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경쟁이 격심의 극에 달한 민회의원 선거
명치 43년(1910) 3월 1일, 민회의원 제3회 선거회는 민단사무소에서 열렸다.
그때의 마산의 동포 세대수와 인구는 진해(鎭海) 경영 진척에 따라 크게 증가하여 2,300호에 6,799명이었기 때문에 종래 12명 정원이던 의원 수는 16명으로 증원되어 신마산, 마산포 각 8명의 후보자를 공인하도록 타협이 성립되었는데 신마산에서는 중앙부와 합쳐서 입후보한 사람이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아 그 결과,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메카다 헤이사부로(目加田平三郞), 오키타 토시타로(沖田敏太郞),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 미야케 요시로(三宅吉郞),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사토 토요스케(佐藤豊介), 마츠모토 다조(松本多藏), 무라카이 다케지로(村上竹次郞),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의 열 사람을 공인하였다.
그러나 공인을 무시하고 후보자로 나서 선거운동을 막 벌인 자가 바로 한국은행 마산출장소장 지배인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씨이다. 저자는 이 사람을 날려 보리려고 이 사람에 대항해 공인 후보 중에서 선거함이 옳다고 입후보했는데 항상 이 사람들은 저자의 실명(實名)인 스와 부고츠(諏方武骨)의 부고츠(武骨)을 들어 야유하고 촌스럽다는 등 비타협적이라는 등 비난하였다.
마산포에서 후보자로 공인된 사람들은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하쿠모토 게이이치(百本惠一), 야마모토 구니지(山本國次), 에다 구니미츠(江田國光), 나츠메 데츠조(夏目哲三), 요시다 마스타로(吉田益太郞), 고후지 지로(古藤次郞), 히사에 간사쿠(久重勘作)의 여덟 명이다.
모두 공인 후보자이기에 연합사무소를 설치한 것 외에 각 후보자의 주소를 운동 사무소로 삼은 것이다. 마산포에서도 공인 후보자의 주소를 운동 사무소로 삼은 것이다.
마산포에서도 공인 후보에 반발한 혁신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나섰다. 다나하시 센노스케(棚橋仙之助), 야마나카 이치노스케(山中市之助), 사토 고노스케(佐藤子之助), 야마노 겐지로(山野源次郞)의 네 사람이다.
이 네 사람은 다나하시 씨 집을 연합사무소로 하고 화려하게 운동을 했으나 현세가 좋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자연적으로 해산했음은 차라리 무사적인 행동으로 칭찬받을만하였다.
2월 28일, 선거회가 내일로 다가왔는데 아침부터 비가 많이 왔다.
저자는 다른 후보자처럼 항상 인력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걸어 다니는 완만한 운동을 방침으로 삼았고 비까지 와서 집에서 집필을 하였다.
저자를 위해 성의있는 운동을 해준 이는 옆집 친구 요시가타 우메마츠(吉形梅松) 씨와 마산신보사(馬山新報社) 뿐이었다.
밤에 들어서자 각 후보자의 운동이 열을 띠어 연합통일은 이미 깨진지 오래며 어느 곳에 서는 방망이가 휘둘리고 칼날이 번쩍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음 날, 3월 1일은 날씨도 개이고 새벽부터 후보자와 그 운동원들이 동서로 인력거로 달려 공천 게시판 등이 널려 있는 선거장으로 몰려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통로를 막고 있었다.
각 후보자는 근처의 점포를 빌려 접대소도 차리지 않은 이는 나 혼자뿐이었다.
선거 세계의 경쟁이 치열함이 알려지자 창원, 진영, 현 진동 방면에서 응원자로 왔고, 구경꾼들은 누구는 떨어뜨려야 한다거나 누구는 당선되고 누구는 떨어진다느니 누구를 쳐야 한다느니 등의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고 한다.
선거위원장인 마에다 민장은 오전 9시에 선거 개시를 선언하고 감독관 미마스 이사관, 마산경찰서장 야스다 가츠미(安田勝實) 경시와 그 외의 입회인 열석 하에 차례차례 투표가 진행되어 오후 3시에 끝났다.
개표 결과 아래의 16명이 당선되고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一), 에다 구니미츠(江田國光), 사토 토요스케(佐藤豊介), 무라카이 다케지로(村上竹次郞)의 공인 세 사람이 낙선하였다.
그날 밤 저자에게 당선장이 교부된 것은 정말 뜻밖의 감정을 금할 수 없었다.
〔당선자 명단〕
하마다 시치주로(濱田七十郞)(신), 오키타 토시타로(沖田敏太郞)(신), 요시다 마스터로(吉田益太郞)(포), 나츠메 데츠조(夏目哲三)(포), 야마모토 구니지(山本國次)(포),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포), 마츠모토 다조(松本多藏)(신),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신), 고후지 지로(古藤次郞)(포), 메카다 헤이사부로(目加田平三郞)(신), 미야케 요시로(三宅吉郞)(신),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신), 히사에 간사쿠(久重勘作)(포), 히로시 세이조(弘淸三)(신), 하쿠모토 게이이치(百本惠一)(포), 스와 부고츠(諏方武骨)(신)
당시 저자 나름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선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을 당선시키고 싶이 않아서 표를 분산시키려고 입후보한 것이다.
하마다 시치주로 씨는 적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이다 당선은 틀림없을 것이다.
개표가 반쯤 끝났을 때 나는 집에 가려고 했는데, 하마다 씨가 말하기를 “자네의 낙선은 틀립없을 테이니 나는 당선 축하연을 요시카와(吉川) 여관에서 하니 20분 후에 내가 그리로 가니 자네도 요시카와에서 기다려 달라”했다.
그래서 요시카와 여관에 가서 널려 있는 술과 안주로 한 두 사람과 환담을 하고 있었다.
하마다 씨가 좀 있다 와서는 “자네도 당선되었다”하며 축하를 자기가 해 주겠다는 것이다.
내가 농담하신다고 믿지 않고 있으니 요시카와 우메마츠 씨 이하 대여섯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당선이다. 당선됐으니 빨리 집에 가서 부인을 기쁘게 해 드려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 밀어내니 집에 갔는데 불로 꺼져있고, 숯불로 떨어지고 마누라도 없었다.
이웃 요시카타 부인이 도오운(東雲)의 출산으로 집을 비우고 있다고 전해 주매 우메마츠 씨는 동운이 음식점이니 바로 가서 부인에게 알리고 먹을거리 몇 가지를 주분해 오라고 했다.
좀 있다가 축배를 올리고 있느니 마누라가 돌아와 뜻밖의 당선을 좋아하며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다가 요쿠라 노부요시(興倉信義) 씨로부터 ‘축일기당선(祝一騎當選)’이란 명목으로 10원을 축하금으로 받았다.
소시 힌(莊子斌) 씨도 일금 15원을 보내왔다.
명함 인쇄비나 축하연 경비는 이것으로 충분하며 남는 것은 게타(下駄) 값이라도 할까 했다.
그날 밤 여기저기 사람들과 어울려 요정을 두세 군데나 초대받아 아침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55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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