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6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학살’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특히 마산과 창원에서도 이를 능가하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지난 1999년 9월 <경남도민일보>가 이 사실을 보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산·창원지역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다.
『마산시사』나『창원군지』, 『경남도사』는 물론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어떤 책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왜그럴까?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이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합법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민간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는 이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까지 사형을 시키거나 감옥에 보내 버렸다.
대통령후보로서 이 문제를 제기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 씨는 끝내 사상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1960년 4·19혁명 이후 ‘좋은세상’이 온줄 알고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유족회 간부들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두 ‘용공분자’로 몰려 구속되고 말았다.
빨갱이로 몰리지 않으려면 그저 입을 꾹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침묵하고 있는 유가족마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 친지들까지 감시대상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취직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나 직업군인·경찰은 물론이고, 제법 번듯한 대기업이나 은행도 경찰의 ‘신원조회’를 통과한 사람만이 취업할 수 있었다.
용케 말단 공무원에 합격을 해도 아예 발령을 받지 못하거나 승진·진급과정에서 영락 없이 신원조회에 걸렸다.
외국에도 물론 나갈 수 없었다. 유족들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1980년대 초반까지 풀리지 않았다.
연좌제 폐지로 제도적인 족쇄가 풀렸을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유족들은 이미 60대 노인이 돼 있었다. 모든 걸 체념할 나이가 된 후에야 비로소 정부는 그들을 놓아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자유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은 그 후에도 여차하면 용공분자로 잡아넣겠다고 을러대며 유족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또 연좌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각 읍·면 지서와 파출소에서 관리해온 연맹원들의 신원과 유가족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상부기관에서 일괄적으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 미군에 의해 학살된 곡안리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국가기관에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950년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30만명,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희생자를 합치면 무려 1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미군(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이 가운데 마산에서도 1,681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됐으며, 창원과 진해에서도 숫자를 알 수 없는 민간인이 다수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와는 별도로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100명에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미군에 의해서 학살된 사건도 있다.
곡안리 양민학살은 1950년 8월 11일 곡안리 뒷산 아래의 성주 이씨 재실(齋室)에 피란해 있던 마을 주민 100여명 중 83명이 미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무참히 숨진 사건이다.
미군은 학살 하루 전날 저녁 이 재실을 찾아 주민들의 정체를 확인한 후 “여긴 작전지역이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다.
이에 주민들은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 데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많아 밤중에 피란을 가긴 어렵다”면서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고했다.
미군은 “그렇게 하라”고 말한 후 재실을 떠났다.
주민들은 밤새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다음 날 주민들은 평소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친 후 마루에 짐을 쌓아두고 미군을 기다렸다. 다시 통보가 올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 때였다. 뒷산에서 내려온 인민군 정찰대 2명이 재실 인근 대나무 숲까지 내려와 마을 앞 ‘멧등거리(묘지)’에 있는 미군을 향해 총을 쏘았다. 미군 1명이 꼬꾸라졌다.
미군을 쏜 인민군 정찰대는 즉시 뒷산으로사라졌다.
그로 부터 약 30분이 지났을까. ‘탕’‘탕’하는 총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마루에 있던 주민 중 한 명이 픽 쓰러졌다. 재실 앞쪽 30m 전방에 진을 치고 있던 미군이 쏜 총탄이었다.
연이어 소낙비처럼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재실은 아비규환이 됐다. 주민들은 허겁지겁 양쪽 방과 부엌·마루밑·변소·돼지우리 등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사격은 계속됐다.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면서 기총사격을 해댔다.
박격포탄이 날아들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서쪽 방 지붕이 내려앉았다. 그 방에 있던 임산부(이귀득·당시 31세)가 온몸에 피를 흘리며 마당으로 기어 나왔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물을 달라”고 절규했지만 아무도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당시 현장에서 시할아버지·시어머니와 두살 난 아들을 잃은 황점순씨는 재실 뒤편 콩밭을 가로질러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던 중 온몸에 총을 맞고 쓰러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60년마산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식장에서 오열하는 유족들>
또 다른 생존자 조호선씨는 큰집 장조카와 딸을 안고‘작은 전각’(재실 관리인의 집) 변소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삼진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시아버지 이교영씨와 시어머니 변담래씨, 그리고 시숙 종성씨와 동서 이귀득씨, 조카 우순, 계숙, 그리고 호적에 출생신고도 않은 조카 2명 등 모두 8명을 잃었다.
이재순씨(83)는 재실변소 똥통 속에 얼굴만 내밀고 숨었던 덕에 목숨을 건졌다. 악취는 물론이고 구더기가 입과 코로 기어오르는 속에서 하루종일을 견뎠다.
그러나 아들 상업(당시 9세)이는 척추에 총상을 입고 시름시름 앓다가 스물 아홉에 장가도 못 가보고 죽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군의 양민학살보다 훨씬 잔혹하고 조직적이며 철저히 계획적인 학살범죄는 오히려 한국군 특무대(CIC)와 경찰이 저지른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이다.
물론 피학살자의 숫자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후자가 많았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6월초의 한 신문보도는 당시 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접 거창·함양·산청 등 경남일대의 양민학살사건이 보도 됨과 아울러 이곳 마산에서도 6·25 당시 1,500여명을 수장(水葬) 내지 총살한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다. 현재 유가족들은 당시의 학살자들을 찾아내어 규탄해 달라는 요구를 내건 ‘데모’까지 할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유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83년(단기,서기1950년) 7월 15일 군(CIC·HID)과 경찰에서는 시민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고 보도연맹 가입자를 포함한 양민들을 집합시켜 삽과 괭이 등을 들려 도로보수공사를 하러 간다는 구실로 추럭(트럭)에 실어서는 창원군 북면 뒷산과 진해 앞바다에서 각각 수장과 총살을 감행했다한다. (하략)「( 대구일보」1960년6월13일자)
시민극장에서 마산형무소에 옮겨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은 8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갔다.
군경은 이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앞 뒤 사람의 허리를 나일론줄로 묶었고 양 손도 결박했다. 얼굴에는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씌웠다.
마산 창포동 해안가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LST(상륙함)에 실렸다. LST는 엔진소리를 최대한 줄인 채 한참을 나아갔다.
약 한시간이 지났을까.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듯 싶더니 공포에 질린 연맹원들을 뱃전에 세운 후 소총 개머리판과 군화발로 바다 속에 처넣기 시작했다.
‘타타타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맹원들을 모두 바닷물에 밀어넣은 군경은 LST를 서서히 선회하며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조준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푸른 바닷물이 피빛으로 변해갔다.(목격자 윤봉근씨(사망·1999년 증언 당시 69세·마산시 합포구 창포동)의 증언)
특히 충격적인 것은 당시 보도연맹원 중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하는가 하면, 중·고등학생도 학살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60년 6월 5일 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에서 당시 마산유족회 간부였던 김용국씨는 이렇게 증언하고있다.
51명의 여자들이 있는데 이 중 47명은 강간에 응했다고 해서 살아났고 그 거절한 4명은 즉시 없어졌습니다. 마산형무소의 담벽에 43발의 탄환자취가 있습니다. 시체의 손발을 철사로 묶어서 집단적으로 열명 스무명 수장을 했는데 죽은 시체가 사변 그 당시에 어망에 걸려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949년 12월 28일자「남조선민보」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 마산지부는 마산상고와 마산중·마산여중 교감 이상과 연석회의를 갖고, 이들 3개 학교 학생 중 보안법 위반으로 중퇴한 300여명 전부를 보도연맹에 가맹시키기로 합의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마산지역 일간지에 보도된 민간인 피학살자 명단>
필자가 이를 확인하기위해 마산여중 학적부를 뒤져본 결과 1948년과 1949년 각각 159명과 122명이 제적 또는 자퇴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중 적지 않은 학생이 시국사건으로 경찰에 구속됨으로써 제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17세였던 박○전(마산부 표정 142) 양의 경우 “교내에 불온세포 조직하려다 경찰에 구금되어 1949년 5월 1일부로제적”이라고 적혀있었으며, 이밖에도 이○순(19), 강○자(19), 박○순(19), 허○아(18), 김○애(17) 양 등이 ‘불온단체 가입’ 또는 ‘교내 질서문란’ 등의 이유로 제적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당시 마산상고 재학중 보도연맹원으로 가입, 오빠(19)를 잃은 팽상림(68·현재 부산 거주)씨는“미술부원이었던 오빠는 당시 아무 것도 모르고 학생동맹에서 부탁한 포스터를 그려줬다는 혐의로 퇴학당한 후 보도연맹에 가입돼 무참히 학살됐다”면서“어린 학생들까지 사상범의 누명을 씌워 재판도 없이 학살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
이같은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누구일까?
마산지구 양민피학살자 유족회가 1960년 7월 19일자로 마산 검찰지청에 제출한 고발장에 따르면 당시 학살사건의 주범으로 조영운 전 마산경찰서장(1960년 당시 경남교통협회 이사·경전여객자동차주식회사 근무), 구중억 전 마산경찰서 사찰형사, 최익주 전 형사반장, 이부종 전 형사, 강상봉 전 사찰계장, 정도환 전 사찰계장, 노장현·황임규 사찰계 형사, 이우정 전 특무대장, 이진영 전 특무계장, 노양환전 특무대 상사 등 11명을 지목하고 있다.
또 마산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가입을 독려했던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지도위원회(검찰지청장, 경찰서장, 시장, 창원군수, 형무소장, 경찰서, 사찰계장), 상임지도위원(김종규, 정인수, 김순정, 김종신, 최광림, 배린, 박양수, 문삼찬, 조철제, 김순명, 이석건이다. (「남조선민보」1949년12월8일, 1950년3월28일자)
학살이 자행된 곳으로는 마산 원전 앞바다 외에도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 ‘안데미골’, 마산시 봉곡리 수원지 입구 산골, 마산시 월영동 뒷산 ‘요색고개’, 창원면남산, 창원고개, 창원군 구산면 산골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창원 성주사 골짜기에서도 진해로 끌려가던 민간인들이 집단학살됐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보도연맹원들의 시체가 매장된 터를 5군데나 확인했다.
지금이라도 삽으로 흙을 파면 유골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구산면 심리·원전·옥계·남포·설진리 해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나일론 줄에 묶인 시체들이 떠밀려 왔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이 해안가 주민들은 끔찍한 생각에 차마 생선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과 보도연맹원들도 1950년 7월말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되기 직전 곳곳에서 집단 총살 당했다.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골짜기에서 집단총살 당한 200여명의 민간인도 진주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이었다.
둔덕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 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저수지 옆 작은 골짜기에는 금굴이라는 폐광이 있었다. 시체는 이곳과 인근 골짜기 등 2군데로 나눠 암매장됐다.
이 가운데 한 곳은 지난 2002년 9월 태풍으로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면서 유골이 무더기로 드러나 학살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했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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