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산행기 - 2
갑자기 울리는 알람 소리. 아침 6시다.
8시에 식당에서 바지락 죽 먹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기상이 6시람. 7시 기상해도 충분한데... 다들 나이 값 하느라 그런지 별 불평도 없이 일어난다.
바지락 죽 일인당 1만원. 그러나 그 환상적인 맛 덕분에 100산대장 어젯밤 받았던 비난을 상당히 회복했다.
주인장이 포장해준 닭 조리탕 남은 것을 받아들고 전체 기념사진을 찍는데 차오차오 개가 우리 옆에 어슬링거린다. 이름이 ‘문수’란다. 좀 위에 있는 ‘원효사’에서 키우다 사정이 안 되어 자기에게 그냥 주었단다.
‘문수’와 함께 사진 찍으려고 앞에 앉혔는데 셔터 누르는 찰나 도망가 버려 실패했다. 그래 환생하신 ‘문수보살’께서 어찌 중생들과 같이 사진 찍으려 했으랴.
8시 30분 숙소 출발.
금방 원효사 앞 사설주차장(3천원/하루)에 주차하고 즉시 산행을 시작했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인 줄은 안내판 보고 이미 알았지만 산행로(팻말에는 옛길로 되어 있다) 입구에 수 명의 직원이 서서 감시하는 줄은 몰랐다.
입산자 자동 체크 장치도 있다. 어흐, 담배와 라이터 뺐길까봐 조바심이 들었는데, 조사는 하지 않는다.
막 오르막으로 들어서다가 물을 준비하지 않은 게 생각나 다시 내려와 가게에서 생수 작은 것 8개를 신삼호 대원이 구입해 나하고 4개씩 나누어 배낭에 넣었다. 다른 회원들 이미 올라가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다.
얼마 안 올라가서 만난 제철유적지 푯말을 그냥 지나쳐 올라가니 김덕령 의병장 묘 푯말이 나온다. 이번에는 유심히 읽어본다. 그의 활약상과 무고로 인한 억울한 죽음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다. 언제 어디서나 영웅을 시샘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인가!
조금 더 올라가니 무등산 옛길 물통거리란 나무 팻말이 나온다. 나뭇꾼들의 땔감이나 숯 이동길이었다가 1960년대에 무등산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선 후부터 보급품 나르던 길이었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냥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봉에서 오는 능선 길과 만나는 곳에 도착해보니 절반 이상은 올라온 것 같기도 하고, 화장실 겸 휴게소가 있어 보급대장이 나눠준 보급품을 먹으며 줄어든 에너지를 재충전하다. 보급대장의 은혜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다시 출발해 얼마 지나니 갑자기 주상절리 형태의 암벽이 턱 하니 나타난다.
사진들 찍으며 야단법석 하는데 지난 가는 등산객 진짜 서석대는 좀 더 위에 있단다. 약간 머쓱해진다.
서석대(瑞石臺) 장관을 바라보는 전망대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주상절리는 보통 해안가에 있는데 산봉우리 주상절리대라 처음 본다. 국내 유일한 것인지 궁금하다.
좌측으로 난 길을 돌아서 올라가니 서석대 위쪽 뒤편에 무학산 서마지기 같은 펑퍼짐한 곳이 나오고 무등산 정상이 정면으로 마주보인다.
등산객인 시민은 더 이상 접근금지다. 군부대가 무등산 정상의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을 점령한 것이다.
푯말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정상의 원래 모습과 비교해 보니 암석봉우리들을 통째로 파괴해 버렸다. 이러한 만행을 과연 1960년대 야만의 시대, 군부독재정권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저지를 수 있었을까? 전두환의 광주시민 학살도 그 연장선임을 알겠다.
서석대(1100m)라고 새겨진 비석 앞에서 학봉산악회 현수막을 앞세우고 단체증명사진을 찍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현수막이 주인공이다. 이 사진을 위해 여기까지 발을 절뚝이며 올라온 것이다.
서석대는 한자로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설판은 이 유식한 해석이 식자우환임을 금방 깨닫게 한다. 선돌의 한자식 표현(음 차용)으로 고대 선돌 숭배신앙의 중요한 표상이라는 거다. 반만 맞춘 것도 아니다. 전혀 맞추지 못했다.
아! 상식(常識)의 허망함이여! 세인이여, 상식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지어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입석대(立石臺)도 마찬가지로 선돌의 한자식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고, 역시 그러함이 곧 확인되었다.
사방이 확 트인 곳이라서 그런지 올라올 때는 없던 세찬 찬바람이 횡행한다.
이제 보급품을 소진시키고 하산할 시간이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백산대장 멋진 곳을 찾았다. 돌병풍으로 둘러싸여 등산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돌병풍을 우측으로 돌아가니 아늑한 서향받이 조그마한 분지가 나타나고 중심부에 파헤쳐진 무덤(?)이 있다. 문외한이 봐도 명당자리인데... 국립공원 내 무덤의 이전 공고를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짐승이 그랬는지 파헤쳐진 이유를 모르겠다.
드디어 100산대장이 자기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반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남은 보급품을 끌러먹는데 여전히 온기를 간직한 닭도리탕이 남다른 맛을 준다.
산 정상에서 먹는 닭도리탕은 세상에서 역사상 우리가 처음일 것이고 향후 역사에서도 있을 법하지 않은 쾌거가 아닐까.
기대하지 못했던 커피까지 나눠주는 보급대장. 모두들 만족하며 선견력 있음을 맘속으로(?) 칭송하다. 언젠가 송덕비라도 세워줘야 하지 않을까.
배를 든든히 채우고 본격적으로 하산한다. 곧 입석대를 만났다. 단체도 찍고 개인별로도 찍고.
입석대에 관찰사 등의 이름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실감난다.
전 세계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인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하니, 낙서의 민족인지 기록의 민족인지 헷갈린다. 나도 어딘가 이름을 새겨 놓아야 할까봐? <<<
글, 사진 /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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