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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12

by 운무허정도 2020. 3. 9.

본 회까지 총 12회에 걸쳐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포스팅하였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Ⅴ.맺음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두어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이교재(우측 사진)의 사망 상황과 관련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컨대 “부산형무소에서 2년 언도를 받고 복역중 1차 피검 당시의 전신타박과 고문의 여독으로 49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정돈”이라는 1954년 4월의 이교재댁 방문 기사가 그렇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3)」, 마산일보, 1954년 4월 16일자)

이보다 7년 뒤에 동일한 신문사에서 작성한 이교재의 추도식 관련 기사에는 “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는 추도문을 전하기도 하였다.(「죽헌 이교재 열사, 32주기 추도회, 4월 17일」, 마산일보, 1961년 4월 1일자)

이보다 10여 년 뒤에도 변지섭은 “1931년 사명을 띠고 입국, 진주의 허만정, 달성의 문대효, 창녕의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事露하여 마산경찰서에 피검,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영면”하였다고 기술하였다.(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178쪽. 그러나 문대효, 성낙문 등 부호가를 역방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검되었다는 기술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각종 문건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의 사실을 과거에 소급하였기 때문이다. 이교재는 문대효나 성낙문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이 기술은 사실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교재는 위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설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망 직후에 나온 신문 보도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교재의 사망 직후 동아일보는 「이교재씨 영면」이라는 제목 아래 “신유년 통영 사건으로 6년간의 철창생활을 겪고 나온 후 이래 10수년간을 해내외로 다니며 많은 활동을 하던 斗山 이교재씨는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불행히 지난 12일에 씨의 고향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영영 이 세상을 이별하였다 한다.

유족으로는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고, 다만 80노모와 미망인 홍씨가 있을 뿐이라 한다”고 그의 부음을 전하였다.(「이교재씨 영면, 신유년통영사건으로 옥고 후 신음 중」,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자)

“풍상에 받은 악질로서 수년 동안 신음하던 바.. 자택에서 세상을 이별”이라고 한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수년간 병으로 신음하였고, 마침내 악질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신유년 통영사건’이라거나 ‘6년간의 철창생활’은 잘못된 설명이다.

통영사건은 신유년(1921)이 아니라 1923년(임술)에 있었으며 감옥생활 역시 4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교도소라든가 옥사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가족으로는 부인과 노모 외에 8살 된 딸이 있었으나, 이 역시 빠트렸다.

따라서 이 신문기사에는 세 가지 정도의 오류가 있지만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오류는 아니다.

이교재의 사망과 관련된 최초이자 당시의 기사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와병 중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해방 이후 삼진의 이교재 묘소를 참배하고 유족들을 만난 뒤의 글에 따르면, “과거 상해 체류시 본국으로 파견하여 운동하다가 옥중 고문을 받고 결국 그 여독으로 세상을 떠난 이교재 지사의 유가족을 방문, 위로” 하였다는 것이다.(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417쪽)

와병의 원인을 각각 악질과 고문의 여독으로 약간 달리 보았지만, 악질 역시 고문의 후유증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두 종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부산교도소 수감되었다거나 옥사하였다는 이야기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믿기 어렵다.

진전면에 소장된 범죄인명부에도 이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와병 중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그의 사망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갔을 정도로 경제 사정은 극히 어려웠다. 당시의 건물등기부에 따르면,(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건물등기부, 고유번호 1901-1912-162796. 2017년 10월 24일 발행) 이교재의 집은 그의 사망 직후인 1933년 3월 20일에 馬山府 萬町(오늘날의 동성동, 필자)에 사는 川崎泰次(가와사키는 함안군의 일본인 토지소유 중 11,197평으로 전체 25,305평 중 약 44%를 차지한 지주였다-이정은, 「경남 함안군 3.1독립운동」, 122~123쪽)에게 4백엔에 저당 잡혔으나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통영에 사는 朴喜鎣(박희형은 통영에 있는 하동집 박진영의 장손이고 통영군자금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성숙의 조카이다. 통영사연구회 회장 박형균의 증언에 따른다. 박형균은 박희영의 아들이다-2019년 4월 1일 인터뷰)이 이를 갚으면서 경매가 취하되었고, 최종적으로 그 집은 이교재의 모친인 金受室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김수실은 이교재의 모친이었다. 이교재의 손부인 조혜옥의 증언에 따른다-2019년 3월 27일 인터뷰)

이러한 어려움이 그의 유족으로 하여금 동대 마을을 떠나 도산 마을로 이주하게 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도산 마을을 방문한 김형윤은 ‘한두 섬의 저축이 있을 리 없는’ ‘불행한 혁명가’로 묘사하였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자)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교재의 독립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초기의 독립운동에서 마지막 단계까지 초지일관 해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영역의 확대와 심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대 직후의 초기 단계에서 이교재는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삼진 지역의 3.1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넘어서 진주지역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량이나 형명으로 본다면 단순 참가가 아닌 주도자의 역할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상해 망명 직후에 전개된 것으로, 주요 임무는 국내에 밀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으는데 진력한 일이었다.

통영에서 항일적 지사와 인척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간 이 지역에서 구축한 그의 조직 능력과 군자금 모금에 대한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임정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교재와 같이 헌신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임정이 1931년 9월에 시작된 중국 동북침략전쟁(만주사변)을 반침략전쟁의 중요한 기회로 삼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를 통해 광복을 도모하던 때에 국내에 파견되어 그에 호응하는 조직을 갖추면서 준비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교재가 1931년 11월 말 이후 입국시 휴대하고 들어온 9개의 문건은 임정의 광복계획과 그에 따른 이교재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한 문서에 따르면 창녕·밀양·진주·달성 등 경상남북도 지역에 임정의 후원망이 있었고, 이교재는 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활용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임정 설립 직후 구축한 연통제나 교통국이 일제의 단속에 의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교재는 특파원으로서 이 과업을 수행하였으니, 임정의 국내연락망은 1930년대에도 여전히 살아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두 번째의 의미는 이교재가 그의 본거지이자 초기 활동무대였던 경남과 상해의 임정이라는 두 지역을 연계하면서 임정이 추구하는 조국광복이라는 광대한 목표를 지역이라는 맥락 속에서 실천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의미는 임정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조직화에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해방 뒤에 김구가 이교재의 묘소에 와서 남긴 말은,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그의 업적을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었고, 임정문서를 휴대하고 입국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투고일 : 4월 22일 심사일 : 5월 17일 게재확정일 : 6월 3일

주제어 : 이교재, 창원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 3.1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통영군

자금모금사건, 이교재임정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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