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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13) - 제국주의 침략과 마산포 개항

by 허정도 2014. 8. 18.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6 제국주의 침략과 마산포 개항

 

제국주의는 독점기업과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고 상품수출보다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지니며, 열강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영토가 분할된 단계의 자본주의를 말한다.

고대 로마의 제국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침략하여 노동력과 생산물을 약탈하거나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제국주의는 군사적 점령과 자본의 이식을 통하여 식민지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 시장에 강제적으로 편입시켰으며, 식민지 민족자본의 성장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선진자본주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고, 19세기말경에는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이탈리아 등이 전 세계 대부분을 식민지로 분할하였다.

시아도 자본주의 열강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동아시아의 대국 중국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열강의 주요한 침략 대상이되었으며, 한반도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세계 질서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던 조선-

조선은 세계질서 변화에 적극 대응하지 못했다. 조선의 정치지배세력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혈안이었다.

봉건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반봉건적 요구를 철저히 외면했다. 개화파조차도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사회를 해체하고 제국주의 세력을 축출하려는 피지배층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조선은 이제 일본의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중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태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면서 조선도 개항시키고자하였다.

1866년 미국의 제너럴셔먼호의 평양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조선정부가 프랑스신부 9명과 8천여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것을 빌미로 18669월에 군대를 보내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강화도를 침략한 후 조선정부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배상금 지급, 통상조약의 체결 등 침략적 요구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이유로 18714월 조선을 침략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은 대원군 정부의 강력한 반개항 정책으로 격퇴되었지만 그것이 자주적 조선을 유지하는 길이될 수는 없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개항된 이후 군부의 침략 욕구와 해외시장의 획득 주장이 제기되면서 군국주의적 침략정책이 추진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은 먼저 한국·중국 등 인접국에 대한 침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류큐지역을 점령하고(1871년), 대만에 출병한데(1874년)이1876년에는 조선을 개항시켰다.

 

<정한 논쟁도>

 

1894년에는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관심으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산지역도 일본, 러시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마산포의 개항과 열강의 진출-

일본이 마산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은 처절할 정도로 집요했다.

마산 개항 이전에 부산(1876년), 원산(1879년), 인천(1882년) 목포(1879년) 등이 개항되고 1899년에는 군산, 성진과 함께 마산이 개항된다.

마산포의 개항은 1898526일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이루어진다. 고종의 지시에 의해 외부대신 박병목이 청원한‘성진, 군산, 마산 3구 개항 및 평양을 개시’한다는 안은 찬성7표와 반대3표로 통과됨으로서 가결된다.

광무3년(1899) 51마산포는 개항장으로 발족하고, 마산포의 개항업무를 담당할 관청인 ‘창원감리서(1898년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건물자리)’가 설치되고 창원 부윤이었던 안길수가 감리업무를 겸임했다.

개항이 되면 외국인이 거주하며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치외법권지대인 조계지가 필요했다.

창원군 외서면의 신월리·월영리 2개 지역의 해안 약 13여평이 외국인 거류지 즉 조계지로 확정되었다.

<조계장정에 첨부된 '마산포 각국 조계도'>

 

조계지가 확정되자 각국 공동조계의 획정을 내용으로 하는 조계장정을 조인했다. 조계장정에는 조계지 주위 10여리를 개방하여 매매양도가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산포 조계장정은 다른 개항장과는 달리 영사관이 보유할 수 있는 부지면적은 최대 45백평으로 제한했지만, 일본은 이 조항을 무시했다.

러시아도 마산포를 조차해 러시아의 해군기지를 마련할 속셈으로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섰다. 본과 러시아의 마산포 땅 매수 경쟁은 치열했다.

이보다 늦게 영국은 12000㎡에 이르는 부지를 매입하기도해 마산포는 열강들의 토지 매입의 각축장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땅을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되자 토지매매를 담당할 관청이 필요했다. 신동공사라고 하는‘관리마산조계사무소’가 이일을 담당할 법인체였다.

이 공사는 신동이라는 관리가 계약이나 소송에 관련된 업무나 조계지 안의 도로공사 그리고 다리 제방, 병원을 세우거나 풍기단속 등을 맡아 보았다. 이들은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징수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마산포를 대련이나 여순처럼 조차해서 해군근거지를 만들어 일본세력을 견제할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마산조계장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러시아는 두척산(무학산)의 연봉의 하나인 자복봉으로부터 해안쪽으로 자복동, 월영동 아래쪽 30만평을 저탄장소와 해군병원을 설립한다는 명분으로 표석과 표목을 세우기도 했다.

이를 뒤늦게 알게된 일본정부는 한국주재 일본공사인 히야시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자복, 월영 일대의 땅을 러시아와 경쟁해서 매입하라는 지시를 내려 토지매수 경쟁이 시작되었다.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라는 일본상인이 토지매입에 나섰다. 광무 3년(1899) 721일 조계주변 10리 이내의 땅을 매매할 수있는 관계제도(공증제도)가 생겨, 하사마는 자복동과 월영동 일대에 2만여 평의 땅을 매입하고 완월동과 자산도, 율구미 토지까지 매입한다.

러시아도 일본의 토지매입 공작에 굴복하지 않고 광무 4년(1900330일) 우리나라와 ‘마산포 부근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 전용 조차지에 관한 협정’을체결하기에 이른다.

러시아는 창원감리를 협박하여 율구미의 땅 중 하사마가 차지하지 않은 약30여만 평을 확보했다.

일본은 총면적 30만 평(이중 일본정부가 사들인 땅은 14만평)을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율구미에는 러시아의 단독조계가, 자복동과 월영동 지역에는 일본의 단독조계가 만들어졌다.

물론 일본이 마산포에서 합법적인 토지 소유를 위해 ‘마산포 일본 조계장정-자복동 협정서(광무 6년-1902517일)'가 맺어진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우리나라 개항장에서 외국인의 단독조계가 생긴 것은 마산포에서만 있었던 특유한 일이었다.

19042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조계지는 일본의 소유로 넘어갔다.

개항 후 10년이 지난 마산에는 일본인이 5,941명이나 거주하게 된다.

189951일 (광무3년) 개항되었던 마산항은 한일합방이 된 이듬해인 191111일부터 진해군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폐쇄된다.

이날 이후 마산항에는 일본인 마산세관장의 허락 없이는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마산포의 각국조계도 1913421부터 폐지되었다.

 

<러시아 영사관>

 

-개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마산항의 개항이 자율이었는가, 강제였는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다.

후자는 마산항 개항 1년전인 1898년 의정부 대신들이 개항문제를 놓고 찬반투표를 벌인 규장각 외부청의서를 제시하고 자율개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뚜렷한 역사적 근거없이 열강에 의해 강제개항되었다는 주장은 주관적 판단이나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마산항은 19기말 일본 등 열강들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의해 타율적으로 개항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자본주의 체제로의 강제적 편입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정부 각료가 찬반투표를 통해서 결정했다고 해서 자주적인 의사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형식적인 절차보다 개항이 마산 지역민의 이익을 담보하고 있었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항이후 상권을 둘러싼 마산민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통해서도 개항의 의미는짐작될수있다.<<<

김용택 / 당시 마산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