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3 귀환동포와 하모니카촌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한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깊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광복군을 길러 연합군의 당한한 부대로 참전하려던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버린데 대한 통한의 눈물이었다.
조국 해방의 주체가 한국민이 아니고 외세였을 때, 그 외세의 간섭이 조국의 운명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 염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항복 소식에 국내외의 동포들은 감격에 벅차 있었지만 상황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여운형 중심의 중도계열 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여 치안을 맡고, 일본인들의 재산을 관리하며, 심지어 해외동포들의 국내 귀환을 위한 배까지 보내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9월 들어 미국은 군정을 선포함으로써 건준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1945년 9월 9일, 남한 전역엔 일본 국기가 미국의 성조기로 교체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체제로 군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포고문에서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는 엄히 다스리겠다고 했다.
심지어 제2포고문에선 “미 상륙군에 항의하면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인의 환영도 금했으며, 그것을 모르고 환영 나간 한국인을 인천에서 사살하기도 했다.
미군정은 통치경비 조달을 위해 당시 국내 전 재산의 70%나 되는 적산을 불하했는데, 연고자에게 우선적으로 불하하는 원칙을 정함으로써 친일파들이 훗날 한국 경제의 주역이 되게 했다.
그것은 미군정의 통치 목표인 ‘반공 친미 권력’의 형성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해외로부터 부푼 꿈을 안고 온 200만 귀환 전재민(戰災民)들, 특히 구호대상인 100만 동포들의 고통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호법이란 일제 말의 조선구호령이나 군정이 응급으로 내놓은 훈령 정도였으니 수용시설이나 구호물자의 체계적 공급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다 미군정은 통치비용을 많이쓰기 위해 불환지폐를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켰다.
1948년 8월 15일 출발한 한국 정부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일제가 이 땅에서 형성한 거대한 재산은 일제에게 착취당한 가난한 민중들 구호에 쓰여져야 할 텐데 이승만 정부도 ‘재조선 미군정청이 이미 행한 처분을 승인’함으로써 빈민구호는 외면하고 친일파들 재산만 불려주는 일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직후에는 많지 않았던 전재민들이 이듬해 1·4 후퇴 후 크게 불어났다.
1952년 통계엔 전국의 전재민이 3,935,152명, 이 중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3,040,389명, 그러나 구호시설에 수용된 사람은 겨우 399,739명이라고 적혀있다.
<전쟁 초기 전투 상황도>
이승만 정권은 전재민들 구호보다 권력 유지에 더 몰두했다.
전쟁 초엔 ‘정부는 서울에 머물겠다’고 속이고, 한강다리조차 끊어버린 뒤 권력 수뇌부들만 후방으로 피신하더니, 부산 임시 수도에선 온갖 권력 연장 음모를 자행했다.
‘발췌개헌안 (대통령 직선제안)’ 통과와, 이승만의 삼선을 위한 ‘사사오입’ 파동이 그것이다.
한편으론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을 일으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미군의 양민 학살과 짝을 이루었다. 이런 정국에서 전재민들은 피난민 임시 수용배치법(1950.8 제정) 이 있긴 했으나 제대로 보호받을 리 없었다.
구호 위원회가 조성되어 한국 공무원과 UN 민사원조처 직원들이 활동했으나 여러 나라에서 온 구호품들도 힘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함으로써 전재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쥐꼬리 만큼의 배급에 불과했다.
-귀환동포, 그들은 우환(憂患)동포였다-
8·15 후 해외로부터 귀환하여 마산에 온 전재민의 수는 약 2만 5천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로 마산 인근의 농촌인 창원군, 함안군, 의령군 등의 출신들이었다.
귀국 직후엔 연고지로 갔으나 가난한 농촌 현실 때문에 도시지역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신포동과 월포동, 중앙동 등에 있었던 일본군 창고와 노동자들의 숙소, 그리고 회원동에 있었던 일본군 말 사육장의 마구간에 들어갔다.
처음엔 한 창고 안 15~20가구가 칸막이도 없이 살았다. 밑바닥엔 헌 가마니나 짚, 판자조각 등을 깔았고, 비가 새는 지붕 밑에서 누더기 같은 이불이나 담요를 덮고 잤다.
조금 지나면서 판자를 주워다 칸을 막으니 그 모양이 하모니카 같다 하여 회원동 하모니카촌이라 불렀다.
<중앙동 빈민촌 모습>
어른들은 주로 막일품을 팔았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장사나 구두닦이, 심지어 넝마주이를 하거나 구걸하러 나서기까지 했다.
선창에는 생선내장이라도 주워가려는 귀환동포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소금장수의 빈 가마니를 사서 그 속에 붙어있는 소금을 털어 모아 내다 팔고 가마니는 방앗간에 팔아 돈을 만들었다고 월포동에서 회원동으로 옮겨가 살았던 김순두 (80세. 여) 씨는 증언했다.
“회원 뒷산 (무학산, 봉화산)엔 하루 3,4백명씩 나무꾼들이 깔려있었지,” 귀환동포가 아니면서 30년 가까이 그들속에서 살았던, 회원동 토박이 정덕현 (65세)씨의 말이다.
여자들은 운이 좋으면 방직공장이나 제지회사, 성냥공장 등에 취업했고, 아니면 빈 논밭이나 산과 들로 다니며 이삭도 줍고 나물도 캐고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귀환동포 치고 얻어먹거나 도둑질해보지 않은 사람 별로 없을거요” 신포동 주공아파트 노인정에서 만난 이순환 (67세)씨의 말이다.
월포동 창고에서 살았다는 전판수(66세, 창원시신월동), 조용기(66세, 마산시신월동) 씨 등은 창고 건너편 역 근처의 소나무밭에서 목을 맨 시체들을 몇 번 봤다고 한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그들은 지혜를 발휘했다.
창고의 콘크리트 바닥 한 부분을 깨고 그 밑 부분의 흙을 넓게 파낸 다음 솥을 걸고 불을 때어 잠을 자니 콘크리트를 구들로 활용했고 큰 깡통을 주워다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고 편 것 여러 장으로 견고한 지붕을 만들고, 시멘트 부대나 비료부대, 그리고 콜탈을 주워와서 루핑을 만들어 창고 처마에 덧대어서 집을 늘리기도 했다.
마산에도 건준이 결성되었다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전국 상황과 같이 곧 군정관이 들어오면서 활동이 중지되었다.
뒤이어 마산군정청이 서고, 고문역이지만 한국인 시장도 선임했으나, 미군정의 통치목표는 미국의 이익 실현에 있었기 때문에 전재민들 구호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한국전쟁을 맞아 오히려 살기가 나아졌다.
구호식량이 전보다 많이 나왔고, 전쟁물자 하역작업으로 일거리도 많아졌다.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를 끓여 만든 소위 ‘꿀꿀이죽’이 싸서 빈민들의 배를 채우기가 좀 나아졌다. 또, 군복이나 군화 같은 것도 시중으로 흘러나와 빈민들에게 싼값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 고통이 생겼다. 담장 하나 사이인 월포국민학교에 미군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이 밤만 되면 전재민 촌의 부녀자들에게 접근해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위책으로 부녀자들을 창고 가운데 눕히고 남자들이 가쪽에 둘러 누워 차례로 지키다가 미군이 나타나면 깡통을 두들겨 온 마을사람을 깨웠다.
그런 일은 회원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창고마다 연결된 줄에 깡통을 매달아 미군이 접근할 때 줄을 흔들어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회원동 판자촌>
그래도 술 취한 미군들은 심지어 총질까지 해가면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대부분은 공포였지만 언젠가는 흥분하여 대드는 청년을 월포동에서 사살하기까지 했고, 회원동에서는 항의하는 마산일보 기자에게 총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나마 월포동 전재민들은 미군부대가 불어나면서 거기에서도 쫓겨나 다른 난민촌으로 이주해 갔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그들을 단결시켰고, 인정의 나눔은 형제애 이상이었다. 48년 총선 때는 귀환 전재민들만 똘똘 뭉쳐 큰 표 차로 같은 전재민 출신인 권태욱을 당선시켰고, 상이 나거나 사고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섰다.
“하루는 어둑어둑한데 한잔 얼큰히 된 옆집 아저씨가 손에 든 간칼치를 흔들며 타령을흥얼거리고 옵디다. 그날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던가 보지요. 그날 저녁 우리집 저녁 반찬에도 간칼치구이 두어 토막이 있었지요”
고기냄새 못 맡아 소증 걸린 비위를 함께 달래자는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있다.
아이들은 학교가면 한국말을 잘못한다고 친구들로 부터 ‘우환동포’로 불리며 따돌림당하고, 또 수업료도 못 내어 쫓겨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행이었다.
50년대까지도 회원동을 통틀어 고등학생이 한 학년에 10명 미만이었다 하니 그들의 고난은 대부분 대물림될 수밖에 없었다.
“못살아 외국까지 가서 발버둥치다 해방이 되어 희망을 안고 왔는데 왜 우릴 푸대접합니까. 군대가고 보국대가고 할 일은 다했는데. 고관들은 잘먹고 흥청거리면서......” 윤대권 (79세, 신포주공아파트) 씨의 항변이다.
귀국을 후회한 적은 없었느냐는 물음에 모든 증언자들은 하나같이 “귀환동포치고 귀환을 후회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과 전재민들-
1951년에 들면서, 안전지대로 인식되어 있던 마산에도 무려 4만의 전재민들이 밀려드니 9만 인구였던 마산 시내가 전재민들로 북적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주로 러시아 조차지로서 비어있던 대내동일대로 들어가고 일부는 중앙동, 회원동 등의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그 외엔 상남동 개천변이나 반월산 자락 등에 움막 같은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한편, 패물이나 돈을 많이 지녔던 전재민들은 그 와중에서도 좋은 처소를 세 얻거나 심지어 집을 사기도 했다. 또, 어떤 부자들은 부림시장 상권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기도 했다.
판자촌 사람들의 생활은 앞서 말한 귀환동포들 보다는 조금 나았다. 배급이 조금 더 나오고, 군수품 하역에 따른 일거리가 많아졌으며, 일용품이나 식량 등이 군으로부터 많이 유출되어 부림시장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시에서 준 군용천막 속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지냈다. 바닥엔 짚이나 헌 가마니를 각자 주워다 깔았다. 시에선 강냉이 같은 구호물자를, 그것도 가끔 조금씩 줄뿐이었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나무하러 다니고, 평일에도 학교 파하면 빈 고구마밭에 가서 이삭줍고 잔뿌리 캐고 가을에는 도토리 줍고……” 한창열 (62세, 대내동, 황해도 출신) 씨의 증언이다.
이런 형편이니 중고등학교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씨는 말했다.
또, 변소는 수십 가구에 하나밖에 없는지라 아침마다 변소 앞에 줄서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잠까지 설쳤다고 한다.
함경남도 출신의 한철준(87세, 문화동)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낮엔 학생들이 들어가 공부하고 밤엔 피난민들이 들어가 잠자고 그랬지요. 그러니 칸막이도 할 수 없어 밤에 부부의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옆 사람들에게 들렸지요. 그래서 다음날 그걸 가지고 이웃끼리 농담도 했지요.
”시일이 좀 지난 뒤의 일이지만, 흙을 파고 부엌을 만들어 연탄을 피웠지만 판자집들이라 통풍이 잘 되니 연탄중독 사고는없었다고 한씨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주로 부두노동이나 어시장, 공사장 등의 막일을 하고 부인들은 군복 개조나 순대국장사 등을 하여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이들의 소원이었기에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 여기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10% 미만일 것이라고 두한씨는 말했다.
종전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마산 인구: 1949년 9만 1천, 51년 13만 3천, 53년 10만 5천), 그 자리엔 다른 난민들이 바뀌어들기를 반복하면서 근래까지 난민촌으로 불려왔다.
<귀환동포 아이들 (1946년, 남기섭 작, 대한통운 앞거리)>
-아직도 국민의 삶은 여전하다.-
미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미군정치하에서, 그리고 미군정의 정치노선을 계승한 이승만 정권 하에서 우리민족, 특히 민중들의 고통은 어쩌면 필연적이라 하겠다. 정치권력의 성향이 그 국민의 생활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것은 뚜렷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IMF사태’라는 국가재난을 기회로 IMF와 이 땅의 부자들은 높은 이자로 큰 이익을 챙겼지만 가난한 민중들은 정리해고 당하거나 임시직으로 내몰리고, 심지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되기까지 하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발전이 시급한 이유를 다시 확인한다.
신포동과 중앙동엔 고층아파트가 섰고, 대내동 (문화동에 포함)엔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난민들 중 다수는 또 다른 빈민촌이나 단간 셋방으로 밀려났다.
회원동도 마찬가지다. 단지, 회원동 하모니카촌엔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져가는 집이 (창고의 일부) 몇 군데 남아있다. 그리고 일자집 덩이가 옛날 창고의 넓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창고와 창고 사이의 길이 지금도 골목길이 되어있어 옛날 위치만을 나타내주고 있다.
<증언자들 ; 김순두, 윤대권, 박수권, 박노오, 이순환, 전판수, 조용기, 정덕현, 한철준, 한창열>
박호철 / 당시 마산학원 국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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