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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4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두 기사 소개합니다. 4. 1935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마산의 교육현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내 地方當面問題(지방당면문제)’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高普設置問題(고보설치문제)’라는 제목으로 마산에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며, 두 번째 기사는 ‘商校昇格問題(상교승격문제)’라는 제목으로 당시 3년제 을종학교로 1922년 개교한 마산상업학교(옛 마산상고, 현 용마고)를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로 승격시키자는 겁니다. 첫 번째 주장인 고등보통학교 설립 문제는 이듬해인 1936년 4월 11일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 개교 당시 5년제 10학급)가 개교됨으로 이루어졌고, 두 번째 주장인 마산상업학교 승격문제는 1939년 5년제 10.. 2013. 10.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4)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대 이후 마산 도시변화와 관련한 신문보도를 기사와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간단한 기사가 대부분이지만 꽤 볼만한 기사도 있습니다. 1. 먼저 1931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돗섬 관련 기사입니다. 제목은 「納涼村施設 마산 저도에」이며 기사는 「마산부에서는 여름 동안의 피서지(避暑地)로 마산부 저도리(猪島里, 돗섬)에 납량촌(納凉村)을 신설할 터이라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부민들을 위해 돗섬에 어떤 피서시설을 만든다는 내용인데 건물을 짓는다는 건지 해수욕 시설을 조성하는 건지 이 기사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2. 1933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몽고정 관련 기사입니다. 제목은 「馬山 蒙古井 大谷博士 證明」이며 기사는 「지난 14일 성대교수 .. 2013. 10.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3) - 강점제3시기 '관광 마산'에 소개된 사진 중 마지막 석장입니다. 53. 자안지장(子安地藏) 자안지장에 대해서는 처음 접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우선 관련 글 한편 소개합니다. 『약진 마산의 전모』에 실린 글입니다. "구강(마산 팔용산 수원지 내지 산호리 일대) 광천 쪽으로 가는 왼쪽으로 상당한 급경사의 산길을 약 1시간 가량 올라가면 자안지장을 안치해놓은 곳에 다다르는데, 거암 아래의 안쪽에 안치된 지장불 근처에는 송송 맑고 정결한 물이 샘솟는다. 전설에는 이 거암을 '상사암'이라 부르는데, 남녀가 서로 연모하였으나 결국은 부부가 되지 못했다면 뱀으로 변하여 연인을 마음대로 희롱하기 때문에 이 바위 위에 앉혀서 주문을 외우게 했고, 그렇게 해보아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두 사람 모두를 공물로 바친다고 전한다. 이곳을.. 2013. 10.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2)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50. 마산해수욕장 당시 마산 최고의 관광지요 피서지였던 월포해수욕장입니다. 아래 사진은 1934년 7월 5일 자 5면에 실린 이 해수욕장 관련 동아일보 사진 기사입니다. 기사는『때 만난 마산월포해수욕장』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여름의 바다는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떠들썩거리는 판인데 마산 진해 해수욕장에도 벌써부터 남조선 각지에서 욕객이 모여드는 판이다.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남조선 지방에서도 물이 맑고 모래가 희어 풍광이 명미하기로 이름이 높아 각 여관업자들은 이 때 한목을 보게 된다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51. 완월동 부동폭포 장군천 상류에 있는 완월폭포입니다. 이 폭포에 대해 1941년 발간된 『약진마산의 전모』에서는 "화강암의 바위 사이를 이으면서 흐르는 물은 옥을 .. 2013. 10.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1) - 강점제3시기 그림 석장입니다. 47. 마산수도배수지 팔용산 저수지에서 공급된 물을 정수하고 배수하던 곳입니다. 위치는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였습니다. 1930년, 이 정수장이 준공되어 통수식을 할 때, 도지사와 진해요항사령부 사령관까지 참석하여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준공식 당시 마산부윤 판원지이(板垣只二 / 제5대부윤 / 1928.3-1930.10 재임)의 글을 석각해 놓은 「水德無疆(수덕무강)」이라는 넉자 글입니다. 한반도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로 알았던 일제관료의 확신과 힘센자의 너그러움까지 서려있는 글입니다. 48. 산제당 당시 마산 사람들의 종교적 근원지였던 환주산에 있었습니다. 사진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성덕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로 남아 있습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2013. 9.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0)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44. 마산공원 마산신사에 접한 위치. 지금의 제일여고 부지 중 일부였습니다. 조경계획은 임학박사였던 본전정육(本田靜六)이 하였고 수종은 벚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등이었습니다. 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의 놀이터와 휴식처로 사용되었습니다. 45. 근위빈공원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조그마한 해변공원으로 1934년 월영동 해안에 조성되었습니다. 1941년 벚나무 묘목 1백본, 버드나무 2백본을 이식해 공원을 꾸몄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46. 추산공원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에 있었으며 지금까지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암석이 많았다고 하며, 동쪽에 오래된 벚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서 벚꽃이 필 때 쯤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2013. 9.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9)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 소개합니다 41. 합성리 정동행성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창원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성리 정동행성지는 바로 그 합포성을 말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어느 주택의 담벼락으로 아직 남아 있는 합포성의 성곽입니다. 42. 월영대 월영대는 경상남도기념물 제.. 2013. 9.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78) - 강점제3시기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38. 농공금융주식회사 1933년 3월 20일 창동 51번지에서 설립, 농공업자에 대한 금융대부와 화재보험 대리점을 함께하였다. 대표는 이봉수 씨. 39. 몽고정 몽고정은 고려 충렬왕 때 중국 원세조가 2차례 일본원정에 나서면서 당시 이곳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우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물 앞에 몽고정이라고 쓰인 비석은 1932년 일본인 고적단체에서 세운 것으로, 그 전에는 고려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40 마산성지 정유재란 때 마산에 왜군들이 상륙해 지금의 산호공원인 용마산 일대에 구축한 왜성입니다. 정상부근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모습입니다. 2013. 9.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이야기 (177)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금융기관 세 곳 사진 소개합니다. 35. 무진회사 1925년 3월 월남동 1가에서 시작한 마산무진주식회사입니다. 1931년 월남동 3가 1번지에 아래 사진처럼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진해에도 지점이 있었습니다. 1936년 경남 도내의 각 무진회사들이 통합하여 부산무진회사를 창립함으로써 부산무진회사 마산지점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무진회사는 지금의 상호신용금고를 의미합니다. 36. 마산금융주식회사 1908년 6월 일본인 만무구일(滿武龜一)이 설립한 회사로 각 개인들을 상대로 부동산 담보대출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6년 추산동 69번지에 지은 근대적 2층 건물의 사옥니다. 37. 산업금융주식회사 1929년 5월 19일 동성동 173-1번지에서 시작하였고 금전.. 2013. 9.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6) - 강점제3시기 마산에 있었던 세 곳의 금융조합 사진을 소개합니다. 금융조합은 제1차 한일협약(1904년)에 따라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온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금융기관 확충 정책에 의해 전국에 설립되었습니다 한말인 1907년(융희1)에 시작되어 1956년까지 있었습니다만 1956년 농업은행의 설립으로 해산되고 1959년 현 농업협동조합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주로 일본인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금융조합의 조합장은 한국인이 맡았지만 실질적 총업무는 대부분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32. 마산금융조합 1919년 2월 17일 도시금융조합으로 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1일 중앙동 1가 1번지에서 영업을 시작햇습니다. 신마산지역에서 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던 금융조합입니다. 아래 사진의 건물은.. 2013. 8.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29.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 1904년 일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학교로 현 월영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일제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입니다. 30. 마산공립보통학교 1901년 4월 마산공립소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한 마산공립보통학교는 현 성호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위 마산공립심상소학교가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다면 이 학교는 한국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31. 식산은행 마산지점 1918년에 지은 건물로 남성동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벽돌조 1층 양식으로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습니다. 2013. 8.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4) - 강점제3시기 오늘은 학교 사진 석장입니다. 26. 마산공립상업학교 지금은 용마고등학교가 된 마산상업고등학교입니다. 1922년 3년제로 개교했다가 1939년 수학연한 5년제로 바뀌었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수학연한을 다시 4년제로 단축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한국인들이 다닌 학교이지만 1942년에는 신입생의 50%가 일본인으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27. 마산공립고등여학교 공립마산고등여학교는 1927년 수학연한 5년제의 고등여학교로 개정한 현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입학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의 입학은 매우 어려워서 전체 재학생 수의 20%에도 못 미쳤습니다. 원래 1915년 장군동 2가에서 개교한 여자실과학교인데 1921년 고등여학교로 바뀌었으며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이 건.. 2013. 8.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3)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재미있는 사진 석 장 소개합니다 23. 구마산공설시장 지금의 부림시장입니다. 1924년 개설된 시장으로 당시 마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와 장가(長家)점포 3채였고 그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 저녁시장 시간이면 언제나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24. 원동무역주식회사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1920년 5월 16일 자본금 50만원으로 창립한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입니다. 이 사진은 1927년 8월에 착공하여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지은 사옥입니다. 외형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 원형이 남아있으며 건물 앞에는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2013. 8.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2) - 강점제3시기 오늘은 당시 유명했던 마산의 장유공장(醬油味噲製造場 / 장유미쾌제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은 장유산업의 메카였습니다. 양도 양이지만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뿐만 아니라 멀리 청진, 원산 등지에까지 판매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장유산업은 일본인의 독점산업이었습니다. 20. 복정(福井 / 후쿠이)醬油味噲製造場 한일병합 다음 해인 1911년 5월 복전증차랑(福田增次郞)이 마산부 都町(도정 / 현 중앙동)에서 창업한 회사입니다. 1928년 마산의 장유 총생산량 5,000석의 70%를 생산한 대형공장이었습니다. 21. 적문(赤門 / 아카몽)醬油味噲製造場 1906년 관무부(管武夫)에 의해 설립된 마산 최초의 장유공장입니다. 마산 유정(신창동) 18번지에 공장이 있었으며 연간 1,000석 내외.. 2013. 7.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1)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네 곳을 소개합니다. 양조장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16. 청수(淸水 / 시미즈) 양조장 1921년 창업하였고 신창동, 현 무학아파트 자리(전 무학소주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만주에 까지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大正櫻(대정앵)’과 ‘井筒平(정통평)’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장이 있던 곳 옆을 흐르는 창원천(대곡천이라고도 함)에는 이 공장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는 청수교(淸水橋)가 있습니다. 17. 원등(遠藤) 양조장 1909년에 창업하였고 장군동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건물 보존 여부를 놓고 논쟁거리가 되었던 천도원(千島園)주조장이 바로 이 양조장입니다. 상표는 彌生(미생)이었.. 2013. 7.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0)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모두 당시 유명했던 일본 청주 공장들입니다. 13. 월포(月の浦) 양조장 장군동 경남데파트 뒤편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회사가 사용했던 술통도 함께 소개합니다. 14. 삼호(三好 / 미요시) 양조장 1913년에 창업하였고 부림동 아래에 있었습니다. 상표는 ‘松の色(송색)’이라고 했습니다. 15. 산읍(山邑 / 야마무라) 청주 양조장 1929년에 창업하였고 월남동에 있었습니다. 만주에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櫻正吉(앵정길)’이었고 지금 중리에 있는 무학주정 전신입니다. 2013. 7.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9)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10. 빈전(濱田 / 하마다)양조장 1923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금배빈학(金盃濱鶴)이었습니다. 추산동에 있었습니다. 11. 서전(西田 / 니시다)양조장 1907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계림(鷄林)이었습니다. 위치는 홍문동, 즉 현 신동아빌라 자리입니다. 마산의 토호 이승훈 씨가 운영한 백광청주가 바로 해방 전 이 회사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양조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 촌기(村崎 / 무라자키)양조장 1925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염록(艶錄)이었습니다. 홍문동에 있었습니다. 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는 1923년에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앞 건물은 사무실, 뒷 건물이 공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3. 7.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8)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석교양조장, 원전양조장 사진을 소개합니다. 1.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사진입니다. 현재 통술거리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입구 오른쪽 건물은 현재도 똑 같은 모습의 건물이 있습니다만 동일한 건물은 아닙니다. 아마 저 건축물이 갖은 상징성 때문에 예전 모습 그대로 지은 것 같습니다. 2. 석교(石橋 / 이시바시)양조장 1905년 설립되었으며 서성동 덕천아파트 자리에 있었습니다. 후에 대흥주조라는 이름으로 문삼찬 씨가 경영하였습니다. 상표는 대전정종(大典正宗)이었습니다. 3. 원전(原田 / 하라다)양조장 1904년에 설립한 마산최초의 일본 술 공장입니다. 원래 이름은 아즈마(東)주조장이었습니다. 상표는 '한목단'이었고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2013. 7.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7) - 강점제3시기 오늘 소개할 사진은 마산역, 마산우편국, 도립마산의원 순서입니다. 1. 마산 역 현재 마산중부 경찰서 앞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에 있었습니다. 1905년 목조 일식으로 단층이었습니다. 1905년에 경부선과 함께 개통된 철도 마산선의 종착역이었고, 1925년에 개통한 철도 경남선의 출발역이었습니다. 이 역에서 출발하면 삼랑진을 거쳐 서울과 부산으로 연결되었고 함안 군북을 거쳐 진주까지 연결된 유서 깊은 역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마산우편국입니다. 2. 마산 우편국 현재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마산우체국의 전신입니다. 우편국을 통해 모든 정보와 통신이 연결되었던 시절, 마산의 가장 첨단시설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1930년에 지었으며 약 300평 규모였습니다. 20대 초반 때 우표수집 한답시고 저도 자주 들락거.. 2013. 6.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에 예고한대로 오늘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순서는 본판 순서를 따르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이고 원판 사이즈가 가로40mm×세로30mm 밖에 되지 않아 상세하게 감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냥 1930년대 마산도시의 분위기만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1. 마산부청 중앙동 3가에 있는 현 마산합포구청, 즉 오랫동안 마산시청으로 이용되었던 위치에 있었었던 건물의 최초 모습입니다. 마산시민들에게는 약간 낯이 익은 건물일 겁니다. 2.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원으로 지방법원이 이전하기 전까지 마산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3. 마산경찰서 중앙동 2가에 있는 옛 마산경찰서, 현 마산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건.. 2013. 6.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65) - 강점제3시기 이번 회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아래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리플렛과 리플렛 속에 들어 있는 마산 지도는 이미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만 지도의 아래위에 실린 사진은 처음 소개합니다.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3/0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이 리플렛은 1937년에 제작 발행되었습니다. 일본관광객 유치용 마산 홍보 혹은 마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마산 도시를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리플렛입니다. 「觀光の馬山」이 발간된 1937년은 만주사변(1931년)에 이어 일본군부가 중국대륙을 삼키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 2013. 6.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4) - 강점제3시기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태평양 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던 미군 B-25 경폭격기입니다. 미군의 공습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2013. 6.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3) - 강점제3시기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한 사립 창신학교의 1930년대 사진 몇 장 소개합니다. 『창신학교 100년사』에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 사진들은 폐교되기 전, 창신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장면입니다. 당시 우리 지역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소개해봅니다. 어떻습니까? 불과 80년 전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 모습이. 2013. 5.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2) - 강점제3시기 일본제국주의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년)에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 1941년, 조선총독부는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마산에 결핵전문병원을 세웠습니다. 마산 가포지역에 있는 현 국립마산결핵병원의 전신입니다. 시작은 상이군인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 변화를 거듭해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 되었습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지역은 한 많은 땅입니다. 110여 년 전, 한반도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며 ‘지바무라(千葉村)’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업이민의 전진기지가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포는 20세기 초입에 강대국의 발톱에.. 2013. 5.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1) - 강점제3시기 1940년 2월에 創氏改名이 실시됩니다. 따라서 토지소유주의 이름만 보고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이 글에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할 때 확인한 이름 중 대부분의 한국인은 개명이 되지 않았지만 개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이름의 형태을 보아 국적을 판단하였고 그 다음은 한국인이 개명을 하여 실제로 사용했던 사례, 그리고 일본인들이 보통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이들을 한국인이라고 자의로 판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니 약간 틀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래 표는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의 원마산 토지에 관한 비교표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 2013. 5.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0) - 강점제3시기 1910년대 중반에 대규모 매립을 경험한 원마산 해안은 25여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다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다시 동성동 해안 일대의 대규모 매립이 시작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그림 중 앞의 것이 1930년, 뒤의 것이 1945년 그림입니다. 1910년대 박간(迫間)의 매립 때 매립되지 않고 남아있던 동굴강이 1927년에 현재 대신증권에서 어시장으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는 형태로 부분적으로 매립되었다가 1935년 마산부가 행한 매립 때 전면적으로 매립되었습니다. 동굴강은 현재 어시장에 있는 이른바「너른 마당」의 북측 인접대지입니다. 「너른 마당」은 마산의 어시장 내에 있는 지명입니다. 일제 때 도로개설과정에서 각 도로가 집중함으로써 넓어진 곳인데 넓은 곳이라 하여 .. 2013. 5.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9) - 강점제3시기 먼저 1945년 원마산 상황과 193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서 보다시피 1930년부터 1945년까지에 원마산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한 번호는 위 1945년 그림에 표기되어있는 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1935년에 지금의 신포동 일대 매립으로 원마산과 신마산이 지형적으로 하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② 같은 해 기선권형망수협지소와 그 인근 건어물 시장 주변 매립으로 동성동과 오동동의 경계까지의 해안이 직선으로 변했습니다. ③ 1937년에는 수성동, 즉 시민외과 앞 도로가 부림시장과 이어져 신포동 매립지와 연결되었습니다. ④ 같은 해 현 오동동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⑤ 같은 해 ④의 도로가 새로 매립된 지역의 도로망과.. 2013. 4.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58)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1945년의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대규모 매립이 시행되어 규모도 커지고 근대식 도로망도 확산되는 대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1945년 사이의 원마산에는 한국인 상인들에 의해 부림동 시장과 남성동 해안 일대에 걸쳐 곡물․면사포 등의 포목류․식료품․고무화․기타잡화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상인들도 원마산에 많이 진출하여 건축자재․철물․과자․서적과 문방구․가구․의복․주류․육류․연료․선구(船具) 등을 판매했습니다. 대금업자도 10여명에 달했으며 건축 붐을 타고 토건청부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1931년에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는 당시 마산 토지 중 대지․논․밭을 종류.. 2013. 4.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7) - 강점제3시기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 관련 글은 지난 번까지였습니다. 개항기 9회, 강점 제1시기 2회, 강점 제2시기 3회, 강점 제3시기 15회로 총 29회였습니다. 하지만 개항기 매립 중 5회는 계획으로만 끝났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 매립 횟수는 총 24회였습니다. 매립 면적은 모두 325,000여 평이었습니다. 매립 주체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개인 혹은 공동매립과 단독매립 등이 있었으며,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하였고 일거에 수만 평의 매립을 했는가 하면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을 비롯해서 농지로 사용하기 위한 매립이 있었는가하면 군용지 혹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한 것도 있.. 2013. 4.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6) - 강점제3시기 중앙부두 건설공사도 제1부두와 같이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의 삼택조(三宅組)에 맡겨 시공하여 제1부두와 같은 날인 1939년 5월 19일 준공하였습니다. 총 25,475평 규모로서 총길이 1,080m의 물양장도 갖추었습니다. 현재 이 중앙부두에는 연안여객터미널․마산지방항만청․모래부두․쌍용양회 시멘트 사일로․세관․검역소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현대아이파크 앞에 합동청사가 준공되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은 곧 이전할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들이 이전하고 나면 이 일대를 근래에 조성한 서항부두와 함께 해양친수공원으로 조성할 것입니다. 마산 해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계획이므로 시민들 기대가 높습니다. 시멘트 사일로도 철거한다고 하는데 여수엑스포 때처럼 재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 설.. 2013.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