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7 4군 6진의 개척자, 최윤덕 장군의 묘가 창원에 있다
세종 때에는 최윤덕, 이천, 김종서 등의 활약으로 4군과 6진이 설치되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최윤덕 장군에 관한 내용의 전부이다. 장군에 관한 내용이 너무나도 짧아서일까, 대개 수업시간에도 교과서만큼이나 짧게 언급을 하고 다음 단원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우리 학교 1학년 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최윤덕 장군에 대한 인지도와 인물사 학습에 대한 경험을 조사해 본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역시 현 역사교육의 수준과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장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학생과 창원에 장군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은 각각 9%에 불과했다.
중학교에서 역사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그 시대를 이해하는 인물사 학습의 경험이 있는 학생은 대략 25% 정도였으나, 그 역시 간단한 조별 발표를 통해서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비디오 시청을 통해서라는 의견이 조금 있는 수준이었다.
결국 대다수의 중학교에서는 인물사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입시위주 교육으로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고등학교의 역사 수업은 이보다 더 심각할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인물사 학습을 통한 역사교육은 올바른 인물관과 가치관을 키워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결과이다.
단지 사실의 나열만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학습으로는 가치관과 역사의식 함양이라는 역사교육의 진정한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지역 인물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학교의 향토사 학습과 인물사 학습에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우리 지역 출신의 명장 최윤덕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명나라와의 사대관계 속에서 자위를 위한 독자적인 군사행동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야인들의 침략이 빈번하여도 그 근원을 뿌리뽑는 응징이 어려웠다.
이러한 때에 북벌을 단행하여 북방 야인을 크게 물리쳐 재침을 근절시키고, 변방의 안정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 최윤덕이다.
최윤덕은 고려 우왕 2년(1376) 경남 창원시 북면 내곡리 무동 마을에서 최운해 장군과 이씨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 세 살 되던 해에 화살 한 촉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이「국조명신록」에 전해지며, 열 네살에 당대의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권근의 문하에서 학문과 병법, 무술을 동시에 익혔다.
최윤덕은 19세 되던 1394년 갑무과에 합격하여 함길도의 이성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고 이성 순무사로 있던 아버지 최운해 장군 밑에서 2년동안 국방의 임무를 다하였다.
21세되던 해에 경상도 영해의 반포에 침범해온 왜구를 경상도 병마도절제사로 전임한 아버지와 함께 크게 섬멸하였다.
반포에서의 승전은 최윤덕이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태종의 신임을 얻게되어 종5품 부사직을 제수받았다.
1404년 아버지 최운해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양장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최윤덕은 당시 효도의 덕목인 3년 상을 마치기도 전에 태종의 명을 받고 다시 조정에 나와야 했으니, 그만큼 최윤덕은 태종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종 원년(1419) 삼군도절제사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고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온 최윤덕은 늘 세종에게 성을 튼튼히 쌓아 적을 막을 것을 진언하였는데, 53세(1428)에 병조판서가 된 후에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세종임금께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 연안과 동북, 서북 양도의 북방 변경에 성을 쌓을 것을 진언하였다.
그는 후일 우의정,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연안과 변방으로 내려가 성을 쌓아 그의 소신을 실행했으니, 세종은 그에게 ‘축성대감’이란 별명을 내릴 정도였다.
세종15년(1433) 야인 이만주가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을 건너 침입하여 인민을 학살하고 곡물을 가져가므로 장군이 삼군도절제사로서 평안·황해 2도 군병 일만 오천 명을 거느리고 북벌을 단행하여 야인을 격퇴하였다.
세종은 그 공으로 무인으로서는 예를 찾아볼 수없었던 우의정 벼슬을 내렸는데, 이를 반대하는 관료는 없었다.
오히려 맹사성 등 대신들은 “최윤덕은 공평하고 청렴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조심하여 나라 일에 힘써 바치는 사람이니, 비록 수상을 삼을지라도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으니 그의 인품을 능히 헤아릴 수 있다.
실록을 보면 정승이 되어서도 고향 창원을 다녀갈 때에는 나귀 한 필에 종자 하나만을 거느리고 다녔다 하니 그의 검소함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우의정이 된 후에도 최윤덕의 국방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다시 서북면 일대가 시끄러워지자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란 직함을 받고 임지로 떠나서 북면을 평정하였다. 이듬해 사직소를 올리나 세종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종 17년(1435) 마침내 최윤덕은 좌의정에 오르나, 두 번째사직소를 올리니 이때 그의 나이가 60이었다.
어진 사람은 영광된 때에 물러나야 일신의 욕심과 후세의 비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무신은 오로지 국방의 무거운 책무에만 전념해야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굳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번에도 최윤덕의 사직을 허가하지 않았으니,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종은 항상 그를 ‘나의 제갈 공명’이라 일컬었고, 이러한 임금의 지극한 신임 아래 국경을 북으로 압록강까지 밀어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으니, 세종이 있었기에 최윤덕이 존재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윤덕 또한 그럴수록 조심하고 자중하여 무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으니 이를 통해서도 그의 인격과 인품을 새삼 우러러 보게 된다.
그 후 최윤덕은 다시 60의 노구를 이끌고 평안도 도안무찰리사가 되어서 북면으로 떠나 야인들을 평정하였다.
<사군경역도>
-오직 국방에만 전념했던 무인-
세종 26년(1444) 최윤덕이 병석에 눕게 되자, 세종 임금은 어의까지 보내 그의 병을 돌보게 했으나 이듬해(1445) 70세의 나이로 세상을떠났다.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예관을 명하여 조상(弔喪)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미두(米豆) 7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주고 시호(諡號)를 정렬(貞烈)이라 하였으니, 청백(淸白)하게 절조(節操)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공이 있어 백성을 편안히 한 것이 열(烈)이다.윤덕은 성품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간소하고 평이하며 용략이 많아서 일시(一時)의 명장이 되었다.
장군의 묘소는 창원시 북면 대산리 갈전마을 동북쪽 구릉으로 어머니 묘소에서 50m 아래 남향으로 안장되어 있다.
<최윤덕 장군 묘역>
1992년 10월 21일 지방 기념물 제 121호로 지정된 장군의 묘는 조선조 초기의 방형묘로 이 부근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분묘이다.
속칭 사리실(대문 없는) 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어떤 집에도 대문이 없기 때문에 대문 없는 민속마을이 되어 있다.
도둑이 와서 소를 몰고 가면 밤이 새도록 가도 날이 새면 사리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잡히기 때문에 장군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공의 정려각은 창원시 소답동(구 창원읍 동문 밖)에 있고, 1996년에 건립된정열공 최윤덕 장상 신도비가 창원시 용지공원에 있다.
최윤덕 장군이 싸움에 임할 때의 군령은 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적진에 나아가 어린이와 노약자와 부녀자를 죽이지 말것.
2. 적의 개나 닭 등 가축을 훔치는 자는 군율에 따라 처단한다.
3. 적이라 할지라도 항복하는 자는 해치지 말라.
4. 부녀자를 폭행하는 자 또한 군율에 의해 처단한다.
문명이 발전했다는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도 양민 학살, 무차별 폭격에 따른 민간인의 살상 등 전쟁의 폐해가 극심한 것을 볼 때에 최윤덕 장군의 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신을 오로지 국방의 임무에만 머무르게 하소서.”라고 밝힌 그의 무인으로서의 신념은 군부 쿠데타로 얼룩진 우리의 현대사를 돌아볼 때 더욱더 빛난다고할 수 있겠다.
역사적 인물의 생애와 가치관을 통해 책임의식과 비판정신을 기르는 올바른 역사교육이 있었다면 우리의 현대사가 군부에 의해 그토록 짓밟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지역에서 최윤덕 장군과 같은 인물이 났음은 큰 자랑거리이며, 최윤덕 장군은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장군이 두 번에 걸쳐 세종임금께 올린 상소를 통해 무인으로서의 그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
신은 매양 생각하옵기를 의정(議政)의 직책은 본시 용렬한 인품이 얻어할 바 아니며 국사의 옳고 그릇됨을 다스리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은 무신이 헤아릴 바아닙니다. 그러하오나 외적을 막아서 북방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이 마땅히 이 몸이 다할 때까지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야 하겠사오니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옵서는 신의 벼슬자리를 해면하여 주시고, 어질고 능한 사람으로 대신하여 주시면 이보다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창원시청 앞 중앙로에 서있는 최윤덕장군의 상>
예영주 / 당시마산 구암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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