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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 창원 역사읽기 (27) - 옛사람들의 쓰레기장, 성산패총

by 허정도 2014. 11. 24.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옛사람들의 쓰래기장, 성산패총

 

직선길이 12.5km로 전국 시가지 도로 중 가장 긴 창원대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광활한 창원공단 한 복판에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성산패총이 있다.

성산패총은 공단도시 창원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원공단은 기계생산이 주류이다. 지금의 창원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성산패총에는 조개껍질과 토기류 외에 철을 생산했던 흔적이 발견돼 야철지(冶鐵地)로도 명성이 높다.

오늘날 창원공단을 이룬 요람인 셈이다. 지금 성산패총은 사적 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보존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산패총이 발굴된 1970년대 초는‘산업근대화’를 부르짖던 시기였으므로 두 말할 필요 조차 없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성산패총을 보존할 경80여억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한데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특명사업인 자주국방을 위한 공단조성의 공정이 1년 이상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보존을 반대했다.

즉, 발굴조사에는 지장이 없도록 예산 등 모든 지원을 하겠지만 보존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당시의 관련학자들은 차라리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유적만큼은 보존돼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성산패총의 보존 문제는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현장에서 브리핑 받고 발굴현장을 보고 나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만찬장에서 “공단을조성하게 되면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는 그 곳 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한 마디로 보존은 결정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산패총은 살아 남게된 것이다.

<성산패총 유물전시관과 전시관 내 야철지 유>

 

-성산에서 보이는 것들-

성산패총은 창원분지의 남측에 형성된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마을유적이다.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을 성산(城山)이라 부르는데, 이 곳에 돌로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성산은 벌판 가운데 홀로 솟은 구릉이다. 원래는 그 북동쪽의 가음정동 당산(堂山)과 이어져 있었으나 창원공단의 중심도로인 산업대로의 개설로 그 줄기가 잘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된 것이다.

옛 사람들이 먹거리를 구해 먹고 그 찌꺼기를 내다 버린 쓰레기터로서 조개껍질이 집중적으로 쌓여 있어 그 모양이 얕은 언덕이나 무덤과 비슷하여 조개무지[貝塚]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는 조개껍질에 함유된 알칼로이드화 성분으로 인해 많은 유기질 유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므로 당시의 물질문화와 식량자원,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해안선의 변화에 기인하는 패각의 구성인자 분석과 패총의 분포권을 토대로 해안선 추정에도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산패총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성산패총의 중심 유적은 패총과 야철지로서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쇠부리터가 확인된 점은 획기적인 발견이랄 수 있다. 지금도 이 유구는 이전 복원되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다.

성산산성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조사된 유물들을 구역별로 살펴보면, 동쪽 패총구역은 지금은 없어진 성산마을 배후 사면의 해발 약 20m 정도되는 곳에 정남향으로 입지해 있었다.

<성산패총 발굴광경>

 

패총의 규모10×15m 정도의 소규모이다. 조개껍데기는 굴이 대부분이며, 전복·대합·소라 등이 섞여 있다.

유물은 연질도기 위주이고, 경질도기와 골각기도 출토된다.

이 구역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확인이다. 즉 무문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반월형석도를 비롯한 석기와 수정제곡옥, 각종 골각기, 두형토기, 시루 등의 연질도기류가 출토되었다.

서남쪽 패총구역에서는 유구석부와 지석, 마제석촉, 석부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가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도기류가 검출되었다.

중국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어 패총이 어느 시기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갖가지 조개껍질과 짐승뼈가 출토되어 당시인의 생계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패류는 굴·방갑·고동 위주였다.

재첩도 보였는데 이 성산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짐승뼈는 사슴·노루·멧돼지·말 등을 비롯하여 개·닭·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류로는 참돔·농어·다랑어·새치다래 등이 있는데 다랑어 등의 존재로 미루어 당시의 어업이 연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산패총 출토유물>

 

패각층 아래에서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야철지는 굴뚝의 하부로 여겨지는 소형의 원형유구와 쇳물을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홈통 등의 유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야철송풍관이 출토되어 이 곳이 야철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야철지의 조성시기는 출토된 오수전으로 볼 때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구역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쇠부리터의 발견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선제때 주로 사용된 것이므로 성산패총의 연대가 기원전 1세기 경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북쪽 패총구역에서는 마제석검, 유구석부, 지석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 및 도기류가 출토된 것을 비롯해 다른 패총 구역에 비해 철기가 많이 출토된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철기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철기의 제작시 이용되었던 망치가 출토된 점이다.

성곽은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는데, 성곽의 형태는 성산 정상부위의 외곽을 따라 구축한 테뫼식이다.

서벽의 경우에는 성내에 성곽과 관련된 생활유적이 확인되어 성곽 내에 일정한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서남쪽 구간에서 당나라 고종 무4년( 621)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성의 축조 시기는 7세기였을 가능성이있으나, 삼국시대 전기의 도기류 출토에 근거하여 3세기 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의 삶을 쓰레기장에서 알 수 있고-

성산패총의 발굴조사를 통해 혹은 그 존재로써 우리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패총의 존재로써 당시의 환경을 헤아려 볼 수 있다. 패총의 분포 사실로써 이곳과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패총의 분포권을 잇게 되면 옛날의 해안선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실제 창원분지내에는 성산패총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많은 수의 패총이 분포한다.

가장 북쪽의 소답패총 및 남산패총, 가장 남쪽의 성산패총과 가음정동 패총으로 이어지는 그 가운데의 낮은 곳이 당시의 해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등재된 포구와 염전 등의 분포를 통해 방증된다.

그 범위는 지금의 시외주차장을 중심으로 한 사화동(조선시대에 사화포가 있었음, 북측 외곽에는 반계동패총과 남산패총, 소답동패총이 있음)과 명서동(한마음병원 일대에 염전 및 염창이 있었음), 대원동, 지귀동(조선시대의 지이포가 있었음) 반림동, 내동(내동패총이 있음), 외동(외동패총 및 성산패총이 있음), 가음정동(가음정동패총이있음) 부근으로추정된다.

또한 패총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자연유물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생계경제와 이를 위해 활동한 자원영역 등을 알 수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육지와 바다의 각종 동물유체가 출토되어 이들이 식료로 사용되고 그 부산물은 도구로 혹은 장신구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지동물은 사슴, 돼지, 노루 등이 잡혔다. 이는 지금의 동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해수산 어패류 중 다랑어의 존재는 당시의 자원영역이 연안어로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민물조개인 재첩의 존재는 성산 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지역임을 알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의 구조물은 세 차례의 조사에서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쪽과 서남쪽 패총구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은 이 시기에도 성산 구릉에서 사람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다른 곳에서의 유적 발굴 예를 비교해 보면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구릉지에 입지하는 경향이 많은데 가까운 곳의 남산유적에서는 구릉의 정상부에 입지한 청동기시대 마을의 한 형태로서 구릉의 꼭대기나 그 비탈에 형성된 마을의 바깥에 둥근 고리 모양의 고랑(환호 環濠)을 파서 외적을 막는 방어적 성격을 가진 마을 즉, 환호취락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볼 때, 성산의 정상부에도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입지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 전의 성산 일대는 북측사면을 제외한 삼면은 경사가 완만하였고, 그 남쪽사면에는 약 30여호의 민가로 구성된 외동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사 전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사진에 의하면 성산의 정상부는 주위 사면과 구분되는 봉우리가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취락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곳은 주변 사면부의 야철지와 패총에 대한 조사만 진행된 채 삭토가 진행되어 조사의 손길조차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당시의 상황이야 여러 모로 보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취락 전반에 대한 조사로 진행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성산패총에서의 야철지 발견은 고대 창원지역사회의 발전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을 매개로 인근지역과 교역했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창원지역이 기계생산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것은 고대사회의 철생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먼 옛날의 철제련 역사는 오늘날 야철제(冶鐵祭)로 이어지고 있다.

이 행사는 창원시로 승격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의 날에 선보이는 향토 고유의 축제이다. 광활한 시청 광장 가운데 마련된 제단에 인조 용광로에 불을 지펴 창원시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공단 내의 용광로 기술자들이 성산패총 야철지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고 성화에 불을 붙여 시청앞 광장까지 봉송한다. 창원시장은 이 불씨를 받아 용광로에 불을 지핀다.<<<

최현섭 / 당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조사연구부장

이 글은 창원시가 마산 진해와 통합되기 이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