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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7. 07:30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이야기 하나,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지금 그 곳에 없다.
이십여 년 전 봉암동 골짜기로 이전한 후 그곳에는 덩치 큰 판상형 아파트만 덩그러니 몇 채 있을 뿐이다.
교복을 입은 채 까까머리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운동장도 없어졌고 여름에는 그늘, 가을에는 낙엽청소를 시켰던 그 큰 활엽수와 그 아래 나무벤치도 사라졌다.
봉암동에 새로 지은 학교에서 지금의 아이들이 40년 전 나보다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는지 모르지만 나의 추억이 녹아있는 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의 고등학교는 생각 속에만 있고 찾아가볼 장소는 없다. 새로 지은 학교에 갈 일이 더러 있지만 행사만 있지 추억은 없어 여느 학교를 찾았을 때와 감흥이 다르지 않다.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회원동 구 창신학교 본관>

이야기 둘,
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나는 좁은 골목길 끝의 낮은 양철지붕 조그만 집에서 27년 쯤 살았다. 흙 놀이에서 축구경기까지 가능했던 그 골목길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회상 장치다. 전에는 컬러였는데 지금은 흑백으로 보인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쯤 그곳을 간다. 혼자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내와 함께 가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토막 해준다.
내 어린 날의 흔적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그 작은 집과 좁은 골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재개발로 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것이라 걱정이다.

장소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의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곳. 과거 속에서 지금의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추억이 깃든 교정과 옛집 그리고 좁은 골목이 그럴 진데, 하물며 시민 전체가 기억하는 장소, 위대한 예술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역사와 문화의 현장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문화와 예술’로 도시공간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도시 곳곳에 역사와 문화가 담긴 장소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장소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렇다. 커피숍에서 나누는 연인의 속삭임도 서울시청 앞 광장의 정치집회도 장소를 전제하지 않은 행위란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유한한 인간에게 시간은 극복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이지만 ‘지나간 시간’이라는 그 절대적 영역을 피라미드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시와 건축, 그리고 ‘장소’의 위대함이다.
장소와 시설이 사라지면 기억과 역사는 결정적으로 훼손당한다. 시간을 담은 장소 앞에서 필요한 것은 당장의 개발이익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다. 우리는 시간과 역사와 문화를 돈으로 대체할 만큼 빈곤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마산의 자랑 '문신'을 볼 때, 예술의 흔적을 담고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되어야 할 것은 문신에 대한 연구다. 이미 많이 이루어진 그의 예술세계 연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세계와는 별도로 그의 생애사가 보다 깊이 보다 세밀히 연구되어야 한다.
구술로 문신의 삶을 회고해 줄 수 있는 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매우 시급하다.

그가 어디를 걸었는지, 그가 즐겨 다닌 찻집과 식당은 어디며, 그가 지인들과 자주 찾았던 주점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즐겨 불렀던 노래는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서서 아름다운 마산만 정경을 그윽이 바라보았는지, 또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의 흔적이 녹아 있는 장소와 공간이 그를 도시문화산업과 연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문신의 이름으로 이 도시를 부상시킬 수 있는 기회의 통로다.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며 신처럼 창조한다’는 그의 신념을 느끼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
단지 남긴 작품만으로 문화산업과의 연계를 모색하기에는 도시공간이라는 거대한 사이즈가 받아내기에 부족함이 많다.

그런 점에서 경남도민일보가 세 명의 연구자에게 의뢰, 작년에 문신 생애사 『그리움의 바다 위에 영혼을 조각하다』를 낸 것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문신의 생애사를 통해 그와 관련 있는 시설과 공간이 밝혀졌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문화산업과 연관시킬 것인가라는 최종과제가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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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29. 09:12

노무현의 추억

 



최근에 용산 재개발문제로 참극이 빚어졌습니다만, 이런 사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이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 난장이들의 꿈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18년 전, 1991년이었습니다.
건축가였던 나는, 세입자이기 때문에 재개발의 혜택은커녕 어디론가 빈손으로 쫓겨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끝에, 기존의 재개발방식과 달리 세입자도 입주 가능한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정말 아무 방법이 없는지, 집을 지어주지는 못하지만 집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도 제시해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산에서 펴낸 이 책을 읽고 공부하시겠다고 직접 전화를 한 후 보좌관을 보내 받아간 그 책 입니다.


일 년간의 시간을 들인 뒤 ‘세입자의 입주가 가능한 재개발’을 주제로 책을 한 권 펴냈습니다. 집 주인만 혜택을 받았던 기존의 방법과 전혀 다른 재개발이라 언론의 관심도 높았습니다. 비매품이라 구입할 수 없으니 보내달라는 요청을 여러 곳에서 받았습니다만 모두 도서관이나 주택정책연구자들이었습니다.


국회의원 노무현의 전화를 받다



실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될 정치가와 행정가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당시 13대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허정도 선생님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저는 국회의원 노무현입니다. 허 선생님께서 재개발에 관한 책을 펴냈다고 이야기들었습니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 책을 한 권 구해 읽어보고 싶습니다. 파는 책이 아니라서 이렇게 직접 연락을 드렸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아, 예…, 그렇게 하시죠.”
“보좌관을 마산으로 보낼 테니 그 친구 편으로 한 권 보내주기 바랍니다.”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는데…”
“아, 아닙니다. 그 친구가 부산에 갈 일이 있으니 마산에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 1991년 당시, 연구 대상 지역이었던 곳 입니다. 사진의 스레이트 지붕이 지금은 콘크리트 스라브지붕으로 바뀌었습니다. 최근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데 세입자를 배려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마산에서 만난 보좌관의 말.


“지역구의 가난한 세입자들이 집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기 위해 노무현 의원께서 직접 책을 읽어보려는 것입니다”


저의 짧은 ‘노무현의 추억’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이런 정치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의 모색을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노무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한국정치에 대한 희망을 그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가 떠난 지 나흘째 되던 날, 불현듯 그 때 일이 생생히 떠올라 이 글을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같은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 정치가 노무현…,
그가 정녕 아깝습니다.

 


윤민석님이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님 추모 노래 '바보 연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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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12
  1. sisters 2009.05.29 09:23 address edit & del reply

    부디 편안한 곳에 가셨길

    • 허정도 2009.05.29 10: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해주어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 무탄트 2009.05.29 09:51 address edit & del reply

    아~~가슴 시리도록 마음 아프게 하는 인간 노무현...정말 아깝습니다..그와 잡았던 손의 온기를 절절한 그리움으로 안겨주고
    떠났기에 정말정말 억장이 무너지도록 가슴이 아픕니다..면복이 없습니다..당신을 사랑한 한사람으로서..부디 좋은곳에서 편안하시길 두손모아 기원합니다.

    • 허정도 2009.05.29 10:12 신고 address edit & del

      참 가슴이 아프네요. 좋은 지도자 한 분을 잃은 것 같습니다.

  3. 구름 2009.05.29 16:44 address edit & del reply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이 열리는 바로 그 시간에 깡패 용역들이 용산에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문정현신부님이 깡패같은 용역들에게 끌려 나오셨다고 하는군요.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서울광장에 몰리고, 언론이 모두 서울광장에 몰려간 동안 철거민들을 끌어낸 것 입니다.

    이명박 정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네요.

  4. 야무진 2009.06.02 09:53 address edit & del reply

    사람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5. 푸른옷소매 2009.06.02 18:24 address edit & del reply

    너무 소중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6. 등산길 2009.06.03 16:03 address edit & del reply

    서민을 위해 . 서민과 함께 할수 있는 분이 서민들 곁을 떠나셨습니다. 고인을 명복을 두손모아 빕니다

  7. 자연 2009.06.14 15:22 address edit & del reply

    초보연구자로서 위의 선생님의 책을 읽고싶습니다..
    jin21s@dreamwiz.com 이메일 입니다..

    • 허정도 2009.06.15 17:14 address edit & del

      너무 오래된 책이라 여분이 없습니다.
      참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내용이 별로 없어서 볼만한 책은 아니지만, 혹 필요하시면 몇몇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것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출판 당시에 서울대도서관, 한양대도서관 등에서 연락이 와 보내준 기억이 있습니다.

  8. 수잔 2009.06.30 17:16 address edit & del reply

    즐겨찾기를 해두고 보고 또보기를 몇번...
    흐르는 노래가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언제까지 노짱님을 그리워하며 뒤로 뒤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현시대를 가슴 아파해야 하는지...
    허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같은 분들이 모여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겠죠?
    우리사는 세상이 노짱님 희생의 값으로 사람사는 세상이 빨리 다가오는 오는 날을 간절히 바래봅니다.

  9. 박주언 2009.10.22 13:06 address edit & del reply

    님을 지지 합니다. 노무현님도 허정도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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