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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7.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6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 군자금 모금 사건(1)

 

이교재(우측 사진)의 독립투쟁에서 두 번째 단계는 상해로 망명한 다음 상해 임시 정부의 일원으로서 활동한 시기이다.

그는 상해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임정의 지시를 받아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1923년 9월 21일에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이 있다. 따라서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뒤 출옥했을 1921년 12월 이후에 상해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간의 국내 기록들은 ‘3.1만세운동이 전국에 한창일 때 감연히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동지와 규합’하였다거나,(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1921년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갔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7쪽.)고 보았다.

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상해로 망명한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1921년 출옥 후 혹은 1922년 4월 벌금형 이후 상해로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기부금품취체규칙 위반으로 체포된 사실도 상해 임정과의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본다면, 그의 첫 번째 상해행은 1920년도 말의 출옥 직후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교재는 왜 상해로 갔을까?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당시 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자는 부류와 외교와 정치력을 통해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부류가 있었다.(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 연구, 지식산업사, 2016, 114~115쪽)

전자에 뜻을 둔 이들은 만주로, 후자는 상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교재가 상해를 택한 이유는 통상적으로 일찍부터 한인들이 집결하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3.1운동 이후 망명자들이 급증하고 일본과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3월 하순경 최고기관 설립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설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8~51쪽) 독립운동에 뜻을 둔 인사들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진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맺은 인맥이나 단체를 통해 상해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상해의 임정과 마산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조직은 국권회복단이나 대동청년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권회복단은 1915년 대구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 등이 경북지방의 유림을 포섭하여 조직한 항일운동결사였다.

이 단체는 마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안확을 지부장으로, 李瀅宰·金璣成을 임원, 부원으로 이순상·배중세·변상태 등이 참여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경남대 경남지역문제연구소, 2004 참조)

이 중에서 일부 단원들이 4.3삼진의거 때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고, 이후 상해 임정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79)

1909년 10월에 안희제·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형식의 대동청년단은 1945년까지 비밀결사로서 활동했기에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는 대동청년단의 거점이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4쪽. 80) 떤 경우 대동청년단의 표면적인 조직활동으로서 국권회복단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권대웅, 「조선국권회복단연구」, 160~163쪽)

마산과 삼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형재·배중세·변상태·김관재 등과(김봉열, 「마산 삼진의거의 3.1운동사적 고찰」, 경남의 역사와 사회연구, 239쪽) 윤상태·서상일·신상태·남형우·박영모·안희제·박중화 등도 양 단체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구성에서도 의원 중 남형우를 비롯한 대동청년단 출신이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I -상해시기, 80쪽)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 및 국권회복단과 일련의 연락망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재는 1923년 9월에 통영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상환과 서상호가 국권회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통영시사편찬위원회, 통영시지1, 통영시사편찬위원회, 2018, 534쪽. 서상호는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박성숙의 처남이었다. 박성숙은 또 이교재의 내종형제였다.)

또한 이교재가 마지막으로 국내에 들어올 때 임정에서 전한 문건 중에 김관제와 윤상태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2인 모두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마산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에서 김관제는 변상태와 함께 각각 경남 동부와 경남 서부 일원의 의기를 책임지고 분담하였고,(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88쪽. 김관제는 경남 창원군 동면 무점리 51번지 출신으로 1920년 5월경에 있었던 의열단 폭탄 밀송 사건 관련자로 체포될 당시 김해군 김해면 남문통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高等警察要史,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5권 1920년 7월 31일 의열단원 곽재기 이성우 등 26명). 이후 김관제는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직의 주요 인물이었던 변상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는 책임을 맡았다.86) 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80쪽. 86)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 멤버 이순상(이순상은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11년 3월에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송성안, 「자산 안확과 마산」, 270쪽)은 상해에서 잠입한 高漢과 부산에서 접촉하기도 하였다.

권오봉의 동지였던 안희제는(이병철, 「다시 쓰는 인물독립운동사, 백산의 동지들 9, 성재 권오봉」, 부산일보1995년 1018일자 : 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권오봉선생비문, 삼진독립운동사, 88~89) 1917년에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특히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남형우와 윤현진을 파견하였으며, 임정의 재정난이 심각할 때 누만의 자금을 조달하여 위기를 돌파하도록 도와준 사실도 있었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11~113쪽) 나아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원년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정원 의원에 경상도 대표 6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을 맡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임시정부사 자료집), 독립유공자 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155쪽) 백산상회 자금 30만 원을 임정에 헌납하기도 하였다.(인터넷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윤현진)

상해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고한은 배중세와 안확과도 면식이 있었고, 결국 배중세와 함께 상해로 탈출하였다.(「이순상신문조서(제1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국권회복단),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판 참조) 이 때 상해로 탈출한 사람으로 배중세 뿐만 아니라 남형우, 윤현진도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교재는 권오봉, 안확, 변상태, 김관제, 안희제, 배중세, 남형우 등을 비롯한 삼진, 마산 및 경남지역과 상해를 연결하는 국권회복단 및 대동청년단이라는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상해행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교재는 당시 어떤 루트를 통해 상해로 갔을까.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상해 및 만주로의 망명 열기가 타올랐다. 이 당시 상해행 루트는 열차로 신의주까지 간 다음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의 단동(현 안동)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는 노정이었다.

임정에서는 1919년 7월 10일에 연통제를 설립하면서 국내와 임정의 연락망을 조직화하였다. 연통제란 임정과 국내를 연결하는 비밀연락망 조직으로 당시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설립하여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 77~81쪽.)

남편을 따라 상해로 망명한 정정화는 연통제와 뒤이어 만들어진 교통국을 통해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잠입경로는 상해에서 아일랜드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안동으로 간 다음 그곳에 상주하는 통신원의 집에 머물고 그의 안내에 따라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오는 노정이었다.

신의주에서는 비밀연락 거점인 이세창 양복점을 접촉하였고, 그의 편의로 서울에 도착하면,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 박사를 찾아가 이곳에서 약 20일 동안 머물며 임정에서 지시한 사람을 만나고 자금을 모은 다음, 위의 귀환 코스를 거꾸로 되짚어 가며 상해로 귀환하였다.(한시준, 「정정화의 생애와 독립운동」, 사학지 47, 2013.12, 137~141쪽)

이교재도 이른바 ‘정정화루트’라고 부를 수 있는 코스를 따라 상해로 들어갔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위 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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