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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6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1920년에 비해 10년 후인 1930년에는 가용지가 186,119㎡에서 182,406㎡로 약 3,700㎡가 줄었습니다. 이 차이는 1920년대에 새로 개통된 다수의 도로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1920년 기준으로 필지수로는 274필지에 21.3%, 면적으로는 65,000.11㎡에 35.0%였으며 필지 당 평균면적은 237.23㎡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에는 필지수가 365필지에 26.5%, 면적은 70,812.08㎡에 38.8%이었고 필지 당 평균면적은 194.01㎡이었습니다. 필지수와 면적은 늘어난 반면 필지 당 평균면적은 오히려 줄어든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토지소유 상태는 1920년 981필지에 76.3%, 면적 116,320.88㎡에 62.5%, 필지 당 평균면적 118... 2012. 6.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1)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포 해안의 변화는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남성동 매립 후 항만의 선박이용 빈도가 높아지자 1924년 매립지역 해안에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건설된 것이며, 둘째는 1910년대 박간(迫間)의 매립 때 시공하지 않았던 동굴강이, 1927년 현재 대신증권에서 어시장으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면서 부분적으로 매립되었던 겁니다. 다음 그림(푸른 원 내)처럼 말입니다. 셋째는 현 몽고장유의 전신인 야마다(山田)장유의 사주 산전신조(山田信助)가 시행한 오동동 매립입니다. 2012/05/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마산시사』 등 마산도시변화와 관련한 각종자료를 보면 박간(迫間)의 매립 이후 마산만 연안을 드나드는 선박의 이용이 편리해졌.. 2012. 5.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먼저 1930년 원마산 상황과 192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두 도면을 통해 이 시기 마산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식 도로가 여기 저기서 뻥뻥 뚤렸습니다. 지금의 코아양과 앞 도로,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그 때 생겼습니다. 두 도면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생한 도시 구조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⑧까지의 번호는 1930년 토지이용도에 표기된 도로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먼저 현재의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남북방향의 삼성생명 앞에서 현 대신증권까지의 도로가 1923년 개설되었다. ② 이어 1924년에는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③ 1926년, .. 2012. 5.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되는 시기였으나 도시시설의 수준은 낮았습니다. 일제하 마산의 유통시장은 원마산과 신마산 상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원마산(마산포) 지역의 상가는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1910년대 새로 개설된 도로 주변이 중심상권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마산포 지역의 상권은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있었고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곳 마산포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 2012. 5.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1929년 5월 24일 구 고려모직 뒤편으로 회원천 하류에 이르는 오동동 2-1번지와 15-1에 새롭게 총 면적 2,117평이 조성되었는데 그 중 대지가 1,615평이었습니다. 다른 자료에서는 1,692평이라고도 하는데 1,615평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자료에 의한 것입니다. 매립 신청 초기에는 이보다 면적이 약간 작았으나 설계변경을 거치면서 이 규모로 확정된 것입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352, 필름번호87-625」를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이 매립은 당시 자산동 119번지 소재 야마다(山田)장유양조장(현 몽고간장)의 사주 산전신조(山田信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서류에 나타난 매립의 목적은 ‘택지조성’이었으.. 2012. 5.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신마산에 오래 동안 살아온 일본인 목재상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명이 시행한 매립입니다. 공사는 우리나라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에 참여한 후 재계에 두각을 나타낸 서울의 토건업자 황정초태랑(荒井初太郞)에게 의뢰하였고, 1926년 해면 매축 사업에 착수하여 1928년 12월 21일에 준공하였습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193, 필름번호87-560」을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위치는 현재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남쪽 건너편 일대입니다. 세분해보면 옛 마산도기 및 진일공업사 등이 있던 월남동 1가 5번지에서 46번지의 1에 이르는 4,663평을 비롯해서 전 유원연탄 및 그 주변일대와 전 항등여관.. 2012. 4.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강점 제2시기의 매립- 마산포에는 1910년대에 이미 일본인 박간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마산만의 매립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해방 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매립이 빈번했던 까닭은 마산 해안의 창탄지역이 일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저비용 고수익, 즉 손쉽게 큰돈을 쥘 수 있었던 투자의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령 폐지로 1920년대 벽두에 시작된 국내 공업시설 확충 붐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1920년대(강점 제2시기) 매립착공은 많았지만 준공된 곳은 마산포 두 군데, 신마산 한 군데 모두 세 곳이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첫번째 매립입니다. 전 동성동 사무소와 그 주변인 남성동 30-1번지의.. 2012. 4.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마산** 1930년 / 山本三生 / 개조사 / 1:40,000 / 일본지리대계12, 조선편 / 개인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의 마산도시공간을 알아 볼 수 있는 지도입니다. 직선형의 도로 외에도 예전부터 조성되어 있던 도로까지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 외에도 개천 및 철도까지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신마산은 이때도 고운로 상부는 개발되지 않고 있었으며 중앙마산은 구도로 변에 조그마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은 북쪽으로 영역이 넓어져서 동척사무소와 교도소 위쪽으로 건물이 들어서고, 전 북마산파출소 부근에 일단의 건물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동굴강 일부가 매립되었지만 워낙 축척이 세밀하지 못해서인지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지도.. 2012. 4.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4) - 강점제2시기 마산부약도** 1930년 / 조선총독부 / 조선총독부 / / 朝鮮の 都邑(조선의 도읍) / 경남대 도서관 2주 전에 소개한 「마산부약도*」를 약간 조정하여 옮긴 것으로 보이는 지도입니다. 특별히 따로 설명할 것이 없는 지도이지만 당시에 간행된 지도를 선보이는 차례라 소개합니다. 도시의 공간 변화가 1923년부터 1930년까지는 상당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산부약도*」에 나타난 경남선 철도에 대한 표기오류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표기 방법만 약간 다를 뿐입니다. 최근 3.15의거 때 목숨을 잃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인양된 곳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만, 바로 그곳이 당시에 해수욕장이었다는 기록이 뚜렷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지도 역시 그다지 신뢰할만한 자료로 .. 2012. 4.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마산(조선교통도 마산5호) 1926년 / 일본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50,000 / 조선교통도 / 국립지리원 이 지도는 1916년에 측도하여 1926년 6월 25일에 인쇄, 6월 30일에 발행한 것으로 저작권 소유자는 조선총독부이며 인쇄 겸 발행자는 육지측량부입니다. 1916년 측도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1925년 6월에 개통한 경남선 철도가 뚜렷이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발행 연도인 1926년 당시의 지도인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도’이기 때문에 등고선 등의 표기는 없고 그 대신 도로 사정을 잘 알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는 것이 이 지도의 특징입니다. 이 지도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글의 출처는 1986년 栢書房(株)에서.. 2012. 4.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1921년부터 1930년까지 제작된 마산관련 지도를 해제하고 그 외 관련 자료를 토대로 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지도는 이미 1916년에 측도 제작한 1:10,000지도와 1:50,000지도에 기초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10,000지도처럼 세밀한 지도는 이 시기에 다시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1910년대만큼 지도를 통해 정밀하게 도시구조의 변화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 馬山府略圖* 1923년 / 조선총독부 / 조선총독부 / / 조선철도여행편람 /.. 2012. 3.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5) 중앙마산의 형성과 의미 시작부터 거리를 두고 자리 잡은 신마산과 원마산은 일제의 강점이 진전되면서 확산되었지만 두 도시의 도시 공간 확산 방향은 완연히 달랐습니다. 원마산이 교방동과 상남동 방향, 즉 신마산의 반대방향으로 확산된 반면 신마산은 그와 반대로 원마산 방향으로 도시공간이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도시공간은 확산되었지만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마산부의 행정기관들은 대부분 조계지, 즉 마산도시의 남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개항기 혹은 강점 초기에 건설되어진 것들로서 미래의 도시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행정기구를 담당하고 있었던 일본인들만의 편의를 위해 그들이 집중해 있던 조계지에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920년대 들어서는 부민들 사이에서 도시의.. 2012. 3.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0년 4월 8일에 시작한 연재가 오늘로 100회를 맞았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글을 올린 것이 그럭저럭 2년이 다되었군요. 보잘것 없는 글을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4) 문헌을 통해 본 당시 상황과 중앙마산의 도시계획 직전 포스팅에서 올린 중앙마산에 대한 문헌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당시 중앙마산의 상황이 다음과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중앙마산의 범역은 신월천에서 장군천을 거쳐 척산교에 이르는 철도용지 내 시가를 뜻했다. ② 마산은 마산포․신마산․중앙마산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산포 방면은 한인을 상대하는 상점이 많고, 신마산은 정비된 가로에 군인 및 관리를 상대로 하는 상점이 많으며 중앙부는 관아․학교․사원․철도소재지가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사택이 많이 있다. ③ 1931년에는.. 2012. 3.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3)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중앙마산’이라는 용어는 이 글에서 처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일제기에 간행된 마산관련 몇몇 자료에서「중앙마산(中央馬山)」혹은「중앙방면(中央方面)」「중앙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신마산과 원마산의 두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두 지역 사이에 있는 다른 성격의 도시공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1920년대 일본인이 발간한 문헌에 나오는 '중앙마산' 관련 기록들을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내용을 간추려 번역한 것이며 명칭은 현재 사용하는 용어로 고쳐 적습니다. ①『馬山港誌(마산항지, 1926)』- 諏方史郞(추방사랑) a. 위치와 지세(p.3) 마산부의 대체적인 지세는 본래 마산포 즉 마산포 방면과 이전의 각국거류지 및 군영,.. 2012. 3.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철도용지를 둘러싼 일제의 공공연한 토지약탈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의 철도용지도 지난 주 포스팅에서 언급한 한일의정서 제4조를 적용시켰던 겁니다.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번천사 (97) - 강점제2시기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마산의 일본.. 2012. 2.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1)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된 원인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가 1920년대까지 도시형태를 띠지 못하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대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일본의 군용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뒤 1920년대까지 변하지 않고 그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1904년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9월 1일, 군용철도 마산선의 건설공작대가 마산에 입항했습니다. 러일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 조정을 강압하여 의정서를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삼랑진 - 마산 사이의 철도공사는 의정서 제.. 2012. 2.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중앙마산의 형성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앙마산’이란,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마산의 두 도시, 즉 옛 부터 자연발생적 취락으로 발전해온 '원마산(마산포)'과 일본인들이 건설한 조계지 '신마산'의 중간 지역을 말합니다. 두 도시 사이에는 약 2㎞ 정도의 이격공간(離隔空間)이 있었는데, 이 범위 안에 조성된 혹은 조성될 도시공간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대략 마산합포구청(구 마산시청)에서 부터 3.15의거탑까지를 말합니다. 사실 마산포(원마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 잡은 신마산(조계지)은 태생 때부터 이미 마산포와의 도시연담화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각국공동조계지의 위치를 결정할 때부터 연담도시를 의도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 2012. 2.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직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의 1928년 편을 보면 「學校建築號」라는 주제의 특집기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학교건축물 현황의 일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잡지 편집진에서 국내의 중요한 학무당국자와 전국 각 학교 교장들에게 당시의 학교시설에 관해 세 가지의 질문지를 보낸 후 이에 응답한 학교관리자의 의견을 게재한 것입니다. 마산에서는 일본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와 한국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의 교장이 이 질문에 응답하였고, 그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책에 실린 질문과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질문 1) 재래학교의 건축에 대한 감상 2) 장래 지을 학교 건축에서 개선해야할 점 3) 기타 학교 건축에서 눈에 띄는 점 ■ 마산공립소.. 2012. 2.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0년 후반 경에는 철근콘크리트조의 근대식 건물도 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지은 건물들은 용도도 다양했습니다. 회사령 폐지와 3․1운동에 의한 문화정책 때문이겠지만 주조공장과 장유공장을 비롯한 산업시설은 물론,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시설도 이때 많이 지었습니다. 아래 그림의 원동무역주식회사는 1927년 8월에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사옥을 착공하여 1928년 4월 준공식을 가진 한국인 최초의 오피스전용건물입니다. 세련된 근대미가 물씬 풍깁니다. 밑은 현재 모습입니다. 다음 표는 .. 2012. 1.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년경에는 단발에 양장(洋裝)차림을 한 사람들이 부쩍 많아져서 1920년대 중반에는 전체 한국인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투머리를 한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막일하는 사람과 농민이었으며 그 외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짚신도 이 시기에는 많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무신을 신었는데 마산에는 주로 오사카와 고베의 고무신이 공급되었습니다. 개중에는 구두를 착용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고무신 사용자가 많아지니 상대적으로 짚신은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 2012. 1. 23.
동영상 - 마산 지난 연말, 재경마산향우회 송년회용으로 마산도시사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서툰 작품이지만 나쁜 평은 하지 않아 공개합니다. 곧 설입니다. 마산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마산에 얽힌 추억이라도 나누어보시죠. 분량은 13분 쯤 됩니다. 2012. 1.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공인 모임이 있긴 했지만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2일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개최된 마구(馬邱/마산대구)철도촉진기성회를 조직하기 위한 부민대회에서 지역의 상공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제안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이 1929년 4월 24일「마산상공회」가 창립되었고, 이후 마산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1938년「조선상공회의소령」에 의한 마산상공회의소의 설립인가가 나던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최근 마산상공회의소가 펴.. 2012. 1.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3․1운동을 정점으로 시작된 문화정치가 마산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마산에서도 소위「문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운동이란 실업과 교육 장려를 맨 앞자리에 내 세워 회사와 학교의 설립과 확충을 통하여 대중을 조직화하고 강연회․토론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서구적 근대의식을 계몽한다는 사회운동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20년 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을 표방한 마산구락부가 300여 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참여자 중 간부들의 상당수가 원마산 어시장의 객주를 비롯한 상업자본가였습니다. 이들은 세대와 이념 전력 등의 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에 많은 힘을 쏟아 그야말로 문화운동을 실감케 했습니다. 이 문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마산의 경제인들은 학교설립에.. 2012. 1.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대표적인 시장(市場)에 대해서 조선총독부서무부조사과에서 간행한『朝鮮の市場』의 내용과『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의 내용을 복합하여 인용해 보겠습니다. ① 우선 1924년에 개설된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이 가장 큰 시장으로서 제일 붐볐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煉瓦造)의 장가(長家) 점포 3채였고 그 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서 저녁 시장 시간이면 더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朝鮮の市場』에 나타나는 「구마산 시장」은 부림동․수성동․남성동․동성동 창동의 도로(등외도로)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적과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도로연장으로 200칸(360m)내외라고 했습니다. .. 2011. 12.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 2011. 12. 19.
옛 마산사진 몇 장 인터넷으로 마산과 관련된 사진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사진이 몇장 있어 올려봅니다. 처음 사진 두장은 1944년 마산의 奥村亮氏가 경영한다는 통조림 공장의 모습입니다. 앳띤 학생들까지 동원시켜 만드는 저 통조림이 군수품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일본사이트에서 발견했는데 사진속의 인물 중에 지금 누군가의 부모나 조부모님이 아니실런지... 写真1 奥村亮氏経営の馬山市の缶詰工場(昭和19年12月撮影) 写っているのは学徒動員の男子学生 写真2 馬山工場で缶詰製造に従事する学徒動員の女子学生(昭和19年12月) 아래의 사진은 1908년 마산각국거류지에 위치한 소학교의 전경과 마산심상고등소학교의 전경을 담은 엽서입니다. 국내의 한 경매사이트에 올라왔던데 시작가가 10만원이더군요. 울타리밖에서 신기한듯 학교안을 바라보는 이들이.. 2011. 12.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1920년 4월 ‘회사령’이 폐지되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가 공포해 3일 만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기업통제령’입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의 표면상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의 기업 성장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공급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만든 규정이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대 내내 한국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기업을 할 수 없게 통.. 2011. 12.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한 192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입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의 통계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본인비율(%) 1920 11,923 4,172 70 16,165 25.8 1921 1922 1923 1924 13,616 5,168 98 18,882 27.4 1925 17,148 4,824 109 22,081 21.8 1926 17,802 4,975 124 22,901 21.7 1927 18,019 5,095 129 23,243 21.9 1928 18,300 5,339 95 23,734 22.5 1929 19,309 5,592 87 24,988 22.4 1930 20,149 5,559 102 25,810 21.5 1930/1920 169.0% 13.. 2011. 12.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도시 변화는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산업 변화와 중앙마산의 형성 및 매립, 그리고 시구개정 사업으로 인한 원마산의 도로망 확산과 경남선 철도 개설 등이 큰 흐름입니다. 1923년 9월 1일 동경과 요코하마를 비롯한 관동지방에 대규모 지진, 즉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에 돌연히 동경과 요코하마 및 관동지방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가옥을 비롯한 지상시설물을 도괴(倒壞)시켰을 뿐 아니라 해일(海溢)과 3일간 계속된 대 화재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망91,344명 행방불명13,275명 부상51,074명 가옥전소38,090채 가옥반소517채 전궤(全潰)83,819채 반궤(半潰)91,233채 유실1,390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2011. 11.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10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던 시기로 「산업수탈기」라 부릅니다. 정치적으로는 3․1운동을 전환점으로 무단정치가 철폐,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습니다. 「문화정치」라는 말은 1919년 8월 12일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재등(齋藤)이 서울에 부임해 온 다음 날, 즉 9월 3일 아침에 내린 훈시 중에서 8월 19일에 있었던 관제개혁과 헌병경찰 폐지, 복제(服制) 폐지 등을 언급하면서 「이는 요컨대 문화적 제도의 혁신에 의하여.. 2011.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