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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59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6. 일간 신문지국 126. 일간 신문지국 일문 - 경성일보, 조선신문,상공일일신문(이상 서울), 인천매일신문, 중도일보(대전), 대구일보, 대구민보, 시사신문(부산), 부산일보, 마산신문(창간 직후 폐간), 남선일보, 대마산신문(下關-남선일보 대항 수일간 폐간), 대판조일신문, 대판매일신문, 복강일일신문(福岡日日新聞), 만조보(萬朝報, 동경 폐간), 그리고 운송해 온 일문일간지 평양매일신문, 압강일보(鴨江日報), 목포일보, 전주신문, 함흥일보, 원산매일신문 등이다. 국한문지 - 매일신보, 경남일보(창간 12년에 폐간),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폐간), 국민신보(사주 민원식-동경철도호텔에서 핀일파로서 피살- 창간 직후 폐간) 등등인 바 경성일보, 매일신보가 총독.. 2016. 11.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5. 벽신문 125. 벽신문 1924년 여름께 국내 처음으로 벽신문이란 것이 나왔다. 그때도 ‘벽신문’이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것이라 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이것이 신문에 예보도(豫報道)되자 보도 기관이 희소한 관계로 그랬던가 몇몇 지방에서는 지국 설치 희망자로부터 규약과 보증금 액수 그리고 부수에 대한 할부 관계 무가지 매수를 문의하는 우편물이 쇄도하여 쓴웃음을 머금게 했다. 여기에 벽신문에 관한 취지와 유래를 약설(略說)해 보면 이것을 Sten gajeta~Stennya gazeta라 칭하며 멀리 제정 러시아 때부터 적색소비에트 또는 프랑스 등의 적위군(赤衛軍)의 대내(隊內)에서 유행하여 이것이 점차로 각 공장과 공청(公廳) 노동자 구락부, 농촌 독서실 그리고 학교 등에 보급된 신문 형식이었는데 주로 .. 2016. 11.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3. 기자 피살사건, 124 - '비(秘)'를 알리는 경무국 123. 기자 피살사건 현역 신문지국 기자가 폭한에게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당시 조선총독부 어용지인 매일신보 마산지국 기자 박성화(朴性和)이며 가해자는 마산시 오동동 이성화의 자 이 모(某)로서 가해자 이(李)가 저지른 전날의 비행이 전기(前記)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반드시 동 지국 기자 박성화의 취재 송고에 의한 것으로 그릇 판단한 가해자 이(李)는, 항상 박에 대한 살의를 품고 오던 중 1935년 10월 모 일 밤 11시경 시내 서성동 동사무소 옆에서 그를 만나자 근처 술집 식도를 들고 나와 다짜고짜로 하복부를 두세 번 찔러 병원에 옮겨 놓은 즉시 숨지게 한 것이다. 박 기자는 피살되던 다음날 동아일보 지국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는 평소에 형평운동(衡平運動)에 자진 투신하여.. 2016. 11.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2. 남선일보의 수난 122. 남선일보(南鮮日報)의 수난 일문(日文) 지방신문 남선일보가 경영난으로 세인의 동정이 쏟아졌다는 것은 별보(別報)와 같거니와 이 신문이 일반에 주는 성격상 인상은 하등의 정치적 재정적 배경도 그리고 국수사상이나 군벌 예찬 같은 그런 것은 아예 없고 말하자면 지방으로 전락한 자유주의자 몇 사람이 제작한 순수한 지방지라는 것이 적중할 것이다. 발행 부수와 보급 범위가 극히 좁고 경제적 기초가 없으니 사원의 보수와 신문사로서 항상 재고되어야할 용지마저 그날그날 허덕이는 판이니, 활자 개체(改替)같은 것은 일종의 몽상에 지나지 못한 형편으로 ‘루비’ 활자 전체가 폐자(廢字)가 되다시피 망가져서 교정원들은 비명을 울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마친 검열 당국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소화 천황의 즉위식.. 2016. 11.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南鮮日報) 마산지방에서 발간하는 일간지(일문 4페이지)는 멀리 명치 38년 경에 마산신문으로 발행하다가 폐간, 그 후 명치 43년 경 경성일보가 발행권을 가졌다. 강용일(岡 庸一)이란 사람이 10년 계약으로 운영하였는데, 기계는 16혈(頁) 수동식, 소설은 일본서 지형(紙型)아닌 연판(鉛版)으로 들어오고, 사옥은 신마산 진일기계사 창고 옆에 있다가 다시 구 러시아 영사관(현 일성펌프공장)으로 옮겼으나, 기계에 모터 장치란 꿈에도 모를 때고, 족답(足踏)으로는 회전이 되지 않아서 기계공 4명이 수동을 하여 신문 한 장이 나오는 시간이 약 4초 내지 5초가 소요되었다. 기계공 4명 모두 유발자(有髮者)라 수동할 때 상방(相方) 2명의 상투가 수동 회수에 따라 꺼떡거리는 광경은 지금.. 2016. 10. 3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0. 신문기자 대회 120. 신문기자 대회 1919년에 제등 실(齊藤 實)이 조선총독으로 칙임 후 종래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탈피함으로써 총독부 어용지 경성일보(日文) 외 각 도마다 일인이 경영하는 신문은 있어도 한국민 민영지는 전혀 없었다. 제등(齊藤)은 선심이나 쓰는 양으로 우리 민간지로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동아일보 그리고 친일분자 민원식이 국민신문을, 그리고 시대일보(후에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 등으로 어두웠던 근역(槿域) 삼천리의 언론계에 처음으로 일조(一條)의 여명이 비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방방곡곡에는 언론에 갈증 났던 열혈청년들이 솔선하여 각 사의 지국을 설치, 신문기자의 홍수시대를 이루었다. 때는 경향각지에 사회주의 사상이 팽창한 시절이라 조선일보 본사 간부급 대부분이 좌경사상에 침윤된 .. 2016. 10. 2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9. 태운환의 취항 119. 태운환(太運丸)의 취항 바다에 화륜선(火輪船)이 생긴 뒤로 목조 범선이 취급하던 하물과 승객을 거의 아끼던 시절에 마산 앞바다에 하나의 색다른 배가 생겨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냈었는데 그게 바로 ‘빡락선’(혹은 똑딱선)이라는 발동선이었다. 1912년에 진해(현동)-마산간의 화객(貨客)을 취급하던 배였는데 몸집이 크고 속도가 느릿느릿하게만 보이던 화륜선보다 통탕통탕 성급한 소리를 내며 까불까불 달리는 ‘빨락선’에 인기가 집중되었던 것이다. 물론 회조업(廻漕業)은 스노우찌(須之內, 수지내)라는 일인이 독점하였으나, 매표는 노천 선착장에서 일인과 조선인 두 사람이 따로따로 출찰(出札)하였다. 개업한 이틀째부터 자연히 생기게 되니, 일본 매표구는 파리를 날리는 판이 되고 조선인 매표구는 저가(시장)처럼 .. 2016. 10. 17.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7. 이등의 밤중 도독술, 118. 영친왕의 정략결혼 117. 이등(伊藤)의 밤중 도독 술 융희 황제가 남한 순행 때 수행해 왔던 이등박문은 숙소인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 이사관 관저 근처는 경계가 사뭇 삼엄했다. 삼증 이사관 부인도 행여나 해서 밤중에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조심조심 숨을 죽여 살펴보았더니 다름 아닌 이등이 찬장을 열고 비치되어 있는 술병을 흔들어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도오꼬(銅壺, 동호)에다 데운 뒤 쭈그리고 않아서 두 홉이나 마시고 있지 않은가? 산증 부인은 비로소 이등이 호주(好酒)하는 줄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이 말을 부군에게 아니하고 1, 2년이 지나 남편이 마산부에서 최임하고 동경으로떠날 때 비로소 발설한 것인데 남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한 대판매일신문 주재기자로부터 새어나온 .. 2016. 10. 1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116. 융희 황제의 남한 순행 조선 왕조 최후의 황제인 순종 이척(李拓)은 1909년 1월 10일~12일(원문에는 '등극한 1907년(융희 원년) 10월'로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에 소위 경부·경의선 철도부설 시찰이라는 명목 아래 마산포를 순행하였다. 이 순행을 축하하는 뜻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가 마산만에 투묘(投錨)하고 101발의 축포를 터뜨렸다. 한편 마산 이사청(현 경남대 평생교육원) 정문과 숙사(宿舍)인 이사관사(부윤관사-현 마산종합복지관) 앞 그리고 경교(京橋, 제일각 앞)와 창원교(전 럭키회관 앞)에는 한제폐하(韓帝陛下)의 어남순(御南巡) 환영대송문(歡迎大松門)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수행원은 통감 이등박문, 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등 외교 문무백관이었다. 숙소는 삼증(三增) 이사관.. 2016. 10. 3.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5. 이등방망이 피살보 115. 이등(伊藤)방망이 피살보(被殺報) 1909년 10월 27일(이등 피살 이튿날) 마산공립보통학교 제4학년 정영관(본교 3회 졸업생)은 완월 의숙(義塾)학원 생도들과 하학 도중 성지학원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등박문이 북만주 ‘하르빈’이라는 정거장에서 한인 독립군 안중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전보 통신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인 만큼 신문보도인 경성일보를 본 흑목원이(黑木源二) 교장이 전교생을 모은 가운데 울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등이 어떠한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 위인인가는 확실히 모르면서도 한인의 원수라는 것만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일부 국민들은 덮어놓고 통쾌하게 생각했으며, 이등박문이라는 것이 와전되어 이등방망이가 한국인의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고들 하였던 것이다... 2016. 9. 26.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3. 생도들의 복습소, 114. 간수의 인권유린 113. 생도들의 복습소 천자문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동안 신학문이 들어오고 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학교에서 하학하면 과거의 서당과 마찬가지로 그 날 배운 과목을 단순히 통독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있었고, 이것을 독려하기 위한 무료 과외 수업격인 복습소를 웬만한 가정에서는 차릴 수가 있었다. 즉 한 칸 방을 복습소로서 다수 학생을 상대로 이를 제공하게 되면 학부형들은 연료인 화목대(火木代)만 부담하면 석유대는 없어도 좋고, 또 전등이 있더라도 전기 사용료라는 명목은 없었다. 상급 생도는 하급생을 감독하였고, 또 일정한 시간에 출석하여 일정한 시간에 복습을 시킨 후 공동 취침을 하는데, 때로는 복습소끼리 경쟁을 하여 성적이 우수한 복습소에는 학교 선생과 부형들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각 복습.. 2016. 9. 19.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2. 포시의 명 강연 112. ‘포시(布施)’의 명 강연 포시진치(布施辰治)라고 하면 50대 이상의 조신인 사회주의자나 민족운동가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많은 자유주의자 혹은 좌경 변호사 중에도 상촌진(上村進), 산기금조미(山崎今朝彌) 포시(布施) 등은 학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하천풍언(賀川豊彦)을 종교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 보는 것처럼 포시(布施)도 급진 사상가로서 일반은 간주하였다. 사법성과 내무성에서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인데, 일본 공산당 사건의 변론공판 변론 중 당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정부 당국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4년 형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피고인 포시(布施)는 판에 박은 주소, 성명을 묻는 판사에게 무직이라고 하기는 싫었던지 ‘법률 기술자’라고 비꼬아 답변을 해.. 2016. 9. 1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1. 일어 만능 시대 111. 일어 만능 시대 한말 나라 운명이 바야흐로 기울어져 갈 때 일어 열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 몇몇 출판업자들은 재빨리 일어강습 책을 출판했는데 왈(曰) 속수일어독본(速修日語讀本), 일어대성(日語大成), 일어대해(日語大海) 등으로 이름 붙여 도시보다 농촌 서당 출신들이 열독(熱讀)하였고 더벅머리 총각과 유처(有妻) 유자(有子)한 상투쟁이들이 삭발을 하고는 보통학교 상급생으로 전입학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한문 실력자들이라 한문만 가지고는 개명한 사회에 있어 낙오자를 면할 수 없었으므로 신식학교에 들어가서 산술과 일어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보통학교만이라도 졸업하게 되면 면 사무원이나 헌병보조원, 아니면 순사, 철도 역부도 골라서 할 수 있는 판국이요, 조금.. 2016. 9. 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8.첫 맥주 양조장 109.비어홀 110. 일주박래 108. 첫 맥주 양조장 시내 수성동 소재 김동조 이비인후과의원 건물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로 유명한 숭양산인(嵩陽山人) 위암 장지연 선생 우거처이며, 그 전에는 박우길의 소유였으나 또 그 앞에는 맥주 양조장이기도 했다. 규모는 미미하여 얼마만한 양의 양조를 하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밀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맥주 양조를 하는 일방 경성에서 선전 ‘포스터’를 인쇄하여 출입하는 대문과 도로변에도 붙여 선전에 노력도 했으나 자금과 기술 관계인지는 모르나 설치된 미구(未久)에 해산되고 말았다. 109. 비어홀 전 제(諸) 내과의원 천변 건너편에 있는 댄스홀은 대정 초기 경 일본 본전(本田)이란 사람이 최초로 맥주홀을 개점하였다. 입구는 지금 그곳인데 문 앞 간판에는 서양인 선부(船夫) 비슷한 비.. 2016. 8.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 2016. 8.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6. 사립 일어학교 106. 사립 일어학교 마산에 최초로 학교의 명칭이 붙은 것은 신마산 일인 거류지에 있던 심상소학교요, 다음은 구마산 아래학교 정문 건너편에 사립 일어학교이다. 이 학교는 일종의 일어 강습소에 불과하였지만 그 당시 부산에서 개진(開進)학교를 경영하던 일인 시원치랑(柿原治郞)과 그 부인 학길(鶴吉) 부처가 교장직과 주임으로 분담하여 1906년 경에 전기(前記) 학교를 설치하였다. 과목은 일어와 산술이었고, 수업시간은 1년 내지 1년 반이었는데 생도의 본의는 산술보다는 일어습득에 중점을 두었으며, 초기 입학생은 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통영에서는 일인 도변직필(渡邊直弼)이란 자가 일어학교를 설립하고자 부산에서 건축자재를 반입하였다가 조선인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초지(初志)가 좌절되었으며 도변(渡邊)은 그 .. 2016. 8.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923년 1월 당시 동경서 유학한 몇몇 청년 김형두(明大 법과 재학 중, 변호사 시험 합격)를 필두로 손문기, 이주만 등이 연휴(連携)하여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그 해 여름에는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라는 것을 조직 발족하였다. 명칭은 ‘노농’으로 있으나 그 대상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고 부두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자유노동자들로서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최초에는 오월절이란 이름 아래 프랑스를 위시하여 세계 남녀 노동자들은 하루의 행락을 마음껏 즐기는 극히 평화로운 날이었다. 호주 멜본 시에서는 시위 행렬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시장은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였지마는 그 반대로 미주 시카고에서는 헤이 마켓에 이르는 평화시위 군중과 경찰이 충돌함으로써 발포.. 2016. 8.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4. 의례준칙과 헌수 폐지운동 104. 의례준칙과 헌수(獻酬) 폐지운동 1935년(소화 10)에 관혼상재의 간소화와 비용 절양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의례준칙령을 공포한 일이 있다. 헌데 이 영(令)이 공포된 뒤에 부내 만정(萬町, 동성동 / 원본에는 중성동)에 있던 학산의원(鶴山醫院)의 이순필 원장이 영애의 결혼식을 의례준칙대로 거행할 터이니 부 당국에서 와 보라고 하여 그대로 실행해 본 외에는 아무도 실행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안다. 주석(酒席)에서 교배(交杯)하는 풍속은 아마 조선인과 일본인 뿐일 것이다. 친한 벗들과 권커니 잣거니 하여 거나하게 되면 논담풍발(論談風發)로 그날 그날의 삶의 시름을 잠시 털어버리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네 교우상의 멋이었다. 그러나 주석에서 교배(交杯)의 도가 넘쳐 상대방의 주.. 2016. 8.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3. 동경 대진과 마산 학생 103. 동경 대진(大震)과 마산 학생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동경을 중심으로 근기(近畿)기방에 격심한 지진이 일어나서 시 전역은 불바다가 되어 덕천(德川)막부시대의 무장야(武藏野)를 방불케 하였다. 시민들은 불바다 속에서 시내를 관류하는 10여 처의 하천- 그 중에도 오유천(吾嬬川), 우전천(隅田川) 등 물 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지저(地底)에서 뿜어 오르는 열은 용광로와 같이 비자(沸煮)하므로 물에 투신한 수많은 사람은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여기 황혼이 짙어가니 시작할 무렵 누가 조작한 일인지 유언비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돌았다. ‘무정부주의자의 선동에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독약과 폭탄을 가지고 제도(帝都)의 폭파를 서둘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를 전도(顚倒)할 .. 2016. 7.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1. 독립교회의 탄생 102.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101. 독립교회의 탄생 1927년 11월 27일 마산 문창 장로교회에서 벗어나온 교인 일단이 ‘신앙의 자유와 자활적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위적 조직과 제도를 더나 성서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내어 걸고 독립 마산예수교회를 창설했다. 당시 교인 총수는 손덕우 장로를 비롯하여 남녀 200여명, 초대 교역자로는 김산(金山) 목사(중국 남경 금릉대학 출신)를 추대하니 교회 초창기에 희생적인 노력이 많았다. 1928년 11월 2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당시 김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손덕우(장로) 한좌건, 김주봉, 박덕우, 박채우, 김은수, 최종안, 이창우, 최원칙, 유진구, 정대근, 박덕근, 황덕수, 문덕중, 이일래, 서상삼, 설반.. 2016. 7.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0. 미궁에 빠진 대금 도난 사건 100. 미궁에 빠진 대금(大金) 도난 사건 1932년(소화7) 1월 8일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재고금(在庫金) 4백50만원 중 78만원(중량 7관貫 96인刃-두 지게)이 하루밤 사이 감쪽같이 없어진 일로, 조선 내는 물론 만주에까지 수사망을 펼치는 일방 길천(吉川) 경찰서장의 직접 지시로 용의자를 시내에서 탐색 중 의외에도 시내 진정(賑町, 유곽촌-대동강 반각도半角島 우측 소재)에서 송지가(松之家)라는 요정의 포주 좌나전심길(左奈田甚吉) 외 5명이 주 공범으로서 수사 인원 130인, 범행 발생 42시간 만에 타진하였다. 현금 소비 만원을 제하고 77만원을 회수한 사건 후로 각 은행마다 가까운 경찰본서와 파출소에 비상 신호기를 비치한 일이 있었다. 평양사건이 발생한 지 23년만인 1955년 3월 21일에.. 2016. 7.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99. 헌병 사가의 밀주 수색 99. 헌병 사가(私家)의 밀주 수색 1939년(소화 15년) 여름 모일, 마산세무서 주조합(酒組合)에 탁주밀고의 고발 투서가 날아들었다. 여기에 신명이 난 동서(同署)의 직원(1명)과 업자(5명)가 투서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전광석화적(電光石火的) 행동을 개시했다. 상일(常日)에는 세리(稅吏)만이 행동했던 것이나 업자가 5명이나 이에 가담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투서가 날아들면 묵인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요, 또한 투서들이 사실과 틀린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기(躍起)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출동은 차례차례 허탕이었다. 마지막에 손을 댄 곳이 석정(石町, 창동) 상양삼랑(相良三郞, 일본인-편자 주)의 전당포 입구 좌측 두 번째 집이었다. 그들은 이 집에 돌입했다. 딴 집.. 2016. 7.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98. 통주사변의 희생자 98. 통주사변(通州事變)의 희생자 통주사변이라 함은 소화 12년 7월 7일 북경 근교의 노구교(蘆溝橋)서 발발한 중일병(中日兵) 충돌사건의 한 개의 부산물적 비극을 말함이다. 발생 연월일이 기억되지 않으나 통주시내에 우거(寓居)나 거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준전시(準戰時) 중 중국병이 야반(夜半)과 미명에 걸쳐서 전격적으로 무차별 대학살을 행한 참상을 말하는 것인바, 그 당시 일본 신문을 보면 중국의 군인 혹은 비적(匪賊)이라고 했는데, 종전 후 일본의 전문가들의 진상조사 저서를 보면, 중국군이 단순한 일본인(조선인도 포함)들의 증오감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나라에서 야간 군사훈련이란 명목으로 도전 행동을 감행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그늘에서 중국인들에게 방약무인 행동을 한 자에 대한 분격이 폭발, 말하.. 2016. 6.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97. 탄산가스 소동 97. 탄산가스 소동 마산의 도로 연혁이 별로 없으니 상보(詳報)는 어려우나 부림시장에서 서성동 내림길 일대에는 수백년을 헤아리는 고목들이 가히 천일(天日)을 가릴만치 울밀(鬱密)하여 이곳을 숲골(林谷)이라 불렀고, 또는 서림(西林)이라고도 하여 지금 이한철(李翰喆) 치과의원 아랫집 터에 보통학교 생도들의 복습방이 있어 그 이름을 ‘서촌숙(西村塾)’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신작로를 설치하기 위하여 모든 초부(樵夫)들을 동원하여 그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해서 베어내는 것인데, 그 초부라는 것이 산에 잡목이나 메는 말하자면 졸때기들이어서 고목을 베는 큰 톱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베는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몇 개의 고목을 베는 동안에 초부 수십명이 한꺼.. 2016. 6. 2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6. 박애의 두 간호원 96. 박애의 두 간호원 현재 마산시 가포동에 있는 국립마산병원은 소위 대동아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 해군 당국에서 상이군인 요양소로 발족한 후로 해방과 함께 오늘에 이르렀다. 이 병원의 위치에 있어서 요양지대로서는 전 동양적이라고 한 독일 의학도로부터 지적당한 곳이다. 전쟁 중반기부터 남방에서 부상한 육·해군을 비밀리에 수송하여 치료하던 곳으로 많은 환자들이 회복소생한 곳이다. 워낙 숫자가 많이 밀려와서 완전한 치료도 해 받기 전에 8·15가 닥쳤다. 한국에 있던 일인들은 ‘세화회(世話會)’의 주선으로 그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니 이곳에 입원환자 역시 목선을 빌려 귀국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이요양소는 원장을 필두로 일인 용원까지 앞을 다투어서 떠난 뒤에 맨 끝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함경북도.. 2016. 6. 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95. 엄원도의 일본 의인 95. 엄원도(嚴原島)의 일본 의인(義人)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동경 고학생 중 거의가 무등산치(武藤山治)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는 종연방적회사(鐘淵紡績會社) 경영주인데 사회에 불행한 인물만 있으면 반드시 몇 푼을 등기 우송해 주던 사람이다. 중야(中野)인가 황천약사(荒川藥師)인가 문인(이름은 밝히지 않음) 2, 3인이 백구사(白鷗舍)라는 곳에서 자취생활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름 폭우가 지난 뒤에 백구사(白鷗舍)의 사람들은 한 묘안을 냈다. 즉 조선인 노동자의 합숙소인데 저번 수해로 노동할 길이 없어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무슨 범죄라도 해야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웠다. 인심 잘 쓰는 무등(武藤)은 긴급히 관할 경찰서를 통해 우선 50원을 가지고 임시 구조를 하라고 했다. 현금을 전달하려고 고.. 2016. 6. 6.
김형윤의 <마산야화> - 94. 야까이 일인 도가 어조 94. 야까이 도가(都家) 일인 어조(漁組)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의 조차한 곳이라 해서 대개 한인들은 신마산을 거류지 아니면 조계(租界)라고 하는데, 이곳이 일인들의 생활 중추지점이다. 모든 생활필수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신마산 일인들끼리의 상거래로서 자족한 것이며, 지금 외교구락부라는 다실 근처에 ‘아케트(염매시장 廉賣市場)’를 설치하여 그들끼리의 편리를 꾀하였으며, 신마산 발전소 근방 일대를 매립하기 전까지는 일인들의 생선 도매상이 있었다. 이 일본인 생선 도매상 즉 수산조합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한인 어민들을 ‘세리’에 가지 않고 대부분 구마산 어판장 위탁으로 하고, 이 때문에 일본 어상(漁商)들은 어로 현장에서 직접 매매 계약을 하는 식 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거리의 밤꾸미(栗九味).. 2016. 5.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 2016. 5.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92. 묘락좌의 화재사건 92. 묘락좌(妙樂座) 화재 사건 1931년 3월 10일은 일로(日露) 전쟁에 승전한 육군기념일로 진해 군항에서는 아침부터 축제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읍내에 있는 목조 2층 건물인 영화관 묘락좌(妙樂座)에서는 무료 영화를 공개하는데 조선인을 제외한 일인, 읍민, 군인, 소학생만으로 소위 ‘대입(大入)’ 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한창 상영되어가고 있을 때, 2층 영사실에서 돌연 화재가 일어났다. 그 당시의 필름은 가연성 물질이어서 가끔 인화의 화를 입게 되었으므로 필름을 취급하는 자는 각별히 주의를 했어야 했다. 그날 묘락좌(妙樂座)의 경우를 보면 무료 입장이라 장내는 발디딜 틈이 없었고, 영사 도중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비상구는 물론 출입문까지 꼭 잠가버린 뒤에 “불이야” 소리가 났으니 장내의 소란은 그야.. 2016. 5. 16.
김형윤의 <마산야화> - 91. 제등만의 참사 91. 제등만(齊藤灣)의 참사 진해 해군통제부 앞 부두 있는 곳을 일인들은 제등만(齊藤灣)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성에 죽첨(竹添) 일본공사가 있던 곳을 죽첨정(竹添町), 장곡천정(長谷川町), 마산의 까치나루(작진, 鵲津 - 지금 발전소 있는 곳 / 현 남부터미널)를 일본 귀족원의장 근위(近衛)가 상유(賞遊)한 곳이므로 일인들은 하마(近衛濱)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조선총독(元朝鮮總督) 제등 실(齊藤 實)이 과거 진해 요항부(要港部)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을 인연해서 제등만(齊藤灣)이라 명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후로 일반 민간선박은 일체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통제부 앞 솔섬 사이와 날부리(비봉, 飛鳳) 현동으로 작은 배들은 관통하였다. 1928년 창원-진해선 철도(일본 千葉공병대 병사들.. 2016.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