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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언을 하고 공로자 심사 신청을 하기로 맘먹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먼저 철저한 비밀 유지의 이유를 살펴본 후 증언 결심의 동기를 알아보자.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하상칠이 315의거 당일 시위에 참가한 이후 무려 50년 동안 침묵해왔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기는 공포라는 감정과 빨갱이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성격보다는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하상칠의 사례는 이것들이 개인의 의식에 어떻게 각인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우선, 권력의 보복에 대한 공포증이다.

315의거 당시 부정선거라는 권력의 부당한 행위에 저항권을 행사한 시민들에게 공권력이 가한 폭력과 보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증언록(2010a)을 보면 기자는 물론 구경꾼이나 시위에 참가한 가족을 찾아 나선 사람 등 시위와 전혀 무관한 사람까지 무차별로 연행해갔고, 그들 중 다수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거나 악랄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반병신이 되거나 평생 동안 지병으로 고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난사하거나 심지어는 도망치는 시위자들을 뒤쫓으며 뒤에서 총격을 가했고(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남아 있는 사람 키 높이의 총탄 흔적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315의거 당일 밤과 그 직후 며칠 동안 마산 시내 분위기는 무차별 검문검색, 가가호호 가택수색, 보복적인 검거 선풍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당시 경찰은 물론 정부도 315의거가 빨갱이 소행이거나 적어도 북한 오열(간첩)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저지른 일로 간주했다.

빨갱이나 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불온문서를 시체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작태나 피검자들 중에는 사주 받았다는 자백을 하라며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이 부지기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상칠은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 해나온 포로였었기 때문에...”(증언록, 478)라고 진술하듯이 자신이 검거되면 반공포로 경험이 빨갱이 조작 빌미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그날부터 며칠 동안 가위에 눌렸다고 증언할 정도다.

이러한 빨갱이 트라우마는 단지 하상칠의 경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 그리고 반공독재 치하를 겪은 한국인 모두에게 많건 적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적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빨갱이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0년 경 마산시내에서 가족과 함께 / 가운데가 신을순 여사. 하상칠 선생의 팔장을 낀 이가 둘째 딸 하효선 시네아트 리좀 대표>

 

이러한 빨갱이 트라우마는 하상칠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행동이나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다.

우선, 그는 그 오랜 세월 동안 315의거 참가는 물론 반공포로 경력에 대해서도 가족에게조차 거의 완벽하게 비밀로 유지해왔다.

다음, 혹시 있을 수 있는 의심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경력을 세탁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필자에게 상당한 후원금을 내고 경우회 자문위원이 된 것은 의거 참가자나 빨갱이로 의심받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경우회 회원이라면 시위 가담자로 의심받거나 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사상까지는 의심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얼음상인조합 결성을 주도하거나 경남인조빙판매조합장 등을 역임한 것도 이러한 경력 세탁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1960315일 이후 그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단체에는 일체 가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벌이에 신경 쓰고, 직업 관련 이익단체에만 관여하고, 자식 교육 시키고, 집안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정치적으로 주목받을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극우 보수주의자로 처세했는데, 이 역시 자기 위장의 한 술책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처럼 사회와 역사가 하상칠이라는 개인에게 각인시킨 공포와 트라우마는 반세기나 지속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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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2

12. 정전 후의 체험들 - 귀환, 상이군인들

 

정전 얼마 후에 전장에 갔던 아저씨들이 속속 돌아왔다.

함께 끌려가서(그땐 그렇게들 표현했다) 내내 한 부대에 있다가 함께 돌아온 우용 아저씨와 내 당숙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고, 다른 두 분은 정전 한참 후 제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우용 아저씨는 볼에 큰 흉터를 가지고 왔는데, 내 당숙은 손끝 하나 다친데 없었다.

부대가 후퇴할 때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다 열차탈선으로 부대원 전체가 부상 혹은 사망을 당하여 모두 상이용사로 제대되었는데, 집결지에 늦게 가 열차를 못 탄 당숙도 함께 상이제대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동네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았던 남규 아저씨의 귀환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정전 후 우리 집에도 두어 명 다녀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름한 복장에 단봇짐을 지고 나타난 청년들에게 음식을 주고 여비도 쥐어주는 걸 보았는데, 아버님 말씀으로 그들은 거제도에서 나온반공포로라고 했다.

그들에게 협조하라는 공문까지 시와 동에 왔더라고 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집결한 반공포로>

 

그걸 본 얼마 후에 그 청년들 보다 훨씬 남루한 누비옷차림의 남규 아저씨가 아리랑고개를 넘어왔고, 가족들의 울음과 동네사람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받던 광경을 나도 본 기억이 난다.

북한수용소에 이 년 넘게 있다가포로교환으로 왔다고 했다.

다른 부대와의 교신이 끊긴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계곡 따라 올라가라고 몰아치던 소대장, 결국 반 이상의 병사와 소대장도 전사하여 저항도 못하고 엎드려 있는데 총성이 그치고 누구에게 엉덩이를 거칠게 채여, 그 길로 수 일 동안 타고 걷고 하며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간 이야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다투던 이야기, 친공포로들의 협박과 회유에 얼버무리곤 하다가 결국 심사관 앞에서고향가고 싶다는 한마디로써 풀려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은 그때 우리들 사이에서도 꽤 오랫동안 인기화제 감이었다.

그런데, 그즈음 하여 여러 번 보았던 상이군인들의 횡포는 매우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의족이나 의수를 한 상이용사들이 몇 명씩 몰려다니면서 민폐를 일삼았던 일이다.

 

상이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상가나 민가에 들어가 곡식이나 돈을 요구하다 여의치 않으면 시비를 붙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었는데, 그런 광경을 등하교 길에서도 여러 번 목격했다.

쌀이나 보리쌀 반 되 혹은 돈 몇 푼이면 순순히 받아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더 많은 경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느냐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심지어 구멍가게 과자 통을 비우는 일도 있고 주막집 막걸리 독을 비워 버리는 일도 있었다.

항의하는 주모의 저고리 소매를 쇠갈고리로 된 의수로 꽉 집어 질려버리게 했고, 저만치 서있는 남정네의 복장을 향해 창 던지듯 목발을 날리기도 했다.

자꾸 던지면 그것도 단련이 되나 보았다. 목발이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가서 상대의 가슴이나 배, 옆구리 등을 정확하게 맞혀 그를 헉하고 엎드리게 하는 장면도 두어 번 목격했다.

이렇게 행패를 부리고는,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는데” “너그들이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게 누구 덕인데”, 저주 섞인 목소리로 고함치기 일쑤였다. <전술한 졸저에서>

 

같은 상이용사였던 9촌 아저씨의 말이 기억난다.

집도 가족도 잃고 몸 때문에 취업도 못하는 저들이 저 짓 말고는 뭘 하고 살아 가겠냐

<전쟁 후의 상이군인>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 배불리기에 바빠 그들을 방기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애먼 양민들, 아니, 비슷한 희생자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리는 형태를 달리하면서 그 후에도,, 아니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분단의 부작용이 언제까지 이 사회 역리의 원천으로 작용할 지, 종종 암담한 생각이 들기도 해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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