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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59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마산은 술 생산량에서도 이름이 높았지만 더 유명했던 것은 마산 술의 품질입니다. 마산 술의 향과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마산 술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술은 나다자케(灘酒, 탄주)였다고 합니다. 「나다자케(nadazake)」는 일본의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지방에서 나는 고급 청주를 말합니다. 지금도 생산되는 일본 고급 전통주입니다. 「나다자케」가 생산된 것이 1624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그 기원은 그로부터 훨씬 더 오래전인 14세기경이라고 합니다. 문헌에 의하면 무로마치(室町: 1338-1573)시대에 이미「僧坊の酒(승방의 술), 酒屋の酒(술집의 술)」이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가히 일본 최고의 술이었다고 볼 .. 2012. 11.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 2012. 10.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마산 최초의 의료기관은 1904년 덕영오일(德永吾一)이 설립한 사립마산병원인데 1925년 도립마산의원으로 변경된 이후 1926년 신축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1941년 당시 마산의사회 회원은 12명이었습니다. 이 중 한국인이 운영하는 의원은 삼성의원․학산의원․순천의원과 창동의 동인의원․중앙의원․평안안과의원과 중성동의 대동의원 그리고 수산의원․삼광의원 등 9개의 의원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경영한 의원은 대곡(大谷)․전원(前原)․수상(水上)의원 등 3개소였습니다. 강점말기 마산의 치과의사는 한국인이 4명이었으며 일본인 치과도 이와 비슷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치과에 환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강점 말기, 마산에도 방송국이 설립되었습니다. 조선방송협회에서 노비산에 자리잡고 있던.. 2012. 10.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2012. 10.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 2012. 10.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강점 후기의 조선인 말살 정책에 대해 간단히 몇 자 적습니다. 마산도시변천에 대한 글이라 정치사회변화에 대해서 말한 입장은 아닙니다만 도시변화가 사회변화와 별개의 것이 아니니 간단히 당시 분위기만 적습니다. 1929년에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제공황은 일본을 완전한 군국주의의 길을 택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압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특히 제7대 총독으로 취임한 남 차랑(南 次郞, 미나미 지로)은 재임 6년 동안 철저하게 한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을 폈습니다. 1938년부터 각 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키고 일본어만 사.. 2012. 10.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마산상공회의소 백년사』에는 1939년 현재 마산에서 활동한 개인 영업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은 제외한 통계입니다. 이들 개인영업자 중 한국인 상인들은 주로 원마산 중심상가와 부림동 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서 곡물, 면사포 등의 포목류, 해산물, 식료품, 고무신 등 생활필수품을 많이 취급했고 대금업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상인들은 주로 건축자재, 철물, 과장, 서적과 문방구, 가구, 의복, 술과 고기, 연료, 선구(船具) 등을 판매했고 대금업도 10여명 정도 되었고 토건청부업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나타난 개인영업자의 숫자는 232명이며 영업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이용해 232개의 영업장을 원마산․신마산․중앙마산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동별로 나.. 2012. 9.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 후 마산에 들어오기 시작한 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분야는 섬유산업이었습니다. 1923년에 설립된 마산조면공장과 1927년에 설립된 태전마산공장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섬유산업의 발전가능성을 간파한 마산상공회의소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으로 섬유산업 유치운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조선물산주식회사, 조선신흥방직주식회사 등 대형 섬유공장이 마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주류양조산업과 섬유산업의 두 축이 마산의 대표산업으로 자리를 잡게된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마산에 들어 온 대표적인 두 섬유회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1939년 설립된 조선물산주식회사입니다. 오동동 2,200평 부지를 매입하여 건평 1,000평의 공장을 건설한 이 회사는 「낙낙직(樂樂織)」이라고 부른 특수.. 2012. 9.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기 마산의 산업 중 상업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장입니다. 마산의 시장은 1924년 개설한 원마산의 부림동공설시장과 1923년 신마산에 개설된 반월동공설시장 외에 구마산 어시장․신마산 어시장․우시장․신마산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7년경 부림시장 전경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 마산해산주식회사(1940년)와 부림동(富町) 부영(府營)청과시장(1941년)이 전 강남극장 앞에 개설되었습니다. 1931년 경상남도가 펴낸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서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는 주식회사 20개와 합자회사 5개로 총 25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는 8개였습니다. 1940년에는 법인조직으로서 마산에 본사를 갖고 있던 기업체는 주식회사 21개사․합명회사 2개사․합자.. 2012. 9.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1904년에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東)주조장을 시작으로 마산에는 일찌감치 양조산업이 들어왔습니다.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주조장은 나중에 원전(原田)주조장으로 회사명을 바꿨는데 현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1930년대 중반의 원전(原田)주조장입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마산양조산업은 1928년 그 생산량이 11,000석으로 늘어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드디어 국내 지역별 술 생산량에서 제1위를 차지했습니다. 마산청주업계의 호황은 이후에도 계속되면서 생산량이 해마다 증가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에 까지 그 이름을 떨쳤고, 1938년에는 양조량이 20,000석을 넘었습니다. 마산의 청주업자 조합에서 현 제.. 2012. 9.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무역량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는 것 같아 빼다보니 글이 짧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병참기지 기능을 맡았던 한국의 역할은 마산의 무역량을 늘이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0년대 마산항의 무역은 그 구조상 1920년대와 별 차이가 없이 수․이입에 비해 수․이출의 금액이 훨씬 많았습니다. 전체금액은 1930년의 730만 엔에서 1939년에는 1,770만 엔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마산항의 무역 증대는 정상적인 무역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물자의 반․출입 증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제하 마산항의 수․이출, 특히 미곡의 일본 반출량 증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굶주림을 강요한 결.. 2012. 8.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에는 마산의 인구도 많이 변했습니다. 1930년에 25,810명이던 것이 1941년에는 41,546명이 됨으로써 증가율이 161%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이 20,149명에서 35,670명 177%가 늘어난 데 비해 일본인은 5,559명에서 5,865명 105.5%로 변화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을 제외한 기타의 외국인은 102명에서 11명 10.8%로 심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다음사진은 1930년대 한국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와 일본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30년 이후부터 해방 때까지의 인구 변화는 다음 표와 같습니다. (1944년의 54,000명은『통계연보』를 인용한 표를 이용했는데 천 단위 이하는 삭제되어 있었으며.. 2012. 8.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고시 제556호로 발포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구역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 내용은 가로개설 및 구획정리였습니다. 계획인구 8만명, 목표연도 1961년이라는 일제의 계획을 보니 어떻습니까? 이 고시가 발포된 시기는 1941년 4월 19일이었습니다. 발포시기와 달리 마산은 1936년과 1938년에 가로(街路)축조공사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이 공사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됩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사진)은 「조선시가지계획령」 분석을 통해 원마산 지역은 1920년대에 총독부의 재정 지원으로 실시한 시구개정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신마산 지역은 시구개정을 하지 않았지만 개항장을 조성할 때 비교적 도.. 2012. 8.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마산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구조 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30년대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품 공급창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해안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매립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중앙마산이 완성됨으로써 이전까지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었으며, 원마산은 철도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범역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법은 1934년 6월 20일자로 만들어진「조선시가지계획령」입니다. 이보다 앞서 1920년에 시가지계획령을 입안한 일이 있으나 시기상조란 이유로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도시계획과 관련한 법제 중 가장 이른 것은 한일병합(1910) 이전에.. 2012. 8.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부터 1945까지 15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3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이 시기는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전쟁수행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 시기입니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발한 경제공황은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파급된 대공황이었습니다. 대미무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일본 경제도 여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업생산이 위축되고 임금체불 노동자의 대량 해고로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고, 그 여파가 농촌에까지 이어져 몰락하는 농가가 속출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일본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31년 .. 2012. 7.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9) - 강점제2시기 85회부터 시작된 1920년대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강점 제2시기인 1920년대는 한국이 일제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 특히 식량공급지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던 산업수탈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치가 표방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미증식계획이 강행되었고 회사령이 철폐되었습니다. 1920년대의 마산인구는 1920년에 16,165명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성장의 폭이 조금씩 많아져 1930년에는 25,810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은 1920년 당시 4,172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5,559명이 되어 1920년에 비해 133.2%로 늘어났지만 한국인들은 같은 시기에 169.0%로서 일본인의 증가율에 비해 약간 높았습니다. 조선회사령 폐지로 마산의 민족자본가들도 .. 2012. 7.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8)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초 마산 전경 사진 몇장 소개합니다. 도시의 형태는 지금과 완전히 다릅니다만 자연은 그대롭니다. 첫번째 것은 산복도로 쯤에서 파노라마로 찍은 신마산 일대 사진입니다. 오늘 쪽 끝부분의 노란 점이 당시 마산부청,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옛, 창원군청)입니다. 멀리 돝섬과 오른 쪽 이시미곶(MBC송신소 자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다음은 신마산 쪽에서 마산포(원마산) 쪽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3.15의거탑 쯤이고 노란 점이 지금 봉암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매립되기 전이라 3.15의거탑 바로 앞까지가 바다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월동 뒤쪽에서 신마산 일대를 찍은 사진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 집들이 제법 반듯합니다. 위 사진 확대본입니다. 2012. 7.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7) - 강점제2시기 오늘은 1920년대 초에 마산의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엽서에 소개된 사진입니다. 우선 이 엽서들이 들어 있었던 봉투를 보겠습니다. 반도의 낙토, 마산명소 그림엽서, 동경당 발행(半島の樂土 馬山名所繪葉書, 東京堂發行)이라고 적혀있고, 벗나무와 마산만과 마산 전경이 그려져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역이 있었던 역전광장 사진입니다. 광장 제일 안쪽에 있는 단층 건물이 역 청사인데,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지금의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우체국입니다. 건물은 다시 지었지만 지금도 저 자리에는 합포우체국이 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신사입니다. 제일여자고등학교 부지 내에 있었는데, 마산공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마산공원 마산신사’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건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만, 제일여고 교정에는 .. 2012. 7.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6) - 강점제2시기 오늘은 1920년대 마산의 거리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모두 신마산 쪽 거리입니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 주로 사용되던 상업용 엽서 사진들이 때문에 그들의 도시였던 신마산만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편차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넉 장은 소인 일이 1922년(대정11년) 7월 11일이니 1920년-1922년쯤으로 보이고 소인이 없는 한 장도 건물 들어선 상태로 보아 비슷한 시기인 듯합니다. 모두 창원천 인근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아래 두 사진은 京橋(?)ノ櫻과 馬山川(橋?)ノ櫻이라고 적힌 걸로 보아 두월동 통술거리 입구와 인근에 있었던 다리 부근에서 찍은 사진이며, 시기는 벗나무가 만발했던 4월인 것 같습니다. (푸른 색 화살표) 아래 두 사진은 京町이라 했으니 통술거리 남쪽 입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2012. 7.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5)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초 신마산 일대 경관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소개합니다. 일본국립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엽서입니다. ‘잔교에서 보이는 마산’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이 사진은 두 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해 놓은 사진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 장 씩 따로 된 사진도 올렸습니다. 일제기 마산 시가지 사진은 대부분 육지에서 찍은 것들인데 이 사진은 드물게 바다에서 시가지를 바라보고 찍었습니다. 일본해군이었던 송미삼헌(松尾三憲)이 훈련항해 도중에 들러 수집한 엽서로, 그 아들이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스탬프에 12. 6. 15라고 찍힌 것으로 보아 대정 12년, 즉 1923년 6월 15일이라는 뜻인데, 그렇게 볼 때 이 엽서에 보이는 마산 모습은 대략 1920년대 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에 .. 2012. 6.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4) - 강점제2시기 마산에 최초로 철도가 개통된 것은 개항 6년 후인 1905년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종전으로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집어 삼키기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경부선 개통과 같은 해였으며 마산이 종착지라 ‘마산선’이라고도 불렀고 삼랑진에서 마산과 연결된다 해서 ‘삼마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마산선은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철도회사를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을 빌미로 그 사업권을 강제 접수한 다음, 자국의 중요 인력을 동원하여 개통시킨 철도였습니다. 비록 국력이 약해서 강제로 탈취 당한 철도였지만, 이 철도의 개통은 마산의 도시화를 촉진시켰으며 마산을 일본열도와 한반도 내륙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로 만들었습니다. 마산선이 개통된 20여년 뒤, 진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또 하나의 철도가 놓였습니다. ‘경남선’이라 불린 이 철.. 2012. 6.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통합 창원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팔룡산의 명칭은 원래 반룡산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산의 명칭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 지역의 지명을 연구한 민긍기 교수는 대략 1980년대 전후, 그러니까 30여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지명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 글에서도 팔룡산이라 부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 산은 무학산과 함께 선재봉산(船材封山), 즉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산이었습니다. 마산포 해안가에 있던 전선소(戰船所)에서 무학산과 팔룡산의 재목으로 선박을 건조했던 겁니다. 두 산에 곧고 굵은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제는 마산부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1927년 5월 이 산의 정상부에 수원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30년 3월에 준공하였습니다.. 2012. 6.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1920년에 비해 10년 후인 1930년에는 가용지가 186,119㎡에서 182,406㎡로 약 3,700㎡가 줄었습니다. 이 차이는 1920년대에 새로 개통된 다수의 도로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1920년 기준으로 필지수로는 274필지에 21.3%, 면적으로는 65,000.11㎡에 35.0%였으며 필지 당 평균면적은 237.23㎡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에는 필지수가 365필지에 26.5%, 면적은 70,812.08㎡에 38.8%이었고 필지 당 평균면적은 194.01㎡이었습니다. 필지수와 면적은 늘어난 반면 필지 당 평균면적은 오히려 줄어든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들의 토지소유 상태는 1920년 981필지에 76.3%, 면적 116,320.88㎡에 62.5%, 필지 당 평균면적 118... 2012. 6.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1)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포 해안의 변화는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남성동 매립 후 항만의 선박이용 빈도가 높아지자 1924년 매립지역 해안에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건설된 것이며, 둘째는 1910년대 박간(迫間)의 매립 때 시공하지 않았던 동굴강이, 1927년 현재 대신증권에서 어시장으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면서 부분적으로 매립되었던 겁니다. 다음 그림(푸른 원 내)처럼 말입니다. 셋째는 현 몽고장유의 전신인 야마다(山田)장유의 사주 산전신조(山田信助)가 시행한 오동동 매립입니다. 2012/05/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마산시사』 등 마산도시변화와 관련한 각종자료를 보면 박간(迫間)의 매립 이후 마산만 연안을 드나드는 선박의 이용이 편리해졌.. 2012. 5.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먼저 1930년 원마산 상황과 192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두 도면을 통해 이 시기 마산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식 도로가 여기 저기서 뻥뻥 뚤렸습니다. 지금의 코아양과 앞 도로,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그 때 생겼습니다. 두 도면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생한 도시 구조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⑧까지의 번호는 1930년 토지이용도에 표기된 도로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먼저 현재의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남북방향의 삼성생명 앞에서 현 대신증권까지의 도로가 1923년 개설되었다. ② 이어 1924년에는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③ 1926년, .. 2012. 5.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되는 시기였으나 도시시설의 수준은 낮았습니다. 일제하 마산의 유통시장은 원마산과 신마산 상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원마산(마산포) 지역의 상가는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1910년대 새로 개설된 도로 주변이 중심상권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마산포 지역의 상권은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있었고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곳 마산포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 2012. 5.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1929년 5월 24일 구 고려모직 뒤편으로 회원천 하류에 이르는 오동동 2-1번지와 15-1에 새롭게 총 면적 2,117평이 조성되었는데 그 중 대지가 1,615평이었습니다. 다른 자료에서는 1,692평이라고도 하는데 1,615평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자료에 의한 것입니다. 매립 신청 초기에는 이보다 면적이 약간 작았으나 설계변경을 거치면서 이 규모로 확정된 것입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352, 필름번호87-625」를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이 매립은 당시 자산동 119번지 소재 야마다(山田)장유양조장(현 몽고간장)의 사주 산전신조(山田信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서류에 나타난 매립의 목적은 ‘택지조성’이었으.. 2012. 5.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신마산에 오래 동안 살아온 일본인 목재상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명이 시행한 매립입니다. 공사는 우리나라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에 참여한 후 재계에 두각을 나타낸 서울의 토건업자 황정초태랑(荒井初太郞)에게 의뢰하였고, 1926년 해면 매축 사업에 착수하여 1928년 12월 21일에 준공하였습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193, 필름번호87-560」을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위치는 현재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남쪽 건너편 일대입니다. 세분해보면 옛 마산도기 및 진일공업사 등이 있던 월남동 1가 5번지에서 46번지의 1에 이르는 4,663평을 비롯해서 전 유원연탄 및 그 주변일대와 전 항등여관.. 2012. 4.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강점 제2시기의 매립- 마산포에는 1910년대에 이미 일본인 박간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마산만의 매립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해방 때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매립이 빈번했던 까닭은 마산 해안의 창탄지역이 일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저비용 고수익, 즉 손쉽게 큰돈을 쥘 수 있었던 투자의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사령 폐지로 1920년대 벽두에 시작된 국내 공업시설 확충 붐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1920년대(강점 제2시기) 매립착공은 많았지만 준공된 곳은 마산포 두 군데, 신마산 한 군데 모두 세 곳이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첫번째 매립입니다. 전 동성동 사무소와 그 주변인 남성동 30-1번지의.. 2012. 4.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마산** 1930년 / 山本三生 / 개조사 / 1:40,000 / 일본지리대계12, 조선편 / 개인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의 마산도시공간을 알아 볼 수 있는 지도입니다. 직선형의 도로 외에도 예전부터 조성되어 있던 도로까지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 외에도 개천 및 철도까지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신마산은 이때도 고운로 상부는 개발되지 않고 있었으며 중앙마산은 구도로 변에 조그마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은 북쪽으로 영역이 넓어져서 동척사무소와 교도소 위쪽으로 건물이 들어서고, 전 북마산파출소 부근에 일단의 건물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동굴강 일부가 매립되었지만 워낙 축척이 세밀하지 못해서인지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지도.. 2012.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