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595

김형윤의 <마산야화> - 49. 공동우물 순역 49. 공동 우물 순역(巡歷) 마산은 옛날부터 산수가 좋아 술맛을 가로되 제호미(醍醐味,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고급음료)라는 정평이 있다. 이것은 오로지 양조장 경영주의 인격이라 할 수 있으며, 술을 빚는 杜氏(두씨 상용일어)의 심오한 기술이기도 하지만 근본을 따져보면 이 지방의 물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산 전체를 감싸돌고 있는 두척산(일인이 명명한 무학산)의 청정한 지하수가 혹서(酷暑)에 한랭하고 심동(深冬)에 미온(微溫)하여 과연 이곳의 모든 서민(棲民)의 생활 주변이 이웃과 돈목(敦睦)하여 상호부조하는 정신이 구현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고을의 식수가 나쁘면 인심도 거칠다는 것은 즉 물이 나쁘면 모든 양조장, 간장, 된장 특히 술이 나쁘게 되는 것이며 술이 나쁘면 음주자의 주벽.. 2015. 10. 5.
김형윤의 <마산야화> - 48, 일류 요정들 48. 일류 요정들 국치병합 전만해도 요정이란 이름은 없고 오직 점잖은 측에서 한담이다 혹은 밀담을 하려면 소위 들어앉은 집이란 곳을 찾는다. 그런 곳은 거의 은군자(隱君子)나 노기(老妓)라는 중년층 여자가 손님을 영접하고 손님의 청에 의해서 기녀를 불러 주효(酒肴)를 벌이며 여기에 북, 장고, 가야금, 거문고 등이 따른다. 말하자면 매우 우아한 현상이다. 차차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화류의 격조가 저질로 흐르기 시작했다. 인육을 현금과 직접 거래하는 청루(靑樓)가 생기고, 게다가 격을 조금 올린 니마이모찌(이중이란 말인데 연회장 작부도 되고 매춘도 할 수 있다는 의미) 감찰제도도 있었다. 이것은 기녀의 자유 여하로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권번이니 조합으로 일본 화류계 풍습이 반도 산하.. 2015. 9.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46. 보천교, 47. 김차랑 문고 46. 보천교(普天敎) 중성동 내에 소재(번지 미상)한 2층 목조건물은 전대미문의 총각회 사건으로 한때 전국적 화재가 되었지만 총각회 변고로 집 주인은 어디로인가 가버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비어있던 이 집에는 회색 도복에 행근을 찬 상투쟁이들이 날이 갈수록 삼삼오오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대체 이들 3,40명 되는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하여 이런 차림의 사람들을 처음 보는 동네 어른 아니 할 것 없이 의아그럽고 기이하게도 여겨 구경꾼들이 뜰 안으로 붐비었다. 말하자면 장꾼보다 풍각쟁이가 많았다. 지식층은 대개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보천교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유사 종교의 교도들이다. 이 교의 요술에 걸려들면 깍가쟁이(삭발) 신사로 자처하던 자도 양모자발구식(養毛仔髮舊式).. 2015. 9.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44. 마산의 풍물첩, 45. 국어상용의 가 44. 마산의 풍물첩(風物帖) 풍신제 정월 대보름이 논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가고 정월 그믐날 밤이 오면 내일은 영등제(靈登祭)-속언에 바람 올리는 날이라 하여 각 가정의 규수들은 깨끗한 그릇을 가지고 인근 공동샘에서 정화수와 사람 발에 밟히지 않은 황토를 치마폭에 싸가지고 와서 주방 선반, 붉은 베조각 앞에 촛불을 켜고 정화수와 황토를 얹어놓고 별도로 술과 음식을 베풀어 그 해 풍년을 비는 것을 말해서 풍신제라고 한다. 이들 처녀들이 정성 모아 길어오는 정화수에다 마을의 짓궂은 머슴애들이 불결한 손이나 픍을 길어서 순진한 처녀들을 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여기 이들 처녀애들이 길어오는 물은 은상이샘, 수통골샘, 통샘, 광대바위샘, 자산동샘, 그 외 깔방샘 등이었다. 단오절 오월 단오절은 시내 놀이터로.. 2015. 9.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43. 방앗간 43. 방앗간 지금은 모든 것이 기계화하여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옛날 우리 가정의 일상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루 세 끼의 식생활 중에서도 주부들의 고통의 하나는 쌀과 보리를 찧는 일이었다. 절구통(石造, 木造)이 가정마다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웃집이 아니면 삯방앗간을 이용해야만 했다. 방앗간의 종류는 마산의 경우 전(前) 삼성의원 앞집에 쇠방앗간이 있었는데, 방아의 윗돌은 미끄럽고 대석(臺石)은 거친 요철(凹凸)형으로 깎아놓은 위에다가 보리 도는 벼를 깔아 놓은 원형의 절구 둘레를 소가 돌아가면서 찧게 되어 있었다. 다음은 남성동 천주교회 근처에 디딜방아(足踏式)가 있었는데, 중후한 목조로서 절굿대는 Y자형이며 천장에 달린 두 개의 줄을 잡고 두 사람이 밟도록 되어 있다. 또 완월.. 2015. 9.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41. 투우대회 42. 신 각설이 타령 41. 투우(鬪牛)대회 마산 명물의 한 행사로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북으로 근주석전(近珠石田, 봉화재)에서부터 남으로 남성동 주재소를 동서로 기준하여 색전(索戰)대회를 행했다고 한 것은 별도로 소개한 바 있거니와, 8월 추석 때에는 근교 농촌에서 몰아오는 목우(牧牛)를 대소비왜(大小肥矮)로 감정 신사에 따라 갑을병종으로 구분하였다. 광장에서 투우대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는 이것 역시 이곳의 전통적인 놀이가 되어온 것이다. 여기에 출전한 최강의 투우로써 아직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소는 속칭 손(孫) 감찰집 소와 정경팔 집 소, 그리고 김선집 집 소의 3强豪(강호). 이들의 실력과 교묘한 투기는 참으로 막상막하로 시간이 갈수록 전연 피로함도 후퇴함도 없이 때로는 일몰 관계로 무승부 판정이 되기.. 2015. 8. 31.
김형윤의 <마산야화> - 39. 미기 인기대회 40. 축산여담 39. 미기(美妓) 인기대회 1917년 초하(初夏) 지방신문 일문(日文) 남선일보사(南鮮日報社) 주최 재마산 현역 예기(藝妓) 인기투표 대회가 있었다. 물론 투표로 결정하는 것인데, 투표용지는 관제엽서에다 1매 1인으로 제한한바 그것은 당연한 절차요 상식이다. 처음 발표에는 신마산에 산재한 망월루, 탄월 등의 일본 예기들이 판을 쳤으나 1, 2일 뒤에는 구마산에 있는 모 권번 재적자인 배학희가 경쟁을 물리치고 단독 등장, 조선 예기의 후보자가 되었고 일인 예기 후보 3명도 도중에 낙오되어 구마산 대 신마산, 조선인 대 일본인으로 획연히 대립, 매일 신문 발표를 보면 막상막하, 보는 자로 하여금 가슴을 졸이게 한 것은 요사이의 선거운동과는 근본 유추가 현저하게 달라서 여기에도 민족적 흥분을 일게 하였던 것.. 2015. 8. 24.
김형윤의 <마산야화> - 37. 산왕대신, 38. 세 가지의 기형상 37. 산왕대신(山王大神) 구마산 추산동 공신당산(公神堂山) 산정직하(山頂直下)에는 거대한 고목이 있고 그 고목 밑에 산제당(山祭堂)이라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약 2,3백년쯤 될 것이라고한 고로(古老)들 말이 기억된다. 이곳은 부녀자들이 장수식재(長壽息災)를 산신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무당들의 돈벌이에 가장 적지라고 했다. 대개 보면 제당(祭堂) 밑 조그마한 정화수 옆에서 제(祭)에 필요한 재료를 요리하는데, 솥은 흙으로 만든 지괴솥을 사용하며 제 올리기 전에 제 나이대로 대잎(竹葉)을 따서 제단 앞에 놓고는, 무당의 지시대로 몇 번이고 예배를 올림으로써 복을 받으며, 화를 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 왔던 것인데 뜻밖에도 수성동에 거주하는.. 2015. 8. 17.
김형윤의 <마산야화> - 36. 줄다리기 36. 줄다리기 정월 대보름날, 마산의 자랑일 수 있는 행사는 부산과 마산의 줄다리기(색전, 索戰)라고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은 줄다리기가 끝나기만 하면 으레 불상사를 야기시킴으로써 중간에 와서 당국이 중지 시켰으나 마산 같은 소도시로서는 그런 일이 시종 없었다. 줄다리기 시초는 동부 소년과 서부 소년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시작하여 구마산 우편국 앞길이 신작로로서는 그 위치가 줄다리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으므로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해가 지난 뒤 바다가 매축되어 공지가 1만2천 평이나 되었으므로 이곳에서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졌다. 제1차로 하목(夏目)이라는 일인 미곡 창고(현재 尙存, 지금은 없어짐)가 들어섰을 뿐 대중을 수용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곳이었다. 대규모의 색전장.. 2015. 8. 1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4. 음료수, 35. 사기점의 약수 34. 음료수 음료수라고 하면 물론 인류가 상용하는 식수를 제외할 수 없지만, 여기에 특히 음료수라 칭함은 화학적으로 감미료를 가미해서 인체에 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설탕에 주석산(酒石酸)과 소다 등을 배합해서 만드는 사이다를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다. 사이다가 일본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히라노스이(平野水)라 했고, 이것과 전후해서 나온 것이 미깡스이(蜜柑水)와 라무네가 각광을 뽐냈다. 미깡스이는 밀감의 즙을 낸 것이며 지금은 믹서를 가진 가정에서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라무네라는 것은 레이몬 혹은 레몬(梠檬)이라는 것을 일인들의 발음이 오전(誤傳)된 것인데 근자에는 그 종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과거에는 일본서 박재(舶載)하거나 부산서 가져오다가 신마산 헌병분견대 이웃에 살던 일본인.. 2015. 8. 3.
김형윤의 <마산야화> - 33. 마산 명주 33. 명주(銘酒) 마산의 미각이라면 으레 술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이 명주(銘酒)를 양조하는 두(杜) 씨의 비법도 비법이려니와 우선 마산의 물이 좋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흘러가는 냇물이나 공동정수까지 감로수하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마산근교의 감천리(甘泉里)에 세차게 흘러내리는 냇물로써 술을 빚어놓은 탁주 맛은 흡사 청량사이다 맛이다. 완월 폭포수 역시 수세가 거창해서 기관차에 그 물을 넣으면 오르막길도 능률을 올린다고 한다. 공동우물 중에도 광대바위 샘물(통칭 몽고정), 구 형무소 앞 통샘물 그리고 지금은 매몰된 성호초등학교 샘물은 1911년 조선총독부의 기술원들이 수질 검사를 한 결과 가장 우수하다고 발표한 일이 있다. 이 물은 형무소 재소자들의 음료수로서 상용(常用)하였고, 몽고정 물.. 2015. 7.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32. 벚꽃 32. 벚꽃 마산의 자랑으로서 벚꽃을 뺄 수 없다. 더욱 밤의 벚꽃 말이다. 타지방의 벚꽃나무 위치를 살펴보건대, 대개가 내(川)를 끼지 않은 평지로서 진해가 그렇고, 서울 근교의 우이동 같은 곳도 그러하며, 창경원이나 진해 해군 통제부 영내의 벚꽃 터널도 또한 평지다. 이런 곳들에 비하면 마산은 신마산 경교교반(京橋橋畔)을 중심한 천변양안(川邊兩岸)에 즐비한 벚꽃나무와 장군천 양안(兩岸) 및 마산 신사 앞 급경사 진 표리삼도(表裏參道 /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원문 그대로 옮긴다)의 벚꽃나무들은 4월 중순경이면 만개된다. 이 외에 마산 중포병대대 영내 전역과 마산 부청(창원군청, 지금의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내와 부윤관사(마산시립 보육원, 지금의 마산종합사회복지관) 주변 등에 하루밤 사이의 기온에 .. 2015. 7.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1. 마산의 미각 31. 마산의 미각 지금은 경향 각지에서 ‘곰탕’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옛날엔 생활이 윤택한 가정에서만 끓여 먹을 수 있었다. 마산엔 구 삼성(三省)병원 뒤에 박복년이라는 이가 곰탕장수를 시작한 게 그 원조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집의 곰탕은 유명했지만 곁들여 깍두기의 맛 또한 구미를 돋구었다. 이관용(瓘瑢) 박사가 이 집 곰탕과 깍두기 맛을 본 뒤로는 지방순회 강연으로 영남방면에 올 때면 백사(百事)를 젖혀놓고서라도 복년네 집 곰탕을 먹고 가야만 맘이 후련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재직 시에 점심시간만 되면 사원들은 마산 복년네집 곰탕의 예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 복년네집 다음으로 현재 구외과(具外科) 자리에 김성일 유기점에서 그 집 부인 경련 여사의 곰탕과 비빔밥도 또한 호평이었다. 또 박병주 .. 2015. 7.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29. 면·마포상들, 30- 마산인구의 추세 29. 면·마포상(綿·麻布商)들 마산 시내의 외래 면포와 마포 도·소매상들은 대부분이 현재의 부림동과 남성동에 집중해 있었는데 청국인 상점의 상호로는 원생호(源生號), 취성호(聚星號), 덕성호(德盛號), 서상호(瑞祥號), 동성호(東盛號) 등 다섯 개가 있었으며 일본인의 그것은 길전상점(吉田商店), 고직상점(谷直商店), 전중상점(田中商店) 등이고 한인으로서는 남사겸(南士兼), 이기일 등이 있었다. 한국 토산품인 저(苧 / 모시), 마포(麻布) 도매상으로는 이순길, 강창언 등이 손꼽을 만했다. 그 외는 군소 소매상들인데 거의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뺄 수 없는 필수품들을 취급했다. 황화(荒貨) 즉 동래 자주(東萊 紫紬), 상주 자주(尙州 紫紬)는 국내에서 굴지의 염색물이며 그 외 한산세모시, 남해 모시, 북포(.. 2015. 7. 6.
김형윤의 <마산야화> - 27. 미잠수정 출몰, 28. 조언 단속법 27. 미잠수정(美潛水艇) 출몰 1941년 일본의 대미 선전포고를 며칠 앞둔 12월 모 일, 청진과 일본 쯔루카(敦賀) 사이의 정기 연락선 게히마루(氣比丸)가 청진 출항 얼마 후 로영(露領) 블라디보스톡에서 부설하였던 기뢰(機雷)에 접촉 침몰하여 승객 백수 십 명이 몰살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사이라 하여 한 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소련 역시 반구의 진사(陳謝)도 없이 이렁저렁 끝맺고 말았다. 이 배의 승객 중에 경도제대의 철학과 일본인 학생이 있었는데, 당시 대판 조일신문에 게재 소개된 그의 수기인 즉 ‘생과 사는 표리가 동일하다’는 내용인바, 배는 해저로 내려가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종용(從容)히 최후를 마친 그의 유서였었다. 이 해상 사고 후 일본 철도성.. 2015. 6.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 2015. 6.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23. 203고지의 거포, 24. 돝섬의 위장 적기 23. 203고지의 거포(巨砲) 마산 신사(현 제일여중·고) 정문 앞 공지에 녹슨 대포 일문(一門)이 거치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해방된 몇해 안가서 포대와 동시에 흔적이 없다. 이 대포는 1904년에 발발한 일로(日露)전쟁시 일본 최고의 군벌인 대산(大山), 내목(乃木) 등 원수급에 의하여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 군함으로 여순항에 인양하여 격전장이던 203고지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마산만 입구이며 중포병 대대 입구 까치나루(鵲津) 산정에 두었다가 1935년 대대장이던 굴구중좌(掘口中佐)가 마산부에 기증하였던 바, 부 당국은 이것을 전기 장소에 이전 거치함으로써 마산만을 일모(一眸)에 보고 일본의 군국주의 사상을 환기했던 것인데, 그대로 보존해 두어서 하등 해될 것도.. 2015. 6.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22. 철도 이야기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마산에 간판 많기로 이름난 점포는 신마산 함흥집 자리의 석견옥(石見屋)이라는 신약 도매상이었다. 간판을 보면 대학목약(大學目藥), 미안수(美顔水) 하루나, 대전위약(大田胃藥) 등을 비롯하여 장방형의 작은 간판이 20여 개나 되었는데, 제내과(諸內科) 자리 건너편 3층 건물로 신축 이전 후에는 없어졌고, 본래 점포에는 ‘고마야’라는 상호의 오복점(吳服店)이 들어 앉았다. 몇해 후에는 민의소 건너편에, 즉 지금의 중앙병원 자리에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와 조선일보 지국이 자리잡고 난 뒤로는 대소 간판이 십 수개가 붙었는데 기억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노농문고(서적 대부분이 ML당원 김형두의 장서), 무산자신문(日共의 佐野學 主宰), 민중신문(일본의 赤松克磨 주간), 혜성사진(彗星社進.. 2015. 6.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9. 풀먹은 총순, 20. 쌍사슴표 성냥 19. 풀(糊) 먹은 총순(總巡) 마산 본주민으로 우리가 유시(幼時)부터 알기로는 총순(總巡)이라 칭하는 사람이 두 분인데, 한 분은 한부성 친부(親父)인 한총순과 정성호 친부(親父)인 정총순이다. 그런데 확실히 기억 안 되나 한성(서울) 경무국에서 출장 온 총순 한 분이 마산경무청(위치=현 구마산 오처탕 위의 공설시장) 청사(廳使 / 使童)에게 위장이 좋지 못하다 하여 밥을 먹을 수 없으니 미음을 끓여오라 하였다. 총순은 출발 차시간이 급박하였다. 명령을 받은 김응도(故)는 번개 같은 꾀가 났다. 그때는 다 엽전을 쓰던 때다. 엽전 두 푼(百푼이 일원)어치의 풀(糊-그때 풀은 쌀임)에다 설탕을 섞어서 끓여다 진상하였더니 총순 어른은 풀인 줄이야 알 턱 없이 신속하고 맛이 좋게 끓였다 하여 사환 김응도에.. 2015. 6.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7. 요사한 유학생들, 18. 바산을 마산으로 17. 요사(夭死)한 유학생들 마산 학생으로서 청운의 대지(大志)를 품고 급(笈)을 지고 동양의 신문화 도시 동경에서 유학 중 제4기쯤 될까? 재학생으로 이역에서 요절한 학생은 황갑주 2남 황희찬이다. 황은 경응의숙(慶應義塾) 대학생으로 하기 방학 때면 유학생 야구단의 1루수로서 활약한 바 있었는데 악성면정(惡性面疔)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사망한 것을 필두로, 명치대학 전문부 법과생 옥용환은 급성 맹장염으로 역시 동경 우거(寓居)에서 사망, 경응의숙대학의 김창재, 산구고상(山口高商)의 강우정, 그리고 중앙대학 법과의 구연혁은 식중독으로, 조도전(早稻田)대학 특대생 이상수는 장질부사로 사망하여 한때는 동경 유학을 주저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모두 수재들로서 국가 장래를 촉망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애석하기 이.. 2015. 5.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6. 공중욕탕 16. 공중욕탕 60여년 전 인구 2만을 넘지 못했을 때 신·구마산의 공중 욕탕을 손꼽으면 신마산 일인촌에 불로탕(不老湯), 앵탕(櫻湯), 구마산에 상반탕(常盤湯), 명호탕(鳴戶湯), 오동동에 조선인이 경영하던 곳이 고작이었다. 40여 년 전에는(구마산의 3개 탕은 폐업) 오처탕(吾妻湯), 오동동 입구 오동탕(午東湯) 그리고 현재 청락탕 자리(마분'馬糞'저장소)에 웅천 사람이 탕업을 차린 조일탕, 남성동 매립지에 소금탕, 현 철도 PX 이웃에 일인이 경영하던 곳과 철도 합숙과 기관구에 직원용의 큰 욕탕은 현재도 있다. 공동탕의 입욕료는 대인 5전, 소아는 3전에서 1전 5리까지며 월정을 하고 매일하는 사람은 1월 5전으로 4, 5전의 덕을 보게 되며 이웃 사람에게는 온정을 베풀어 무료 제공인바, 이것은 .. 2015. 5.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 B29의 맹위, 15. 학병의 출진 14. B29의 맹위 그라만 함재기가 수십편대로 동경 천지를 저공으로 전주 사이를 날아다니며 곡예식으로 맹습한 것은 일본이 진주만을 암타(暗打)한 131일만인 1942년 4월 18일인데, 그로부터 오랜 침묵을 지켜오던 연합군 측의 소위 대공의 요새라는 B29기가 행동을 개시한 것은 1940년으로서 중국 성도에서 이륙, 마산의 무학산정을 거쳐 천자봉을 경과, 일로(一路) 일본 본토를 진공하였는데 처음 마산 상공에 나타난 것은 한여름 오후 9시경. 어스름 달밤에 가는 비가 내렸다. 이로부터 한반도 상공으로 B29기가 통과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이것들이 통과하고 나면 일본 각 도시는 소이탄(燒夷彈)과 폭격으로 날로 초토와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국은 무사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 다소의 피해가 있었으니 마.. 2015. 5.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 중학교유의 익사 13. 민족의 제전 상영금지 12. 중학교유(中學敎諭)의 익사 마산 공설해수욕장은 원산의 명사십리에 못지 않는 곳이다. 물결이 잔잔하면서 차지 않고 멀리까지 얕았으며 깔려있는 모래가 깨끗하고 해변은 철도공지에 창창한 송립이 쭉 늘어져서 문자 그대로 백사청송(白沙靑松)의 경치였던 것이다. 매년 7월 13일에 개장이 되면 각 지방의 피서객과 수영 훈련차 학생단체 등이 쇄도한다. 이 학생 훈련생들은 연중 정례로 오는데 2,3년 계속하여 온 학교 중에는 대구 의전생(醫專生)과 대구 중학생은 수영 감독 겸 지도하는 선생이 인솔하였다. 1928년(소화3년)경에 십수 명의 대구 중학생 중 두 명이 수영을 하다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인솔 선생이 무아무중(無我無中)으로 뛰어들어 난을 면케 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으나 구제해 준 선생은 심장마비.. 2015. 5.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 양악대 11, 감전사 제1호 10. 양악대(洋樂隊) 마산부내에 양악대가 시초된 것은 1911년 전후라고 기억되는데 현재 신마산에 자리잡고 있는 마산극장 위편 모 상점 자리에 일본인이 경영한 안부(安部)양복점이 있었다. 여기에 악기를 일본에서 구입하여 활동사진이나 일본 연극단체의 선전으로 신·구마산을 일주하면서 점원들의 후생사업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서 마산 사립 창신학교에도 7인조 양악기를 구입하여 고등과 학생에 한해 연습케 하였는데 총지휘자는 안부(安部)양복점 주인과 직공 몇 사람이었고, 교습을 받은 생도들은 박군현(팔룡), 김인숙, 황장오, 김필석, 김영근, 박성우, 최사규, 김정기, 김상기, 강을렬, 박진우 등 제씨로 기억된다. 이들 창신학교 학생 밴드대는 교내 춘추 대운동회 때는 취악(吹樂)을 하여 선수 .. 2015. 4.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8. 말띠 여성의 수난 9. 극장 순례 8. 말띠 여성의 미신 본시 우리 민족 간에는 없던 미신 하나가 이 땅의 여성계에 정착했으니 말띠 여성의 숙명론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미신인데, 그 근원을 캐어보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일본 여성들이 크게 기(忌)하는 이 ‘말띠’는 ‘병오생(丙午生)’에 한한 것이지 다른 말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 병오생의 처녀가 시집을 가면 신랑을 잡아먹든지 아니면 결혼 얼마되지 않아서 상부(喪夫)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숙명론이 퍼지게 된 근원을 캐어보면 이러하다. 일본 강호(江戶, 지금의 동경)의 한 반찬 가게 집에 오시찌(於七)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방화범이 되어 강호(江戶)의 군데 군데에 불을 질러 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오시찌가 병오생이었는 데서 미신의.. 2015. 4.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 인단과 유성기 7. 창가 6. 인단(仁丹)과 유성기 일본 대판에 제조공장과 본점을 둔 국내 향료로서 발매된 ‘仁丹’은 경영을 ‘森下 博’이 처음에 근소한 자금으로 시작한 것이 의외에도 동남아와 조선은 물론 얼마 안가서 만몽(滿蒙) 전역에까지 판매망을 석권하였다. 초기에는 글자 그대로 녹두만한 크기에 붉은 색이며 백립(百粒)에 10전이었다. 이것을 집시풍의 일본인들이 이 나라에 돌아다니며 가두 선전은 않고 밤을 이용하여 각 가정을 방문코 유성기(축음기)를 틀어 손님을 모은다. 음반은 조선인으로 제일 먼저 취임했다는 박춘재 재담에 몇 종의 조선노래를 틀어서 이런 신기한 것을 처음 듣는 중년 남녀의 마음을 흥겹게 한 뒤에 본격적으로 거짓말 투성이의 효능을 시부렁거린다. 두통, 치통, 위장병, 신경통, 피로 회복, 악역(惡疫) 예방 등.. 2015. 4.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4. 선교사의 박애심 5. 사기 비행사 4. 선교사의 박애심 앞(지난 주)에서 말한 도변(渡邊)이란 포주의 창녀 최모 양이 포주와 항쟁하여 자신이 해방되기 12년 전의 얘기다. 역시 같은 동네에 명월루(明月樓)라는 유곽이 있었는데, 이 포주는 명치 41년 경에 구마산 서성동(町名 시행 전) 해변에 목조 2층을 짓고 일본에서 창기(娼妓)를 모집해 온 젊은 청년으로서 이름을 길천(吉川)이라 하였다. 이 길천이는 불시에 화재를 당하여 유곽을 날려버리고 다시 남성동에다가 덩그렇게 2층 화식(和式) 건물을 지어 창녀업을 운영해왔으나 이번에는 부채로 실패,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격으로 이번에는 다시 수성동에 규모를 축소, 목조 단충으로 소자본에 알맞게 가난한 농촌 여식들을 싸게 사서 운영을 해보니 과연 지출은 적고 수입은 느는 편이었으며 이곳을 찾아오.. 2015. 4. 6.
김형윤의 <마산야화> - 2. 변태성 고리업자, 3. 포주의 횡포 2. 변태성 고리업자 시내 서성동(幸町) 일인 간수(看守)부락에 천기(川崎) 모(某)라는 60대 고리대금 업자가 있었다. 집에는 6개월 혹은 길면 1년마다 젊은 여자가 교체된다. 직업은 조선인을 상대하는 고리대금업이다. 일본 은어(隱語)로 고리업이나 창기업(娼妓業) 혹은 호색자(好色者)를 시계의 4시 40분 혹은 8시 20분이라 하여 위의 눈꺼풀이 좌우로 처진 때문에 그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천기(川崎)의 눈도 그러하였다. 피부 빛깔은 검붉어서 고리업자로서 일목(一目) 직감된다. 고리업자나 전당업자는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음음(陰陰)함은 상통하여 채무자가 기일을 어길 때는 인정사정 헤아리지 않고 즉각 법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천기(川崎)의 경우는 다르다. 채무자가 이자나 원금을 환.. 2015. 3.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 수전노 2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 이야기,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馬山野話』를 포스팅하겠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수록되어있어서 이 도시의 한 시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판본은 목발 선생이 돌아가신(1973. 8. 7 작고) 후인 1973년 말에 출판되었고, 재판은 1996년 ‘도서출판 경남’의 수고로 나왔습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원문을 손대지 않아 초판과 재판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글『馬山野話』는 재판본을 그대로 싣는 겁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혹 탈오자가 있으면 바로 잡겠습니다. 글이 모두 141꼭지라 짧으면 1년6개월, 길면 2년 정도 걸릴 분량입니다. 의 .. 2015. 3. 23.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3-마지막 회) - 매립의 도시, 마산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8 매립의 도시, 마산 19세기 말, 동성리(현 동성동)에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항된 해인 1899년 10월, 마산포 조창에 들어있던 창원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항만건설과 매립사업을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에게 15,000량의 공사비를 차용하여 매립공사에 착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1906년 히로시는 김경덕의 매립인허장을 저당 잡을 때 작성한 전집표에 ‘차용금을 갚지 못하면 매립권은 .. 2015.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