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4월 29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軍用地’(군용지)라고 뚜렷이 음각된 표석, 그것은 일본의 지배 흔적이었다. 수십 년 식민의 흔적이 어디 한두 군데 일까마는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증표였다.
지인들과 봄바람을 쐬러 올랐던 마산 월영동 뒷산 능선이었다. 그날만 두어 개 보았으니 마음먹고 나서면 더 있을 터였다. 오래 전에 이 능선에서 ‘迫間所有地’(박간소유지)라고 새겨진 표석을 보기도 했다. 박간은 강점기 부산의 갑부다. 사유지의 표석은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도시라 마산 일대에 더러 서있다. 하지만 ‘군용지’ 표석은 사유지와 무게감이 크게 다르다.
위치로 보아 그곳에 박힌 이유는 알만했다. 강점기 마산에 소재했던 일본군 중포병대대 바로 뒷산 능선이었다. 누구도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일본군대의 강력한 영역표시였고, 나라 뺐긴 우리에게는 치욕의 표시였다.
일본군 중포병대대가 월영동(옛 국군마산병원부지, 현재 아파트 단지)에 자리 잡은 것은 1909년이었다. 이름 그대로 대형포(重砲)를 다루는 일본군 병영이었고 영내에 대구위수병원 분원도 있었다. 부대 건너편인 자복산에는 지금도 당시 사용했던 포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마산과 인근의 시위를 이 부대가 진압하였다. 4·3삼진의거 때도 이 부대의 일본군이 출병하였다.
1920년대 문화정치시기에는 야구단과 배구단까지 두어 마산의 주민들과 교류하기도 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던 전쟁시기에는 주민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키기도 했던 부대였다.
병영이었지만 풍광이 아름다웠다. 영내 벚꽃이 유명하여 마산을 소개하는 그림엽서에 많이 실리기도 했던 장소였다.
병영건설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善通物’(선통물)이라는 글을 보냈는데 이 글이 음각되어 지금도 아파트 단지의 공원연못 돌다리에 남아 있다. 하세가와는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해 3·1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자다.
중포병대대의 해방 후 변화를 좀 더 알아보자. 일본군이 떠난 뒤에는 미군이 이 땅을 사용했다. 1948년에는 조선경비대 제15연대도 이곳에서 창설되었다. 일본군에서 시작해 미군을 거쳐 한국군까지, 이곳은 군인들의 땅이었다.
전쟁 중인 1950년 말 서울에 있던 수도육군병원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52년부터는 육군군의학교로 사용되었다. 1954년 육군의무기지사령부도 이곳에서 창설되었다. 그 뒤 36육군병원-26육군병원-국군마산통합병원-국군마산병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쭉 군인병원 용지로 사용되었다. 지금처럼 아파트 단지로 토지용도가 바뀐 것은 1990년대였다.
진해박물관에는 일본해군에서 박은 ‘입입금지’(立入禁止) 표지석이 전시되어 일제의 한반도침탈 물증을 보여주고 있다. 1906년 해군기지와 배후신도시 건설을 위해 토지를 수용하면서 진해지역 주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박은 것이다. 진해 것은 일본해군이 박았고 마산 것은 일본육군이 박았을 뿐, 둘 다 똑같은 목적이었다.
일제강점기도 우리의 역사다. 치욕스럽지만 지울 수 없는 역사이고 결코 잊지 말아야할 역사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런 점에서 월영동 뒷산 ‘군용지’ 표석도 창원시의 담당기관에서 발굴해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 잊지 말아야할 민족수난사의 뚜렷한 증표가 산길 가에 나뒹굴어서야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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