으며 지내는 의리도 인정도 없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욕심만 챙기기에 바쁘고 마산의 발전 따위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이며, 몰지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피도 눈물도 있는 가옥주인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 씨나 미야 요시로(三宅吉郞) 씨 등은 이렇게 말한다.

“마산의 집세는 너무 비싼 것이 아닐까. 나도 집세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비싼 것은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가옥주들의 생각도 있어 함부로 내리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집세가 비싼 것은 마산의 발전을 저해한다. 아니 오늘의 집세 비율로는 집주인의 이익이 너무 많다. 집세 인하에 찬성 지주가 있으면 나는 주저 없이 내리겠다.”

또 한편 욕심에 찬 냉혈 동물 같은 이가 다음과 같이 불어대는 것을 직접 들었다. “집세가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떠나면 돼. 우리 집 방침은 3년이고 4년이고 비싼 집세를 낼 사람이 나설 때까지 비워 두겠소.”

이 무슨 폭언인가! 마산의 발전을 위해서는 중대한 장애물이 아닌가!

돈 있는 것에만 기대어 이렇게도 부조리한 말을 내뱉다니 참으로 인면수심이 따로 없다. 이익이 나는 한 집세도 내리고 이주자를 환영하게끔 하고 그들에게 편리함과 위안을 주는 것이 먼저 이주한 사람의 의무가 아닌가. 참 못 되었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스물여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