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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5

by 운무허정도 2020. 11. 23.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3) 인접 지역의 기업과 공장들 - 3

 

● 협동정미소 터

상남동 회산다리 건너 회원천변에 붙은 회원동 429-1번지. 현재 환금프라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곳을 이병철이 1936년 마산에 세운 협동정미소가 있던 곳으로 추정해 왔다(머니투데이 성희용기자, 경제기행-삼성, 중교리에서 타임스퀘어까지(3)-27세 200만평 대지주가 되다(http://news.mt.co.kr/mtview.php?no=2004100609333465335&vgb=column&columnType=&code=column119)

일본에서 돌아와 사업을 하기로 한 이병철은 마산에서 정미업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확신하고 친분이 있던 정현용, 박정원 두 사람과 각 1만 원을 투자하여 정미소를 차리기로 했다.

1936년 봄, 그들은 북마산에 터를 마련하고 '협동정미소'라는 상호를 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의 젊은 시절

 

막상 제일 큰 정미소를 만들려고 하니 자금이 부족하자 이병철은 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 융자를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1년 동안에 자본금의 3분의 2를 잃고 말았다. 이병철은 실패 원인을 분석해 다음 결산 때는 큰 이익을 냈다고 한다.

또 이병철은 마산에 운송수단이 부족하다 보니 트럭 운임이 매우 비싸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마침 매물로 나와 있던 일본인 경영의 마산일출자동차를 매수하고 기존의 10대에 새 차 10대를 더 보태 20대를 보유한 운수회사를 출범시켰다. 이 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이병철은 정미소와 운송 사업에 이어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는데, 자신의 돈이 아닌 은행 융자금만으로 토지 매입 대금을 전액 지불하고도 돈이 남아도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였다.

게다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소작료까지 한꺼번에 들어와 자금 사정은 이전에 비해 더욱 여유가 생겼다.

이병철은 동일한 방식으로 은행권 대출을 통한 부동산 투자를 확대해 1년 뒤에는 무려 5배나 되는 200만 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조선총독부가 비상조치의 일환으로 토지 담보 대출을 일체 중단하면서 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금 회수 통보를 받은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이병철은 은행으로부터 빌린 엄청난 규모의 부채를 갚기 위해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토지를 팔아넘겨야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협동정미소와 운송회사까지 처분하고 나서야 이병철은 겨우 자신이 빌린 은행권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이후 이병철은 1938년 3월, 대구에서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병철의 협동정미소는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자리에 해방 이후에도 정미소가 있었음을 볼 때 정미소로 계속 운영되어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에 들어 선 정미소는 환금정미소(丸金精米所)였다.

그 후 김일권(1927년생, 생존)이 1955년에 인수하여 정미소를 계속 하다가 그 뒤 환금장여관이 들어섰다가 다시 환금프라자 건물이 건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