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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18)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by 허정도 2014. 9. 22.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1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정부대신이란 자는 자기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고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어 사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오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는 모두 남의 노예 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이천 만 동포여! 살았느냐 죽었느냐. 단군 기자 이래 사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너무나 유명한 위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오늘에 소리 높여 통곡하노라)’의 한 부분이다.

<위암 장지연 (1864~1921)>

 

19051117일제는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사로 파견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위암은 11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통해 친일 정부대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라 잃은 원통함과 분노를 격렬하게 표현하여 일제에 의해 투옥된다.

위암은 1864년에 경북 상주에서 이름난 유학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6세 때 마을서당에 입학하여 한학을 배웠다.

10세 때에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공부를 계속하다가 13세에 할머니도 타계하자 아버지 장용상은 위암을 상주의 절에 맡기고 떠나 버렸다.

2년 후 절에서 나와 한학자인 친척 장석봉의 집에 머물면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하여 한학에 통달할 무렵 스승 장석봉도 타계한다.

명성황후가 시해(1895)되자 항일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었고, 아관파천(1896)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기도 했다.

1898년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민중계몽과 자강(自强)정신의 고취를 위해 노력하고,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여 이승만, 이상재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0138세 되던 해에 <황성신문> 주필이 되고 곧이어 사장이 되어 한말의 언론계를 주도해 나갔다.

19051117일 나라의 외교권을 상실하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1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발표하여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위암은 투옥되어 64일 만에 출옥한다.

그리고 19062월에 <황성신문>은 복간되었으나 위암은 사장직을 사임하게 된다.

곧 이어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황성신문 (1905. 11. 20)>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해조신문>의 주필을 잠깐 맡았1909년 중국 남경에 있을 때 괴한으로부터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귀국하게 된다.

19099월에 진주로 내려가 촉석루에서 있었던 ‘대한자강회’의 계승단체인 ‘대한협회’의 연설대회에 참석하고, 같은 해 10월 진주에서 지방신문으로서는 처음 발행된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다시 언론계에서 활동하게 된다.

<경남일보>는 경남의 유지인 김홍조 등이 항일언론의 거봉인 위암을 초빙하여 만든 한국 최초의 국문 지방지이며 한국인이 경영하던 유일한 신문이다.

위암은 이 신문을 통해 국내정세를 지방민에게 알리고 주민들의 무지를 깨우는데 주력했다.

경술국치를 맞아 한말 최후의 유학자 매천 황현이 910일 음독자결하자 장지연은 매천이 죽으면서 쓴 시(絶命詩) 4수(四首)를 경남일보(1011일자)에 싣는데 이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조수도 슬피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이 세상은 망하고 말았구료

책을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

세상에 글아는 사람되기 어렵도다.

( 鳥獸哀鳴海岳嚬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難作人間識字人)

                                   - 황현의 절명시 4수 중 마지막

 

이 시를 실은 관계로 19101014일 <경남일보>가 압수, 정간됐다가 얼마 후 다시 발간된다.

위암은 경남일보사 부설‘야학교’를 만들어 한문 등을 가르쳤다.

191110월 진주로 완전히 살림집을 옮겨 19135월까지 4간 진주에 머물며 경남일보 주필로 활동한다.

위암은 충의(忠義)의 고장 진주를 무척 사랑했다.

그는 때때로 홀로 술병을 차고 촉석루 위에 올라가 술잔을 기울이며 남강을 굽어보면서 식민지 민족 지식인의 고뇌와 울분을 달래곤 했다.

위암은 푸른 물 굽이치는 남강을 바라보며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을 생각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

바위 앞 고운 풀잎 치마와 같고 / 바위 밑 긴 강은 거센 물결만 굽이 치네

아녀자의 지킬 예절 그대로 있어 / 해마다 제사지내 의낭(義娘)의 넋을 달래네

 

위암은 객지생활에 많이 지쳤으며 망국의 통한을 가눌 수 없어 술을 많이 마셨고 1912년 여름경에는 건강이 상당히 나빠졌다.

 

너의 골상은 위엄이 있고, 너의 모습 또한 훤출한데 눈은 어찌 그리 형형하며 귀밑머리는 어찌 희끗희끗한가. 이는 석실(石室)의 부처가 아니라 글미치광이요, 술주정뱅이로다(書痴酒狂)

 

이 글은 위암이 1913년에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에 쓴 자찬(自讚)이다.

가  50세 되던 해 백양(白羊)이란 화가가 그린 이 초상화는 반백의 머리에 수염까지 희어진 초로(初老)의 모습이다. 이 무렵은 위암의 일생 중 만년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그는 50세 되던 19135월(음력)에 <경남일보> 활동을 그만두고 맏아들 재식이 살고 있는 마산 월영리로 이사 한다.

위암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하지만 그해 12월에는 매일신보의 기고자로 글을 쓰기도 한다.

이 기고를 통해 나중에『조선유교연원』등의 책이 발간된다.

그는 마산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하며 글을 쓰고 1917년에는『대동시선(大東詩選)』을 편찬한다.

또한 위암은 1916년에 마창시사(馬昌詩社, 또는 회원시사)를 결성하여 그 취지를 밝히는 글을 쓰는데 다음은 그 일부분이다.

우리 (마산과) 창원은 땅이 산과 바다의 뛰어난 형세에 거하여 옛날부터 문물의 자취가 번성했던 곳이다. 최치원(孤雲)의 문장과 … 정구와 허미수의 성리학 같은 것이 있어 옛사람이 남긴 풍도와 운치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귀와 눈을 새롭게 해 준다. … 동지 약간명과 함께 문학으로 만나는 모임을 만들어 한 시사(詩社)를 일으켜 마창시사회라 이름짓고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바람 맑은날, 눈오는 때마다 산이나 바다의 정자에 모여 시문을 지으며 바람을 쏘이고 노닐며 시를 읊고… 옛자취를 답사하고 예전의 현인들을 마음 속으로 그리며 미루어 생각한다면 그것이 정신을 화창하게하고 뜻에 맞게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위암은 어릴 때 2년간 절에서 생활했으며 오래 전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져 마산에 온 후에는 마산의 불교 포교당에 나가 당시 주지로 있던 경봉(鏡峰)스님과 만나 두터운 인연을 맺게 된다.

경봉은 위암보다 28살이나 아래였지만 경봉의 법문을 듣고 감명을 받는다.

다음은 1919년 가을에 경봉이 마산을 떠남을 아쉬워하면서 보낸 편지 글의 일부다.

경봉선사는 통도사의 큰 스님이다. 그 성품은 단아하고 학식이 해박하여 시 잘 짓고 글씨를 잘 쓰며 유가(儒家)의 선비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니 대개 혜원과 영철 같은 분이다. 마산 포교당에 와 머물면서 설법하고 계행을 지니니 모든 선남 선녀 신도들이 신앙하고 귀의하여 계를 받지 않는 이가 없다. …… 나 또한 스님의 오묘한 경해와 정진 그리고 원만하면서도 맑고 담박함을 좋아해서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스님께서 만기가 되어 장차 양산의 내원암으로 옮기어 주석하게 되니 스님께서 몸소 시 한편을 지어 내게 정을 표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산승의 병과 발우는 뜬 구름과 흐르는 물 같아서 머무름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는데 어찌 서글픈 정이 없으랴.

 

경봉스님과 헤어져 쓸쓸히 지내던 위암은 1919년 겨울에 마산 월영리에서 수정(壽町)으로 집을 옮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도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고 비참한 시국을 개탄하며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1921년 음력 102일(양 111일) 마산 자택에서 일생을 마치니 이 때 선생의 나이는 58세였다.

그의 평생의 저술이 수집 정리되어『장지연전서』101979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간행되었다.

경남매일의 전(前)사장인 김형윤씨「( 마산야화」의 저자)는 오래 전부터 마산의 전체 언론인들로 하여금 ‘신문의날’에 마산시 현동에 있는 선생의 묘역에 참배케 하여 장지연 선생의 뜻을 추모했으며 이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해마다 신문의 날(47일)이면 많은 언론인들이 이곳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최근에 장지연선생 말년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 문제는 충분한 검증을 거쳐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김재현 / 경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이 글 발표 후 장지연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등 평가에 대한 변화가 많았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 옮긴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