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팽나무찻집(榎茶屋)
진해의 개발 초기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중광소로(中広小路, 나카히로코지)에 있는 큰 팽나무 부근에 돗자리를 걸친 판잣집이 20~30채가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팽나무찻집의 기원이다.
찻집이라 하면 찻집이며 노점이라 하면 노점인데 어느 쪽인가 하면 노점에 가까운 것이겠다.
노점이야말로 그 당시에는 지금의 팽나무찻집보다 소중히 여겨져 막벌이꾼이나 인부들의 위안을 위한 자리로 뜻밖에 손님이 잦았을 뿐 아니라 시찰 나온 신사나 상인들도 적당한 여관, 요릿점, 음식점 등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셨으며 손님이 많을 때는 하루 매상이 6엔부터 10엔까지 되었다고 한다.
가게에서 어떤 것을 팔았냐 하면 막과자나 떡 같은 것이 주가 되며 조금 비싼 것으로 우동, 스시, 계란, 조린 나물 정도였다.
애당초에는 가게도 한두 군데 밖에 없었는데 큰 팽나무 부근 노점은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파다해져 가게가 두세 달 사이에 20~30채까지 늘어났다.
이렇게 점점 가게가 늘었을 때에 제1기 대하(貸下)가 발표되어 건축이 시작돼 점차 요릿점, 음식점 등이 나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소자본으로 영위되는 노점 영업도 경영이 여의치 않아졌는데 원래 여유 없는 그들은 장사를 접을 생각은 염두에 없었다.
그러다가 제1기에서 제2기, 제3기 토지 대하가 발표되었을 때에는 갑작스레 가옥이 늘어나기 시작해 각종 상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옛적의 적적함이 현재의 융성함으로 탈바꿈해 훌륭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해군 측에서도 살풍경한 판잣집들을 가장 눈에 띄는 중광소로(中広小路, 나카히로코지)에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해서 퇴거를 명령했다.
이와 동시에 노점지구를 정해 진해좌(鎭海座, 주로 영화와 극을 공연하던 진해 최초의 극장으로 일출통(日出通, 히노데도오리)과 상반통(相盤通, 도키와도오리)이 교차하는 장소에 있었음) 일대로 옮기기로 했으나 개발 초기의 노점 모습을 남기지 못할 아쉬움을 느껴 추첨으로 6군데 가게만을 남기기로 했다.
이 가게 사람들은 중광소로(中広小路, 나카히로코지) 일대의 청소를 해야 한다는 조건과 돼지 사육장 식의 판잣집 같으면 풍치를 너무 손상시키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아연지붕에다 널판 벽으로 된 좀 깔끔한 건물을 지어 큰 팽나무를 둘러싸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팽나무찻집의 유래이다. 애당초에 여기에 살던 사람 중에서 열심히 한 사람이 다소간 돈을 남겨 다른 장사로 넘어간 사람도 많다는데 그 이름을 일일이 적어놓기는 도리어 지금 신용에 배반하지 않을까 사료되니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사람이란 어떤 일로 성공할지 어떤 일이 성공의 계단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팽나무찻집에 관한 설명을 하다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다.<<<
이 글은 2022년 창원시정연구원이 1910년대와 20년대 진해의 모습을 담은 세 권의 책을 번역하여 하나로 묶어 낸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 3권 『근대 문헌 속 진해』 중 『진해』 부분이다. 1912년 출간되었으며 저자는 스기야마 만타(杉山萬太)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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