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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by 허정도 2012. 8. 13.

<마산의 도시계획>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고시 제556호로 발포한 마산의 시가지 계획은 구역면적 43,287,000㎡, 계획인구 80,000명, 목표연도는 1961년까지, 내용은 가로개설 및 구획정리였습니다.

계획인구 8만명, 목표연도 1961년이라는 일제의 계획을 보니 어떻습니까?

이 고시가 발포된 시기는 1941년 4월 19일이었습니다.

발포시기와 달리 마산은 1936년과 1938년에 가로(街路)축조공사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이 공사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됩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사진)은 「조선시가지계획령」 분석을 통해 원마산 지역은 1920년대에 총독부의 재정 지원으로 실시한 시구개정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신마산 지역은 시구개정을 하지 않았지만 개항장을 조성할 때 비교적 도시가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 것 같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손정목의 이 견해에 따르면 원마산 지역은 이미 시구개정이 어느 정도 되었으며 신마산 지역은 이미 도시가 잘 정리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시구개정사업의 역점을 두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데, 바로 그 다른 곳이 중앙마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마산과 신마산이 아닌 곳에 이 시기 도로를 개설한 곳은 중앙마산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점제2시기의 97, 98, 99, 100, 101>의 포스팅에서 설명했듯이 마산은 이미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중앙마산지역의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시작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마산시가지 계획은 이미 시행하고 있던 중앙마산 조성의 사실상 연장사업으로서 보다 체계적인 도시체제 정비계획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앙마산의 형성은 토지 용도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 표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밭을 畑이라 하고 논을 田이라 합니다.

1931년 기준으로 밭(畑)이 65.3정반(정반, 町反 / 1정반은 척관법(尺貫法)의 한 단위로서 1町의 뜻인데 3,000평(坪)에 해당됨), 논(田)이 138.0町反 대지(宅地)가 125.5町反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인 1941년에는 밭(畑)이 61.1町反, 논(田)이 131.5町反로 각각 4.2, 6.5町反 줄어들었으며 대지(宅地)는 172.0町反으로 46.5町反이나 늘어난 것이 그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구분

1931년

1932년

1935년

1936년

1938년

1941년

밭(畑)

65.3

64.2

64.3

59.7

60.4

61.1

논(田)

138.0

137.2

133.2

133.0

127.5

131.5

택지

125.5

129.4

150.0

152.2

159.4

172.0

 

-마산의 범역이 넓어지다-

강점 막바지였던 1941-1942년 사이에 몇몇 도․시․부(道․市․府)에서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습니다.

이 때 마산은 부산과 함께 1942년 9월 30일자로 총독부령 제242호에 의해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됩니다.

마산에 인접한 창원군 내서면 내의 5개 동리, 창원면․구산면내에서 각각 1개 동리씩을 마산부에 편입함으로써 마산부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된 것입니다.

이 때 편입된 곳이 그 때까지 창원군 내서면에 속해 있었던 교방리․회원리․산호리․석전리․양덕리와 창원면 봉암리와 구산면 가포리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동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마산부 관할구역의 면적은 29㎢로 확대되었는데, 1914년 4월에 결정된 마산부의 행정구역 약 10㎢에 비해 약 3배로 늘어난 셈입니다.

이 경계는 해방을 지나 1964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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