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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33) - 지방교육의 중심, 향교와 서원

by 허정도 2015. 1. 5.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8   지방교육의 중심, 향교와 서원

 

전근대사회의 교육은 모든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평등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예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양인 농민 이상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림의 떡이었다. 온종일 책을 끼고 살았던 양반들과 생업에 전력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이 형설지공(螢雪之功),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그들과 경쟁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반의 자제들은 서원에서 향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과거시험을 치르고 그들은 관료로 나아갔고 이로 인하여 경제적 기반도 확보할 수 있었다.

<창원향교의 전경 / 향교의 건물배치는 항상 성현의 배향공간인 대성전(사진 제일 뒤쪽 큰 건물)이 교육공간인 명륜당(가운데 큰 건물)보다 우위에 두도록 하였다. 구릉지에 위치하여 고저차이를 이용하였다. 사진 앞쪽에서부터 문루의 역할을 겸한 풍화루, 기숙공간인 동재·서재, 성현위패를 모신 동무·서무가 있다.>

 

-지방교육의 중심-향교에서-

교동, 교촌, 교촌동, 교리, 명륜동……. 이러한 마을 이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향교가 있었거나 지금도 남아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 나라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들며 유학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고 지방민을 교화하는, 곧 제향과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다.

성균관이 대학에 해당하는 중앙의 최고 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을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을 받는 지방 최고 교육기관이다.

지방의 또 다른 교육기관인 서원과는 기능과 목적은 같으나 서원이 사학기관임에 반하여 향교는 지방관청에 속한 관학기관 임에 차이가 있다.

향교의 발생은 고려중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지방교육제도로 정착한 것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건국한 조선이 들어선 다음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유교이념을 전파하여 지방통치를 잘 해내기 위해 전국 각지의 주, 부, 군, 현에 각각 하나씩 향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향교의 운영에 드는 비용이 막대했다. 국가는 이른바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여 지원하였으나 실제 수요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지방관청도 부족 분을 메우려 노력하였으나 향교 운영은 적자를 면할 수 없었고, 이러한 문제의 누적은 조선후기 향교가 쇠퇴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향교에 입학한 16세 이상의 학생을 교생(校生)이라 하였다. 교육기한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40세까지 향교에 머무를 수 있었다.

또 원칙적으로 평민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교생이 될 수 있었다. 생도들은 향교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의 호칭을 받고 다시 성균관에서 수학하여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교생의 정원은 고을의 크기에 따라 달랐는데『경국대전』에 의하면 부(府)와 목(牧)은 90명, 도호부는 70명, 군(郡)은 50명, 그리고 현(縣)은 30명이다.

교생은 신분에 따라 양반은 액내 교생(額內校生:정원내 학생), 서얼과 평민을 액외 교생(額外校生: 정원외 학생)이라 하여 차별을 두었으나,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으로 서얼, 평민이 정원내 교생으로 편입됨에 따라 기숙공간에 따라 동재 유생(東齋儒生: 양반), 서재 유생(西齋儒生:평민, 서얼)으로 구별하였다.

향교에서 교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관으로 큰 고을은 교수(종6품), 작은 고을에는 생원· 진사 출신의 훈도(종9품)를 두었다.

그러나 약 330개에 달하는 모든 군현에 이들을 파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식 관원은 아니지만 교수직을 수행하는 교도직, 학장(學長)이라는 이름으로 그 지방의 생원이나 진사 중에서 선발하여 충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초기부터 교수관의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이유는 문과에 합격한 자가 지방의 교수관으로 부임하기를 꺼렸고, 생원이나 진사들도 과거를 통한 중앙 관료 진출을 선호하여 교도직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교수관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유능한 학도들은 서원 등의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조선 후기 향교는 이로 인해 교육능력을 상실하고 문묘의 향사를 받드는 일로 관학의 면모를 유지하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경부터 향교는 수용인원, 교수진이나 교생의 질적인 면에서 점차 부진한 상태를 드러내다가 임진·병자의 양란을 겪은 뒤로는 건물과 인재의 손실, 재정의 궁핍 등으로 유명무실한 형편이 되었다.

게다가 서원의 성행은 향교의 쇠퇴를 부채질해 마침내 고종 31년(1894)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남한에는 231소의 향교가 남아있다.

 

-창원 향교의 모습-

창원 향교는 원래 고려 충렬왕 때 세워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창원 향교의 명륜당>

 

향교를 처음에 소답동에 세웠다가 성종때(1482) 합성동 내상리의 청룡산 아래로 옮겼다.

그러나 그 곳이 숭무(崇武)의 땅(地)이지, 숭문(崇文)의 땅이 못된다고하여 영조 25년(1749)에 부사 이윤덕에 의해 태을산(구룡산) 아래의 현 위치로 옮겼으며, 1761년 당시 부사 임익창에 의해 풍화루(風化樓)가 창건되었던 것이다.

향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25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향교나 서원의 뜰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행단(杏亶)이라 하여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입구에 ‘부사 이윤덕 이교불망비(異敎不忘碑)’와 ‘부사 임익창 풍화창건비(風化創建碑)’가 있어 향교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창원향교의 정문은 이층누각 풍화루(風化樓)이다.

보통 향교의 정문은 두가지 양식으로 지어진다. 하나가 문 세 개가 나란한 삼문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누각식이다.

누각식은 아래로 출입구를 내고 누마루는 유생들이 시부를 읊조리고 경치를 조망하며 학문을 연찬하기도 하는 장소로 쓰인다.

편액의 내용은 유교의 덕이 바람처럼 아래의 백성에게 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풍화루의 오른쪽 문을 통해 들어서면 정면에 명륜당이 듬직하고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나란하다.

향교건축은 고상한 선비의 기품처럼 단순 소박하고잘 균제되어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기능에 충실할 뿐 다른 장식이 배제되어있고 이 공간의 남북으로 중심선을 그어보면 양쪽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단정한 선비를 대하는 기분이 된다.

명륜당은 오늘날의 교실이자 교수의 숙식처이다. 동재·서재는 이름 그대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이다.

창원이 도호부임을 미루어 창원향교의 정원은 7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금 좁은 느낌이 든다.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들이, 서재에는 평민 자제들이 생활하였다.

명륜당을 돌아들어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내삼문을 통과하면, 대성전이 정면에 있고 그 앞의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이곳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곳이다. 이 세 건물도 대칭이 철저한 차분한 통일성과 조용한 엄숙함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향교처럼 우리지역도 평소에는 비어 있고 석전(釋奠)이나 제례 때 정도에만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밖진동면 교동리에 위치한 마산 향교가 있다.

원래 조선초 태종13(1413)에 이곳이 현으로 승격되어 설치된 ‘진해향교’가 그 원초였으나 순종3년(1909)에 현을 폐함에 따라 진해향교는 폐교되었다.

그후 ‘창원군 향교’로 개칭되어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가 1996년 진동면이 마산시에 편입됨에 따라 ‘마산향교’로 개칭된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진해에도 웅천향교가 있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것이다. 철거된 건물 중 일주문이 현재 창원 불곡사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어 향교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지방교육의 중심-서원으로-

서원은 향교와 달리 우리나라 선현만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조선 중종 38(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고려 안향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지어 안향을 기리고 선비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비롯되었다.

서원이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은 퇴계 이황의 서원 설립운동에서 비롯된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와서 서원에 대한 지원을 조정에 건의하는데, 이에 명종은 1550년 이를 권장한다는 뜻에서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액(額: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과 노비, 면세·면역의 특권을 내려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제 서원은 관학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많은 사림양반들이 이전보다 더욱 더 서원 건립에 열성을 기울일 수 있게된 것이다.

또 다른 서원의 확대이유로 사화(士禍)가 큰 계기가 되었다.

향촌에서 나름대로 학문을 연구하던 사림양반들이 중앙정계 진출을 시도하나, 당시 훈구파 실권자들과 충돌하여 큰 피해를 보는데 이를 사화라고 한다.

이후 사림들은 산간이나 고향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원은 향촌의 선비와 명망 있는 석학들이 연결되면서 체계적인 교육시설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서원은 동문, 사제관계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서 중앙 정계에서 쫓겨난 선비들의 재기 장소로 활용되었고, 붕당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위치적으로 서원은 향교와는 달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육적 효과를 높이고 절터에 많이 세워 불교를 억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서원의 건물 배치는 향교와 비슷한데, 일반적으로 전교당·홍교당 등으로 불리는 공부장소인 강당을 중심에 두고, 그 양옆에 기숙공간인 동재·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강당 뒤에 제사공간인 사우(祠宇)가 배치되어 있다.

입학자격은 서원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는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들어올 수 있었다.

한편 교육과 제사 외에 서원(書院)이란 명칭이 당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집현전 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된 것에서 보듯이 여러 서적을 수집, 보관하고 나아가 연구 성과와 선현의 사상을 서적으로 출판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의 도서관’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서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서원의 본래 기능이 변질하기 시작하였다.  특정 가문의 결속을 위한 문중서원이 많이 난립하게 되고, 그들의 조상 가운데 한 인물이 제향되면서 교육의 기능보다 사묘(조상숭배)의 기능이 더 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서원은 혈연·지연·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 경향으로 변질되었다.

한 면세·면역의 특권이 남용되어 국가재정의 부족을 초래하고, 백성에 대한 심한 횡포, 관학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국, 1864년 흥선대원군은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게된 것이다.

 

-우리 지역의 서원들-

무학산 계곡 일대의 서원곡을 찾아가면 서원을 만날 수 있다.

곳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15431620)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마산에 칩거하면서 두척산(무학산)의 경치에 매혹되어 서원골(書院谷)에 취백당(聚白堂)이란 정자를 지어 시·서를 강론한 곳이다.

1634년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청와를 덮은 정자를 세워 회원서원이라 했으나 뒤에 대원군에 의해 폐쇄되고 정자만 남았다.

이것이 바로 합포바다를 굽어 본다고하여 이름 붙여진 오늘의 관해정이다.

<마산 교방동에 있는 회원서원, 관해정>

 

지금도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3월과 9월에 한강과 그의 문하인 미수 허목을 제사지낸다. 

관해정 입구에는 정구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440년의 은행나무(높이 13M)가 있는데 은행나무가 교육기관의 상징임은 앞서도 말한바 있다.

허목선생은 예송논쟁 후 관직을 물러나 마산에서 저술편찬과 후진양성에 힘쓴 분이다.

또한 글씨(전서)에 능하여 동방의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그의 친필이 북면 달천계곡의 바위에 ‘달천동’이라고 음각이 되어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다.

한편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 만이 있어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창원시 사화동에 가면 좀 색다른 느낌의 운암(雲岩)서원을 볼 수가 있다.

1702년 운암사라는 사우였으나 1843년 서원으로 되었다가,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손된 곳이다.

100년이 넘는 회나무가 십여 그루 장관을 이룬 곳이다. 회나무를 심는 이유도 은행나무와 비슷한 맥락에서 심어졌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 때 삼괴(三槐)라 하여 조정에 회나무 세 그루를 심고 삼공(三公)의 자리를 나타냈으며, 당나라 때는 회나무 꽃이 노랗게 변하는 음력 7월 무렵에 과거를 보였다.

특히 낙양 동쪽의 회나무숲에서는 선비들이 손수 쓴 책을 사고팔고 강론을 하기도 하여 흔히 괴시라 불렀는데 이 일을 들어 대학을 괴시라고 일컬었으니 마당에 회나무가 선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마산시 해운동 월영대에 가면 월영서원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름만 남아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헌종 1846년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학덕을 기려 세운 것이다.

월영대는 고운 선생이 자주 들려 소요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월영서원의 원래 건물은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손되었을 것이라 여겨지며, 현재의 월영대는 1932년에 ‘월영대 비각’과 그 대문인 ‘척융문’, 그리고 두어 개의 기념비 등을 지은 것으로 본래의 건물과는 무관하다.

이 밖에도 문중가문의 성격을 띤 서원은 마산에 7곳 , 창원에 3곳이 더 있다.<<<

  이제욱 / 당시 창원여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