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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진해』(1912) - 44. 노점가

by 운무허정도 2025. 7. 7.

44. 노점가

 

진해가 개발된 당초의 명물은 비봉에서 현동, 현동에서 신시가지, 신시가지에서 경화동, 덕산 방면에 산재하고 있던 노점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적은 자금으로 떡이나 막과자 따위를 널어놓고는 여기 저기 길가에 손님을 고대하는 얼굴로 있노라면, 많은 구경꾼들은 배가 고파도 음식이 가능한 집도 없고 앉아 있을 데도 없으니 먼지투성이의 떡이나 과자를 집어 먹고 허기를 채웠기에 비교적으로 어느 노점이나 잘 팔린 것 같다.

그래도 중광소로(中広小路, 나카히로코지) 부근의 노점을 능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 노점의 손님들은 구경꾼 이외에 노동자를 유일한 단골로 삼았으며 그 후 차라리 노동자를 위해 차려진 가게처럼 되었다.

얼마나 팔렸느냐하면 자리 좋은 가게는 하루에 3엔 쯤 매상이 있었을 것이고, 사람 왕래가 적은 끝머리 가게는 불과 50전이나 1엔도 못될 정도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 노점을 했느냐 하면 그 대부분이 진해군항 시설건축이 착수되어 사람이 아주 붐빈다는 소문을 믿고 아무 기약 없이 찾아오기는 왔는데 별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일단 왔으니 쉽사리 되돌아갈 수도 없어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 기다린다고 해도 놀고 있을 수가 없으니 그 날만이라도 지낼 수 있도록 일을 해야 한다고 궁여지책으로 노점을 하게 된 것이다.

 

노점 같으면 작은 자금으로 시작할 수가 있고 손해를 봐도 본전이란 생각으로 개항초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시기를 기다리는 사이 업무로 시작한 것이다.

노점 주인들에게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코 밑에 수염을 기른 관리를 퇴임한 것 같은 사람, 부인의 담배 살 돈을 벌자는 기특한 사람, 주판알을 항상 만지작거리는 성실하게 생긴 사람, 용돈을 달라고 부모에게 보챌 나이 또래 애들이지만 가난한 집안 때문에 일찍부터 고생을 하며 부모를 돕겠다고 콧물 질질 흘리면서 가게를 보는 귀엽고 가엾은 자 등 백양백색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근처 한인 부락에 살며 일찍 정해진 길가 자리에 나가 밤이 되자 줄줄 귀로에 들어선다.

이러다보니 생활상태도 참담하기 끝이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누구나가 목욕이란 것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의 다가 손과 발에 때가 묻고 한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기억이 되살아나니 전율을 느낄 정도인데 불편하면 다소 더러워져도 참을 수 있는 있는 모양이다.

이상 노점의 양태를 설명했는데 노점가가 어떻게 탄생했느냐 얘기를 해본다.

큰 팽나무 부근에 있던 노점들이 퇴거명령을 받았을 당시에 노점가가 정해졌기 때문에 노점가의 운명은 마치 팽나무찻집의 운명을 방불케 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얘기는 생략하고 중복을 피하고자 한다.

당국이 구역을 정해 노점을 허락한다기에 뒤질세라 모두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며칠 사이에 200통까지 접수되어 당국은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허가를 했기 때문에 진해좌 앞부터 상반통(常磐通, 도키와도오리)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짧은 기간에 꽉 차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북광소로(北広小路, 기타히로코지) 일대, 행암만에서 경화동으로 통하는 해안가, 후지카츠 도쿠히사(藤勝徳久) 연와(煉瓦)공장 부근에서 경화동에 이르는 도로변이 노점 투성이가 되어 모두를 합치면 꽤나 많은 숫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인구가 많아진 것에 비해 장사도 뜸하겠는데 이는 동업자가 많아진 탓이라 어쩔 수가 없다.

거의 모두 비교적 저렴한 월세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될 것이다.

다만 애당초 노점 영업자와 오늘날의 그것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