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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하고,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상업학교, 마산중학교 등 오늘날 마산의 유서 깊은 학교의 육성에 적극 관여했다.

민족자본가이기도 했다. 경제인으로서 한국인 최초로 마산에 무역회사이자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마산경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얻어진 수익을 교육에 투자하여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였던 민족자산가였다.

 

-마산 교육의 버팀목-

옥기환에 대한 기억은 일제시기 민족의 각성을 촉진하고 지역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교육방면에 열정을 쏟은 교육지사로서의 모습이 가장 뚜렷하다.

“인재양성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선생이 교육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1907년이다.

선생은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개설하고 스스로 교장에 취임하였다.

마산노동야학은 처음에는 지금의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 하나를 수리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학생 수도 20∼30명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나 공장근로자, 농민, 도시빈민의 아이들이었으며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교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한문 등이었는데, 당시의 일반 공립보통학교가 일본어로 된 교과서에다 일본어로 수업하였던 것에 비해, 노동야학은 조선어를 첫째 과목으로 가르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사 수는 늘어갔다. 교사들은 대부분 창신학교의 교사들이었으나 김철두, 명도석, 김용환 등과 같은 청년지식인도 노동야학의 교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우리 민족을 강력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보수 없이 무료로 교육을 담당하였다.

노동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재 등도 무료로 학생들에게 지급하였다.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은 컸다. 경영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서 급기야 운영비 자체를 선생이 혼자서 부담해야 했다.

191410월에는 기존의 교사(校舍)를 대신하여 마산시 창동에 교실 여섯 개의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이 때도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 1,300의 거금을 조달하여 보다 많은 학생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노동야학이 번창할수록 일제의 견제도심해졌다. 일제는 ‘노동’이라는 학교명에 대해 사상적인 트집을 잡았다. 때문에‘노동야학’은 학교 이름을 마산중앙야학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마산중앙중학교와 마산공업고등학교는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중앙야학교 졸업식(1939년) / 앞줄 가운데가 옥기환 선생>

 

한편 그는 야학 하나만으로는 일반의 교육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야학이나 일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보다 상급의 학교가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때마침 3·1민족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 정책도 일방적인 탄압과 수탈로부터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그 방향이 바뀌면서 뜻있는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고등교육의 필요성과함께 그 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마산에서도 선생을 중심으로 지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마산에 실업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기성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19211228일에 3제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는 훗날 5년제의 정식 상업학교(지금의 마산용마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된다. 이 때도 선생은 기성회장을 맡았다.

그밖에도 선생은 19215월 마산구락부 평의장으로 있을 때, 마산구락부에서 운영하던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교에 당해 년의 운영비로 200원을 기부하였고, 1924년에는 북간도에 있던 민족학교인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의 확장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마산지방을 방문한 김홍선 등에게 지역인사들과 함께 약300원에 가까운 자금을 제공하였다.

1927년 신마산을 근거지로 삼은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고등보통학교 창립기성동맹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준비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이때도 이우식, 구성전 등과 함께 각각 1만원을 기부하기로 하였다.

결국 일제의 방해로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일제가 마산중학교(현재 마산고)를 설립하는데 있어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마산중학교의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60%, 한국인이 40%의 설립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그 기성회가 결성되었을때, 선생은 한국인을 대표하여 부회장을 맡음으로써 그 실현에 기여했다.

그리고 193561일에는 선생의 회갑연 비용으로 쓸 작정이던 1,300원이라는 거금을 마산부 내의 각 공사립학교와 유치원에 극빈자 구제비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업가-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자신이 이룩한 사업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함으로써 마산을 대표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를 바탕으로 선생은 교육사업에 자신의 열정을 투자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진영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19199월 당시 원동상회(元東商會)를 운영하고 있던 선생은 명도석, 김철두 등과 함께 경제적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본금 50만원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주식회사 원동무역을 정식으로 출범시키게 된다. 이 회사는 마산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대표적인 주식회사이며 무역회사로 성장하게 되며, 마산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모태가 된 원동상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1915115일 경북 달성군 수성면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한다.

조선국권회복단과 원동상회가 관계를 맺게된 것은 마산을 근거로 활동하였던 민족주의자이자 국학자였던 안확(安廓)에 의해서였다.

안확과 원동상회간의 연결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안확이 일찍이 창신학교의

교사를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가, 이 학교 교사들이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원동상회 운영자인 옥기환은 일찍부터 노동야학을 개설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동야학을 중심으로 안확과 옥기환과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원동상회가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원동상회와 조선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원동무역회사가 성립된 이후에도 계속된 듯 하다.

그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계는 현재의 상태로는 밝히기 어렵지만,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시경제통제의 강화로 이 회사가 문을 닫기 전까지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 회사의 이익금 중 일부를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초대 마산시장으로-

일제시기 교육과 경제인으로서의 옥기환의 업적은 마산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선생의 업적은 마산의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그것은 선생이 미군정의 초대 부윤으로 추천되었다는 것에서도알수있다.

194512월에 마산에도 미군정청이 정식 발족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미군이 맡은 미군정 부윤 외에 한국인 부윤을 임명하여 양두체제를 갖추었는데 이 체제는 19473월 군정이 2선으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 시기로부1949621일까지 마산부엔 4명의 부윤이 있었다. 그 초대 부윤으로옥기환 선생이 임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선생은 약 5개월 간(19451215일부터 1946514일까지) 군정의 부윤직을 맡았다.

당시 군정 부윤은 행정이야 별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나 어수선한 당시 사회분위기의 안정을 위해서는 덕망있고 지역민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 지역 인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군정부는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선생을 한국인 부윤에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군정부윤을 비롯한 부내 유지와 부청관계자들의 집요한 요청에도 수락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군정청에서는 7번째로 선생을 찾아가 “당신에게 당신 나라 일과 당신이 사는 사회의 일을 해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다그치며 민족감정을 자극하자 선생은 마침내 그 직을 수락하였다. 그나마 그것도 마땅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몇 개월만 맡겠다는 조건부 수락이었다.

또한 초대 마산시장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주위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그는 시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역시 다음을 위해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아름다운 미덕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도 일제에 협력했던 발자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민족자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에 대해 굴신(屈身)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1911년 마산경찰서장이 조선인의 풍기교정과 공익증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최초로 발기한 교풍회(矯風會)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일이나, 명치신궁(明治神宮) 봉찬회(奉讚會)에 많은 성금을 기탁하고 부협의원(府協議員)으로활동하였다는점등이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 인물의 평가에서 지나치게 공만을 드러내고 허물을 감춘다면 그 또한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또한 너무 허물만을 강조하여 그 사람의 역사적 평가마저 부정한다면 그 역시옳지 않다.

옥기환 선생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교육과 경제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육계에서 그의 활동은 당대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마산지역이 민주성지로 우뚝 서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치었다.

그가 세웠던 노동야학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일제시기 마산지역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3·15, 4·19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가 존경할만한 인물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산의 역사 인물 발굴은 더없이 중요한 사업의 하나라 생각되며, 선생에 대한 공과의 연구도 그런 차원에서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김원규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Trackback 1 Comment 1
  1. 오동추 2014.11.08 10:20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그나마 민족정기를 이어받은 유서깊은 도시가 되는데는 이와같은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 특징없는 지리멸렬한 도시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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