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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44

마산창원 역사 읽기 (31) -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6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봉림산 중턱까지 올라가노라면, 산들바람을 벗삼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봉림사 옛터에 이르게 된다. 그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있는 건물지, 탑지, 연못지 등은 우리의 기억을 천년 전의 아득한 세월 속으로 이끌어 당긴다. 나말여초! 이 땅에는 사회변동의 기운과 전쟁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믿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무너져가던 신라왕실이나 왕실·중앙귀족과 밀착된 화엄종 등의 교종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기댈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서 자라나던 지역의 세력가들이나, 미륵신앙·선종 등이 희망으로 떠올랐다. 천년 전 우리 지역인 김해와 진례에서도 경주의 중앙정부와 독립된 세력가들이 나타.. 2014. 12. 22.
마산창원 역사 읽기 (30) -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5 네온사인에 가려진 월영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김춘추 즉 태종 무열왕계의 왕권을 중심으로 전제 왕권을 수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이념의 도구로 유학이 도입되고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국왕의 조력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수, 설총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혜공왕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분규는 진골 귀족들 간의 왕위쟁탈전으로 신라 하대(下代)의 혼란을 가져왔고, 골품제도로 인한 6두품들의 정치 참여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이들은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중앙의 진골 귀족들이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였고,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6두품의 정치적 진출은 차단되었다.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6두품 계열의 지식인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심.. 2014. 12. 15.
마산창원 역사 읽기 (29)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4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푸른 및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남암(南庵)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 남창(南窓) 빈자리에 머물고 가오. /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두려워라. 『삼국유사』권 4 탑상(塔像)편에는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수도와 성불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위의 찬문(贊文) 가운데 앞의 것은 백월산 북암(北庵)에서 수도했던 달달박박을, 뒤의 것은 남암(南庵)의 노힐부득을 찬한 것이다. 어두운 밤 백월산 깊은 골짜기를 찾아온 낭자-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를 .. 2014. 12. 8.
마산창원 역사 읽기 (28) -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3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우리는 신문, 방송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접하곤 한다. 예를 든다면 함안 마갑총에서 국내 처음으로 국보급의 가치를 가진 철제 말갑옷이 출토되어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고대 가야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든가, 또는 창원 다호리무덤에서 통나무 형태의 목관 실물과 더불어 각종 토기, 칠기, 철기류 그리고 필기용 붓이 발견되어 2,000년전에 이미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가능했고, 가야 초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출토되었다 등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창원 지역은 지형상으로 마을 배후에 솟아있는 높은 산은 바람을 막아 주어 추위를 피할 수 있으며 주변에 하천을 끼.. 2014. 12. 1.
마산 창원 역사읽기 (27) - 옛사람들의 쓰레기장, 성산패총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옛사람들의 쓰래기장, 성산패총 직선길이 12.5km로 전국 시가지 도로 중 가장 긴 창원대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광활한 창원공단 한 복판에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성산패총이 있다. 성산패총은 공단도시 창원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원공단은 기계생산이 주류이다. 지금의 창원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성산패총에는 조개껍질과 토기류 외에 철을 생산했던 흔적이 발견돼 야철지(冶鐵地)로도 명성이 높다. 오늘날 창원공단을 이룬 요람인 셈이다. 지금 성산패총은 사적 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보존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산패총이 발굴된 1970년대 초는‘산업근대화.. 2014. 11. 24.
마산·창원 역사 읽기(26) -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을 통해서 그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들어 시신(屍身)을 따로 모시는 것 자체가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으며, 내세관(來世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신을 별도의 장소에 모시는 것은 물론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내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무덤이 만들어졌던 예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 2014. 11. 17.
마산창원 역사 읽기 (25) - 문화권력, 이은상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8 문화권력,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 1923년) 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옷을 입으셨네 / 하얀구름 너울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 1925년) 내 고향 남쪽바다 /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요 /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가고파. (, 1932년) 앞의 두 노래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고, 마지막 노래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이은상이다. 가 국민들이 애창하고 또 마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면서 이.. 2014. 11. 1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4) -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7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노랫말을 쓴 사람이 동원 이원수다. 그는 15세 되던 해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이 당선된 후 7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아동극, 수필, 시, 아동문학 평론 등 모두 800여 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문학은 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였고, 우주 만물의 모든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고 서로를 죽였던 처.. 2014. 11. 3.
마산창원 역사 읽기 (23) -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6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학살’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특히 마산과 창원에서도 이를 능가하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지난 1999년 9월 가 이 사실을 보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산·창원지역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다. 『마산시사』나『창원군지』, 『경남도사』는 물론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어떤 책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왜그럴까?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이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합법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민간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는 이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까.. 2014. 10. 27.
마산창원 역사 읽기 (22) -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이교재」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5 백범도 존경했던 독립운동가 「이교재」 1982년 3월 1일, 언론은 이교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남북도 상주대표였음을 증명하는 위임장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동안 남몰래 보관해오던 선생의 양자인 이정순씨가 공개한 위임장은 가로 29cm 세로 20cm 크기의 명주천에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교재를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다음 사항을 위임한다. 하나, 애국지사 연락에 관한 일, 하나, 독립운동에 대한 비밀적 지방조직을 행할 일, 하나,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일. (李敎載 右人을 慶尙南北 常駐代表로 右記事項을 委任함 一. 有志者 聯絡에 關한 일, 一. 獨立運動에 對한 秘密的 地方組織을 行할 일, 一. 政府에 對한 特殊獻誠을 勸行케 할 일, 大韓民國 .. 2014. 10. 2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 2014. 10. 13.
마산창원 역사 읽기 (20) -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3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마산 진동 신기리 죽전마을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묘 2기가 있다. 허당 명도석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의 사위인 김춘수가 지은 묘비문이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商權鬪爭),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교육(後進敎育), 기미독립만세항쟁(己未獨立萬歲抗爭)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 민족계도사업(民族啓導事業)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安東)에서의 거사모의사건(擧事謀議事件)으로 체포되어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獄苦), 밀양 폭탄사건(爆彈事件) 거사자금 전담(專擔), 의열단(義烈團) 경남거점조직을 주재(主宰), 일본에의한 창씨개명(創氏改.. 2014. 10. 6.
마산·창원 역사 읽기 (19) -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2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을 말하고자 할 때 ‘창신학교’는 마땅히 맨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왜냐하면 창신학교는 우리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배웠거나 가르친 이들이 뒷날 우리 지역의 크고 작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시기 창신학교가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려웠을 때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살리고자 했던 노력은 바로 이런 까닭에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나라 잃은 시기의 민족교육활동가들 가운데 창신학교에서 삶의 중요한 한 때를 서로 부대낀 이들을 가려 뽑아 우리 지역의 정신맥락 하나를 가다듬고자 한다. -민족 교육자이자 광복 투사였던 안확과 이.. 2014. 9. 29.
마산·창원 역사 읽기 (18)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1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정부대신이란 자는 자기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고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어 사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오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는 모두 남의 노예 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이천 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 이래 사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너무나 유명한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오늘에 소리 높여 통곡하노라)’의 한 부분이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사로 파견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 2014. 9. 22.
마산·창원 역사 읽기 (17) -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10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학우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대학생연합회에 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익히 알면서도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일 입니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 2014. 9. 15.
마산·창원 역사 읽기 (16) -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9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마산의 봄은 산등성이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의 붉음 만큼이나, 부정과 불의에 저항했던 정열에 불탔던 계절이다.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를 쟁취했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마산의 지역민들은 항상 그 앞에 서 있었다. 3·15는 분단된 남한, 그 민주화의시작이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마산에서는 적어도 4차례의 시위가 목격된다. 3월 14일 밤 민주당사 앞에서 일어난 시위, 3월 15일 선거 당일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마산시 전역에서 진행된 시위와 총격발포 사건, 3월 15일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2014. 9. 8.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2014. 9. 1.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 2014. 8. 25.
마산·창원 역사 읽기 (13) - 제국주의 침략과 마산포 개항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6 제국주의 침략과 마산포 개항 제국주의는 독점기업과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고 상품수출보다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지니며, 열강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영토가 분할된 단계의 자본주의를 말한다. 고대 로마의 제국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침략하여 노동력과 생산물을 약탈하거나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제국주의는 군사적 점령과 자본의 이식을 통하여 식민지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 시장에 강제적으로 편입시켰으며, 식민지 민족자본의 성장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선진자본주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고, 19세기말경에는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이탈리아 등이 전 세계 대부분을 식민지로 분할하였다. 아시아도 자본주의 열강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 2014. 8. 18.
마산·창원 역사 읽기 (12) -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5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1960년대 이래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온 임진왜란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의 승패논쟁인데 명과 일본측의 기존연구는 대체로 자국의 승전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었으며 조선에서는 패전관이 우세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승전론이 우세해지는반면, 일본측의 연구자들이 패배한 전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전쟁발발 원인과 관련한 성격 및 명칭에 대한 문제이다. 대부분 임진왜란을‘국가적인 규모의 왜구’들에 의한 약탈전쟁으로 보아 ‘임진왜란’ 혹은 ‘임진왜화(壬辰倭禍)’로 표현해 왔다. 이러한 입장의 이면에는 성리학적 사상을 지닌 조.. 2014. 8. 11.
마산·창원 역사 읽기(11) -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4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정동의 일이 시급한데 / 농삿일을 누가 생각하랴 / 사자는 끊임없이 이어져 / 동으로 서로 달리네 / 백성을 거두어가니 고을은 텅텅 비고 / 말들은 달려 강가로 향하고 있네 / 밤낮으로 나무베어 /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 한 자의 땅도 갈아놓지 않았으니 / 백성들은 무엇으로 목숨 이어가나 / 집집마다 묵은 양식 없고 /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 하물며 다시 농업마저 잃었으니/ 볼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위의 시는 원 간섭기를 살았던 수선사(修禪社 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당시 일본정벌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던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며 읊은 것이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토지.. 2014. 8. 4.
마산·창원 역사 읽기(10) -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3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나온다. -다양하게 남아 있는 유적들- 창원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민무늬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 2014. 7. 28.
마산·창원 역사 읽기(9) - 마산만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골포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2 마산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 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한조) 삼한시기 마산・창원지역이 속했던 변한의 생활모습을 적은 글이다. 변한은 삼한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 2014. 7. 21.
마산·창원 역사 읽기(8) -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1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연일 계속되는 고성과 난투장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 언제 그랬냐는 듯 품위와 위엄으로 재무장(?)하고 마치 일월의 야누스인 양, 두 얼굴로 웃고 화내고, 타협하고 뒤돌아 서고........... 누구의 일상일까? 아마도 현재만이 아닌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진 이래 계속되어 온 평상의 모습은 아닐까. “정치집단” 혹은 “정치제”하고 명명되는 이러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일까?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이들의 역할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받거나, 혹은 그 존재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 될 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더욱 절실하게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흔.. 2014. 7. 14.
마산·창원 역사읽기(7) -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 7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마산에서의 3.15의거는 그 뒤 4.1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은 도시의 지식인층이나, 학생들, 중간층들에게 반이승만, 반자유당이라는 성향이 투표로 나타났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인하여 2.28 대구에서의 학생시위, 제1.2차 마산봉기, 그리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4.19항쟁, 4.26 교수단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2014. 7. 7.
마산·창원 역사읽기(6) - 일본의 침략과 저항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6 일본의 침략과 저항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개항 이후 마산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하여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들의 소굴로 변해갔다. 드디어 1899년 5월1일, 마산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인 개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포 남쪽 2㎞거리에 이쓴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가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계획도시(지금의 신마산지역)가 들어섰다. .. 2014. 6. 30.
마산·창원 역사읽기(5) -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5 ·조선시대의 마산과 창원 창원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 조선시대이다. 조선 태종대에 의창과 회원을 합쳐 창원이라 이름지었다. 부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도호부가 되었다. 선조 34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했다. 대도호부로의 승격은 임진왜란때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인, 관인, 백성들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체찰사의 장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과 벌였던 대표적인 전투는 노현 및 창원성 전투, 안민고개전투, 합포해전이 대표적이다. 칠원군과 합쳤다가 광해군 9년(1617)에 나누었다. 인조 5년(1627)에 진해와 합쳤다가 7년에 나누고, 현종2년에 전패를 잃었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에 다시 승격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 지역은.. 2014. 6. 23.
마산·창원 역사읽기(4) - 고려시대의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4 고려시대의 마산과 창원 신라말의 사회는 중앙진골귀족들간의 왕위계승분쟁으로 지방세력들이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호족세력이었다. 이 지역의 인근에는 김해지역의 호족이었던 김율희가 있었다. 이 사람은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봉림사 개창을 지원했던 인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제압하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마산.창원지역은 고려 현종때에 의안.합포를 합쳐서 금주(지금의 김해)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각각 설치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군량등을 공급한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지역명을 변경하고 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시대의 마산지역은 원나라 주도의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전진기기가 되었다. 몽고와의.. 2014. 6. 16.
마산·창원 역사읽기(3) -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3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려군읍」 연혁도칠폭, 채색필사본, 19세기 이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단군조선 이후 고려까지 각 왕조의 강역을 그린 일종의 역사지도.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도성을 비롯한 주요지명의 위치를 이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중국의 정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남지역), 진한(낙동강의 동쪽), 변한(낙동강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이들 삼한에는 다양한 이름의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 2014. 6. 9.
마산·창원 역사읽기(2) -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2.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이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거나 유물이 채집된 사례는 없다. 하지만 가까운 부산.경남 권역에서는 최근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고 중기구석기시대 이전 유적들도 몇 군데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마산.창원지역에도 이 시기의 유적이 나올 가능성은 많다. 신석기 시대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8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시대는 보통 농경이 시작되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처음부터 농경을 한 것이 아니고 식물성식료의 채집과 특히 어로생활 중심의 생업경제였다. 이러한 생활형태였다면 신석기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통영 상노대도 유적처럼 마.. 2014.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