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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7) - 마산의 심장, 어시장

by 허정도 2015. 2. 2.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2 마산의 심장, 어시장

 

어시장은 마산의 심장이다.

어시장의 성쇠와 마산은 하나다. 어시장이 살아 숨쉴 때 마산은 피가 끓는 청년이 된다.

어시장의 하루는 아직도 밤이 깊은 새벽 34시부터다. 너른마당의 새벽시장에는 시골에서 지은 채소를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내리는 할머니, 전날 오후 잡은 게 한 동이를이고 나와 앉은 아주머니, 집에서 만든 고추장, 된장, 된장에 박은 고추를 수북히 담아 들고 나온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건어물가게 주인들은 멸치, 꼴뚜기 등을 수북히 담아 가게 앞에 진열하기 바쁘다.

대풍골목 앞 공터에는 횟집주인들이 56시경이 되면 수십 대의 물차에서 펄떡펄떡 살아있는 히라스(부시리), 광어, 농어, 숭어 등 제철 횟감을 구입하기 위해 손수레(딸딸이)를 끌고 나온다.

<마산 어시장 내에 있는 진동골목의 아침풍경>

 

동 골목에는 처마마다 내건 백열등 아래 전날 냉동고에 보관한 도미, 민어, 대구, 참조기 등 제수고기를 진열하는 손길이 바쁘고, 진동아지매는 일찌감치 경매 본 활어를 내 놓고 자리를 잡는다.

바다를 끼고 있는수협 본소와 남성공판소, 잠수기수협 경매장에는 중매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손가락 내기가 한창이다.

경매시간부터 경매장 인근의 바닷가는 어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국내산·수입산 냉동어류며, 선어를 파는 손길이 바쁘다. 남성동 공판소 중매인은 퍼덕거리는 아귀, 대구, 메기, 새우를 상자에 담고 손님들과 흥정을 시작한다.

이 시간 어시장은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손길과 발길이 바쁘다.

골목마다 셔터여는 소리, 짐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소리, 수레 끄는 소리,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는 살아있는 삶을 느끼게 한다.

새벽 어시장은 파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는 사람들도 활기를 느끼게 한다. 어시장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자가 만나 삶의 냄새를 만들어 낸다.

시장은 모든 사람의 삶이 살아 숨쉬는 곳이면서 역사의 줄기에서는 가려지고 묻혀있다.

역사를 움직여온 수많은 민중의 살아있는 생활사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시장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자가 만나는 곳이며 유통되는 곳이다.

하지만 단순히 물자만 교환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환이 이루어진다.

특히 한 지역의 사회 문화적 양상과 생활상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민중의 삶의 방식, 즉 민속의 집결소라고할 수 있다.

<구마산 시장의 건·염어점 / 한국수산지 제2집>

 

-조선후기 마산 어시장-

마산어시장은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어물 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남해의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시장은 육로를 중심으로 한 장시와 해로를 중심으로 한 포구 두 가지 형태로 발달하였다.

마산 어시장은 마산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장으로 발달하였다.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하였던 마산포가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공납을 쌀로 받는 대동법 때문이었다.

대동미를 효율적으로 운반하기위해 1760년(영조36년)에 설치한 마산창은 인근의 대동미를 마산포로 집결시키면서 마산포에는 인근지역의 관원은 물론 객주, 여각, 경강상인을 비롯한 각지의 상인, 이웃 촌락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로 바다를 통한 전국적인 유통이 가능해 지면서 육로의 장시와 연결되면서 더욱 성하게 되었다.

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장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을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로 변모시켰다.

당시 마산의 인구가 7,898명으로 창원부의 다른 면의 인구보다 대략 1,8003,500명 많을 정도였다.

창원에는 마산포외에도 지이포, 사화포, 합포, 여음포가 있었지만, 수천 척의 선박이 정박가능한 마산포가 중심포구로서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해상유통의 중심포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마산포의 시장권은 마산창의 관할구역이었던, 창원, 함안, 칠원, 거제, 진해, 웅천, 의령 동북면, 고성 동남면이었다.

이들 지역의 곡물과 기장, 울산, 평해, 강릉, 영해, 함흥 등지의 어물과 마포가 유통되었다.

특히 원산포에 집하된 북어가 마산포를 경유하여 충청도 은진 강경포까지 유통된 것을 볼 때 마산포가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포 외에도 동래의 부산포, 김해의 칠성포가 경상도의 해상유통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마산포는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포구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운과 영남 남해안과 호남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5일장에서 상설시장으로-

조선 후기 마산장(어시장)은 매월 음력 5·15·25일에는 새강(지금의 오동동 어시장 부근)에서, 음력 10·20·30일에는 구강(산호동 용마산)에서 정기적으로 장이 열렸다.

쌀, 보리, 콩, 조, 면화, 어류, 마포, 모시, 비단, 종이, 유기, 소, 과실, 연료, 호초석 등 다양한 물목이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산장의 규모는 매우 커서 1800년대 말 마산 선창의 객주가 130여호였으며, 1890년에는 어물과 곡물을 실은 수백 척의 상선이 출입하여 해안에 빈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26년 마산장은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 건물이 들어서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이에 따라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새강과 구강 두 곳에서 열리5일장은 새강(어시장) 한 곳으로 모아지면서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히 부정(부림동), 수정(수성동), 원정(남성동), 만정(동성동), 석정(창동) 등의 바깥도로에 수많은 난전이 평일에도 부정공설시장과 연결되어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5·10의 장날에는 인근 5리에 있는 장꾼과 장보러 나온 인근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림시장과 어시장의 취급품목과 공간이 구분이 뚜렷해진 계기는 합포로가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부림시장(1937년) / 5일장이던 구마산시장은 1926년 부정공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상설시장이 되었다>

 

공간이 분할된 이후 부림시장은 의류, 채소, 과일, 식품, 과자, 식기 등의 일용잡화 시장이 되고, 어시장은 생물, 건어물 시장으로자리를 잡았다.

당시 어시장은 현재 건어물상이 밀집한 곳인 동굴강과 어선창에서 부림시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부로 승격한 마산부에 철도가 부설되어 마산장은 또 한 번의 획기적 발전계기를 맞게 되었다.

통영 등의 인근 어촌의 수산물이 마산의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면서 마산장의 주요 물목은 수산물이 차지하게 되었다.

어종은 대구, 청어, 정어리, 멸치, 갈치, 새우, 명태, 문어, 해삼, 성게였으며, 대부분 말리거나 염장하여 거래되었다.

 

-대구와 북어포-

대구와 북어포는 마산 어시장의 대표적인 어물이었다.

대구의경우에는 동지에서 대한 사이에 주로 진해만에서 잡았는데, 년간 어획고 300만∼500마리 중 120만 마리가 마산포를 통해 거래되었다.

성어기가 되면 어항에서 매축지까지 대구가 쌓여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역이지만 구마산역에는 전국 13도로 운송될 대구가 산적해 있었다고 한다.

명태는 마산이 산지가 아니었지만 동해북부에서 잡은 것을 들여와 가공한 북어포를 판매하였다.

마산에서 만들어진 북어포는 조선인이 만든 명태어주식회사에서 창녕, 의령, 삼가, 합천, 진주, 사천, 고성 등의 경남일대의 유통을 담당했다.

회사가 1년간 취급하는 수량은 약 1천 톤에 달하며, 1톤에 9원 내외로 잡는다면 예상액은 100만원 이상에 이르렀을 것이다.

1929년 마산만의 수산물 거래액이 년간 500600만원으로 추정할 때 북어포 거래는 마산의 주요한 거래물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 상거래를 주도하는 상인인 건어물 객주의 경우, 마산을 대표하는 객주는 멸치객주라 할만큼 멸치가 유명했다.

건어물점에는 멸치 이외에도 명태(북어), 대구, 가자미, 도미, 갈치, 문어, 상어, 가오리, 해삼 기타 패류에는 전복, 대합, 새고막 등을 팔았다.

19244월에 건어물을 경매하기 위해 조합원 수 40여 명의 ‘마산전온판매조합’이 설립되었다.

여기서 경매되는 어종은멸치, 뽈래기, 새우가 주품목이었다.

해방되기 한해 전인 1944년 마산수협의 전신인 마산어업조합이 설립되었다. 마산어업조합에는 위판시설을 기반으로 74명의 중매인과 30여명의 객주가 자금선대업을 하였다.

어종은 고등어, 정강어, 갈치, 생멸치, 대구, 조기, 잡어이다. 1950년대만 해도 멸치와 대구는 여전히 최고의 물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70년대 어시장의 철따라 집산되는 어획물의 종류는 봄 3월부터 5월까지 숭어, 도다리, 조기, 도미, 뽈래기, 여름 6월부터 8월까지는 감싱이, 갈치, 정강어, 고등어, 가을 9월부터 11월까지 칼치, 조기, 고등어, 정강어, 12월부터 2월까지 대구, 명태였다.

2002년 겨울 어시장의 주요 거래 어획물은 아귀와 물메기이다.

70년대만 해도 버리던 것이 최고 인기 어종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는 환경오염과 어자원의 감소 현상으로 인해 먹는 종류가 바뀌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잡는 어종은 생태환경, 어자원의 양, 상품성에 따라 역사적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변화요인에 따라 해양생물의 종류와 포획빈도가 변하는 것이다.

 

-어시장, 만남의 공간으로-

마산창의 설치로 대포구로 성장한 마산포는 시대의 변화와 그 궤적을 같이 한다.

항해술과 해운술의 발달과 더불어 경상도 동해안과 남해안을 연결하고 낙동강 수운과 영남 남해안과 호남 남서해안을 연결하는 해로유통권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하였고, 철도가 부설되면서 통영을 포함한 남해안 수산물의 전진기지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1966년 양덕동에 한일합섬과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선 수출자유지역으로 마산의 인구증가와 자본의 유입은 상업의 발달을 더욱 부추겼다.

이런 마산 어시장은 경남의 중추로서 마산 경제의 한축을 담당해 왔으나 최근 어시장의 위축은 마산의 미래를 위해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문제이다.

어시장의 위축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대형할인점의 등장이다.

주부들의 소비패턴이 변화하고 구매의 편리함과 다양성을 장점으로 하는 대형할인점과의 경쟁은 어시장에게는 힘겨워 보인다.

둘째, 도로망의 변화이다. 철도 등의 교통의 변화에 힘입어 발전하였던 어시장이 이제는 새로운 도로망의 확충으로 유통의 중심축으로의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진고속도로의 개통과 남해고속도로의 창원우회도로의 개설, 창원터널과 안민터널의 개통 등은 유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마산의 기능을 많이 축소시켰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마산만의 매립으로 인한 공간의 지나친 확장도 한 이유이다. 공간이 넓어짐으로서 상인간의 유대감이나 상인과 고객 간의 친밀감이 사라지고, 시장전체의 짜임새도 훼손되었다. 따라서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넷째, 과거에는 한 장소에서 거래되었던 채소와 과일, 수산물시장이 분리된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전문화와 현대화한 시장이 오히려 다양성을 손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전문화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마산어시장 전어 축제>

 

앞으로의 어시장은 규모의 확대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과거의 어시장이 가졌던 사회적 교환의 장소로 되돌려야 할 것이다.

최근의 ‘마산 어시장 축제’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으로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일 지도 모른다.<<<

 

이경미 / 당시 경남대학교 사회과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