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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작년 11월 9일 포스팅했던 글인데 연재라서 또 올립니다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 2010. 6.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두 번의 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 2010. 5. 3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왜? 원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 충렬왕은 대일본 원정기지로 남도의 작은 포구 합포를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이 도시가 가졌던 자연적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정리된 내용은 대략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위치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합포가 해로(海路)상 일본과의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거제도와 쓰시마 사이를 지나는 쓰시마 난류를 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첩경(합포-거제도-대마도-이키-일본본토)이라는 점입니다. 해로 뿐 아니라 육로도 수도 개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가 합포였습니다. 둘째는 항구시설입니다. 합포에는 이미 조창이었던 석두창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다른 포구보다 양호한 항구시설을 가지고 .. 2010. 5.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13세기 후반, 고려의 남쪽 해안에 있던 합포는 행정상으로 경상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의안군 관할의 영현(領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 현종 군현체제 개편 때 지금의 양산인 양주에서 금주로 이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합포는 동아시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국제군사도시였습니다. 당시 세계최대 강국이었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이곳 합포를 일본정벌기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때는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여원연합군은 지금의 합포고등학교 남쪽 일대를 싸고 있던 현 자산성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전함건조(戰艦建造) 및 군사훈련을 비롯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둔전은 황해도 봉주(봉산)과 경상도 금주(김해)에, 선박건조는 제주도와 전라도 쪽에서 맡았습니다. 군사.. 2010. 5.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 2010. 5.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조운제가 ‘국가지중최중자야(國家之中最重者也)’라고 표현될 정도로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조운제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고려 제6대 성종(982-997년)기에 전국 여러 포구에 조운기지를 설치하였다가 이후 정종(1035년-1046년)대에 이르러서 이를 개경 남부 12조창으로 개편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12조창은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의, 하양창(충청도 아산), 영풍창(충청도 부성), 진성창(전라도 임파), 안흥창(전라도 보안), 부용창(전라도 영광), 해릉창(전라도 나주), 장흥창(전라도 영암). 내륙의, 흥원창(강원도 원주), 덕흥창(충청도 충주). 남해의, 해룡창(전라도 순천), 통양창(경상도 사천), 석두창(경상도 합포, 마산)이었습니다. 12.. 2010. 5.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고운(孤雲) 최치원은 857년(헌안왕 1년) 6두품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8살에 당나라 조정이 외국인을 등용하기 위해 설치한 빈공과에 급제하여 당나라에서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당서예문지(唐書藝文志)」에 이름과 저서가 실릴 만큼 학문이 출중했습니다. 28살에 신라로 돌아 온 고운은 한림학사에 임명되는 등 공직을 맡기도 했으나 국내 사정이 복잡해 자신의 경륜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부패한 진골귀족과 지방세력 간의 혼란에 나라의 근간이 심하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벼슬을 내던진 고운은 은거를 결심합니다. 경주, 영주,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울산 등 전국 곳곳을 주유하다가 경치 좋고 학문하기도 좋다싶어 이곳 합.. 2010. 4.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행정체계를 주-군-현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진주와 양산이 9주(州)에 포함된 도시입니다. 당시 진주는 뒷날 강주(康州)가 되는 청주(菁州)로, 양산은 뒷날 양주(良州)가 되는 삽량주(歃良州)라고 불렀습니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는 12개 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굴자군(屈自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굴자군(屈自郡)에는 칠토(柒土-칠원)․골포(骨浦-마산)․웅지(熊只-웅천)에 각각 현(縣)을 설치함으로써 마산지역은 골포현이 되었습니다. 마산지역 현(縣)의 명칭인 ‘골포(骨浦)’는 포상팔국 중의 ‘골포국’에 이어 또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곧 '골포'는 기록에 남아있는 마산 최초의 국가명칭이자 행정.. 2010. 4.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2010. 4.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창원 진해와의 통합으로 마산은 곧 단독 시로서의 이름을 잃게됩니다. 아쉬움과 함께 이 도시의 변천과정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도시는 형성과 변환이라는 두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생성해온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도시에는 그 곳에 존재했던 인간의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변천과정은 곧 인류의 역사이자 기록이고, 도시의 형태는 인간의 구체적인 문화실체입니다. 도시(city)와 문명(civilization)이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의 성격과 행동양식이 선․후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듯이 도시도 선천적 요인으로서의 자연조건과 후천적 요인인 역사적 과정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상황과 문제를 이해하고 미래 도시의 올바른 발전.. 2010. 4. 8.
오래된 사진 두 장 ‘삼광청주의 일제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마산에는 근대산업유산들이 제법 남아 있다. 유산이라 말할 정도가 아니라도 옛 사진에 나타난 과거의 모습과 현재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라져버린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자료이긴 하지만 아직 못 본 분들을 위해 마산의 옛 사진 두 장을 소개한다. 첫째 자료는 1910년 경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의 어느 시기 마산 전경사진이다. 이 사진을 두고 개항기 마산사진이라고 소개한 곳도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이유는 사진에 나타난 시가지 형태다. 일본인들이 스스로 지칭한 소위 신마산이 이미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로의 개설 상태가 개항기를 훨씬 지난 1910년-1920년대 초반 경 어느 시기 임을 .. 2009. 12. 8.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 2009. 11. 23.
‘마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모았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 2009. 11. 9.
술과 꽃의 도시 《유장근교수의「도시탐방대」에 참여해, 한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마산의 술 공장과 벚꽃 휘날렸던 창원천을 둘러보니 일제기 ‘술과 꽃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그 옛날 마산’이 생각나 이 글을 포스팅한다》 특정한 도시를 한두 가지 단어로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도시건 그 도시 특유의 자연조건과 문화조건을 이용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한다. 부산하면 항구, 진해하면 벚꽃, 춘천하면 호수 등과 같은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경의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다. - 술의 도시 마산 - 개항 직후인 1904년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이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했던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에 부산을 제치고 이윽고 국내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2009. 11. 2.
마산의 해안선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마산 해안선의 변화는 마산의 도시역사이다. 마산의 해안은 마산항 개항(1899년)으로 마산만, 즉 해안선을 기준으로 시가지가 구성되어져왔다. 특정목적을 위한 해안의 매립에는 도시의 근간을 바꾸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마산은 개항이후의 지난 110년을 거울삼아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보아야 함은 마땅하다. 얼마전 국립환경과학원에서 경기해안에서 전남 땅끝마을에 이르는 서해안 지역에 대한 자연경관의 특성과 형성 및 변화과정을 연구한 결과 서해안선의 총 길이가 20세기 초에 비해 약 1,400km(약 40%)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산시의 해안선은 (=시가지의 변화)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이 변화에 대해 박형규(마산 건축사)의 연구(해방이후 마산시 도시공간구조의 변천과 변화요인에 관한 연구)에.. 2009. 9. 7.
철도를 통해 본 마산의 도시사 〈경부선과 같은 해 개통된 철도 마산선〉 1899년 마산은 열강에 의해 개항되었다. 개항장 마산은 러시아와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 되었던 치욕적인 역사 현장이었다. 이들 두 제국은, 서로 먼저 대한해협의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산을 무대로 갈등을 빚었다. 러일전쟁 종전으로 세력 다툼이 끝나자 이 도시의 운명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었다. 마산에 철도가 처음 개통된 것은 바로 그 즈음, 1905년 5월 25일이었다. 경부선 개통과 같은 해였으며 ‘마산선’이라 불렀다. 원래 마산선은 1904년 1월에 영남지선철도회사가 착공한 마산포와 삼랑진 간 철도였다. 영남지선철도회사는 한국정부의 외부참사를 지낸 바 있는 부산 태생의 박기종이 황족인 완순군 이재완을 앞세워 1902년 6월 한국정부 농상공부 대신으로부터.. 2009.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