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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2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4

14. 정전 후의 체험들 - 마부 버스, 화물차

 

군용차 아닌 것들을 그때 우리들은 개인차라 불렀는데, 개인 승용차는 당시로선 하루에 한두 대 보기도 어려웠고, 거의 모두가 화물차와 버스였다.

거의 모두 일제가 두고 간 것이나 군에서 불하한 것들이었는데, 차종에 관계없이 크기가 좀 작고 연하게 생긴 것은 일제(일본제품), 크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미제(미국제품), 개조한 차들은 선제(조선제=국산)라 불렀다.

차에 호기심들이 많았던지라 지나가는 차들을 그렇게 분류하기를 즐겼고, 종종 분류를 다투기도 했다. 이 용어들은 한참동안 옷, 화장품, 학용품 등에서도 쓰였다.

60년대 서성동 버스 종합터미널이 생기기 전까지 회사 별로 여기저기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주로 오동동, 창동, 남성동에 있었는데, 회사가 마산에 있은 것은 별로 없었고, 부산 회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한금속, 신한여객 등이 생각나는데, 후에 천일, 신흥 등이 나타난 것 같다.

버스 엔진은 군에서 수명이 다한 것을 재생시킨 것이라, 소리도 요란하고 정지 후 출발 때는 으레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쇠창 같은 기구로 돌려서 발동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몸통과 내부 시설들도 철판 등을 붙인 듯 달릴 땐 삐그적거리고 너덜거렸다. 그래도 자갈 튀기며 달릴 땐 아주 빨랐다.

<미군용 폐차 재생 버스>

 

마산 오동동에서 부산 대신동까지 세 시간 반 남짓 걸렸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마부 국도의 거리가 지금보다 길었고, 시내 진입 전의 전 도로가 비포장이었으며 군데군데 패이거나 가장자리가 허물어진 곳도 있었는데다가, 장시간 정차하는 곳도 여러 곳이고, 아무데서나 손만 들면 태워주는 운행방식이라 그렇게 걸렸던 것 같다.

창원(동정동 사거리 위치), 진영(진영역 정문 근처), 김해(위치도 모르겠다), 구포다리 부산 쪽 입구, 범일동 등에서 10여 분씩 지체했었다.

그동안에 장사치들이 올라와 여러 가지 물품을 팔았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구포 배와 진영 단감이다. 장사 중엔 강매꾼들도 제법 있었는데, 대부분 상이군인들과 그 지역에 상주하는 건달들이었다.

버스들끼리 경쟁도 심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차체가 요란하게 흔들릴 정도로 달렸는데, 언젠가 부산 누나 집에 갈 땐 머리가 천정에 부딪쳤던 기억도 있다.

양덕 삼거리(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파출소 근처)에서 탔기 때문에 맨 뒷자리에 앉게 되어서 더 심했던 것 같다.

속도감도 지금 사람들과는 달라 빠르게 느꼈겠지만, 그런 덜컹거림 때문에 더 빨리 달리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쯤 해서 야남면(상남면, 웅남면) 다니는 버스도 나오고, 마진(마산 진해) 버스도 나와 봉암 사람들도 더러 버스 승차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장에 채소함지 이고 나가는 아낙네들이나, 많은 품팔이들은 승차 엄두도 못 내었다. 일마치고 돌아오는 말 구루마(말 수레), 소 구루마 운 좋게 만나 타면 호강으로 여겼다.

당시엔 트럭도 사람들 운송수단으로 많이 쓰였다. 관광버스가 생긴 시기는 6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사람들 동원이나 야유회 등에는 트럭이 주로 사용되었다. 국가 행사나 시 행사 땐 시에서 트럭을 내주었고, 근처 유원지로 놀러갈 때도 트럭을 불렀다.

봄이나 가을엔 트럭들이 짐칸에 시멘트 부대 같은 걸 깔아놓고 요금 받고 태워주기도 했다.

전쟁 직후 아버님 친구 십여 명이 가족들 데리고 북면 온천장으로 놀러갈 때 고개를 삘삘거리며 겨우 넘었던 기억이나, 중학교 때 바로 위 형과 외사촌 형과 더불어 진해 벚꽃장 갈 때 양덕 삼거리에서 세워놓고 호객하는 화물차 타고 갔던 추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 전후 얼마 후부터 소위 하이어(택시)라고 불리던, 8인승 정도의 차도 나왔는데 그것도 군용 지프를 불하 받아 개조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건 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술집이나 유원지로 대절하여 다녔는데, 봉암 다리 근처에 번창했던 꼬시락 횟집 때문에 많이 보았다.

그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인근 바다에서 꼬시락을 잡거나 그걸 재료로 횟집들을 운영했었는데, 50년대 후반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진해 별장가는 길에 거기에 들렀다는 소문까지 퍼져 꽤 번창하기도 했었다.

그 작은 어촌 마을에 해상 캬바레까지 있었으니까.<<<

<봉암교와 인근 해상 꼬시락 횟집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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