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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9) -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by 허정도 2015. 2. 16.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4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

 

역사 연구에도 일종의 흐름이 있다. 술과 같은 음식문화도 그런 흐름을 타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사실 유교주의적 학문 세계 속에서 먹는 것이라든가 입는 것, 또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분야는 늘 소외되어 왔다.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 굶어죽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인 반면, 의리를 잃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역사에서는 국가나 민족, 이념, 엘리트 등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 생활 그 자체 역시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최근에 이르러 인문학자들에게 중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음식문화는 국가라는 단위보다는 대체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지역사회를 이해하는데 좋은 재료가 된다.

마산 지역 사회는 해산물과 농산물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있고,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접점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매우 독특한 음식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를 통해 이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종래와는 다른 역사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고대 의례 중에 제천의식이 있다. 여기에서는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곧 음주가 하늘에 대한 제사 의식에서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곧 술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매개물로 인식하였으며, 이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도 각종 의례에 빠짐없이 술이 등장하였다.

 

-술에 대한 기억들-

마산 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이곳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 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儒仙)이 읊조리던 축대라 말한다..... 주객은 만날 때에 여러 번이나 잔을 든다”라고 읊었다.

두 사람 모두 바다와 산, 그리고 바위가 어우러진 마산의 풍광, 특히 유선으로 불린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 주변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시로 묘사하였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남긴 시에도 월영대와 술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숙종 때에 행정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김이건이라는 사람은 “조창에서 곡식을 싣고 출발하기 전에 위로의 마음으로 음식을 내려주고 포구에서는 기생들이 춤을 추어”라는 조금 색다른 시를 남겼다.

조운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한양까지 가는 일은 앞길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하였다.

그러므로 저와 같이 관청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춤까지 추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술이 항해의 안전을 축원하는 용도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요정 망월관 (1908년)>

 

마산 지역 사회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술과 관련된 기록은 저 정도이지만, 1899년의 개항 이후에는 각종 기록, 특히 일본인들인 남긴 자료 속에서 술과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마산 지역에 진출해서 주목한 것은 좋은 물과 기후, 그리고 인근의 풍부한 물산이었다.

곧 양주업을 하는데 최상의 곳이라고 판단하였다. 예를 들어 물의 경우 마산의 물은 감로수와 같다고 평가하였다.

무학산 뒤편에 자리한 감천리의 물로 막걸리를 빗으면 청량 사이다와 같다던가, 세찬 완월 폭포의 물을 기관차에 넣으면 오르막길도 힘차게 올라갈 정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물에 대한 믿음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산 시내의 샘물 중에서도 광대바위 샘물(일명몽고정)을 비롯한 몇 곳의 샘은 1911년의 총독부 검사 결과 가장 우수한 샘물로 인정을 받았다.

물론 이 샘들은 1919-20년에 마산을 비롯한 전국을 휩쓴 콜레라 발생 이후 공동수도가 생기는 바람에 쇠퇴하였지만, 아직까지도‘물 좋은 마산’이라는 별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일제 강점 이후 일본식 술인 청주의 재료는 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야 했다.

마산 인근의 고성, 김해, 창원과 같은 넓은 들에서 필요한 쌀을 공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는기후도 술을 빗기에 좋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일본인만이 알았던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남부 지방은 조선조 말기에도 술도가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전통식 주조장은 전국에 모두 155,000개였는데, 이 중 경상남도에 22,853개, 경상북도에 26,298개가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 경기도와 전남 및 충남에 각각 1만여 개, 그리고 북부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대략 4,000개-7천 개 정도가 있었다.

곧 남부가 많고 그 다음이 중부, 그리고 북부의 순이었다.

조선시대의 술 제조 양도 남부 지방이 우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인도 결국 물산과물, 그리고 기후 탓이라고 생각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술 제조는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전략-

마산 지역이 술의 생산지로 양호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곧바로 술의 주생산지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재정수입 확보라는 식민지 경제전략이 마산을 술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사실 조선시대의 술은 대부분 주막과 같이 음식점과 숙박시설을 겸하던 곳에서 생산되거나 자가 소비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확보라는 측면보다 그야말로 음식의 일부였던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에 주세법을 제정하여 자가 제조의 술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술을 만드는 원료인 누룩에 대해서도 해당되었다. 누룩업을 통제하여야만이 주조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누룩제조조합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누룩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조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누룩은 대개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하였고, 일부는 경남지역에서와 같이 사원의 승려가 부업으로 이를 제조 판매하는 형국이었으나 이런 방식은 점차 소멸되었다.

새로운 일본식 주조 기술이 도입되었고, 이를 지도하기 위해 각 지방마다 기술관이 파견되었다. 또 주류협회를 조직한 다음, 이곳을 재정담당 관료가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34년에 이르면 주세는 국가 세입3할을 차지할 정도로 그 비율이 높아졌다.

또한 개항 이후 마산지역에 형성된 일본인 사회도 마산의 술 산업을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이 마산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러일 전쟁 이후였는데, 이때 이미 술 공장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1911년에 이르면 일본인이 세운 술공장이 14개나 되었다. 그와 더불어 술의 주종목도 서서히 바뀌어 갔다.

일본인들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청주가 한국 사회에 도입되었다. 여기서 청주란 우리가 흔히 회집에 갔을 때 따근하게 데워달라고 주문하는 정종을 가리킨다.

이후 마산 지역에서 주로 청주를 생산하는 술 공장은 주인이 변하고 공장의 증감이 있기는 하지만 위의 숫자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들 청주업자들은 동업조합을 만들어 시내의 신사(神社)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모여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이들은 청주 질의 향상에도 힘을 쏟은결과 1920년대 초에는 일본에서 더 이상 청주수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930년대 중엽에 이르면 마산은 전국에서 최다의 술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지역 내 시장이 커진 탓도 있지만, 만주라는 큰 시장을 목표로 삼았던 덕도 있었다.

이것이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가 만주까지 ‘진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식 술 생산체제가 뿌리를 내리는 것과 병행하여 한국 술의 전통적 자가 생산 체제도 공장 생산 체제로 바뀌었다.

마산에서 탁주 회사가 설립된 것은 대략 1920년대 후반인 듯한데, 이후 주식회사나 합자회사 형태의 탁주회사가 주로 창동 일대의 마산포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청주 공장이 대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신마산 지역이나 중앙동, 장군동 등 중앙 마산 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진 것과 대비된다.

탁주 회사 자체가 대규모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므로 당연히 생산량도 증가하였으니, 1928년에 1,500(1석은 약 큰 말로 10斗)이던 것이 1938년에는 약 5만석으로 증가하였다.

술 제조업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산업으로 인식된 것이다. 마산 술 산업의 성장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 경제에서 마산 지역이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청주와 탁주-

일제의 경제전략으로 술 산업이 발전하면서 당시의 조선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도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의 술 정책이 농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면 191943일에 있었던 삼진 만세 시위 때, 연도의 마을에서는 각자 빚은 술을 시위대에게 제공하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만든 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국가의 통제 정책에 따라 집마다 전해오던 특별한 술이나 지방색이 강한 술은 사라져 갔다.

이 때문에 당시의 농민들은 오늘날 술맛은 변해있고 즐거움도 그만큼 줄어 들었다고 한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을 쓴 뒤 마산에 내려와 살던 장지연도 하루종일 술을 마시면서 세상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성동의 석교(石橋)양조장이라는 청주 공장에서 만든 대전 정종(大典正宗)이라는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우국지사라고해도 일본 술에 익숙해있었던 셈이다.

사실 일제 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 중에는 마산의 술이 이름났던 이유를 꽃 속에서, 그리고 마산만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특히 조계지를 가로지르는 대곡천(大谷川) 가에는 유명한 고급 술집과 함께 벚꽃이 화려하였기 때문에 꽃필 무렵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을 위해 만든『관광의 마산』이란 팜플렛 표지에는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일본풍의 술통과 벚꽃이 흐드러진 곳으로 마산을 그리고 있다. 마치 이상향과 같은 이미지이다.

<마산부에서 관광안내서로 간행한『觀光の馬山』의 표지이다. ‘술과 꽃의 도시’마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이다.>

 

지금도 그 당시에 명성을 떨쳤던 고급 술집이 마치 폐허처럼 남아 있지만, 이곳은 일본에서 들여온 기생과 음악, 멋진 음식과 술로 인해 마산의 명사들이 모이던 사교장 역할을 하였다.

마산포 일대에도 전통적인 조선식 술집과 더불어 중국식 술집, 그리고 일본식 술집 등이 잇따라 생기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여러 술이 민족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공존하는 새로운 술 문화가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식 청주는 지역의 ‘상류인사’에게 고급스런 술집에서 마실 수 있는 술로 선택되었던 것 같다.

국가의 기술감독, 기술자 초빙 및연구실 설치, 품평회를 통한 질의 향상, 그리고 고도의 영업전략 등 모든 수단이 동원된 결과였다.

이에 비해 영업전략을 갖지 못한 탁주는 그저 그런 술집에서 ‘보통의 한국인’들이 먹는 술로 인식되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위생이나 뒷맛 등의 이유를 들어 탁주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산 거주 한국인들도 대체로 고급스런 청주와 그렇지 못한 탁주라는 술의 위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물론 해방 뒤에도 변형된 채 이어졌지만 술의 도시 마산이라는 명성은 점차 쇠퇴하였다.

일본인이 물러가면서 그들이 즐겨 마시던 청주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일본인에 의해 이식된 주조 기술이 한국인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해방 이후의 식량난도 주조업에 타격을주었다. 술을 만드는데 쌀을 사용하기가 점점 힘들어 졌던 것이다.

근대기 마산의 술 산업은 본래 식민지 당국의 재정정책과 통제, 일본인 이주자들의 욕망, 지역의 자연과 물적 조건, 그리고 이에 부응한 지역사회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어우러지면서 마산 사회의 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유장근 /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