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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이승만이 영웅이라면 3·15는?

by 운무허정도 2024. 2. 28.

이 글은 2월 26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으로 여론이 분분하다.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했을 뿐 독재자는 아니다’ ‘4·19혁명은 이승만이 아닌 자유당과 이기붕에게 원인이 있다’, ‘4·19혁명조차도 이승만의 의무교육이 낳은 민주주의의 성과다’라는 감상평이 돈다.

심지어 ‘영화 보는 내내 울었다. 저런 훌륭한 분이 비난 받다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학창시절 잘 못 배운 역사가 한둘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다.

이러다 보니 관람료를 지원하는 단체도 생겼고, 급기야 6·25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조차 위조된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왔다.

이와 정반대로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두 차례나 뜯어고친, 아집과 자만에 사로잡힌 인물’, ‘서북청년단과 깡패들을 동원하여 비판세력을 죽이거나 핍박했던 악인’ ‘제주도민을 비롯해 무수한 양민을 학살한 역사적 죄인’ ‘6·25직후 일본 망명을 요청했던 반국가적 인물’ 등등 악행열거도 끝이 없다.

이른바 역사논쟁, 오래 전에 사라졌던 이승만이 2024년 대한민국 사회를 가르고 있다.

 

이승만의 종말은 마산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의 극악한 부정에 분노해 마산시민이 일어섰고, 이 분노가 4·19에 불을 붙여 이승만 독재의 막이 내렸다.

독재자의 종말은 참담했다.

혁명직후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의 망치와 괭이에 산산조각이 났다. 4·19 한주 후인 4월 26일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탑골공원의 동상도 와이어에 묶어 끌어내렸고, 그것을 초등학생들이 종로2가와 세종로까지 끌고 다니며 조롱했다.

결국 그는 국민들에게 쫓겨난 뒤 하와이로 망명했고 5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

그랬다. 이승만은 당대 시민들에 의해 철저히 정죄됐고, 마산시민이 일어섰던 3월 15일은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이승만 동상을 끌고 다닌 그 아이들은 지금 70대 중반으로 대부분 생존해계신다. 목숨 바친 열사들의 유족들이 남아있고, 평생 힘겹게 살아가는 부상자도 있다.

의거에 참여했던 학생동지회도 있고, 의거정신을 잇기 위한 기념사업회도 있다. 이승만이 영웅이요 국부라면 이들의 설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오래전에 끝났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까지 이승만을 ‘권력에 눈 먼 독재자’로 규정했다.

필요에 따라 때때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역사라면 누가 역사를 두려워하겠는가. 역사적 평가는 고무줄처럼 변해서도 안 되고 그리 되는 것도 아니다.

멀쩡한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간계를 손가락질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헌법전문에서도, 대한민국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토 박으면서 이승만 정권을 ‘불의’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찬양자들은 불의를 찬양하든지, 헌법을 거부하든지, 그 둘 중 하나다.

김수영의 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그렇다. 64년 전 이승만의 사슬을 끊고 자유와 민주를 위해 쓰러져간 분들, 그분들이 흘린 피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분들의 희생 위에 섰다.

내일모레면 3월이다.

그날, 3월 15일이면 마산에서 국가기념식이 열린다. 이승만이 영웅이요 국부라면 마산시민은 반역에 가담한 역도들일 터.

그 역도들이 모여 기념식을 가진다? 그것도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서 하는 질문이다. 이승만이 영웅이라면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