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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64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5) - 강점제3시기 -부두의 건설- 부두 역시 매립으로 건설되었지만 그 목적이 항만건설이라는 점에서 일반 매립과 구분하여 다룹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에는 부두를 건설하기 위한 네 번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모두 강점 제3시기(1930년 이후)에 이루어 졌으며 조선총독부 혹은 마산부가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정 및 권력 체제로 보아 마산부는 명의만 제공했을 뿐, 모두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급속히 대규모로 시행된 이 항만공사는 마산을 상업무역항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일본의 침략전쟁을 돕는 병참기지로의 역할 수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로 이어지는 일제의 전쟁 광란에서 .. 2013. 4.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4) - 강점제3시기 “나카무라 되었다?” 마산의 명승지 월포해수욕장이 매립된 이후 근위빈 해수욕장이란 이름으로 해운동 일대(전 마산화력발전소 자리) 해변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해수욕장이 1944년 12월 3일자로 일본인 종촌번부(中村繁夫)에 의해 매립되었습니다. 지금의 마산시외버스터미널 남부주차장을 포함한 해운프라자, 뎃츠빌딩까지의 넓은 지역이며 시기적으로는 일제기 마산의 마지막 매립이었습니다. 면적은 12,254평이었으며 매립 후 해안은 석축으로 호안하였습니다. 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매립지는 완공된 지 8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매립된 땅을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했고, 해방 당시에는 공터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매립공사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할 수가 없었고 매립을 한 나카무라(中村)는 졸지에.. 2013. 3.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3) - 강점제3시기 1940년부터 1942년 9월 5일까지 부산 토건업체인 죽본조(竹本組)의 사주였던 竹本熊次(부산부 수정동 116번지 거주)가 시행된 매립공사입니다. 원마산(마산포) 매축지 동쪽 해변일대로서 마산시 수협이 있던 오동동 251-3을 비롯하여 동일제빙․동양공업․신기사 등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복어거리와 탑마트 그리고 웨딩그랜덤 건물이 있는 일대입니다. 총 11,860여 평이었으며 이중 대지로 사용한 면적이 8,885평, 도로는 2,539평, 하치장이 436평이었습니다. 이 외에 물양장이 254평 있었고 방파제 153m도 함께 시공했습니다. 다음 그림은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매립준공인가관계서류」에 첨부된 본 매립공사의 설계도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이 매립지의 위치는 오랜 세월 동안 마산포.. 2013. 3.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2) - 강점제3시기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점 말기에 시행된 네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지 모두 공장부지로 사용한 사례입니다. 지금은 경남대 앞 상업용지로 도시 한복판인 이 땅들이 불과 7-80년 전에는 바다였으니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1938년 1월 28일 창포동 3가 5-12 전 심건(心建)조선소 자리 594평을 앞의 국전암시(菊田岩市)가 자영 국전(菊田)조선소 용지로 매축 준공하였습니다. 총 세 번에 걸쳐 매립을 한 국전암시(菊田岩市)는 1909년에 마산으로 이주해 와서 국전(菊田)조선소를 경영했던 일본인입니다. 위치는 현 경민 아파트 자리로 그림의 A입니다 1940년 2월 15일 창포동 3가 5-14번지인 전 심건조선소(心建造船所) 건너편 주택지 437평을 교본육삼랑(橋本六三郞)이 매립하였습니다. 위치는 역시 경민 아.. 2013. 3.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1) - 강점제3시기 1920년대 중반까지 마산의 도시구조는 한국인들이 모인 원마산과 일본인들이 거주한 신마산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두 지역을 연결해야할 중앙지역은 지형적으로도 잘록한 병목형이었을 뿐 아니라 철도용지로 묶여 있기까지 해서 도시발전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철도용지가 마산부에 불하되어 시가지 형성이 가능해지자 마산세무서․마산부청․경성전기 마산지점․도립마산병원․지방법원 지원․신문사 등 관공서나 공공시설의 건물이 세워지거나 또는 건축예정부지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른바 중앙마산이 공공업무지역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한 겁니다. 때를 맞춰 비슷한 시기에 조선회사령도 철폐되자 일본인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마산의 중앙부 해변에 매축을 계획하게 되어 본 매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위치는 현 대우백화점, 어시장, 삼익아파트, 센트럴.. 2013. 3.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0) - 강점제3시기 1935년 2월 19일에 국민은행 마산지점 앞 간선도로 일대 2,145평이 매립 준공되었습니다. 그 중 대지는 1,043평이었고 그 외는 도로 및 하수구 등이었습니다. 매립의 목적은 어시장부지와 택지 조성이었습니다. 위성사진에서 본 위치입니다. 이 매립은 1927년 마산부가 시행한「남성동 30번지 동굴강 일부 매립」과 함께 마산부 직영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래 도면이 매립설계도입니다. 매립설계도(정부기록보존소,「공유수면매립방파제축조공사서」,문서번호87-1907,필름번호87-1291)를 자세히 보면 이 매립은 한 곳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네 곳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7년에 시행된 동굴강 107평 매립(2012/04/2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06) - 강점제2시기.. 2013. 2.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9) - 강점제3시기 1933년 1월 25일 준공된 매립입니다. 위치는 현 경남대 앞 삼우상가와 월드프라자 빌딩 사이의 부지와 그 뒤쪽 횟집이 많이 있는 삼각형 블록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노란색으로 표시한 땅입니다. 면적은 속칭 번개시장 옆 삼각형으로 남아있는 부지 창포동 3가 7-1번지의 589평과 그 주변 일대에 해당되는 월남동 5가 4-1번지 23평, 월남동 5가 4번지 일대 1,596평을 합쳐 총 2,185여 평이며 도로까지 합친 면적은 3,300여 평입니다. 매립을 추진한 이는 일본 문사(門司 / 모지)에 거주하던 지전원차(池田源次)와 창포동에 거주하던 영삼구간(永森久幹) 두 사람입니다. 처음 매립권을 취득한 자는 경성에 살던 고영경일(高榮京一)과 영삼구간(永森久幹)이었지만 자금사정 때문에 고영경일(高榮京一)의 매립.. 2013. 2.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8)-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의 매립-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마산 해안의 매립은 1930년대 들어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이라이트가 1929년에 착공하여 6년 간 시공한 후 1935년 완공한 신포동의 중앙마산지역 매립인데 이 매립으로 그 동안 둘로 나누어져있던 마산의 도시공간이 지형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931년 12월 4일 창포동 3가 1-1번지 801평이 매립되었습니다. 일본인 조선업자로 창포동 3가 5번지에 살던 국전암시(菊田岩市)에 의해 조선공장 부지조성을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된 「공유수면매립준공인가서 / 문서번호 87-969」에 의하면 토지소유권 취득자 통지서에 토지 취득 일자가 1932년 3월 25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고란에는 도로․구거 및 호안석원(護岸石垣.. 2013. 2.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7) - 강점제3시기 1945년 / 미군정청 / / 1:25,000 / 옥한석 논문 / 허정도 이 지도를 최초로 공개한 옥한석 교수(강원대학교)에게 입수 경위를 직접 확인했더니 1980년경 미국에 체류할 때 미군정에 관여했던 민간인한테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세밀한 지도는 아니지만 표기 상태는 아주 선명합니다. 1945년 해방 당시 마산에 이미 개설되어 있던 도로가 모두 표기되어 있으나 매립지 쪽의 세부 도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 내 각 정(町)의 위치는 표기되어 있습니다. 범례에 기존도로와 계획도로가 각각 실선과 점선으로 구별되어 표기되어 있으며 지도에도 이 두 도로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난 1월 2일에 포스팅한 142회「馬山府全圖**」에 나와 있는 계획도로와 이 지도에 표시된 계획도로가 동일합니다. 미.. 2013. 2.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6) - 강점제3시기 1937년 / 임시토지조사국 / 조선총독부 / 1:200,000 / 朝鮮二十萬分一圖 / 국립중앙도서관 1918년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편찬하고 제판한 지도로 1921년 발행되었다가 1928년 1차 수보(修補)한 후 1937년 2차 수보하여 발행된 지도입니다. 동래군․창원군․통영군․함안군․고성군․진주까지 남부 경남 일대를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마산부 내의 도시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 볼 수가 없지만 마산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도로는 상세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인쇄는 경성에 있는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하였으며 일반인에게 판매를 하였는지 매당 30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940년대 초 / 마산부 / / 매립준공인가관계서류, 문서번호 87-3026 / 정부기록보존소 죽본웅차(竹本熊次)의 오동동 매립공사와 관련된.. 2013. 1.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5) - 강점제3시기 1937 / / / 1 / 40,000 / / 김한근 당시의 도시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표기한 지도입니다. 건물이 들어선 지역을 검은 색 빗금으로 쳐놓아 도시화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대략 가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미 시행된 중앙마산의 도로 상황과 도시범역이 잘 드러나 있을 뿐아니라 추후 시행될 계획도로도 그려져 있습니다. 현 용마고(마산상고) 앞 일대 산호동 지역의 계획도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중요시설 12개, 즉 상업학교(전 마산상고, 현 상남성당 자리), 마산도립병원, 지방법원지청, 세무서, 부청사 이전예정지, 장군교, 여학교(마산여고), 본원사 본파(현 경남아파트), 우편국, 시장(일본인 전용시장, 현 반월시장), 헌병대, 세관 등이 범례에 잘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현.. 2013. 1. 2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4) - 강점제3시기 1937년 / 마산부 / 마산부 / / 觀光の馬山 / 우무석 所藏 지난 주 포스팅한 「마산***」과 함께 첨부된 지도로 역시 채색본입니다. 보다시피 이 지도에는 마산만에 진입하는 해로를 표시한 광역 지도가 추가로 함께 인쇄되어 있습니다. 일본(內地)으로 가는 해로을 비롯해 세 종류의 해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의 「마산***」지도에서 처럼, 이 지도에 표기된 도로들도 계획도로까지 표기하고 있어서 이 지도를 통해 당시의 도로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 계획도로는 연재 142회에 포스팅한「馬山府全圖**」와 내용이 같은 것으로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마산의 도시계획도면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각종 시설들의 위치를 글로써 표기하고 있으며 범례를 두어 중요시설의 표시를 해 놓았는데 도.. 2013. 1. 1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1937년 / 馬山府 / 馬山府 / / 觀光の馬山 / 우무석 所藏 1937년 마산부에서 제작한 관광안내용 책자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이와 똑 같은 형태의 지도가 다른 도시에서도 발간되었습니다. 이 자료의 소장자는 시인이자 불휘기획 대표인 우무석 선생입니다. 마산역장을 역임한 우 시인의 외조부 문판개 선생의 유품이라고 합니다. 지도의 영역은 당시 마산부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한 것으로서 남쪽으로 자복포의 육군중포병대대(옛 한국철강 터)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현 상남동 일대까지입니다. 포켓 형식으로 된 안내서의 표지에는「觀光の馬山」이라는 제목과 함께 산을 배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벚꽃이 만개한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 청주 통을 그려 놓아 당시 마산의 관.. 2013. 1.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2) - 강점제3시기 1937년 / 마산부 / / 마산시구개정관계서류, 문서번호 1014 / 정부기록보존소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제작시기에 맞춰 아주 정확하게 표기된 지도로 보입니다. 조계지는 물론 신마산 전역에 이미 개통된 도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주요 시설들도 명기되어 있습니다. 원마산 역시 그 때까지 개설되었던 도로가 그려져 있고 당시 이미 준공되었던 신포동 매립이 완성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죽본조(竹本組)가 매립한 오동동 해안의 매립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는 달랐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서 장군천까지 완전하게 도시를 이룬 신마산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마산 역시 교방천까지 도시의 범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의 조성도 진.. 2013. 1. 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1) - 강점제3시기 1936년 / / 朝鮮運送株式會社 / / 朝鮮港灣之事情 / 경남대학교 박물관 『朝鮮港灣之事情』이란 단행본에 수록되어 있는 지도인데 마산의 도로 정황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신포동의 매립이 완료되어 ‘중앙매립지’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시행될 원마산의 죽본조 매립이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 시행된 중앙간선도로 서쪽 일대의 도로가 잘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마산 도시사정을 정확하게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는 지도입니다. 조계지의 도로도 실제로 개통되어 있는 부분만 표시하였으며 중앙마산 고지대 중 이미 개통되었던 도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의 특이한 점은 중앙마산의 고지대 부분, 즉 진주가도의 상부로서 지금의 완월동과 자산동일부에 점선.. 2012. 12.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0) - 강점제3시기 1936년 / / / / 진해만 요항부 검열제 도면철 / 정부기록보존소 앞(138회)의「馬山港平面圖*」와 동시에 작업한 도면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연대가 다른 만큼 지도의 내용은 차이가 많습니다. 이미 신포동의 대규모 매립이 완료되어 있고 제2부두와 제1부두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추정컨데 이 지도는 중앙부두 시공과 관련한 도면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방법원과 부청이 표기되어 있으며 아직 시구개정사업에 의한 도로는 표기되지 않은데 반해 강점 말기에 시행된 신마산 해안의 매립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아 상호모순인 이 현상은 내륙의 도로 상황의 변경을 그때마다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마산해안의 매립공사는 도면의 선의 상태를 보아 현재 공사 중이거나 계획 중인 상태를 새로 선을 그은.. 2012. 12.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9) - 강점제3시기 1932년 / 마산공립보통학교 / / / 鄕土の硏究 / 경남대학교 박물관 마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필사본으로 당시 마산상황을 정리하여 간행한『향토의 연구(鄕土の硏究)』에 수록되어있는 지도입니다. 입체형식으로 그린 일종의 조감도인데 당시 마산의 도로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제기 마산 이야기 중 많이 등장하는 월포해수욕장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 이 지도의 자랑입니다. 월포해수욕장의 위치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이 많습니다만 이 지도를 보면 해수욕장의 위치가 신포동 매립지 쪽이 아니라 제2부두에서 중앙부두 쪽(현, 쌍용 시멘트 사일로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어 달 전, 제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배두이 선생님에게서 월포해수욕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12. 12.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강점제3시기인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제작된 마산관련 지도를 해제하고 그 외 관련 자료를 토대로 마산 도시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 1931년 / 내무국토목과항만계 / 조선총독부 / 1:15,000 / 마산만매립서류 / 서울대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마산의 매립공사에 관한 도면으로, 마산시가지 전역이 비교적 상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간행연도인 1931년 이전에 이미 매립이 끝난 부분을 ‘기성부분(旣成部分)’으로, 현재 시공 중인 부분을 ‘공사중(工事中)’으로 구분하여 각기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매립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2012. 12.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7) - 강점제3시기 1930년 이후 마산지역에서 시행되었던 각종공사 중 조선건축회에서 간행한『朝鮮と建築』에 게재된 것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 다음 표입니다. 년도 기 사 제 목 발주처 규 모 금액 (圓) 기 사 위 치 비 고 1931 마산고녀기숙사の신설 학교조합 목조와즙평가530평, 부속동 36,000 10집8호p.35 신흥동 장군천 우측 1931 마산항수축공사の계획 경상남도 넓이6,350㎡매축지 110,000 10집12호p.42 평균길이 125m, 폭 50m 규모 1932 마산부내 매립지の성황 준공․공사중 합계 110,000평 11집3호p.70 현재 매립 신청 중3건 35,000평 1932 마산고녀교の개축문제 11집4호p.51 이십 수년전에 건축하여 낡았음, 이전계획 1933 마산부고녀교이전결정 예산에計上 12집1호p.5.. 2012. 11.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6) - 강점제3시기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마산의 산업시설 확충은 20년대의 주조 및 장유공장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는 대형 방직공작과 창고 등이 들어섰습니다. 군수산업과도 관련이 있는 이런 시설들은 동 시기에 매립된 해안지역에 대부분 배치되었지만 원마산 쪽에도 일부 들어서는 등 마산 전역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원마산 쪽 건설의 예로는 조선물산주식회사가 오동동에, 조선신흥방직회사가 산호동에 대규모로 들어선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한편, 개항기에 신마산 쪽으로 집중 배치되어 불편을 더했던 관공서 건물들이 하나 둘 중앙마산으로 옮겨와 현재 합포구청(옛 마산시청) 일대인 중앙마산지역이 공공업무지역으로 본격 형성되는 변화도 보였습니다. 강점제3시기에 건축된 마산의 대표적인 건물들은 다음 표와 같습니다. 한상술의 논문에다 몇 건물.. 2012. 11.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5) - 강점제3시기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마산이 ‘술과 꽃’의 도시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만 ‘사쿠라’라는 일본어로도 우리 귀에 익숙한 벚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들은 강점기 마산의 벚꽃이 담긴 사진입니다. 직전 포스팅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꽃과 술은 마산을 상징하는 요소였습니다. 심지어 1929년 간행된『馬山現勢錄(마산현세록)』에서는 목차에「酒の馬山(술의 마산)」과 「花の馬山(꽃의 마산)」이라는 항목을 넣어 마산의 술과 꽃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마산 벚꽃이 하도 유명해 봄철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매년 4월 10일을 전후하여 부산․대구․대전․경성 방면에서 꽃구경을 위한 임시열차까지 있었습니다. 일제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 중에는 당.. 2012. 11. 1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마산은 술 생산량에서도 이름이 높았지만 더 유명했던 것은 마산 술의 품질입니다. 마산 술의 향과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마산 술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술은 나다자케(灘酒, 탄주)였다고 합니다. 「나다자케(nadazake)」는 일본의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지방에서 나는 고급 청주를 말합니다. 지금도 생산되는 일본 고급 전통주입니다. 「나다자케」가 생산된 것이 1624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그 기원은 그로부터 훨씬 더 오래전인 14세기경이라고 합니다. 문헌에 의하면 무로마치(室町: 1338-1573)시대에 이미「僧坊の酒(승방의 술), 酒屋の酒(술집의 술)」이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가히 일본 최고의 술이었다고 볼 .. 2012. 11. 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한 도시를 짧은 말 한마디로 규정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도시는 그 도시의 특유한 자연조건과 문화조건 혹은 대표적인 생산품 등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목포하면 항구, 진해는 벚꽃 등과 같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마산을 말한다면「술과 꽃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산지역의 역사에서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마산지역을 찾은 관료나 시인들의 시를 보면 술과 관련된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은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백년 풍류에 싯귀가 새롭고 만리 강산에 한잔 술을 드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이는 “기이한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한데 모두들 유선.. 2012. 10.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마산 최초의 의료기관은 1904년 덕영오일(德永吾一)이 설립한 사립마산병원인데 1925년 도립마산의원으로 변경된 이후 1926년 신축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1941년 당시 마산의사회 회원은 12명이었습니다. 이 중 한국인이 운영하는 의원은 삼성의원․학산의원․순천의원과 창동의 동인의원․중앙의원․평안안과의원과 중성동의 대동의원 그리고 수산의원․삼광의원 등 9개의 의원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경영한 의원은 대곡(大谷)․전원(前原)․수상(水上)의원 등 3개소였습니다. 강점말기 마산의 치과의사는 한국인이 4명이었으며 일본인 치과도 이와 비슷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치과에 환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강점 말기, 마산에도 방송국이 설립되었습니다. 조선방송협회에서 노비산에 자리잡고 있던.. 2012. 10.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2012. 10.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 2012. 10.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강점 후기의 조선인 말살 정책에 대해 간단히 몇 자 적습니다. 마산도시변천에 대한 글이라 정치사회변화에 대해서 말한 입장은 아닙니다만 도시변화가 사회변화와 별개의 것이 아니니 간단히 당시 분위기만 적습니다. 1929년에 불어 닥친 세계적인 경제공황은 일본을 완전한 군국주의의 길을 택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압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특히 제7대 총독으로 취임한 남 차랑(南 次郞, 미나미 지로)은 재임 6년 동안 철저하게 한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을 폈습니다. 1938년부터 각 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키고 일본어만 사.. 2012. 10. 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마산상공회의소 백년사』에는 1939년 현재 마산에서 활동한 개인 영업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은 제외한 통계입니다. 이들 개인영업자 중 한국인 상인들은 주로 원마산 중심상가와 부림동 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서 곡물, 면사포 등의 포목류, 해산물, 식료품, 고무신 등 생활필수품을 많이 취급했고 대금업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상인들은 주로 건축자재, 철물, 과장, 서적과 문방구, 가구, 의복, 술과 고기, 연료, 선구(船具) 등을 판매했고 대금업도 10여명 정도 되었고 토건청부업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나타난 개인영업자의 숫자는 232명이며 영업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이용해 232개의 영업장을 원마산․신마산․중앙마산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동별로 나.. 2012. 9.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 후 마산에 들어오기 시작한 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분야는 섬유산업이었습니다. 1923년에 설립된 마산조면공장과 1927년에 설립된 태전마산공장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섬유산업의 발전가능성을 간파한 마산상공회의소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으로 섬유산업 유치운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조선물산주식회사, 조선신흥방직주식회사 등 대형 섬유공장이 마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주류양조산업과 섬유산업의 두 축이 마산의 대표산업으로 자리를 잡게된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마산에 들어 온 대표적인 두 섬유회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1939년 설립된 조선물산주식회사입니다. 오동동 2,200평 부지를 매입하여 건평 1,000평의 공장을 건설한 이 회사는 「낙낙직(樂樂織)」이라고 부른 특수.. 2012. 9.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기 마산의 산업 중 상업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장입니다. 마산의 시장은 1924년 개설한 원마산의 부림동공설시장과 1923년 신마산에 개설된 반월동공설시장 외에 구마산 어시장․신마산 어시장․우시장․신마산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7년경 부림시장 전경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 마산해산주식회사(1940년)와 부림동(富町) 부영(府營)청과시장(1941년)이 전 강남극장 앞에 개설되었습니다. 1931년 경상남도가 펴낸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서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는 주식회사 20개와 합자회사 5개로 총 25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는 8개였습니다. 1940년에는 법인조직으로서 마산에 본사를 갖고 있던 기업체는 주식회사 21개사․합명회사 2개사․합자.. 2012.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