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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진해』(1912) - 27. 군항기념비

by 운무허정도 2025. 4. 28.

27. 군항기념비

 

명치 45년(1912) 3월 15일 중광소로(中広小路, 나카히로코지) 큰 팽나무(아래 사진) 아래에 높이 1.5m, 폭 0.75m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때문에 아주 오래된 큰 팽나무가 한 층 더 근사하게 비춰지게 되어 아주 장엄한 분위기에 휩싸인 느낌이다.

비문에는 초대 방비대 사령관이던 미야오카(宮岡) 해군소장이 쓴 글자는 암암리에 역사를 얘기하며, 현재와 과거에 대한 감회에 잠기게 한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일본 해군 제독.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짐) 대장이 「진해군항설치기념」이라고 적은 것은 러일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황국의 흥폐가 이 일전(一戰)에 달렸다고 한 천고불멸(千古不滅)의 유명한 신호를 발신한 곳이 바로 이 진해만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경건하기 그지 없다.

지금 이 기념비에 새겨진 문자를 옮겨 보니 표면에는 '「진해군항설치기념 해군대장 백작 도고 헤이하치로 씀' 이란 문자가 있고 이면에는 미야오카소장 자필로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진해만의 지세야말로 동양 유일의 요새항구로 일찍부터 세계가 아는 바, 옛날 진구황후 외정(神功皇后 外征), 고안분로쿠전쟁(弘安文祿役, 몽고와의 전쟁), 임진왜란, 최근의 러일전쟁에서 동양의 해전사상에서도 그 점은 명백하다.

이렇게 되어 러일전쟁 후 한일이 함께 국방상 이곳에 해군설비를 갖출 필요를 인식해 우리 정부는 통감을 거쳐 한국정부와 교섭을 개시해 명치 39년(1906) 8월에 통감 이토(伊藤) 공작과 한국 참정대신 박제순과 수차례 교섭 상의한 결과 이곳에 군항을 설립할 것이 결정되어 양국이 공히 위원을 파견해 군항 경계선을 확정하여 해군용지로서 거제와 웅천 양군 일부를 매수하게 했던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이토 공의 알선 노력 덕분이니 심대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당시 소관(小官)은 통감부 직속 무관으로 이토 공 옆에 있으면서 그분이 성심을 다해 집무에 노고가 많으심을 가까이에서 지켜본지 4년이 된다.

지금 여기에 군항설비 공사가 시작하는 것을 보기에 이르렀거니와 당초 구상했던 이토공은 돌아가시고 당시를 회상하니 그 감개가 무량하도다.

명치 42년(1909) 7월 이토 공이 통감 직에서 벗어나 도한 도중에 이곳을 통과하셨을 때 기념으로 직접 이토 공에 간청하여 진해만의 소감으로 얻은 즉흥 한시를 아래에 올려 적는다.

 

卽是東洋鎭海灣   

水軍潛影擁重関

想會激戰沈楼艦   

成敗分來反掌間

여기는 바로 동양 최고의 요새 진해만이구나

우리 수군의 드리운 그림자 몇 겹 관문을 안았네

이곳에서 격전 중에 침몰한 함대를 상기하라

성패는 손바닥 뒤집기처럼 순간에 달린 것을

                                          명치 43년(1919) 4월

                                          진해방비대 사령관 해군소장 미야오카 나오키(宮岡直紀)<<<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