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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28) -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by 허정도 2014. 12. 1.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3  가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

 

우리는 신문, 방송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접하곤 한다.

예를 든다면 함안 마갑총에서 국내 처음으로 국보급의 가치를 가진 철제 말갑옷이 출토되어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고대 가야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든가, 또는 창원 다호리무덤에서 통나무 형태의 목관 실물과 더불어 각종 토기, 칠기, 철기류 그리고 필기용 붓이 발견되어 2,000년전에 이미 문자를 이용한 기록이 가능했고, 가야 초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출토되었다 등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창원 지역은 지형상으로 마을 배후에 솟아있는 높은 산은 바람을 막아 주어 추위를 피할 수 있으며 주변에 하천을 끼고 있고, 남동·남서향으로 쭉 뻗어있는 구릉 경사면에는 가야시대에 형성된 무덤이 수십에서 수백기 정도로 공동묘지화 되어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가야시대에 대한 역사 기록은 단편적이고 소략하다.

하지만 창원·마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은 그 자체가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수 많은 문화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어 이 지역 사회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산 현동 가야시대 무덤 배치모습>

 

-가야시기 인간들의 흔적-

마산·창원지역에서 가야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흔적들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흔적이란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물질자료를 의미하는데 흔히 유적, 유물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가야시대와 관련된 흔적들은 당시의 마을과 생활쓰레기장인 패총, 무덤인 고분이 대표적이다.

먼저 가야시대 사람들의 마을, 쓰레기장(패총), 공동묘지(고분) 등의 공간 배치는 마산 현동유적 조사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 현동유적은 1989년 마산-충무간 국도 확장공사때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4기에서 6세기까지 형성된 고분, 주거지, 패총으로 구성된 복합유적이었다.

닷가인 덕동과 약 2㎞ 떨어진 마산시 현동 옥동마을 서편 구릉 사면을 배경으로 타원형의 주거지로 이루어진 가야시대 마을이다.

패총은 마을의 서쪽 계곡에 실생활에서 사용하다 버려진 생활도구와 식용으로 채취되었던 조개 껍데기가 층을 이루며 형성되어 있었다.

고분군은 시신을 안치한 공동묘지인데 당시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패총과는 반대 방향인 동쪽 사면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현동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릉 사면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생활 쓰레기장은 가옥 주변에, 무덤은 가옥과 약간 떨어지고 패총과 반대방향인 구릉의 말단부 경사면에 조성하였다.

이러한 유적 내 공간 배치모양은 가야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바닷가와 인접한 마산·창원의 가야시대 사람들은 해발 100m 이내의 구릉 사면과 평지로 이어지는 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을 주변의 높지 않는 구릉의 밭, 구릉 아래의 논에서 곡물을 생산하면서 주변 야산에서 산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또한 풍부한 해산물을 얻기 위해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바닷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류를 채취하여 마을로 운반, 주요 식량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공동묘지에다 땅을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흙을 덮어 무덤축조를 완료하였다.

이러한 가야인의 삶의 모습은 우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시대 유적 발굴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창원에 형성되어 있는 가야시대의 수많은 유적은 진동만에서부터 마산만에 인접한 구릉과 창원분지내 구릉 및 사면, 그리고 낙동강변에 이르는 곳곳에 위치하여 있다.

바닷가와 인접한 관계로 주거지, 패총의 생활유적과 고분군은 동일지역에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유적은 10여개소에 달한다.

마산의 경우고성과 인접한 진동쪽의 대평리유적을 비롯하여 현동유적, 자산동고분군이있고 창원에는 주남저수지와 인접한 야산과 저지대까지 넓게 형성된 다호리 유적, 39사단과 인접한 도계동고분군, 가음정동유적, 삼동동 옹관묘유적, 반계동유적, 천선동고분군, 창곡동유적 등 10개소에 달한다.

이 중에서 가야초기의 고분은 다호리유적, 도계동유적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토광묘이다.

토광묘는 시기적으로 목관묘 축조기, 목곽묘 축조기로 나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는 무덤내 목관을 사용한 목관묘 축조기이고 그후 4세기 후반까지는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 목곽을 추가하여 축조하는 목곽묘가 유행하였다.

목관·목곽묘는 땅을 장방형으로 파고 나무로 만든 관, 곽을 짜서 시신을 넣고 주위에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흙으로 만든 그릇(토기), 도구와 무기로 사용하였던 철제유물 등을 부장한 구조이다.

무덤의 세부적인 구조와 형태는 오늘날의 장례시 행해지는 무덤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무덤을 축조하는 전통이 상당히 보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원여고 부지에 있었던 삼동동고분은 옹관묘(2개의 항아리를 붙여 만든 무덤)유적으로 유명하다.

우리 지역의 4세기대 대부분 가야시대 고분들은 토광묘 중심이었지만 삼동동유적에는 조사 무덤의 70%가 옹관으로 무덤을 만든 형식이다.

옹관묘가 주종을 이루는 고분은 낙동강 주변의 가야시대 고분에서 삼동동유적 외 알려진 바는 없고 전라남도의 영산강유역과 일본에서 다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이들 지역간에 무역이나 사람의 왕래 등 대외교류가 있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5세기에 접어 들면 마산 진동 대평리고분군, 현동고분군, 창원 도계동고분군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무덤 구조가 일대 변화하는데 기존의 목곽묘에서 4벽을 돌로써 만든 석곽묘가 등장한다.

특히창원도계동 고분군, 마산현동 고분군에서는 먼저 축조된 목곽묘를 5세기대의 석곽묘가 축조되면서 선행목곽묘를 파괴시킨 흔적이 조사되어 양 무덤간 상호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덤의 구조 중 내부 곽이 흙에서 돌로 바뀌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이전의 목관·목곽묘의 토광묘가 구조상 견고하지 못한 것을 보완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가야사회 전반에 석곽묘가 유행할 수 밖에 없는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5세기 전반경이 되면 함안, 고성, 창녕 등 여러 가야지역에는 직경 20m가 넘는 지배계층의 무덤인 대형봉토분이 구릉 정선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우리 지역의 경우, 초대형 봉토분은 없지만 마산삼성병원과 마주하는 합성동 구릉 말단 정선부에 형성된 합성동고분1호분이 있는 정도이다.

그외 창원 가음정동고분군에는 직경 10m 내외의 중형분이 있고 창원분지 외곽의 봉림동고분군, 불모산동고분군에도 봉토분이 확인되고 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우리 지역에는 석실분이라는 새로운 무덤이 축조된다.

<창원 가음정동 석실분>

 

이전까지의 무덤11인용이던 것이 1묘 다인장으로 바뀌게 되는데 석실분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한 무덤으로 여기에는 혈연적으로 친숙한 사람들,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무덤에 모시는 형태인 것이다.

다음으로 가야시대 고분에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된다.

가야시대 사람들의 의식에는 죽은 자 역시 저승에서도 똑같이 생활한다는 믿음에서 무덤 속에 당시 주인공이 사용하였던 그릇이나 도구들을 묻어 주었다.

후대 고고학자들이 발굴할 때 출토되는 유물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예술적 조형미가 있는 것이지만 당시 실생활에서 사용한 실용품이라는 점이 고고학적으로 중요성이 있다.

목관·목곽묘가 축조된 가야전기의 무덤에는 흙으로 빚어 구운 토기류와 쇠로 만든 철기류가 다량 부장되어 있어 사료가 부족한 마산, 창원지역의 가야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 해당하는 다호리 1호분에서는 철기, 칠기, 토기 뿐아니라 기록용 붓이 출토되어 2,000년 전에 이미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자료가 된다.

고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은 토기이다. 그 종류는 오늘날 제기처럼 생긴 굽다리접시를 비롯하여 대·소형 항아리, 그릇받침, 잔 등이 있다.

초기 형태는 목기와 흡사한데 아마 목제로 만든 그릇을 본 따서 흙으로 빚어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기류는 화살촉, 작은 손칼, 큰 칼, 쇠도끼, 쇠창, 말에 달았던 발걸이, 장식구, 재갈 등과 규모가 큰 대형분에서는 갑옷, 투구 등도 출토 되기도 한다.

특히 4세기대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굽다리접시는 다리 부분에 삼각, 사각, 마름모 형태의 굽구멍을 뚫어 조형미를 부각시킨 것도 있다.

마산 현동 50호분에서는 가야시대 고분에서 출토 예가 많지 않은 특이한 뿔 모양으로 만든 각배, 예술적 미가 돋보이는 잔과 잔 받침이 부장되기도 하였다.

5세기에 접어들면 석곽묘가 축조되고 무덤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히 토기의 부장이 늘어나고 또한 영토 확장에 따른 철제 무기류, 마구류 등이 부장되는 시기이다.

도계동19호분에서는 쇠로 만든 화살통 속에 20여점의 화살촉이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호리고분에서는 가야시대 가옥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 집모양 토기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형태는 오늘날의 과수원 원두막 형태인데 구릉지에 보이는 일반적인 타원형 가옥은 아니고 구릉 아래 평지상에 위치한 창고 또는 망루의 형태인 것으로 파악된다.

<마산 현동 50호분 출토 유물들>

 

-유적과 유물은 당시의 사회를 말해 준다-

가야시대 사람들은 삶의 최후 과정인 죽음을 무덤으로 만들어 1,500여년 후 우리들에게 당시 모습을 보여 준다.

어느 노래가사처럼 인생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듯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뛰어 가는 것이다.

남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고, 죽음은 인간에 있어서 생과 사를 구분해 주는 통과의례 중 마지막의 단계이다.

현대의 장례도 사람이 죽으면 양지바른 곳을 정하여 땅을 파고 오동나무로 만든 관 속에 시신을 정성스레 포장한 후 고운 흙을 깔고, 지표면에는 표시가 가능하도록 둥그스런 봉토를 덮어 마무리한다.

현대의 무덤은 부장품 없이 시신만을 모신다. 그러나 가야시대인들은 저승에서도 살아 생전과 같이 생활한다는 믿음에서 평상시 사용하였던 그릇이나 칼, 낫, 귀금속 등을 종류별로 무덤 속에 넣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무덤을 만들 때는 반드시 그 집단의 고유한 풍습, 관념에 따라 절차가 이루어지는 관계로 후대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형태, 부장유물만으로도 언제 것인지 어느 지역인지 등에 대해 알 수 있기도 하다.

실제 가야 고분을 발굴하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식되지 않고 남아있는 토기, 석기, 철기, 돌로 된 시설물 정도이고 무덤의 주체인 사람의 인골이나 나무곽, 목제유물 등은 부식되어 그 흔적이 없다.

비록 한정된 자료만 발굴조사되는 것이지만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예술적 가치 뿐 아니라 기록이 별로 없는 가야사회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역사기록과 같은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유물을 단지 돈의 가치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하찮게 생각되는 토기 조각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김형곤 / 당시 창원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