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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595

마산·창원 역사 읽기 (12) -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5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1960년대 이래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온 임진왜란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의 승패논쟁인데 명과 일본측의 기존연구는 대체로 자국의 승전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었으며 조선에서는 패전관이 우세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승전론이 우세해지는반면, 일본측의 연구자들이 패배한 전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전쟁발발 원인과 관련한 성격 및 명칭에 대한 문제이다. 대부분 임진왜란을‘국가적인 규모의 왜구’들에 의한 약탈전쟁으로 보아 ‘임진왜란’ 혹은 ‘임진왜화(壬辰倭禍)’로 표현해 왔다. 이러한 입장의 이면에는 성리학적 사상을 지닌 조.. 2014. 8. 11.
마산·창원 역사 읽기(11) -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4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정동의 일이 시급한데 / 농삿일을 누가 생각하랴 / 사자는 끊임없이 이어져 / 동으로 서로 달리네 / 백성을 거두어가니 고을은 텅텅 비고 / 말들은 달려 강가로 향하고 있네 / 밤낮으로 나무베어 /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 한 자의 땅도 갈아놓지 않았으니 / 백성들은 무엇으로 목숨 이어가나 / 집집마다 묵은 양식 없고 /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 하물며 다시 농업마저 잃었으니/ 볼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위의 시는 원 간섭기를 살았던 수선사(修禪社 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당시 일본정벌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던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며 읊은 것이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토지.. 2014. 8. 4.
마산·창원 역사 읽기(10) -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3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나온다. -다양하게 남아 있는 유적들- 창원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민무늬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 2014. 7. 28.
마산·창원 역사 읽기(9) - 마산만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골포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2 마산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 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한조) 삼한시기 마산・창원지역이 속했던 변한의 생활모습을 적은 글이다. 변한은 삼한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 2014. 7. 21.
마산·창원 역사 읽기(8) -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1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연일 계속되는 고성과 난투장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 언제 그랬냐는 듯 품위와 위엄으로 재무장(?)하고 마치 일월의 야누스인 양, 두 얼굴로 웃고 화내고, 타협하고 뒤돌아 서고........... 누구의 일상일까? 아마도 현재만이 아닌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진 이래 계속되어 온 평상의 모습은 아닐까. “정치집단” 혹은 “정치제”하고 명명되는 이러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일까?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이들의 역할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받거나, 혹은 그 존재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 될 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더욱 절실하게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흔.. 2014. 7. 14.
마산·창원 역사읽기(7) -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 7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마산에서의 3.15의거는 그 뒤 4.1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은 도시의 지식인층이나, 학생들, 중간층들에게 반이승만, 반자유당이라는 성향이 투표로 나타났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인하여 2.28 대구에서의 학생시위, 제1.2차 마산봉기, 그리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4.19항쟁, 4.26 교수단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2014. 7. 7.
마산·창원 역사읽기(6) - 일본의 침략과 저항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6 일본의 침략과 저항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개항 이후 마산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하여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들의 소굴로 변해갔다. 드디어 1899년 5월1일, 마산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인 개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포 남쪽 2㎞거리에 이쓴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가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계획도시(지금의 신마산지역)가 들어섰다. .. 2014. 6. 30.
마산·창원 역사읽기(5) -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2014. 6. 23.
마산·창원 역사읽기(4) - 고려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4 고려시대의 마산과 창원 신라말의 사회는 중앙진골귀족들간의 왕위계승분쟁으로 지방세력들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호족세력이었다. 이 지역의 인근에는 김해지역의 호족이었던 김율희가 있었다. 이 사람은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봉림사 개창을 지원했던 인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제압하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마산.창원지역은 고려 현종때에 의안.합포를 합쳐서 금주(지금의 김해)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각각 설치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군량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지역명을 변경하고 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시대의 마산지역은 원나라 주도의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전진기기가 되었다. 몽고와의.. 2014. 6. 16.
마산·창원 역사읽기(3) -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3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려군읍」 연혁도칠폭, 채색필사본, 19세기 이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단군조선 이후 고려까지 각 왕조의 강역을 그린 일종의 역사지도.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도성을 비롯한 주요지명의 위치를 이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중국의 정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남지역), 진한(낙동강의 동쪽), 변한(낙동강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이들 삼한에는 다양한 이름의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 2014. 6. 9.
마산·창원 역사읽기(2) -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2.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이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거나 유물이 채집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가까운 부산.경남 권역에서는 최근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고 중기구석기시대 이전 유적들도 몇 군데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마산.창원지역에도 이 시기의 유적이 나올 가능성은 많다.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8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는 보통 농경이 시작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처음부터 농경을 한 것이 아니고 식물성식료의 채집과 특히 어로생활 중심의 생업경제였다. 이러한 생활형태였다면 신석기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통영 상노대도 유적처럼 마.. 2014. 6. 2.
마산·창원 역사읽기(1) -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예고해 드린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의 역사서 「마산·창원 역사읽기」를 올리겠습니다. 모두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 택했습니다 이 책은 전공분야가 연구분야가 다른 31명이 함께 쓴 책입니다. 저도 함께 했습니다. 이제는 도시통합이 되었지만 원래 책 제목대로 이 글 제목도 「마산·창원 역사읽기」로 하겠습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한 꼭지에 5-10개 정도의 작은 꼭지가 있기 때문에 약 40 꼭지 정도 됩니다만 해방 이후 부분이 준비될 때까지만 싣겠습니다. --------------------------------------------.. 2014. 5.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4) 개항부터 해방 때까지 47년 동안 진행된 마산의 도시변화과정 속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철저히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자본 축적을 위해 마산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아 도시를 물리적으로 확대하거나 변형시켜 나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계지로 설정되었던 신마산 지역은 식민 지배 이후 부분적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근대적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던 원마산 지역의 사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도시정책을 좌우했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도시는 단지 투자의 대상이었기 때문에「근대도시로의 변화」와「전통 공간의 보존」이라는 도시의 기본적인 발전방향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도시변화과정의 바탕이 이러했기 때문에 근대기 마산 도시는 경제적 잉여를 창출하.. 2014. 5.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3) 개항부터 해방까지 진행된 마산 도시변화과정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한 글입니다. 내용은 시가지 확산, 도로망 패턴, 토지 이용 등 세 가지와 이 시기에 있었던 도시변화 중 대표적인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의 두 도시가 각각 다른 조건과 형태로 생성․변화․확산을 거치면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로 연결되었고, 그 결과 마산 시가지는 남북 장축의 대상형(帶狀型)으로 변하였습니다. 두 도시의 연결은 단지 두 공간이 지형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간적 경계가 완화되고 식민정책을 관장하는 공공업무지역이 형성되는 등 사실상 마산 도시에 있어서 최대의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합방 이전까지 원마산에는 자연취락형 도로 밖에 없었으나 신마산의 .. 2014. 5.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2) 지금까지 올렸던 글에 대한 요점과 관점 그리고 성과를 정리한 글입니다. 마산은 오래 전부터 존속해왔던 조선인 집촌의 원마산(마산포) 지역과 개항 이후 인위적으로 조성된 신마산 지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각각의 영역을 확산시키면서 마침내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어 가는 변화과정을 겪었습니다. 마산의 도시구조가 지금과 같은 틀을 갖춘 것은 이 시기였으며, 이 때 형성된 도시구조는 이후에 규모만 확장되었을 뿐 큰 변화 없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용 중 과거에 존재했던 도시공간의 복원은 그 자체로서 해당 시기에 지니고 있던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익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구조의 물적 형태를 시계열적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도시사학(都市史學.. 2014. 5.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1) 지금까지 210회에 걸쳐 1945년까지의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 도시의 변화과정을 각 시기별로 요약․정리합니다. 고려의 정종(靖宗, 1035-1046년 재위)대에 이르러 정부는 마산 해안에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습니다. 창(倉)의 위치는 오늘날의 남성동 부근에 있던 해안 지역으로서, 근대기까지 존속했던 동굴강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이런 추정과 달리 산호동 쪽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정동행성을 두면서 이 도시는 군사 항구 도시로 변했으며,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36년(1760년)에 조선 정부는 대동미를 운송할.. 2014. 4.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0) - 강점제3시기 지금까지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강점기 마산의 도시변화과정은 여느 도시처럼 사회변화 및 산업성장에 따른 도시인구증가가 일반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마산이라는 도시만이 가지는 특수성도 도시변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동서(東西)쪽에 바다와 산을 접한 자연조건과 개항․러일전쟁․한일합방․부(府)제정․회사령․시구개정․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경제조건입니다.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산과 해안으로 인한 세장형의 해안 평지 --- 시가지형태가 대상형(帶狀型)이 됨 도로망 패턴이 선상(線狀)으로 됨 ○ 간석지가 많음 ;------------------------- 대규모 매립으로 시가지 확산 ○ 短軸(동서방향)의 경사가 심함 ------------ 단축(短軸) 도로가 발달하지 못함 산.. 2014. 4.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9) - 강점제3시기 도시는 인구․생활욕구․교통체계․경제여건 등 내적 상호작용에 의해 그 구조가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지역과 국가 나아가서 국제사회가 기능적으로 상호 긴밀하게 얽혀있는 생태의 장(ecological field)에서 도시가 그 중심적인 구성체이기 때문에 도시와 외부 영향 사이의 관계 및 입지조건 등 외적자극도 중요한 변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변화요인에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비롯하여 문화적․사회경제적 조건 등 일체의 상황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몇 주 동안 올린 강점기 마산의 도시화과정을 요약 정리합니다. 내용은 1) 시가지 확산, 2) 도로망 패턴, 3) 토지 이용 순입니다. 1) 시가지 확산 마산의 시가지 확산은 한국인이 살던 원마산과 일본인이 살던 신마산의 두 .. 2014. 4.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208) - 강점제3시기 지난 주 까지 일곱 가지 분석 틀을 통하여 마산의 토지이용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중에는 각 필지의 토지가격을 이용한 구체적인 접근방법도 있었지만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방법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일곱 가지 분석의 결과를 보면 대체적으로 일관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이들을 종합한다면 당시의 토지이용상태에 대한 개괄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원마산(마산포) 개항기 원마산은 마산창에서 남쪽해안일대에 강력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까지 토지가 상업용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일부 도로 안쪽의 대지와 동성동의 동쪽 일대만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개항 이후 마산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원마산으로 진출한 후 마산창 주변과 수성동 일.. 2014. 4.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7)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의 ‘사정(査定) 당시 원마산의 토지등급’에 이은 글입니다. 2) 1933년 당시 마산의 각 동(洞)의 토지가격 (원본에는 동(洞)이 아니고 정(町)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편의를 위해 동(洞)으로 고쳤습니다) 당시 마산 시가지 내 토지가격을 기록해 놓은 자료로는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에서 1932년 간행한 『鄕土の硏究』와 마산교육회가 1933년 간행한 『鄕土の調査』라는 두 문헌입니다. 이 책에서 1932년 기준으로 한 마산 각 정(町)과 동(洞)의 토지가격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문헌은 모두 당시 마산공립보통학교의 교장이던 일본인 上原 榮에 의해 편집된 것입니다. 발행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과 편집자가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보통학교와 마산교육회에서 간행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자의 .. 2014. 3. 3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까지는 ‘토지이용’에 대한 추정을 각종 문헌과 사진(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과 도시공간·소유상태(나. 도시공간·소유상태를 통한 추정)을 이용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토지의 가격을 통한 추정 방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시가지 내 토지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토지의 상업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의 토지가격을 알게 되면 비교적 정확하게 당해 지역의 토지이용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1) 사정(査定) 당시 원마산의 토지등급 필자가 작성한 1912년 당시 원마산 토지이용도에 나타나는 1,157필지의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사정토지대장 중 남성동1번지의 사본입니다. 확인 후에는 각 토지를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 2014. 3.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5) - 강점제3시기 지난 회까지는 ‘토지이용’에 대한 추정을 각종 문헌과 사진(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을 이용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도시의 공간구조와 소유상태를 통해 추정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도시공간·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1) 도시공간구조를 통한 추정 도시공간구조를 통한 추정이란 도로의 상태, 즉 도로의 폭․형태․위치 등과 해안 선 상태 및 철도역과 인접지역과의 관계 등을 통한 접근입니다. 문자나 그림 등 구체적인 근거를 이용하지 않고 도시공간구조의 다양한 상황을 통해 토지이용상태를 추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분석 방법은 매우 자의적일 수 있지만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이나 도시 각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는 각 필지의 토지 기능과 종합하여 사용한다면 자료로서 일정한 정도의 .. 2014. 3.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4) - 강점제3시기 3) 다섯 문헌에 나타나는 동(洞)별 개체 건물용도 여기서 말하는 다섯 문헌은 馬山市史, 馬山商工會議所百年史, 馬山と鎭海灣, 馬山案內, 경상남도통계연보 등을 말합니다 이 다섯 문헌을 분석대상으로 선택한 기준은 타 문헌에 비해 필요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타의 다른 기준은 없었습니다. 각 시기의 필지별 건물 용도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마산관련 각종 문헌에 단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개하는 문헌의 성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건물의 양에서 우선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시기별 용도에 대한 구분이 되지 않아 중복이 되거나 부정확 혹은 누락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자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이 통계가 당.. 2014. 3.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3) - 강점제3시기 지난 주 포스팅한 ‘각종 문헌에 나타난 토지 이용’에 이어 오늘은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을 해보겠습니다. 2) 사진 및 관련 자료를 통한 추정 각 시기의 도로구조와 중요건축물의 위치는 지금까지 제시한 지도 38점과 각 시기의 시설물 설명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 외에 당시의 도시현황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소개한 그림자료 중 토지이용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6점의 사진과 지도 2매를 통하여 당시의 현황을 추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1 2. 사진 「1910년 경 원마산 건염어점(乾鹽魚店)」전경 2 두 사진은 합방 직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좁은 길을 따라 초가지붕의 상점들이 조밀하게.. 2014. 3.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2)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이란 도시 내 각 지역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용도지역 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지나간 시기의 토지이용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가지 범역을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토지이용과 건물에 관한 자료가 없으면 입증이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자료를 찾아 도시 전체의 토지이용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각종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의 일편들을 총 망라하는 등 현 상황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가.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나. 공간구조․소유상태를 통한 추정 다. 토지가격에 의한 추정 의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접근해보도록 하는데 이 글에서는 ① 문헌과 사진에 나타난 토지이용 중 .. 2014. 2.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1) - 강점제3시기 원마산의 도로는 1910년까지 자연발생적 세도 밖에 없었으나 1910년대 들어서 근대식 도로가 격자형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해안에 매립도 시행되어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도시구조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은 매립을 하면서 조성된 도로와 자연취락 내에 신설된 도로의 축(軸)이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로 상이하였습니다. 도로망의 패턴이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 발달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로를 확장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또한 초기의 도로망에 비해 후기에 갈수록 도로망 개설 영역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강점 말기에는 기존 원마산 시가지 전체가 격자형 도로망 구역 내의 영역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해안의 매립지는 직사각형 격자형 도로망이 뚜렷이 그 형태를.. 2014. 2.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0) - 강점제3시기 지난 글에 이어 도로망패턴에 대한 내용입니다. 2) 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 강점 제1시기인 1910년대 초기에는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가 약 15m 폭으로 준공되었으며 이 무렵 진주가도의 확장공사도 완료되어 두 도로가 연결되었습니다.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중심가로는 원마산의 시가지 한복판까지 이어졌고 때를 맞춰 원마산에 다수의 근대식 격자형도로가 개설되었고, 이 도로는 남성동 매립지의 격자형 도로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최초로 신마산과 원마산을 연결하는 근대식 중심가로와 두 시가지에 격자형의 도로망이 개설되어 도시의 도로망 패턴이 근대적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계획된 신마산과 달리 원마산의 도로망은 격자 체계가 명쾌하게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2014. 2.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9) - 강점제3시기 도시는 교통망, 즉 도로를 중심으로 배치․형성되며 이들 도로의 얽힘 상태를 일컫는 것이 바로「도로망 패턴」입니다. 도시의 형태 구성은 크게 방형상형(方形狀型)․대상형(帶狀型)․방사환상형(放射環狀型)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들 세 가지 도시의 도로망 구성을 보면 방형상형은 격자(格子)와 장방형(長方形), 대상형은 선상(線狀), 방사환상형은 방사동심원형(放射同心圓形)입니다. 다음 그림은 현대도시계획의 선구자로 불려지는 소리아 이 마타 (Soria Y. Mata)가 1882년 제안한 선상도시입니다. 도시의 형태가 특정한 양식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그 도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성인(成因) 및 입지조건이 작용합니다. 특히 자연조건은 도시형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느 요소보다도 능동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 2014. 2.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8) - 강점기 정리 강점기 동안 있었던 마산의 도시변화 중 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개항기 원마산의 시가지 범역 규모는 약 0.19㎢였고 이는 1910년 합방기까지 변화가 없었습니다. 1910년대 들어서 경제적 잉여를 목적으로 시행된 남성동의 매립과 구마산․북마산 두 역의 발달로 인해 유통이 활발해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가지가 확산되었는데 이미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자연취락까지 연결될 정도의 확산양상을 보여 1930년에는 0.9㎢로 약 470%나 확장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 이후부터 확산의 강도와 속도가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원인은 산업의 발달에 따른 도시인구의 증가와 철도역으로 인한 인근지역과의 교류 때문이었습니다. 확산의 방향은 원마산의 자연적 조건(원마산을 지형적으로 보면 남쪽 신마산 방.. 2014. 1.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7) - 강점기 정리 1) 인구변화 추이 개항부터 해방까지의 마산인구 변화를 그래프로 정리한 것이 다음 표입니다. 개항 초기에 1만여 명이었던 마산의 인구는 합방기에 1만 6천여 명이 되었는데 이 중 일본인이 6천여 명이었고 한국인은 1만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10여 년 동안 마산의 전체 인구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폐항으로 인해 일본인이 2천여 명 정도 줄었으나 한국인은 2천여 명 정도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마산의 인구는 약 1만여 명이 늘어나 2만 6천여 명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의 숫자도 늘어나 다시 5천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한국인도 2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이런 인구 증가 현상은 회사령 폐지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시가지의 확산과 토지이용구조의 변화.. 2014.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