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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by 허정도 2011. 7. 18.

<마산시의 시작>

사라져버린 ‘마산시’,,,,
오늘은 그 ‘마산시’의 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글은 행정구역명칭으로서의 ‘마산’에 대한 내용입니다.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1895년 을미개혁으로 태종13년(1413년) 이후 480여 년간 지속되어온 8도제가 폐지되고 부제(府制)가 시행되었습니다.
전국에 23부를 두고 336군을 부의 관할로 두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하급행정구역들을 군으로 통칭하였습니다.
이때 마산은 진주부 관할의 21개 군 중 창원군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부제(府制)의 인위적인 행정구역획정이 마찰을 빚어 실시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896년 병신개혁(丙申改革)으로 13도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의 13도는 종래의 8도를 바탕으로 경기․강원․황해의 3개도를 제외한 나머지를 남북 양도로 분할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도(道) 구역은 이때 결정된 것입니다.
13도 밑에는 7부(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 1목(제주), 331군을 두었는데 마산은 경상남도 창원군에 속했고 경상남도의 수부도시는 진주였습니다.

3년 뒤인 1899년(광무3년), 창원군은 개항에 따른 조치로서 창원부로 승격되어 창원감리서를 두었고 개항장의 관리업무를 감리가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3년(광무7년)에 창원부는 다시 창원군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 전국은 3부, 1목, 339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통감부와 이사관 관제를 발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00년에 설치된 일본영사관을 1906년 9월 1일자로 이사청으로 바꾸고 일본 거류민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적 행정권을 행사하는 거류민단제(居留民團制)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치에 따라 우리 정부는 같은 해 9월 24일 개항장의 감리서를 폐지하고 창원군을 다시 창원부로 개칭하여 감리의 소관 업무를 부윤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여기까지의 복잡한 변화가 한일병합 이전까지 일입니다.

한일병합으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통치기구에 관한 일련의 관제(官制)를 발포하면서 강점 직후의 과도기적 체계를 발포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개청 하루 전날인 1910년 9월 30일이었습니다.

이 때 종전 13도 1수부 11부 317군에서 수부였던 경성부(京城府)를 격하하여 13도 12부 317군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이 개편에서 마산은 이전의 창원부에서 마산부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산이 최초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었습니다. 경남에는 부산과 마산이 부(府)가되었습니다.

이전의 11개 부(府)는 모두 개항장 혹은 개시장이었던 곳이었지만 다시 개편된 부(府) 12개는 모두 통감치하의 일본이사청과 일본거류민단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부(府)의 명칭, 예컨데「마산부」는 ‘마산’이사청과 ‘마산’일본거류민단의 ‘마산’을 그대로 딴 것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1908년 마산이사청으로 건축하여 1914년 마산부청이 된 건물 사진과 당시 이 건물이 있었던 자리(노란 점)입니다. 지금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터는 옛 창원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정문 기둥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馬山府廳(마산부청)'이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부청은 1910년 10월 1일 개청하였습니다.
이사청은 이 날로 폐지되고 전국의 이사청 청사가 각각의 부청 청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었지만 호칭이 달라진 것 외 지방행정단위로서의 성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1899년 시행되었던 마산의 개항도 1911년 1월 1일 진해 일본군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폐지되고 개항과 함께 시작된 각국공동조계지도 1914년 3월 31일자로 폐지되었습니다.
한국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조계지 폐지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합방 후 3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식민통치의 틀이 잡히자 총독부는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대대적으로 지방행정을 개편합니다.
1913년 10월과 1914년 4월에 걸쳐 단행된 이 개편은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을 기해 일제히 실행에 옮깁니다.

마산은 이 지방제도 개혁 때 경성․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평양․신의주․원산․청진․진남포 등과 함께 관하에 면(面)을 가지지 않는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서의 부(府, 지금의 시)가 되었습니다.
이 때 결정된 마산부의 관할구역은 마산부의 각국거류지와 창원군 외서면의 완월리․신월리․월영리․자산리․서성리․성호리․중성리․성산리․동성리 및 오산리․상남리․교방리.회원리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경계로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 남쪽으로 밤밭고개, 북쪽으로 오동동다리를 경계로 노비산까지의 범위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9월 30일자로 마산부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창원군 내서면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의 봉암리, 구산면의 가포리 등 7개리가 마산부에 편입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때의 마산부가 해방 4년 뒤인 1949년 지방자치법제정 때 부(府)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마산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마산의 행정구역 개편은 이처럼 창원군(1895년)-창원군(1896년)-창원부(1899년)-창원군(1903년)-창원부(1906년)-마산부(1910년)-마산부(1914년)-마산시(1949년)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와 같은 곡절을 겪었던 마산시는 2010년 7월 1일 진해 창원과 합쳐 창원시가 되었습니다.
마산부로 시작된 독립 시(市)의 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죠.

‘마산시’가 없어진지 그새 1년이 되었습니다.
평생 ‘마산시 회원동...’으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했던 저로서는 제 의지와 상관 없이 갑자기 ‘창원시.....’로 시작되는 주소를 사용하자니 아직 뭔가 어색합니다.
별로 내키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마산 창원 진해가 아닌 다른 이름, 예를 들어 ‘경남시’였다면 ‘마산’이 없어져버렸다는 느낌보다 세 도시가 통합되었다는 느낌이 더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합시의 명칭을 세 도시 중 하나였던 창원시로 결정해버린 것은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름을 잃은 진해와 마산시민들의 상실감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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