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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2

by 운무허정도 2020. 11. 2.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2) 사업구역 인접 동일생활권 내의 삶의 흔적 - 5

 

● 북마산중앙시장, 북마산청과시장

북마산중앙시장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37년 전인 1976년 11월이다. 이 시장은 북마산 우시장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1967년에 우시장 자리에 선화고등공민학교가 들어서면서 우시장은 사라져갔다.

2년 후에는 학교가 상남동 64-1번지 일대, 지금 마산문학관 바로 밑으로 옮겨가게 된다. 

학교가 옮겨가면서 우시장의 넓은 공터에는 자연스레 난전이 형성되고 어느새 가건물이 들어섰다. 

교통이 편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북마산역이 바로 인근에 있어서 시장이 형성될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 시장에서는 주로 의류와 생선을 취급했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청과물을 취급하는 경매시장도 들어서게 된다. 

시장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자 상인들은 본격적인 시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합을 추진한다. 땅 소유주와의 협상이 잘 풀리지 않자 회원천 회산다리 밑 상남동 40-1번지 일대의 빈 땅 860여 평을 매입하고 시장 이전을 추진하게 된다. 

진주의 대동건설이 건축을 맡았고 1976년에 새 시장이 문을 열었다. 청과시장도 함께 옮기기로 했으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청과시장은 그대로 남았다. 18개의 점포를 가진 북마산청과시장(주)은 김인택 씨가 대표를 맡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청과물 중계를 하였다. 

당시 마산에는 신포동의 마산청과시장이 가장 큰 시장이었고 월영동에도 신마산청과 시장이 있었지만 거래량은 얼마되지 않았다.

회산다리 밑으로 옮긴 북마산중앙시장은 196개의 점포를 가진 시장으로, 지하에는 생선류가 주이고 1층은 메리야스, 포목 같은 의류가 주종을 이뤘는데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고 한다. “북마산중앙시장에는 돌을 가져다 놔도 팔린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사가 잘 되니까 자연스레 주변에 노점 좌판이 몰려들어 시장 상인들과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좌판이 점점 커지면서 경전선 철로 주변으로 상권이 확산되면서 ‘철둑시장’도 생겨났는데 1997년경이 되면서 거의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한 이십여 년전에는 시장 건물을 2층으로 증축을 했는데 허가가 나지 않아 완공을 못해 오랫동안 앙상한 흉물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2층 외벽을 깨끗하게 단장을 한 상태이다. 

마산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대형 마트가 여기저기 생기면서 북마산중앙시장 역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부림시장 보다는 다소 사정이 나아 2000년까지는 그런대로 장사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재건축을 추진 중이지만 건축경기도 그렇고 해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그래도 지하의 횟집들은 아직도 성업 중이다.

 

 

● 마포중학교, 후생주택, 남영주택

현재 교원동에는 2010년 11월 완공된 무학자이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있다. 

그 자리에는 예전에 ‘후생주택’과 ‘남영주택’이 있던 자리였다. 당시 교원동 일대에는 집없는 서민들을 위해 지은 시영주택인 후생주택이 줄지어 들어섰다. 

그리고 1969년에는 ‘삼남(三南)지방 폭우’가 발생했는데, 1967년, 68년 2년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삼남지방이 1969년에는 수마에 휩쓸린 사건이다.

1969년 9월 14일 오후부터 16일 낮까지 부산, 경남, 전남 등 남해지방과 제주와 경북 일부 지역에 집중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 폭우로 2백89명이 죽고 1백7명이 실종했으며, 2백21명이 부상했다. 이것은 1959년 9월 17일 내습, 8백46명을 사망 실종하게 한 사라호 태풍 이래 가장 비참한 재난이었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마산에서도 교원동에다 ‘남영주택’을 지어 수재민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또 콜레라가 발생하여 여러 사망자가 생기자 격리병사(62평)를 짓기도 했다.

그 주택들이 들어서기 전에 그 자리에는 마포중학교(馬浦中學校)라는 중학교가 있었다. 10여 년 미만의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학교라 그런지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마포중학교 상량식 (남조선민보, 1950.2.25.)

 

그래서 자료에 나타난 마포중학교의 연혁을 살펴보기로 한다.

1946년 3월 고등공민학교령에 의하여 마산고등공민학교 인가

1948년 9월 마포중학교 설립기성회 조직

1950년 3월 건벽돌 교사 5교실 준공

1951년 6월 재단법인 마포학원 인가, 7월에 마포중학교 설립인가, 동년 9월 개교식 거행

마포중학교는 처음에 마산 상남동 74번지 호주 선교회 마산지부의 건물에서 공민학교로 출발했다. 

그러나 호주 선교회 소유 건물이기 때문에 교원동 40번지~43번지 일대에 2829평에 달하는 새로운 터를 마련하고 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1950년 4월 당시 마포학원설립기성회(馬浦學園設立期成會) 대표자는 마산의 유력 실업인 김종신(金鍾信)이 맡았다. 재단법인 마포학원 이사로는 손문기, 문삼찬, 이병진, 김상룡, 한태일, 손성수, 박봉기, 박성실, 유석형, 이만희 등 당시 마산지역의 유력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후 4년제 중학교로 개교한 마포중학교는 주야간 학급을 운영하였다. 

마포중학교는 개교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61년 3월에 재단법인 마포학원의 임원이 교체되었는데 정석현 등 7명이 새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를 뒤로 해서 더 이상의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아마도 이 시기에 마포중학교는 폐교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58년에는 회원동 480번지에 웨슬레고등공민학교(교장 서익수)가 설립되어 정규 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많은 불우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활동을 벌여 나가기도 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