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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6) -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9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마산의 봄은 산등성이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의 붉음 만큼이나, 부정과 불의에 저항했던 정열에 불탔던 계절이다.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를 쟁취했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마산의 지역민들은 항상 그 앞에 서 있었다.

3·15는 분단된 남한, 그 민주화의시작이었다.

1960315일 정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마산에서는 적어도 4차례의 시위가 목격된다.

314일 밤 민주당사 앞에서 일어난 시위, 315일 선거 당일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마산시 전역에서 진행된 시위와 총격발포 사건, 315일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411일 바다에 떠오르자, 이를 보고 격분한 군중이 이날 밤에 치열한 시위를 벌이고, 경찰이 총격을 하는 사태와 이어서 통행금지 중에도 일어난 412일과 413일의 시위, 마지막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물러날 의사를 표명한 후인 426일과 27일에 부산에서 원정 온 경남고교 학생들과 군중들이 시청, 소방서, 경찰서, 파출소 등을 파괴한 시위가 그것이다.

 

-“못살겠다, 가라보자”-

1960314일 저녁부터 밤까지 오동동에 소재한 민주당사 앞에서 적게는 1백여 명에서 많게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 민주당의 마이크 유세를 듣는다.

민주당은 당사 옥상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자유당의 폭정을 비난하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군중들이 ‘협잡선거 다시하자’, ‘조병옥만세, 장면만세’를 외친다.

이에경찰이 등장하고, 경찰에 대해 모자를 빼앗아 던지기도 하고, 경남관용 290호 짚차와 공군 81항공창 본부 12호 짚차에 돌팔매질을 하고, 정복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기에 반공청년단이 들이닥치고, 경찰은 폭행용의자를 연행한다.

이에 군중들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 ‘협잡선거 물리치자’라고 외치면서 석방을 요구한다.

이 때 민주당원들은 피해를 변상조치하고, 군중들의 시위를만류하여, 일단귀가한다.

<위, 부전선거 자료들 / 아래, 3.15 시위 광경>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일인 이날은 오전 7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하고, 민주당의 투표 참관인이 참관을 하지 못하고, 투표를 한 사람들도 투표함에 이미 투표용지가 사전에 들어 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자, 마산시민들은 하나 둘, 무엇인가 촉발요인만 있으면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오전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거부를 선언하고, 이어 대외적인 방송을 시작하고, 시위를 준비한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은 하나둘씩 마산시당 사무실 앞에 모이고, 이어서 남성동, 오동동 파출소, 그리고 북마산 파출소를 향해 나아가면서 돌팔매질을 한다.

경찰과 반공청년단은 주동자들을 연행하면서 곤봉, 칼빈총, 몽둥이를 이용하여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더욱 강하게 밀려나오면서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시청방향으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오후 5시경 소방서 차량에서 빨간물을 뿜어대기 시작한다. 낮시위는여기에서 끝나고 거리는 조용해진다.

그러나 오후 6시경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될 예정인 마산시청 앞에 군중들이 다시 하나 둘 모인다.

밤 시위는 무산층의 젊은이들이 주축을 이룬다. 젊은이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어른들이 시위에 나서도록 설득한다. 물론 젊은이들중 대부분은 학생들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여학생이었다.

315일에 총상을 입은 41명중 10대가 반 이상을 차지하며, 반 정도는 학생이고, 반 정도는 무직자 내지 육체노동자들이었다. 경찰과 경찰을 상징하는 파출소, 반공청년단이 시위대의 일차적인 공격대상이었다.

1960315일 마산의거가 일어난 지 27일 만인 411일에 마산시민들은 다시 한번 일어난다.

 

<눈에 최류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315일에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살해된 김주열 군의 시체가 중앙부두(지금의 대한통운 앞바다)에서 오전 1030분 경에 발견되고 참혹한 김주열 군의 시체 모습이 경찰에 의해 신고되어 감추어지기 전에 이미 촬영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에 대해 소문이 나, 삽시간에 마산바닥에 소문이 퍼져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에 모이게 된다.

너무나도 많이 모여든 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경찰은 공개를 결정하고 이를 보여준다.

김주열의 시체모습을 본 시민들은 모두 그 잔혹함에 눈물을 흘리며 밤시위를 벌이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김주열의 참혹한 시체는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경찰들이 자행했던 고문과 주민 살상의 한 일각이 보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315일 이후 실종된 자녀들을 찾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 그러나 경찰은 어린 자녀를 찾는 부모들을 좌익분자로 몰면서 오히려 구금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315일 의거를 좌익의 소행으로 몰려는 경찰은 마산의 이런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금하고 고문을 통하여 죄를 조작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무리한 조작은 마산주민들의 눈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만든다.

김주열의 시체는 바로 경찰의 잔혹함을 만천하에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좌익으로 몰려 숨을 죽이던 마산시민들은 굴종을 깨고 생존의 갈림길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날 시위에는 경찰서와 5개 파출소, 도립병원을 맴돌면서 진행된다. 412일에는 마산에 있는 7개의 고등학교 학생 5천여 명 중 대부분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도립병원은 개방되어 있고, 마산에 주재하는 2백여 경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경찰은 외지에서 도움을 받아 15백여명으로 증강된다.

오전 10시경에 마산공고생들은 마산역 광장으로 몰려오고, 창신고등학교 학생들도 뒤따르고, 오후 1시경에는 마산여고생들과 마산고교생들이 합류하고, 오후 2시에 마산상고생들이 김주열군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에 몰려든다.

12일 밤에는 경찰들이 경찰서에서 나오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마산시내는 이미 시민들이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증강된 병력과 낮의 밝음에 힘입어 13일 오전에는 도립병원을 막아서서 김주열 군의 참혹한 시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

이 날은 해인대 학생들, 마산여고, 성지여고 등이 조직적으로 결합하고, 중학생들도 시위에 나서고,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시위에나선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의사를 표명하고 이화장으로 이사를 간 날, 국회에서 하야를 권고한 날 저녁때 부터 밤 사이인 426일(화) 오후 6시부터 27일(수) 하오 1시까지, 부산 경남고등학교 학생을 필두로 한 약 2여 명의 군중이 마산에 원정을 와서, 폭력 시위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에 마산시 의회조사단이 발표(1960. 5. 3일자 마산일보)한 바에 따르면, 공공시설 및 차량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마산시청의 창문 유리가 부서졌고, 소방서도 유리창이 파손되었고, 경찰서는 유리창문이 파괴되었고, 신마산 파출소의 책상 등, 북마산 파출소의 유리창 등, 남성동 파출소의 유리창 등이 파괴되었다.

관공서 및 경찰 건물 외에도, 일반인들의 피해로는 트럭, 지프, 버스 등이 파괴되었다.

이날은 관공서의 공무원들도 이러한 파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권력 공백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안전만을 감안하여 행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후에 마산시의 서류 망실, 관리들의 무책임한 피신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3.15의거가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를 돕기 위해 성금을 보내왔다. 대구시민은 400만원을 모아 4월 18일 마산시장에게 전달한다>

 

-항쟁의 주체들-

민주당은 315일 낮 시위에서 중요한 촉발인자로 작용하였다.

그 이유는 민주당이 당시 부통령 후보를 내고 있었으며, 자유당의 사전투표, 선거 참관봉쇄, 민주당원에 대한 물질적 회유, 민주당원에 대한 투표권 거부 등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여 최초의 참여가 이루어졌다고 해석된다.

마산의 경우, 조직적으로 허윤수와 그의 일파가 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함으로써, 오히려 잔류한 민주당 세력은 더욱 강하게 조직적으로 뭉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주당은 315일 마산의거 당시에 신속하게 선거포기를 결정하고, 옥외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시위가 곧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었다.

항쟁의 중심은 학생들이었다.

마산에는 당시에 15여만 인구 중에 5천명 이상의 고등학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315일 의거 이전인 313일과 14에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살포하였으며, 14일 밤에는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의 시위에 참여했다.

더구나 선거 당일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번호표를 받지 못하고, 투표를 한 사람들도 투표함에 이미 표가 꽉 차 있다는 경험을 전해들은 학생들은 더욱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후 315일 오전부터 시작된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의 규탄방송은 학생들에게 모일 구심점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경찰들의 시위해산 종용방송, 민주당사 앞 시위자들에 대한 체포, 경찰과 반공청년단이 시위자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시위가 끝날 무렵 신마산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소방차가 붉게 물든 차가운 물을 뿜어대자 315일 밤 시위에서도 가장 열렬히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한 집단이 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숫자상으로는 아마도 시위자의 60~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발생한 낮 시위에서는 선두에 서기보다는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서서히 두려움이 가시면서 시위를 따라다니고, 어둠이 깔린 밤 시위에서는 적극적으로 구호를 따라하고, 욕설을 퍼붓고, 돌팔매질을 하는 집단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일부의 시민들은 병에 모래와 휘발유를 섞어 불을 붙여 던지는 간단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 무산층은 당시에 전체 마산시 경제활동인구의 20%에 달하는 실업자군을 비롯하여, 노동인구, 창포동에 소재한 귀환동포 수용소, 소규모 서비스 업체인 세탁소나 이발소 등에 근무하던 노동자, 신포동 철길 뒤의 매음녀도 등장한다.

물론 이들과 같이 거주하는 아주머니나 노인인구도 최후에 시위에 등장한다.

 

-독재정권이 무너지다-

315일과 411일에서 13일 사이에 일어난 마산의거는 결국 서울에서 419일 대규모 시위를 야기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의 하야가 곧 민주주의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독재권력은 무너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만들어 내었다.

이후 1979년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몰락과 뒤이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전두환군부 정권의 몰락 때 보여준 민중 항쟁의 씨앗이 바로 315일 마산의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 315일 마산의거는 한국민들이 생명을 바쳐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표출한 쾌거였다.

 

<독재자의 말로 / 파고다 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시민들이 끌고 다녔다>

 

산의거는 1948년부터 계속된 이승만 정권의 독재권력을 무너뜨림으로써 전 세계에 한국민이 민주주의를 쟁취할 자율적인 힘을 가졌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한국은 소위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여기에 마산시민들의 피를 머금고 민주주의의 장미가 꽃피어 났다.

이는 민주주의의 소생일 뿐 만아니라, 이를 통하여 전세계에 한민족의 소생을 선언한 셈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 체제가 부정되기 까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마산은 물론이고 한반도에 몰아 친다.

바로 315일 의거는 시대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시도에 물꼬를 튼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315일 마산의거는 통일, 계급모순, 민주주의 등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는 여러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마산은 항구의 도시인만큼 갖가지 사상이 유입되어 혼합되어 있었고, 시장이 발달하여 다른 지역과의 비교도 가능하고, 또한 근대적인 상인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해방후와 한국전 당시에도 6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퇴각, 일본에서의 귀환동포들의 유입과 정주, 한국전 당시의 피난민들과 이들의 정착지가 바로 마산이었다.

따라서 마산은 근현대사의 고민을 경험한 사람들이 제각기 정착하고 있는 도시였다. 이것이 마산의거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은진 /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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