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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2.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4) - 조선시대의 정보통신, 자여역과 봉수대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조선시대의 정보통신, 자여역과 봉수대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급속한 변천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이 행복한 삶을 위해 참으로 필요한 것인지 따져볼 겨를조차 없이‘정보의 홍수’에 빠져 살고 있다.

 많은 돈을 들여서 각종 정보기기의 사용법을 익혀야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고, 컴퓨터 하나쯤은 집안에 사들일 수 있어야 직장 생활도, 자녀들의 학교 공부도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수요에 따라 공급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급이 수요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은 사람들이 저마다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다니는 휴대전화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새 휴대전화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필요해서 선택하고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첨단기능을 갖추고 모양도 예쁜 새로운 기종이 나왔기 때문에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정보기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떤 방법으로 소식을 전해야 했을까?

근대적인 우편제도나 전화가 이용되기 전까지 개인적인 소식의 경우 직접 사람이 걸어가서 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급한 소식이나 공문서를 전하는 통신 수단은 일찍부터 마련되어 있었는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봉(烽 연기)으로 밤에는 수(燧 횃불)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수(烽燧)제도와 사람이 걷거나 말을 이용하여 달려가서 소식을 전하던 우역(郵驛) 및 파발(擺發)이 그것이다.

<경상도(《각도지도》, 채색필사본, 18세기 후반, 규장각 소장) 18세기 이후 널리 유행했던《도리도표(道里圖標)》에 실려있는 필사본의 경상도 부분이다. 경상도내 군현간의 거리를 표시해 주고 있다.에 실려있는 필사본의 경상도 부분이다. 경상도내 군현간의 거리를 표시해 주고 있다.>

 

 

-14필의 말을 준비했던 자여역-

이미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우역을 설치하여 국가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리가 공무로 여행할 때 숙식을 제공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역참제도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역참이란 일정한 도로를 확보하고 그 주변에 역을 설치한 다음, 말과 관리인을 배치하여 중앙과 지방 사이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관원의 출장을 돕는가 하면 관물(官物)수송까지 담당하였던 제도였다.

역참은 군사적 또는 외교적 측면 뿐 아니라 지방세력을 통제하면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다른말로 우역이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우역제도는 장정(丈丁)들을 두어 군사에 관한 문서를 전달하도록 하였으며,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마패제도(馬牌制度)를 만들어 관리의 관등에 따라 제공하는 말의 필수를 정하였다.

마패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발행하였는데, 관원의 관품에 따라 말의 수효(1~10마리)를 새겨 역마의 지급을 정하도록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전국에 525개의 역을 두었으며, 이 역들을 22개의 역도(驛道)로 묶어 관리하였다고 한다.

역도는 지금의 국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8개는 수도인 개경 북쪽에 있었고, 남쪽에 14개를 두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국도와 상당히 일치한다.

마산 인근의 역도는 진주에서 진안을 거쳐 전주로 갈 수 있는 산남도가 있었고, 김해를 중심으로 창원에서 밀양을 지나 양산에 이르는 금주도가 있었다.

역과 역도는 병부 아래에 있는 공역서라는 관청에서 관리하였으며, 역에는 역장, 문서를 전달하거나 필요한 말을 뽑아내는 일을 하는 역리, 직접 문서를 들고 뛰거나 사신의 심부름을 하는 역정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역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상우도에는 5개의 역로가 있었다.

그 중 마산권에 해당하는 창원도호부를 중심으로 하는 역로를 자여도(自如道)라고 하였다.

자여도의 중심역은 창원시 동면 송정리 일대에 있었던 자여역(自如驛)이었으며, 자여도 관할로 14개의 소역(小驛)이 있고, 그 중 근주역과 신풍역, 안민역이 창원도호부내에 있었다. 이중 근주역의 위치는 마산시 석전동으로 짐작되고 있다.

<자여역 터에 남아있는 비석>

 

이들 역에는 각각 얼마나 많은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을까.

소역에 해당하는 근주역에는 13필, 신풍역은 12필, 안민역은 7필이 있었다. 물론 이 외에도 상당수의 역리와 역노비가 같이 딸려 있었다.

중심역인 자여역에는 모두 14필의 역마와 115명의 역노비, 많은 역리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통해 당시에 자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주요 교통 요지에는 관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숙박시설을 설치하였는데 원(院)이라고 불렀으며, 창원도호부에는 9개의 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중 마산에는 내서 지역에 안성원(安成院)과 적옥원(迪屋院)이, 삼진지역에 소달원(所達院)이 있었다.

역참제도는 명나라의 제도를 본따서 파발제도로 발달했다가 고종 21(1884)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도입되고, 철도가 놓여지게 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마산에서는 마산항이 개항되던 광무 3년(1899), 지금의 중성동에 부산우편전신국 마산출장소가 설치되어 우편업무를 처음으로 다루게 되었고, 철도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 마산포와 삼량진을 잇는 군용철도 마산포선(馬山浦線)이 운행을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교통 통신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서울까지 2시간만에 왜구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대-

우리 나라 봉화(烽火)의 역사는,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마중할 때 추장(酋長)인 유천간(留天干)을 망월도(望月島)에 보내서 기다리게 했는데 이때 봉화로 배에 신호를 한 것이 기원이라고 하니 거의 2천년에 이른다.

이러한 봉화가 국방에 이용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에 이르러서이며,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선로(烽燧線路)를 새로 확정하는 등 일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봉수제는 변경 지역의 위급한 정세를 중앙에 전달하는 동시에 인근 지역에도 알려, 피난은 물론 군인과 민간인의 합동작전을 통해 적을 격퇴시키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대는 대개 수십 리의 거리를 두고 높은 산의 봉우리에 설치하였는데,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서울 목멱산(남산)의 경(京) 봉수, 국경선 등의 변경 지역에 설치된 연변(沿邊) 봉수,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內地) 봉수의 세 종류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첫 발생지점에서 경봉수까지 최단거리를 잇는 직봉(直烽)과 직봉 중간 거점을 잇는 간봉(間烽)으로 나누기도 한다.

봉수의 간선(幹線)에 해당하는 직봉은 전국에 5개 지점을 시발로 하여 설치하였는데,  한반도 동남 방면은 경상도 동래에서 출발하였다.

봉수는 평소에 1거(炬), 변방이 위급한 상황이라든지 사태의 추이가 험악하게 진전될 때 2거, 적이 침입하여 머지 않아 전투가 시작되려고 할 때에는 3거, 적과 아군이 접전하여 전황이 급박한 상황에는 4거를 사용하여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날씨가 나빠서 봉수가 불가능할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서 연락하도록 하였다.

마산지역에는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에 대비하여 곳곳에 봉수대를 세웠는데, 그중의 하나가 진북면 정현리 봉화산(해발650m) 정상에 있는 봉화산 봉수대이다.

이곳은 남쪽으로 진해만 뿐만 아니라 함안 가야읍과 멀리 낙동강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진동면 요장리에 위치한 가을포 봉수대 또한 이미 세종 때에 서울까지 빠르면 2시간 안에, 늦어도 12시간 안에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봉수대의 하나였다.

회원 봉수대는 회원동과 석전동의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해발 150m) 정상부에 있으며 마산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함안과 진주 방면에서 마산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하던 요새였다.

<마산 봉화산 봉수대>

 

이 밖에도 가포동 뒷산에 있던 여음포(余音浦)봉수대, 멀리 거제도까지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구산면 남포리의 남포 봉수대, 내서 지역의 성황당(城隍堂) 봉수대 등이 있었다.

국가의 정치 군사적 목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운영되던 우역과 봉수제도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인터넷과 위성통신이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첨단 정보통신 기기들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다양한 성원들이 온갖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개인적인 삶의 모습은 물론 가족문화와 직업생활, 나아가 정보사회라고 하는 사회구조의 대전환 마저 이루어 내고 있다.<<<

철 / 당시 마산삼계초등학교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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