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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4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2. 포시의 명 강연 112. ‘포시(布施)’의 명 강연 포시진치(布施辰治)라고 하면 50대 이상의 조신인 사회주의자나 민족운동가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많은 자유주의자 혹은 좌경 변호사 중에도 상촌진(上村進), 산기금조미(山崎今朝彌) 포시(布施) 등은 학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하천풍언(賀川豊彦)을 종교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 보는 것처럼 포시(布施)도 급진 사상가로서 일반은 간주하였다. 사법성과 내무성에서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인데, 일본 공산당 사건의 변론공판 변론 중 당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정부 당국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4년 형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피고인 포시(布施)는 판에 박은 주소, 성명을 묻는 판사에게 무직이라고 하기는 싫었던지 ‘법률 기술자’라고 비꼬아 답변을 해.. 2016. 9. 1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1. 일어 만능 시대 111. 일어 만능 시대 한말 나라 운명이 바야흐로 기울어져 갈 때 일어 열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 몇몇 출판업자들은 재빨리 일어강습 책을 출판했는데 왈(曰) 속수일어독본(速修日語讀本), 일어대성(日語大成), 일어대해(日語大海) 등으로 이름 붙여 도시보다 농촌 서당 출신들이 열독(熱讀)하였고 더벅머리 총각과 유처(有妻) 유자(有子)한 상투쟁이들이 삭발을 하고는 보통학교 상급생으로 전입학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한문 실력자들이라 한문만 가지고는 개명한 사회에 있어 낙오자를 면할 수 없었으므로 신식학교에 들어가서 산술과 일어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보통학교만이라도 졸업하게 되면 면 사무원이나 헌병보조원, 아니면 순사, 철도 역부도 골라서 할 수 있는 판국이요, 조금.. 2016. 9. 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8.첫 맥주 양조장 109.비어홀 110. 일주박래 108. 첫 맥주 양조장 시내 수성동 소재 김동조 이비인후과의원 건물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로 유명한 숭양산인(嵩陽山人) 위암 장지연 선생 우거처이며, 그 전에는 박우길의 소유였으나 또 그 앞에는 맥주 양조장이기도 했다. 규모는 미미하여 얼마만한 양의 양조를 하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밀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맥주 양조를 하는 일방 경성에서 선전 ‘포스터’를 인쇄하여 출입하는 대문과 도로변에도 붙여 선전에 노력도 했으나 자금과 기술 관계인지는 모르나 설치된 미구(未久)에 해산되고 말았다. 109. 비어홀 전 제(諸) 내과의원 천변 건너편에 있는 댄스홀은 대정 초기 경 일본 본전(本田)이란 사람이 최초로 맥주홀을 개점하였다. 입구는 지금 그곳인데 문 앞 간판에는 서양인 선부(船夫) 비슷한 비.. 2016. 8.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 2016. 8.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6. 사립 일어학교 106. 사립 일어학교 마산에 최초로 학교의 명칭이 붙은 것은 신마산 일인 거류지에 있던 심상소학교요, 다음은 구마산 아래학교 정문 건너편에 사립 일어학교이다. 이 학교는 일종의 일어 강습소에 불과하였지만 그 당시 부산에서 개진(開進)학교를 경영하던 일인 시원치랑(柿原治郞)과 그 부인 학길(鶴吉) 부처가 교장직과 주임으로 분담하여 1906년 경에 전기(前記) 학교를 설치하였다. 과목은 일어와 산술이었고, 수업시간은 1년 내지 1년 반이었는데 생도의 본의는 산술보다는 일어습득에 중점을 두었으며, 초기 입학생은 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통영에서는 일인 도변직필(渡邊直弼)이란 자가 일어학교를 설립하고자 부산에서 건축자재를 반입하였다가 조선인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초지(初志)가 좌절되었으며 도변(渡邊)은 그 .. 2016. 8.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923년 1월 당시 동경서 유학한 몇몇 청년 김형두(明大 법과 재학 중, 변호사 시험 합격)를 필두로 손문기, 이주만 등이 연휴(連携)하여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그 해 여름에는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라는 것을 조직 발족하였다. 명칭은 ‘노농’으로 있으나 그 대상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고 부두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자유노동자들로서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최초에는 오월절이란 이름 아래 프랑스를 위시하여 세계 남녀 노동자들은 하루의 행락을 마음껏 즐기는 극히 평화로운 날이었다. 호주 멜본 시에서는 시위 행렬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시장은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였지마는 그 반대로 미주 시카고에서는 헤이 마켓에 이르는 평화시위 군중과 경찰이 충돌함으로써 발포.. 2016. 8.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4. 의례준칙과 헌수 폐지운동 104. 의례준칙과 헌수(獻酬) 폐지운동 1935년(소화 10)에 관혼상재의 간소화와 비용 절양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의례준칙령을 공포한 일이 있다. 헌데 이 영(令)이 공포된 뒤에 부내 만정(萬町, 동성동 / 원본에는 중성동)에 있던 학산의원(鶴山醫院)의 이순필 원장이 영애의 결혼식을 의례준칙대로 거행할 터이니 부 당국에서 와 보라고 하여 그대로 실행해 본 외에는 아무도 실행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안다. 주석(酒席)에서 교배(交杯)하는 풍속은 아마 조선인과 일본인 뿐일 것이다. 친한 벗들과 권커니 잣거니 하여 거나하게 되면 논담풍발(論談風發)로 그날 그날의 삶의 시름을 잠시 털어버리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네 교우상의 멋이었다. 그러나 주석에서 교배(交杯)의 도가 넘쳐 상대방의 주.. 2016. 8.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3. 동경 대진과 마산 학생 103. 동경 대진(大震)과 마산 학생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동경을 중심으로 근기(近畿)기방에 격심한 지진이 일어나서 시 전역은 불바다가 되어 덕천(德川)막부시대의 무장야(武藏野)를 방불케 하였다. 시민들은 불바다 속에서 시내를 관류하는 10여 처의 하천- 그 중에도 오유천(吾嬬川), 우전천(隅田川) 등 물 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지저(地底)에서 뿜어 오르는 열은 용광로와 같이 비자(沸煮)하므로 물에 투신한 수많은 사람은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여기 황혼이 짙어가니 시작할 무렵 누가 조작한 일인지 유언비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돌았다. ‘무정부주의자의 선동에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독약과 폭탄을 가지고 제도(帝都)의 폭파를 서둘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를 전도(顚倒)할 .. 2016. 7.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1. 독립교회의 탄생 102.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101. 독립교회의 탄생 1927년 11월 27일 마산 문창 장로교회에서 벗어나온 교인 일단이 ‘신앙의 자유와 자활적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위적 조직과 제도를 더나 성서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내어 걸고 독립 마산예수교회를 창설했다. 당시 교인 총수는 손덕우 장로를 비롯하여 남녀 200여명, 초대 교역자로는 김산(金山) 목사(중국 남경 금릉대학 출신)를 추대하니 교회 초창기에 희생적인 노력이 많았다. 1928년 11월 2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당시 김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손덕우(장로) 한좌건, 김주봉, 박덕우, 박채우, 김은수, 최종안, 이창우, 최원칙, 유진구, 정대근, 박덕근, 황덕수, 문덕중, 이일래, 서상삼, 설반.. 2016. 7.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0. 미궁에 빠진 대금 도난 사건 100. 미궁에 빠진 대금(大金) 도난 사건 1932년(소화7) 1월 8일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재고금(在庫金) 4백50만원 중 78만원(중량 7관貫 96인刃-두 지게)이 하루밤 사이 감쪽같이 없어진 일로, 조선 내는 물론 만주에까지 수사망을 펼치는 일방 길천(吉川) 경찰서장의 직접 지시로 용의자를 시내에서 탐색 중 의외에도 시내 진정(賑町, 유곽촌-대동강 반각도半角島 우측 소재)에서 송지가(松之家)라는 요정의 포주 좌나전심길(左奈田甚吉) 외 5명이 주 공범으로서 수사 인원 130인, 범행 발생 42시간 만에 타진하였다. 현금 소비 만원을 제하고 77만원을 회수한 사건 후로 각 은행마다 가까운 경찰본서와 파출소에 비상 신호기를 비치한 일이 있었다. 평양사건이 발생한 지 23년만인 1955년 3월 21일에.. 2016. 7.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99. 헌병 사가의 밀주 수색 99. 헌병 사가(私家)의 밀주 수색 1939년(소화 15년) 여름 모일, 마산세무서 주조합(酒組合)에 탁주밀고의 고발 투서가 날아들었다. 여기에 신명이 난 동서(同署)의 직원(1명)과 업자(5명)가 투서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전광석화적(電光石火的) 행동을 개시했다. 상일(常日)에는 세리(稅吏)만이 행동했던 것이나 업자가 5명이나 이에 가담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투서가 날아들면 묵인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요, 또한 투서들이 사실과 틀린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기(躍起)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출동은 차례차례 허탕이었다. 마지막에 손을 댄 곳이 석정(石町, 창동) 상양삼랑(相良三郞, 일본인-편자 주)의 전당포 입구 좌측 두 번째 집이었다. 그들은 이 집에 돌입했다. 딴 집.. 2016. 7.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98. 통주사변의 희생자 98. 통주사변(通州事變)의 희생자 통주사변이라 함은 소화 12년 7월 7일 북경 근교의 노구교(蘆溝橋)서 발발한 중일병(中日兵) 충돌사건의 한 개의 부산물적 비극을 말함이다. 발생 연월일이 기억되지 않으나 통주시내에 우거(寓居)나 거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준전시(準戰時) 중 중국병이 야반(夜半)과 미명에 걸쳐서 전격적으로 무차별 대학살을 행한 참상을 말하는 것인바, 그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중국의 군인 혹은 비적(匪賊)이라고 했는데, 종전 후 일본의 전문가들의 진상조사 저서를 보면, 중국군이 단순한 일본인(조선인도 포함)들의 증오감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나라에서 야간 군사훈련이란 명목으로 도전 행동을 감행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그늘에서 중국인들에게 방약무인 행동을 한 자에 대한 분격이 폭발, 말하.. 2016. 6.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97. 탄산가스 소동 97. 탄산가스 소동 마산의 도로 연혁이 별로 없으니 상보(詳報)는 어려우나 부림시장에서 서성동 내림길 일대에는 수백년을 헤아리는 고목들이 가히 천일(天日)을 가릴만치 울밀(鬱密)하여 이곳을 숲골(林谷)이라 불렀고, 또는 서림(西林)이라고도 하여 지금 이한철(李翰喆) 치과의원 아랫집 터에 보통학교 생도들의 복습방이 있어 그 이름을 ‘서촌숙(西村塾)’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신작로를 설치하기 위하여 모든 초부(樵夫)들을 동원하여 그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해서 베어내는 것인데, 그 초부라는 것이 산에 잡목이나 메는 말하자면 졸때기들이어서 고목을 베는 큰 톱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베는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몇 개의 고목을 베는 동안에 초부 수십명이 한꺼.. 2016. 6.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6. 박애의 두 간호원 96. 박애의 두 간호원 현재 마산시 가포동에 있는 국립마산병원은 소위 대동아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 해군 당국에서 상이군인 요양소로 발족한 후로 해방과 함께 오늘에 이르렀다. 이 병원의 위치에 있어서 요양지대로서는 전 동양적이라고 한 독일 의학도로부터 지적당한 곳이다. 전쟁 중반기부터 남방에서 부상한 육·해군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치료하던 곳으로 많은 환자들이 회복소생한 곳이다. 워낙 숫자가 많이 밀려와서 완전한 치료도 해 받기 전에 8·15가 닥쳤다. 한국에 있던 일인들은 ‘세화회(世話會)’의 주선으로 그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곳에 입원환자 역시 목선을 빌려 귀국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이요양소는 원장을 필두로 일인 용원까지 앞을 다투어서 떠난 뒤에 맨 끝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함경북도.. 2016. 6.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95. 엄원도의 일본 의인 95. 엄원도(嚴原島)의 일본 의인(義人)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동경 고학생 중 거의가 무등산치(武藤山治)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는 종연방적회사(鐘淵紡績會社) 경영주인데 사회에 불행한 인물만 있으면 반드시 몇 푼을 등기 우송해 주던 사람이다. 중야(中野)인가 황천약사(荒川藥師)인가 문인(이름은 밝히지 않음) 2, 3인이 백구사(白鷗舍)라는 곳에서 자취생활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름 폭우가 지난 뒤에 백구사(白鷗舍)의 사람들은 한 묘안을 냈다. 즉 조선인 노동자의 합숙소인데 저번 수해로 노동할 길이 없어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무슨 범죄라도 해야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웠다. 인심 잘 쓰는 무등(武藤)은 긴급히 관할 경찰서를 통해 우선 50원을 가지고 임시 구조를 하라고 했다. 현금을 전달하려고 고.. 2016. 6. 6.
김형윤의 <마산야화> - 94. 야까이 일인 도가 어조 94. 야까이 도가(都家) 일인 어조(漁組)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의 조차한 곳이라 해서 대개 한인들은 신마산을 거류지 아니면 조계(租界)라고 하는데, 이곳이 일인들의 생활 중추지점이다. 모든 생활필수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신마산 일인들끼리의 상거래로서 자족한 것이며, 지금 외교구락부라는 다실 근처에 ‘아케트(염매시장 廉賣市場)’를 설치하여 그들끼리의 편리를 꾀하였으며, 신마산 발전소 근방 일대를 매립하기 전까지는 일인들의 생선 도매상이 있었다. 이 일본인 생선 도매상 즉 수산조합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한인 어민들을 ‘세리’에 가지 않고 대부분 구마산 어판장 위탁으로 하고, 이 때문에 일본 어상(漁商)들은 어로 현장에서 직접 매매 계약을 하는 식 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거리의 밤꾸미(栗九味).. 2016. 5.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 2016. 5.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92. 묘락좌의 화재사건 92. 묘락좌(妙樂座) 화재 사건 1931년 3월 10일은 일로(日露) 전쟁에 승전한 육군기념일로 진해 군항에서는 아침부터 축제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읍내에 있는 목조 2층 건물인 영화관 묘락좌(妙樂座)에서는 무료 영화를 공개하는데 조선인을 제외한 일인, 읍민, 군인, 소학생만으로 소위 ‘대입(大入)’ 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한창 상영되어가고 있을 때, 2층 영사실에서 돌연 화재가 일어났다. 그 당시의 필름은 가연성 물질이어서 가끔 인화의 화를 입게 되었으므로 필름을 취급하는 자는 각별히 주의를 했어야 했다. 그날 묘락좌(妙樂座)의 경우를 보면 무료 입장이라 장내는 발디딜 틈이 없었고, 영사 도중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비상구는 물론 출입문까지 꼭 잠가버린 뒤에 “불이야” 소리가 났으니 장내의 소란은 그야.. 2016. 5. 16.
김형윤의 <마산야화> - 91. 제등만의 참사 91. 제등만(齊藤灣)의 참사 진해 해군통제부 앞 부두 있는 곳을 일인들은 제등만(齊藤灣)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성에 죽첨(竹添) 일본공사가 있던 곳을 죽첨정(竹添町), 장곡천정(長谷川町), 마산의 까치나루(작진, 鵲津 - 지금 발전소 있는 곳 / 현 남부터미널)를 일본 귀족원의장 근위(近衛)가 상유(賞遊)한 곳이므로 일인들은 하마(近衛濱)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조선총독(元朝鮮總督) 제등 실(齊藤 實)이 과거 진해 요항부(要港部)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을 인연해서 제등만(齊藤灣)이라 명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후로 일반 민간선박은 일체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통제부 앞 솔섬 사이와 날부리(비봉, 飛鳳) 현동으로 작은 배들은 관통하였다. 1928년 창원-진해선 철도(일본 千葉공병대 병사들.. 2016. 5. 9.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 2016. 5. 2.
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가(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현 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년(명치43년)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某 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89. 제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 2016. 4.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86. 고춧가루 강도, 87. 제2의 헤스마 86. 고춧가루 강도 확실히 1924년 봄이다. 그때만 해도 구마산(元町, 현 남성동) 우편소에서 직접 집배는 물론 적행낭수송(赤行囊輸送)하던 때다. 오전 7시면 먼동이 트이고 모든 물체를 확연히 볼 수 있는 때다. 7시 몇 분에 구마산의 발차시간에 우편직원(全모라 했다)이 행낭과 우편물을 둘러메고 가는데 당시 상업학교 정문 근처에서 별안간 괴이한 청년이 나타나 아무 말 없이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뿌리는 찰나 직원은 쓰러졌다. 세상이 어둡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눈이 따가운데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재채기까지 병발(倂發)하여 상당한 시간 동안 땅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을 겪는 중 역으로 가는 승객들에게 구조되었는데 소중한 적행낭(赤行囊)만 없어지고 말았다. 행낭에는 대소액환 송금증이 들어 있었다는 신고를.. 2016. 4.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4. 105인 사건의 후환, 85. 역장의 폭행 84. 105인 사건의 후환 마산원동회사가 발족하기 훨씬 오래전, 초대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가 북한을 초도 순시할 때의 일이다. 조선인 지사(志士)를 탄압하기 위해 조만식 등 1백 수십 명을 타진하고 사내(寺內)암살 음모라는 모략을 조작했다. 이것을 트집하여 지방에 산재한 열혈지사(熱血志士)까지 마수가 뻗쳐졌던 것이다. 원동회사 사옥 자리에서 학부(대한제국 문교부) 편찬교과서를 판매하던 김지관(서울 출신)에게 뜻하지 않던 한 장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발행국 소인은 불명한 것이나 내용을 약기(略記)하면 ‘3년 전에 우리의 원수이며 한국민의 대적인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죽였으니 이번엔 사내(寺內)라는 흉적을 처치해야 안되겠냐? 이 글월을 받는 즉시 때를 잃지 말고 거사준비를 하라!’ 이 글을 본 .. 2016. 4.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83. 엽총 정사 83. 엽총 정사(情死) 1923년(대정12) 초봄 무학산 봉우리에 아지랑이가 서리고 시냇가 버들가지엔 강아지가 겨우 필락 말락하는 약력 3월 중순경, 시내 장군교 교반(橋畔)으로 나이 60이 넘은 일본 노인 한 사람이 다비(일본 버선) 발로 헐레벌떡 달리다 역시 일본인 순사에게 검문을 당하고 있는데, 다리에서 서녘 윗길 30미터 되는 노상에서 총소리가 터져나왔다. 도망치던 노인은 일본 사족(士族)이요, 법정에서 입회 검사와 싸움 잘하는 변호사 장자빈(莊子斌) 노인이었다. 장자(莊子) 변호사집 건너편에 서기로 있는 관원(管原)이 살고 있었다. 이 자는 대구 검사국에서 사기 사건인가 공갈죄로 형을 받아 이 자와 동서(同棲)생활을 하던 조선인 여자가 이 자의 대리 복역을 하고 있었다. 진범은 그 자인 것을 .. 2016. 4.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82. 총각회 사건 82. 총각회 사건 시내 중성동에 자리 잡은 목조는 1921년 경에 진동읍내 김상범이란 청년지주가 장만한 주택건물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리 한 번 한 일이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다. 오직 변한 것이 있다면 집 주인 뿐이다. 주택으로 병원으로 여관으로 변하였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외면으로는 평탄하게 지낸 듯 하지마는 처음 주인 김 씨 때 벌써 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소위 총각회 사건이다. 내용인 즉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중산계급이면 으레 소실을 두는 것이 공공연한 통례이니 여기에 김 씨가 빠질 수 없다. 시내 모 사립여학교를 중퇴한 묘령에다 미모인 조(曺)섭이란 처녀가 있었다. 여학교를 중퇴하였다 하면 그 가정 형편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18,9세의 묘령.. 2016. 3.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0, 어속령의 참화, 81. 두 청년의 순정 80. 어속령(魚束嶺)의 참화 마산 시내에 자동차를 운영한 곳은 대정 2년(1913) 마산역전 상반여관(常盤旅館)인 것 같다. 마산에 소위 신작로가 생기고, 함안, 진주로 통하는 길은 1908년(지금 신마산 쪽에서 시청 앞 도로는 1914년 경인 듯)이다. 이의 증거로 마산 창신학교 앞 회원교에 융희 2년 건립이란 표석이 있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아 1908년인바 해방 후에 반가지(半可知)의 애국자들의 손으로 삭제되고 단기연호로 박혀버린 것이다. 각설 상반여관이 소유한 차량은 그때는 ‘포드’ 포장차(布裝車) 7인승이며 이것으로 매일 혹은 격일제로 진주까지 내왕하던 한산한 시절이었다. 1917년 가을경이다. 지방신문인 남선일보사 주최로 미기(美妓) 투표의 승자인 배학희 양은 애인의 본댁으로 가는 도중 군북을.. 2016. 3.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78. 일경부의 피습, 79. 일기루의 화재 78. 일경부(日警部)의 피습 1905년(광무 9) 2월 모임 마산포 주재(일본 영사관 소속) 경부 경익태랑(境益太郞, 병합 후 마산초대서장)은 낙동강 하류 연안에 수렵갔던 귀로(歸路), 일몰로 해서 창원군 내서면 근주(近珠, 일명 살구징이) 한인객사에 투숙했다가 밤중에 괴한 십수명이 기습하여 그가 소지한 엽총, 탄환, 행이(行李) 등을 탈취한 후 흉기로 난자하여 경(境)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일헌(日憲)과 일경(日警), 한경(韓警)에 급히 연락하여 즉각 인군(隣郡)에 비상망을 펴고 범인 체포에 활동하였으나 수색 8개월이 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간단한 실마리로 함안읍에서 수괴 정원길을, 일미(一味) 등 8명은 창녕읍에서 타진, 마산경무청(현재 부림동 시장에 있었.. 2016. 3.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 한자가 많아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옮긴이) 개항 이래 일본인들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 소유권의 약탈과 아울러 광산권까지도 침탈해 가게 되었다. 마산에 이웃한 창원군 북면에 있는 구룡산 아래 고암동(古巖洞) 동광(銅礦)은 20년의 역사를 가진 유명한 것이었다. 이를 탐낸 일본인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이라는 자가 전 광무감리(礦務監理) 김위섭과 결탁하여 정부에도 알리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1901년 6월부터 기계와 재력을 투입하여 약 5년 한(限)으로 채굴을 시작하였다. 이를 탐지한 내장원(內藏院)은 1902년 2월 철광(撤礦)을 명령하였다.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은 투자를 구실로 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감리보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접광.. 2016. 3.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76. 부자는 오월동주 76. 부자(父子)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에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있다.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은 수구(讎仇)의 사이인데,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 좌석을 같이 했을 때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위암 장지연 선생과 그의 장남 장재식과의 부자지간이다. 위암은 구한말 을사오조약 체결 당시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필화사건으로 유명한 분이며, 선생의 장남인 재식은 마산부제(馬山府制) 실시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판임관에 취임한 사람이다. 선생의 혈육관계를 살펴보면 이남 재철은 웅지를 품고 상해도 갔다가 일찍 타계한 애국청년이며, 삼남 재륜은 유근 선생(1861~1921 / 한국의 언론인 / 장지연,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 2016. 2.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74. 변호사 명록과 대서인, 75, 오촌 변호사 74. 변호사 명록(名錄)과 대서인(代書人) 마산에 법원이 설치됨과 동시에 정착 변호사와 출장 변호사(마산에 연락사무소와 서기만 둔 사람)는 다음과 같다. ○표는 출장 변호사. 정상의리(井上義理), ○굴지(掘池), 이용재, ○김기정(통영), ○박해극, 오촌(奧村), 천기(川崎), 서기홍, 박지영, 중촌(中村), 소출(小出), 장자빈(莊子斌) * 마산 최초의 변호사는 정상의리(井上義理) 법원이 현 장군동(通町 4丁目)으로 이전한 다음 모든 대서인들은 이곳으로 집중한 바 그 당시의 대서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천수 김기수(형제), 길천쾌조(吉川快造), 장도의마(長島義磨), 고교덕조(高橋德助), 미농부 모(美濃部 某), 강인중, 강선중, 선철환, 여병섭, 상야영조(上野榮助), 좌등선구랑(佐藤善九郞), 제.. 2016.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