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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22) -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이교재」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0. 20.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5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1982년 3월 1일, 언론은 이교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동안 남몰래 보관해오던 선생의 양자인 이정순씨가 공개한 위임장은 가로 29cm 세로 20cm 크기의 명주천에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다음 사항을 위임한다. 나,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하나,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하나,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

(李敎載 右人을 慶尙南北 常駐代表로 右記事項을 委任함 一. 有志者 聯絡에 關한 일, 一. 獨立運動에 對한 秘密的 地方組織을 行할 일, 一. 政府에 對한 特殊獻誠을 勸行케 할 일, 大韓民國 十三年十一月二十日 大韓民國 臨時政府 內務長 趙琬九, 財務長 金九)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의 내무장 조완구와 재무장 김구의 직인이 나란히 찍혀 있는 위임장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발견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의 도(道)마다 대표를 임명하여 특별 임무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주대표가 일본경찰에 의해 쫓겨다녔고 가족들도 보관하기보다는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임장이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산을 찾은 백범 김구-

1946917일 창원군(현 마산시) 진전면 도산리에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 항일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죽헌 이교재 선생은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나의 동지였습니다. 이교재 선생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 얼싸안고 반가이 맞아 주었을 텐데, 나라를 위해 먼저 순국하셨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진작 성묘도 하고 참배도 하고자 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제야 찾아 왔습니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 상황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 선생은 항일독립지사들의 유족을 위로 방문하기 위해 삼남지방(경남·전남·충남)으로 향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다른 곳보다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이교재 선생의 유족이었다.

이는 이교재 선생에 대한 김구 선생의 각별한 애정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역사적 일화의 하나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죽헌(竹軒) 이교재(李敎載) 선생은 188779경남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남달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한일합방이 되던 24세때였다. 그때부터 그는 고향에서 뜻이 맞는 동지를 모아 구국격문을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렇게 몰래 항일운동을 하던 중 1919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돌리다가 진주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이교재 선생은 대구법원에서 불온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26개월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옥고를 겪게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다-

1921년 만기 출옥한 이교재 선생은 더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당연히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곧이어 군자금 모금과 국내 연락책으로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통영군 김종원(金宗元) 집안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1923921일 통영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교재 선생은 3년 간 마산교도소에 갇혀 두 번째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그는 국내의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가지고 상해로 되돌아가려다가 신의주 국경에서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간 세 번째 옥고를 겪게 되었다.

세 번째의 옥고를 치른 후 이교재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교재 선생은 잠시 쉴 틈도 없이 얼마지 않아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에서 칼톱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칼톱회는 고학생들의 조직으로 이교재 선생은 그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톱회원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지사들간의 연락을 맡는 등 여러 가지 지원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칼톱회의 구체적인 조직 형태가 현재에 전해지지 않아 선생의 활동을 정리하는데 많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1931년, 이교재 선생은 국내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상해임시정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 1120일,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장 백범 김구와 내무장 조완구로부터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 직위를 위임받게 된다.

이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선생의 헌신적인 항일투쟁이 상해임시정부로부터 큰 신뢰를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교재 선생은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서 또 다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터 위임받은 임무는 모두 세 가지였다.

먼저, 경상남북도에 퍼져 있는 애국지사와 상해임시정부간에 연락책 역할을 하는 것이고 다음은, 각 지방에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임무는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어느 것 하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진주로, 대구로, 또 창녕으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산에서 다시 경찰에게 체포돼 6년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경찰에게 체포된 후 당했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부산교도소는 이교재 선생을 강제로 출소시켰다.

강제로 풀려난 지 10여일 만인 193321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47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의 해방을 보지도 못하고 순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이 죽은 이후에도 일제는 선생의 형기가 남았다는 이유로 그의 묘소에 철책을 설치하기도 했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이교재 선생의 독립활동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김구 선생의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교재 선생은 학자고 선비입니다. 인격이 매우 고매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시며 정의감과 애국심이 투철하신 분입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독립운동의 방법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해 능력이 탁월하였습니다. 선생은 국내주재 조직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습니다. 그의 임무는 장관 몇 명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오고 연락이 자주 오다가 그만 연락이 끊겼습니다. 미처 조국의 광복을 못 보시고 순국하였으니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해방 당시 선생의 묘소는 애국지사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초라했다. 그러나 마산시 진전면 임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 묘소는 옛날의 묘소에 비하면 잘 정돈되어 있다.

그렇게 선생의 명예가 회복되는데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1954년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의 사장이었던 김형윤(작고)이 이교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회를 만들어 지역 유지와 학생들의 성금을 모금하여 현 위치로 묘소를 옮긴 것이다.

그 당시에 새로 세운 이교재 선생의 묘비에는 그의 의로운 투쟁을 기리는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상해가 세 번이라면 감옥은 네 번이요 기 꺾일줄있으랴만 몸은 이미 마쳤구나 아, 임이로다 나라와 겨레의 임이로다 

 

 

현재 이교재 선생의 묘소에 이르는 길은 마산시에 의해서 죽헌로(竹軒路)로 명명되어 그의 항일구국투쟁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이교재 선생의 항일투쟁은 19633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제208호)을 추서 받아 국가로 부터 그의 공적을 공식 인정받게 되었다.<<<

허성진 / 당시 마산문화방송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