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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화폐민주주의연대 뉴스레터 - 8 / 서익진의 Q&A

by 운무허정도 2022. 9. 8.

서익진의 Q&A - ‘빚 없는 자유통화, 과연 가능할까?’ 

 

 

민간은행이 고객의 예금을 받아 이 돈을 대출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만든 새 돈을 대출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부끄럽게도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놀랬을 정도라면 이 비밀(?)이 얼마나 잘 감춰져왔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화폐민주주의연대를 만들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화폐민주주의연대’ 단톡방에 계신 분이라면 조금은 식상한 진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다시 생각하는 돈의 본성 : “돈은 채무다”

돈의 본성(nature)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너무나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골치가 아파 경제학자들조차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먼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하자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크게 보면 돈의 본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썰로 대별됩니다. 하나는 ‘상품’이라고 보는 상품화폐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용(credit)’이라고 보는 신용화폐설입니다.

돈의 본성은 무엇보다 돈의 역사적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돈의 기원에 관한 기존의 정설은 상품화폐설이죠. 물물교환이 너무 불편한 탓에 어떤 물품(예를 들어 포목)을 돈으로 사용하기로 서로 합의해서 돈이란 걸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돈의 형태가 시공에 따라 그리고 기술발전에 따라 돈으로서의 기능 특히 교환매개 수단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좀 더 적합한 형태로 바뀌어 왔다는 거죠. 물품화폐->금속화폐->태환지폐->불환지폐->전자화폐->암호화폐로 말이죠. 그런데 이 설은 불환지폐 이래의 형태가 과연 상품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네요. 어쨌든 이 상품화폐설은 여전히 주류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지론으로 남아 있으며,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면 신용화폐설은 비주류 경제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왔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고대 이래의 오랜 왕정(또는 군주정) 체제 하에서는 왕이라는 절대 권력자가 백성에게 세금이라는 빚을 강제로 지웁니다. 왕은 그럴 힘도 가지고 있고, 백성의 안전을 지켜주는 대가로 일종의 보호세를 거둘 명분도 있거든요. 민주국가도 국방과 치안을 위해 국민에게 세금을 매기듯이 말이죠. 왕은 ‘돈’이라는 걸 만든 뒤 자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돈을 주고 확보한 뒤 이 돈으로 세금을 내면 받아주겠다, 즉 내게 진 빚을 갚은 것으로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왕이 만든 이 돈은 왕의 약속 이행이라는 의무(책임 또는 부채, liability)를 증명하는 증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세금을 내려면 돈을 확보해야 했고, 돈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돈을 받고 자신의 생산물이나 노동을 내주는 교환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화폐거래가 서서히 일반화되었다고 봅니다. 이것이 ‘국정화폐설’이며, 돈이 일반적인 채권-채무 관계를 형성하고 또 이 관계를 청산하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면서 ‘신용화폐설’이라 불리게 됩니다.

더 복잡한 얘기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하구요. 돈의 기원과 관련해 어느 ‘썰’이 맞는지는 역사만이 알겠습니다만, 고고학이나 사회학의 연구가 진척되면서 신용화폐설이 판정승을 거둔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판정승의 근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물교환이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경제학자들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 그리고 실재했던 것은 선물(don) 교환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러한 성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강단경제학도 이를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형태의 발전과정에서 1930년대에 각국에서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불환지폐를 도입한 이래 통용하는 화폐는 더 이상 본래적인 상품이 아니라 발행자의 신용을 나타내는 증표화폐(명목화폐, 법정화폐)가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화폐가 상품이라면 그 명목가치에 상응하는 실물 가치 즉 소재가치를 가지고 있거나(물품화폐 또는 금속화폐의 경우) 그 명목가치를 보장하는 담보물이나 본위(standard)가 존재해야(태환지폐의 경우) 하는데, 불환지폐 이후의 화폐는 소재가치나 담보 또는 본위가 없이 표면가치 즉 명목가치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화폐로 인정하기 어렵기에 법으로 (실정법이든 관습법이든) 그 통용력 내지 구매력을 강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은 현대의 법정·명목·증표 화폐가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되며,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채무를 나타내는 증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컨대 현대 화폐의 본성은 채무(증서)이고, 채무통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채무통화의 발행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돈의 본성이 채무증서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이 돈이 자산의 역할을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은 사용가치(효용)를 가진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으며, 빌려주고 이자를 받거나 부채를 변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폐자산’이라고도 불리는 겁니다. 화폐의 본성은 부채라 하더라도 화폐경제에서 화폐 자신은 자산의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화폐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거래가 되고, 이자나 환율이라는 가격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폐자산의 생산에는 거의 또는 전혀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서로 이 화폐자산의 생산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영국의 경우 왕가와 은행 세력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며, 명예혁명을 계기로 양자 간의 ‘화폐 대타협’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법정통화의 민간은행에 의한 발행/공급 시스템의 원형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앞선 뉴스레터들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마틴의 『돈』이라는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통화 발행/공급 제도는 선택의 문제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현행과 같이 시중은행이 은행통화를 창조해서 대출을 통해 시중에 공급하는 채무통화 발행/공급 시스템이 하나의 주어진 소여로서 손댈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무엇인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스템 역시 하나의 제도로서 사회 구성원의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통화 발행/공급 제도가 바뀌면 화폐의 성격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화폐 발행/공급 제도를 설계함에 있어 채무통화 시스템도 가능하지만 자유통화 - 빚을 동반하지 않는 돈이라는 의미에서 - 시스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거죠.

현행 시스템에서처럼 통화를 민간 주체인 은행이 발행하도록 한다면 그 통화는 채무화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간은행은 비록 전혀 비용을 들이지 않고 무(無)에서 돈을 창조한다 해도 그 공급은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은행이 아니라 기업이나 개인 같은 민간주체가 통화를 발행하는 한 이러한 사정에는 변함이 없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중앙은행과 같은 공공은행에게 통화 창조권을 독점하도록 하고 해마다 필요한 금액만큼 돈을 발행하게 하는 방식이면 어떨까요? 공공은행은 이윤 극대화를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대출 방식을 공급해야 할 이유도 없죠. 그렇다면 이 돈을 정부에게 그냥 주어 공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할 수도 있고 또는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돈은 상환도 이자 불입도 요구하지 않는 그야말로 자유통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진짜로 그런 방법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자유화폐로서의 주권화폐는 시행 가능하다

앞선 뉴스레터들에서 확인한 바처럼 채무통화 발행 시스템에서는 대출로 창조된 예금만큼 통화가 창조되면 그만큼 시중 통화량이 늘어나지만 대출금을 상환하는 순간 채무와 함께 돈이 사라지고 그만큼 시중 통화량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매순간 누군가는 은행대출을 받고 다른 누군가는 채무를 상환하기 때문에 통화량은 매순간 변하게 마련이죠.

예를 들어 1년 동안 신규대출액보다 상환액이 적으면 통화량은 늘어나고, 그 반대면 통화량은 줄어듭니다. 그런데 경제는 항상 일정량의 통화를 필요로 하므로 경제가 물가 또는 통화가치의 변동 없이, 즉 인플레이션도 디플레이션도 없이, 성장하려면 통화량은 경제성장률만큼 늘어나야만 합니다.

따라서 연간 경제성장률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한 해 동안 누군가가 더 많은 돈을 은행에서 빌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죠. 요컨대 현행 채무통화 발행 시스템에서는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누군가의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처럼 빚으로 돌아가는 경제 즉 ‘채무경제’라 부르는 겁니다.

이처럼 통화량은 항상 경제가 필요로 하는 만큼 유통 중에 있어야 하고,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통화량도 증가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자유통화’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와 경제성장을 위해 항상 일정량의 통화가 유통하고 있어야 하고 성장률만큼 통화가 늘어나야 한다면, 굳이 누군가는 상환하고 이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신규대출을 받아야 하는 이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없죠.

상환이 필요 없는 일정량의 통화를 나누어가지고 있으면 되고, 추가로 일정량이 필요하면 또 그만큼 발행해서 나누어가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정부가 일정량을 발행해 지출하고 필요한 만큼 추가로 더 발행해도 상관없죠. 상환이 필요 없으니 이자 불입도 필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통화가 가능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돈을 화민연을 비롯한 화폐 민주화 개혁론자들은 주권통화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주권통화 발행 시스템이 현행의 은행통화 발행 시스템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정부나 공공은행이 모든 신규 통화를 자유통화(또는 자산통화)로 발행해 공급하기 때문에 통화를 발행해도 경제에는 채무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더 이상 ‘채무경제’가 아닌 말 그대로 건전한 경제가 되는 겁니다.

아, 물론 이 경우에도 경제에는 대차거래가 일어나고 채권-채무 관계가 생길 겁니다. 일단 국민들이 돈을 나누어가지거나 정부가 공익적으로 지출을 하는 순간 이 돈은 누군가의 소유가 됩니다. 이처럼 사적 소유가 된 돈들은 경제 주체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은행을 중개로 간접적으로 대차거래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해마다 새로 공급되어야 하는 돈은 더 이상 채무통화가 아니라 자유통화 즉 주권통화로만 발행되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전체 통화량에서 자유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어갈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 전체로 보면 빚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는 빈도나 강도에서 크게 낮아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음 호부터는 현행 통화 발행/공급 시스템을 개혁하자는 근거를 찾기 위해 그 속에 내재된 모순과 그것이 드러내는 부조리를 살펴보도록 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서익진 / 화폐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전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