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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59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4) - 강점제3시기 120회부터 시작된 1930년대 이후 마산도시변화에 대한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일제 강점 제3시기는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전쟁기로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한 시기로,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잠재우기 위하여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을 폈습니다. 1930년의 마산 인구는 27,885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36,429명이었습니다. 비율로 보면 30.6% 증가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목포가 85.2%, 부산이 70.9%, 진주가 71.9% 증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강점 후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 조성계획은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중앙동 2가와 3가, 즉.. 2013. 12.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3) - 강점제3시기 1930년대부터 해방 때 까지 원마산의 범역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해방 무렵에는 북서쪽으로 상남동을 지나 회산교까지 원마산과 이어짐은 물론 오동교까지 건물이 가득 들어섰으며, 해안지역에는 오동교까지 매립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와 달리, 산호리는 여전히 원마산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산호리의 정경은 1941년 발표된 지하련의 단편소설「체향초(滯鄕抄)」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 임화의 둘째 부인이었던 소설가 지하련(1910년, 거창생, 본명 이현욱 李現郁)은 천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마산으로 이주하여 1935년 마산으로 내려온 임화와 결혼, 1938년 상경하였습니다. 하지만 1940년 결핵에 감염되어 마산 산호리 562번지로 낙향하였다가 1947년 가을, 임화와 함.. 2013. 12.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2) - 강점제3시기 이번에는 강점 제3시기에 있었던 마산의 도시구조 변화에 대해 정리합니다. 만주사변 등으로 1930년 이후 국내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최악이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도시의 물리적 환경도 점점 열악해갔습니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 위치가 전선과 멀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접점이라는 점과 군수물자 공급창이라는 점 때문에 새로운 매립도 시도되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마산의 건설경기가 과도하게 상승하여 ‘황금시대’ 운운할 정도였습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매립 전의 마산은 자산동 입구, 즉 몽고정 부근에 해안이 깊고 환주산이 해안 쪽으로 돌출해 있어서 가용대지가 협소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두 개의 철도와 한 개의 간선도로(현재의 장군로)가 지나고 있어서 .. 2013. 12.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1) - 강점제3시기 도시문제와 관련한 두 기사입니다. 16. 1938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都市問題會議에 馬山代表出發」이며 「경성부민관에서 개최되는 전국도시문제 회의 출석과 함께 선진도시의 시찰을 겸하야 마산부회의원과 상공회의소원 일행 20명이 출발하였다」는 내용입니다. 75년 전 식민지시대 일입니다만, 이 기사를 현재 시간으로 당겨보면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되는 전국도시문제회의 참석과 함께 선진도시의 시찰을 겸해 마산시의원과 상공회의소회원 일행 20명이 출발하였다」가 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별로 없습니다. 17. 1938년 12월 11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大工場을 誘致 공업용수문제의 해결과 함께 工業馬山府에 朗報」입니다. 기사의 내용을 대략 .. 2013. 12.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0) - 강점제3시기 마산도시변화와 관련한 두 기사입니다. 14. 1936년 7월 28일 매일신보 4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약진 마산부의 인구 3만5천을 돌파, 6개월간 1천여 인 증(增)」입니다. 내용은 1936년 상반기 6개월간 마산부의 인구가 1천여 명 증가하여 정체되었던 마산이 연말까지 총인구 3만5천 명을 돌파하겠다는 내용으로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마산부의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하는 기사입니다. 기사 아래의 표는 조선총독부가 정식으로 발표한 강점제3시기(1930-1945) 마산의 인구입니다. 1944년과 1945년 인구는 '마산개항백년사' 등 다른 자료에서 뽑았습니다. 신문기사는 공식통계자료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15. 1938년 11월 6일 동아일보 4면 기사입니.. 2013. 12.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9) - 강점제3시기 마산도시변화와 관련된 두 개의 기사 두소개합니다. 12. 1940년 2월 3일자 동아일보7면 기사입니다. 기사 제목은 「共同墓地 移轉要望」이고, 내용은 「마산부 완월동 산기슭에 설치되어 있는 현재의 공동묘지는 도시의 미관으로나 일반출입인사의 눈에 뜨이는 점으로 보아 늘 불유쾌한 감이 있어 각 방면에서 항상 논의되어 오던 터에 더욱 마산부에서도 대마산건설을 목표로 명년에 도시계획실시의 예정인 차제 도시미관을 파괴하는 차등공동묘지는 당연 타처로 옮겨야할 것을 크게 요망한다. 차 지구는 마산의 고지대로서 도로가 불편하므로 부 도로 행정에 대한 불편의 소리도 자자하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월동 공동묘지는 1916년에 제작된 마산지도(아래 그림 참조)에도 나타납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2013. 11.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8) - 강점제3시기 도시와 관련한 두 가지 기사입니다. 10. 1938년 7월 21일자 매일신보 6면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馬山午東洞에 夜市」이며 기사는 「마산부 오동동에 있는 번영회 주최의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작년부터 개시 하였던 바 금년에도 지난 17일부터 개시되었는데 첫 날부터 나온 사람이 무려 수천 명에 달하여 납량구역 오동동 일대에는 미증유의 잡담과 은성을 이루었고 주로 과일 도시 목공물 포목 십전균일품 등으로 또 값도 싸므로 성적이 양호하다고 한다」입니다. 1937년부터 개장된 오동동 야시장이야기인데 당시 오동동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기사입니다. 기사 중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여름철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밤에 열리는 시장'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은성을 이루었고…’는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번화.. 2013. 11.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7)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 관련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8. 1938년 2월 24일 동아일보 7면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돝섬을 새 명소로 만들기 위해 마산중포병연대에서 돝섬공원화 계획을 수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돝섬공원화 계획의 의도는 진해요항부와 비봉리에 해안도로를 조성한 후 진해와 돝섬을 연결하여 진해를 찾은 관광객이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오도록 한다는 겁니다. 또한 진해 부산 간 계획하고 있는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 돝섬이 연결점이 되어 1시간 3-40분내에 부산-진해-돝섬-마산이 이어질 것이므로 돝섬공원화 계획에 마산부민들도 적극 협력할 것이라 보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처럼 돝섬이 개발되고 부산에서 진해와 돝섬을 거쳐 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습니다. 9. 1938년 6월 3일 동.. 2013. 11.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6)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와 관련된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6. 1935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驛移築 用地買收完了’ 이며 기사 내용은 ‘경남 제2의 능률을 내고 있는 구마산역은 외관상 누추와 내용상 협애(狹隘) 및 이의 장래발전에 반(伴)하는 요충지대에 이축을 계획하고 그 동안 용지 매수에 열중 중이던 바 가격 평가가 원만히 되지 못하여 매수에 지장이 되어있던 바 근일에 이것이 호전되어 매수가 거의 완료된 모양이라 하며 가급적 금년 내 완성을 보게되도록 할 것이라 하며 완성 후는 구마산에 신위관(新偉觀)을 정(呈)하리라 한다’ 입니다. 지금의 육호광장 자리에 있었던 구마산 역은 이 신문 기사처럼 위치를 약간 옮겨온 자리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역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만 역.. 2013. 11.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두 기사 소개합니다. 4. 1935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마산의 교육현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내 地方當面問題(지방당면문제)’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高普設置問題(고보설치문제)’라는 제목으로 마산에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며, 두 번째 기사는 ‘商校昇格問題(상교승격문제)’라는 제목으로 당시 3년제 을종학교로 1922년 개교한 마산상업학교(옛 마산상고, 현 용마고)를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로 승격시키자는 겁니다. 첫 번째 주장인 고등보통학교 설립 문제는 이듬해인 1936년 4월 11일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 개교 당시 5년제 10학급)가 개교됨으로 이루어졌고, 두 번째 주장인 마산상업학교 승격문제는 1939년 5년제 10.. 2013. 10.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4)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대 이후 마산 도시변화와 관련한 신문보도를 기사와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간단한 기사가 대부분이지만 꽤 볼만한 기사도 있습니다. 1. 먼저 1931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돗섬 관련 기사입니다. 제목은 「納涼村施設 마산 저도에」이며 기사는 「마산부에서는 여름 동안의 피서지(避暑地)로 마산부 저도리(猪島里, 돗섬)에 납량촌(納凉村)을 신설할 터이라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부민들을 위해 돗섬에 어떤 피서시설을 만든다는 내용인데 건물을 짓는다는 건지 해수욕 시설을 조성하는 건지 이 기사만으로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2. 1933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몽고정 관련 기사입니다. 제목은 「馬山 蒙古井 大谷博士 證明」이며 기사는 「지난 14일 성대교수 .. 2013. 10.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3) - 강점제3시기 '관광 마산'에 소개된 사진 중 마지막 석장입니다. 53. 자안지장(子安地藏) 자안지장에 대해서는 처음 접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우선 관련 글 한편 소개합니다. 『약진 마산의 전모』에 실린 글입니다. "구강(마산 팔용산 수원지 내지 산호리 일대) 광천 쪽으로 가는 왼쪽으로 상당한 급경사의 산길을 약 1시간 가량 올라가면 자안지장을 안치해놓은 곳에 다다르는데, 거암 아래의 안쪽에 안치된 지장불 근처에는 송송 맑고 정결한 물이 샘솟는다. 전설에는 이 거암을 '상사암'이라 부르는데, 남녀가 서로 연모하였으나 결국은 부부가 되지 못했다면 뱀으로 변하여 연인을 마음대로 희롱하기 때문에 이 바위 위에 앉혀서 주문을 외우게 했고, 그렇게 해보아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두 사람 모두를 공물로 바친다고 전한다. 이곳을.. 2013. 10.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2)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50. 마산해수욕장 당시 마산 최고의 관광지요 피서지였던 월포해수욕장입니다. 아래 사진은 1934년 7월 5일 자 5면에 실린 이 해수욕장 관련 동아일보 사진 기사입니다. 기사는『때 만난 마산월포해수욕장』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은 「여름의 바다는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떠들썩거리는 판인데 마산 진해 해수욕장에도 벌써부터 남조선 각지에서 욕객이 모여드는 판이다.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남조선 지방에서도 물이 맑고 모래가 희어 풍광이 명미하기로 이름이 높아 각 여관업자들은 이 때 한목을 보게 된다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51. 완월동 부동폭포 장군천 상류에 있는 완월폭포입니다. 이 폭포에 대해 1941년 발간된 『약진마산의 전모』에서는 "화강암의 바위 사이를 이으면서 흐르는 물은 옥을 .. 2013. 10.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1) - 강점제3시기 그림 석장입니다. 47. 마산수도배수지 팔용산 저수지에서 공급된 물을 정수하고 배수하던 곳입니다. 위치는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였습니다. 1930년, 이 정수장이 준공되어 통수식을 할 때, 도지사와 진해요항사령부 사령관까지 참석하여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준공식 당시 마산부윤 판원지이(板垣只二 / 제5대부윤 / 1928.3-1930.10 재임)의 글을 석각해 놓은 「水德無疆(수덕무강)」이라는 넉자 글입니다. 한반도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로 알았던 일제관료의 확신과 힘센자의 너그러움까지 서려있는 글입니다. 48. 산제당 당시 마산 사람들의 종교적 근원지였던 환주산에 있었습니다. 사진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성덕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로 남아 있습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2013. 9.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0)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입니다. 44. 마산공원 마산신사에 접한 위치. 지금의 제일여고 부지 중 일부였습니다. 조경계획은 임학박사였던 본전정육(本田靜六)이 하였고 수종은 벚나무, 매화나무, 대나무 등이었습니다. 강점기 내내 일본인들의 놀이터와 휴식처로 사용되었습니다. 45. 근위빈공원 일본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조그마한 해변공원으로 1934년 월영동 해안에 조성되었습니다. 1941년 벚나무 묘목 1백본, 버드나무 2백본을 이식해 공원을 꾸몄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46. 추산공원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에 있었으며 지금까지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암석이 많았다고 하며, 동쪽에 오래된 벚나무 수십 그루가 있어서 벚꽃이 필 때 쯤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2013. 9. 2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9)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 소개합니다 41. 합성리 정동행성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창원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성리 정동행성지는 바로 그 합포성을 말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어느 주택의 담벼락으로 아직 남아 있는 합포성의 성곽입니다. 42. 월영대 월영대는 경상남도기념물 제.. 2013. 9. 1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78) - 강점제3시기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38. 농공금융주식회사 1933년 3월 20일 창동 51번지에서 설립, 농공업자에 대한 금융대부와 화재보험 대리점을 함께하였다. 대표는 이봉수 씨. 39. 몽고정 몽고정은 고려 충렬왕 때 중국 원세조가 2차례 일본원정에 나서면서 당시 이곳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우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물 앞에 몽고정이라고 쓰인 비석은 1932년 일본인 고적단체에서 세운 것으로, 그 전에는 고려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40 마산성지 정유재란 때 마산에 왜군들이 상륙해 지금의 산호공원인 용마산 일대에 구축한 왜성입니다. 정상부근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모습입니다. 2013. 9.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이야기 (177)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금융기관 세 곳 사진 소개합니다. 35. 무진회사 1925년 3월 월남동 1가에서 시작한 마산무진주식회사입니다. 1931년 월남동 3가 1번지에 아래 사진처럼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진해에도 지점이 있었습니다. 1936년 경남 도내의 각 무진회사들이 통합하여 부산무진회사를 창립함으로써 부산무진회사 마산지점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무진회사는 지금의 상호신용금고를 의미합니다. 36. 마산금융주식회사 1908년 6월 일본인 만무구일(滿武龜一)이 설립한 회사로 각 개인들을 상대로 부동산 담보대출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6년 추산동 69번지에 지은 근대적 2층 건물의 사옥니다. 37. 산업금융주식회사 1929년 5월 19일 동성동 173-1번지에서 시작하였고 금전.. 2013. 9.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6) - 강점제3시기 마산에 있었던 세 곳의 금융조합 사진을 소개합니다. 금융조합은 제1차 한일협약(1904년)에 따라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온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금융기관 확충 정책에 의해 전국에 설립되었습니다 한말인 1907년(융희1)에 시작되어 1956년까지 있었습니다만 1956년 농업은행의 설립으로 해산되고 1959년 현 농업협동조합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주로 일본인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금융조합의 조합장은 한국인이 맡았지만 실질적 총업무는 대부분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32. 마산금융조합 1919년 2월 17일 도시금융조합으로 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1일 중앙동 1가 1번지에서 영업을 시작햇습니다. 신마산지역에서 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던 금융조합입니다. 아래 사진의 건물은.. 2013. 8.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사진 석장 소개합니다. 29.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 1904년 일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학교로 현 월영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일제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입니다. 30. 마산공립보통학교 1901년 4월 마산공립소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한 마산공립보통학교는 현 성호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위 마산공립심상소학교가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다면 이 학교는 한국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31. 식산은행 마산지점 1918년에 지은 건물로 남성동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벽돌조 1층 양식으로 1970년대까지 남아있었습니다. 2013. 8.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4) - 강점제3시기 오늘은 학교 사진 석장입니다. 26. 마산공립상업학교 지금은 용마고등학교가 된 마산상업고등학교입니다. 1922년 3년제로 개교했다가 1939년 수학연한 5년제로 바뀌었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수학연한을 다시 4년제로 단축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한국인들이 다닌 학교이지만 1942년에는 신입생의 50%가 일본인으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27. 마산공립고등여학교 공립마산고등여학교는 1927년 수학연한 5년제의 고등여학교로 개정한 현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입학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의 입학은 매우 어려워서 전체 재학생 수의 20%에도 못 미쳤습니다. 원래 1915년 장군동 2가에서 개교한 여자실과학교인데 1921년 고등여학교로 바뀌었으며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이 건.. 2013. 8.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3)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재미있는 사진 석 장 소개합니다 23. 구마산공설시장 지금의 부림시장입니다. 1924년 개설된 시장으로 당시 마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와 장가(長家)점포 3채였고 그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 저녁시장 시간이면 언제나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24. 원동무역주식회사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1920년 5월 16일 자본금 50만원으로 창립한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입니다. 이 사진은 1927년 8월에 착공하여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지은 사옥입니다. 외형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 원형이 남아있으며 건물 앞에는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2013. 8.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2) - 강점제3시기 오늘은 당시 유명했던 마산의 장유공장(醬油味噲製造場 / 장유미쾌제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은 장유산업의 메카였습니다. 양도 양이지만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뿐만 아니라 멀리 청진, 원산 등지에까지 판매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장유산업은 일본인의 독점산업이었습니다. 20. 복정(福井 / 후쿠이)醬油味噲製造場 한일병합 다음 해인 1911년 5월 복전증차랑(福田增次郞)이 마산부 都町(도정 / 현 중앙동)에서 창업한 회사입니다. 1928년 마산의 장유 총생산량 5,000석의 70%를 생산한 대형공장이었습니다. 21. 적문(赤門 / 아카몽)醬油味噲製造場 1906년 관무부(管武夫)에 의해 설립된 마산 최초의 장유공장입니다. 마산 유정(신창동) 18번지에 공장이 있었으며 연간 1,000석 내외.. 2013. 7.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1)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네 곳을 소개합니다. 양조장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16. 청수(淸水 / 시미즈) 양조장 1921년 창업하였고 신창동, 현 무학아파트 자리(전 무학소주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만주에 까지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大正櫻(대정앵)’과 ‘井筒平(정통평)’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장이 있던 곳 옆을 흐르는 창원천(대곡천이라고도 함)에는 이 공장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는 청수교(淸水橋)가 있습니다. 17. 원등(遠藤) 양조장 1909년에 창업하였고 장군동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건물 보존 여부를 놓고 논쟁거리가 되었던 천도원(千島園)주조장이 바로 이 양조장입니다. 상표는 彌生(미생)이었.. 2013. 7.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0)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모두 당시 유명했던 일본 청주 공장들입니다. 13. 월포(月の浦) 양조장 장군동 경남데파트 뒤편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회사가 사용했던 술통도 함께 소개합니다. 14. 삼호(三好 / 미요시) 양조장 1913년에 창업하였고 부림동 아래에 있었습니다. 상표는 ‘松の色(송색)’이라고 했습니다. 15. 산읍(山邑 / 야마무라) 청주 양조장 1929년에 창업하였고 월남동에 있었습니다. 만주에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櫻正吉(앵정길)’이었고 지금 중리에 있는 무학주정 전신입니다. 2013. 7.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9)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10. 빈전(濱田 / 하마다)양조장 1923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금배빈학(金盃濱鶴)이었습니다. 추산동에 있었습니다. 11. 서전(西田 / 니시다)양조장 1907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계림(鷄林)이었습니다. 위치는 홍문동, 즉 현 신동아빌라 자리입니다. 마산의 토호 이승훈 씨가 운영한 백광청주가 바로 해방 전 이 회사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양조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 촌기(村崎 / 무라자키)양조장 1925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염록(艶錄)이었습니다. 홍문동에 있었습니다. 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는 1923년에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앞 건물은 사무실, 뒷 건물이 공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3. 7.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8)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석교양조장, 원전양조장 사진을 소개합니다. 1.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사진입니다. 현재 통술거리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입구 오른쪽 건물은 현재도 똑 같은 모습의 건물이 있습니다만 동일한 건물은 아닙니다. 아마 저 건축물이 갖은 상징성 때문에 예전 모습 그대로 지은 것 같습니다. 2. 석교(石橋 / 이시바시)양조장 1905년 설립되었으며 서성동 덕천아파트 자리에 있었습니다. 후에 대흥주조라는 이름으로 문삼찬 씨가 경영하였습니다. 상표는 대전정종(大典正宗)이었습니다. 3. 원전(原田 / 하라다)양조장 1904년에 설립한 마산최초의 일본 술 공장입니다. 원래 이름은 아즈마(東)주조장이었습니다. 상표는 '한목단'이었고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2013. 7.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7) - 강점제3시기 오늘 소개할 사진은 마산역, 마산우편국, 도립마산의원 순서입니다. 1. 마산 역 현재 마산중부 경찰서 앞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에 있었습니다. 1905년 목조 일식으로 단층이었습니다. 1905년에 경부선과 함께 개통된 철도 마산선의 종착역이었고, 1925년에 개통한 철도 경남선의 출발역이었습니다. 이 역에서 출발하면 삼랑진을 거쳐 서울과 부산으로 연결되었고 함안 군북을 거쳐 진주까지 연결된 유서 깊은 역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마산우편국입니다. 2. 마산 우편국 현재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마산우체국의 전신입니다. 우편국을 통해 모든 정보와 통신이 연결되었던 시절, 마산의 가장 첨단시설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1930년에 지었으며 약 300평 규모였습니다. 20대 초반 때 우표수집 한답시고 저도 자주 들락거.. 2013. 6.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에 예고한대로 오늘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순서는 본판 순서를 따르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이고 원판 사이즈가 가로40mm×세로30mm 밖에 되지 않아 상세하게 감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냥 1930년대 마산도시의 분위기만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1. 마산부청 중앙동 3가에 있는 현 마산합포구청, 즉 오랫동안 마산시청으로 이용되었던 위치에 있었었던 건물의 최초 모습입니다. 마산시민들에게는 약간 낯이 익은 건물일 겁니다. 2.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원으로 지방법원이 이전하기 전까지 마산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3. 마산경찰서 중앙동 2가에 있는 옛 마산경찰서, 현 마산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건.. 2013. 6.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65) - 강점제3시기 이번 회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아래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리플렛과 리플렛 속에 들어 있는 마산 지도는 이미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만 지도의 아래위에 실린 사진은 처음 소개합니다.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3/0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이 리플렛은 1937년에 제작 발행되었습니다. 일본관광객 유치용 마산 홍보 혹은 마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마산 도시를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리플렛입니다. 「觀光の馬山」이 발간된 1937년은 만주사변(1931년)에 이어 일본군부가 중국대륙을 삼키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 2013.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