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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4 00:00

홋카이도(北海道) 여행기 2 – 다이세쓰산(大雪山), 비에이(美瑛)

4. 26 (금, 둘째 날) - 오전에 흐리다가 오후에 눈

 

모두들 새벽같이 일어났나 보다. 새벽 4시부터 동이 훤하니까.

홋카이도는 한국보다 비행기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동쪽에 위치해 있음에도 같은 표준시를 쓰니까 생긴 현상이다.

사우나 하고 호텔 뷔페 간편식으로 조식을 먹고, 짐 다 싸들고 나와 차에다 싣는다.

9시 경 아사히다케 호텔에서 눈앞에 보이는 걸어서 5분 정도 걸릴 것 같은 위치에 있는 케이블카 정거장을 향해 간다.

호텔 정문 맞은편에 ‘비지터 센터’(방문자의 집)가 있다. 아직 문이 잠겨 있어 그냥 지나치고 케이블카 정거장으로 직진한다.

우측으로 대설산 정상이 정면으로 나타난다. 사진들 찍으라고 큰 푯말까지 박아놓았다. 바쁘게 사진들 찍는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오늘 날씨들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히 쾌청하다.

허 원로, 어제 밤에 내가 향(?) 피우며 올린 기도가 통했다며 고맙다 한다. 나도 박자를 맞추어 마침 마산에는 비가 온다는데 내가 염력으로 여기 있던 비구름을 마산 쪽으로 보내버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설산의 진면목이 서서히 나타난다. 케이블카 뒤쪽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쪽 방향으로 평야가 갈수록 더 넓어지고, 어제 이곳으로 올 때 사진 찍느라 되돌아가서 멈추었던 장소 옆에 있는 저수지도 보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좌측과 우측으로 길게 늘어진 산맥들의 흰 연봉들도 더 길어져간다. 내 눈에는 좌측 연봉이 훨씬 더 길어 보인다.

해발 1,600미터에 있는 스가타미역(姿見驛)에 내리다. 그래봤자 이 케이블카에는 시점과 종점밖에 없다. 가이드가 눈에 발이 빠질 우려가 있다며 장화를 빌려야 한다 했지만, 다들 그냥 산으로 다가가 사진들 찍느라 분주하다. 60센티 이상 쌓인 눈이라지만 표면이 약간 얼어서인지 걷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약간 경사진 오르막 위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걸상 밖에 없는 작은 전망휴게소가 설치된 곳에 올라가 사방을 구경한다.

 

 

바로 옆에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이 서 있다. 산책로인지 등산로인지 발자국들이 이미 나 있다. 가이드 말로는 얼마 전 실종 사건이 난 후 입산금지를 한 것 같다고 한다.

질서 잘 지키는 한국인들로서 어찌 감히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완만한 경사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설산 주봉이 가파르게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곳에 증기기관차처럼 쉭쉭 소리를 내며 김 기둥을 뿜어내고 있는 곳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발자국도 나 있고 그 우측에는 전망휴게소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비행기 타고 예까지 왔는데, 2시간 정도 눈길 산보를 예상하고 왔는데 이게 뭐람. 게다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정상까지는 못 가더라도 그곳까지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작정 나와 몇 사람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다지 멀지도 않다. 가까이 가서보니 두 개의 분화구에서 뿜는 소리와 세기가 굉장하다. 뒤돌아보니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올라온다.

 

 

분화구와 정상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일명 죽음의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데 갑자기 김 부총무의 ‘사람 살려’라는 외침이 들린다.

돌아보니 발 하나가 눈 속에 푹 빠졌다. 숨구멍이다. 꽁꽁 언 호수에도 이런 숨구멍들이 있는데 빠지면 죽기 십상이어서 매우 조심해야 하지만 눈밭의 숨구멍은 위험하지는 않다. 도리어 재밌다.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발이 빠졌고, 나도 두 번이나 빠졌다. 내가 “발이 빠진 수만큼 죄를 지었지만, 이제 빠진 것으로 땜했다”고 하니 다들 안심한다. 죄들 짓고 살기는 사는가보다. 하기야 요즘 같은 세상, 죄 안 짓고 우예 살 수 있겄노.

우리는 내려오는데 뒤늦게 출발한 우리 일행 몇 사람이 올라오다가 중간에 만나서 다 같이 내려왔다. 이들은 결국 김 뿜는 분화구를 가까이 가 보지는 못한 것이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자마자 바로 구름이 밀려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허 원로 내 기도 빨 덕분에 산에 있을 때는 쾌청했다며 서도사로 인정한다고 하자, 아이고 나도 염력이 다 되어 더 이상 구름을 보내버릴 힘이 없다고 엄살을 떨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다시 쾌청해졌다. 중간에 구름 속을 지나온 것이다.

 

올라갈 때 닫혀 있던 비지터 센터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갔다.

대설산 관련 정보들이 비치되어 있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서가에 대설산의 식생 등 조사보고서가 빼곡이 꽂혀 있다. 누구나 관심 있는 사람은 보라는 것 아닌가.

자료(정보와 지식)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모두 수집해 보관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공개까지 하다니. 선진국답다. 좋은 것 좋다 하고, 잘 하는 것 잘한다 하는 것도 친일일까?

흑곰 한 마리가 진열되어 있다. 물론 박제이지만 살아 있는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어제 잤던 호텔 이름이 왜 베어몬트인가 알겠더라.

 

11시 30분경 비에이(美瑛) 마을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차 안에서 가이드가 일본 맥주 역사를 설명하고 3일째 되는 날 삿포로맥주박물관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도중에 옆 계곡 길로 새서 칠복암(七福岩)의 주상절리를 구경한다.

다시 나오는 길에 보니 차도 외에는 모두 눈으로 덮여 있는데 나무들마다 땅에 인접한 부분의 주위는 눈이 녹아 둥그렇게 패여 있다. 그 이유를 두고 설왕설래한다. 누군가 나무도 생물이라 열 때문에 눈이 녹지 않았을까라는 썰을 풀었고, 다들 대체로 동의한다. 왜? 진짜 이유를 모르니까. 근데 무생물인 표지판들도 조금씩 그러하니 이건 어떻게 설명하나. 몸의 열기가 낮은 탓이겠지... 허허허.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이 마을에 들어서자 점심시간이다.

가이드 왈 카레와 라멘-볶음밥 중 선택하라고 해서 투표하기로 한다. 원로 두 사람은 아무거나 좋다며 기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카레가 대세다. 카레 집으로 가는 도중에 도로변 주택마다 건물 정면 이마에 연도로 보이는 네 자리 숫자가 붙어 있다.

비에이 마을은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삿포로 경영을 위해 이 지역에다 대지를 조성해 놓고 자발적으로 이주해 오는 본토민에게 땅을 나눠주기 위해 조성한 인공마을이다.

연도는 그들의 선조가 처음으로 이주했던 해를 지칭한다. 오래 된 것은 1870년대이고 20세기 전반도 상당히 많다. 이 마을이 계획도시라는 것은 거의 100% 격자형 도로망으로 증명된다.

패밀리레스토랑 다이마루에서 다양한 카레 요리로 점심을 먹었다. 어쩌다 ‘찌께다시’란 말이 나왔다. 가이드가 ‘쯔기다시(附き出し)’로 바로잡아주면서 이건 속어로서 ‘기타 등등’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찌께다시는 일본의의 갱상도 사투리쯤 되겠다.

회원들 왈, “우리가 바로 쯔기다시네.” 대장 외 기타 등등. 쯔기다시는 이후 여행 내내 몇 번이나 반복 사용될 정도로 인기어가 되었다. 학봉산악회에서 대장원로의 위상과 함께 나머지 회원들의 자조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에피소드로 보인다.

식사 후 몇 사람이 카레집 건너편에 있는 전기용품 전문점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하는 말, 임 보급대장이 맘에 드는 유리창 닦는 도구가 있어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파는 물건이 아니고 자기들이 쓰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으니, 부드러운 말투로 “글쎄요,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라고 답하더라며, 김 부총무 감탄해 마지않는다. 한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주인장은 퉁명스럽게 ‘몰라요’ 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투다.

 

오후 2시경부터 비에이 마을을 둘러싼 구릉지대에 흩어져 있는 명소들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멀리 왼쪽으로는 다이세츠산 아사히다케 연봉과 오른쪽으로 토카치다케(十勝岳, 2077미터) 연봉이 보이는 비에이 구릉들(패치워크)은 모두 밭으로 가꾸어져 있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작물은 거의 없고 맨땅이다. 때가 되면 씨뿌릴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무가 거의 없는 구릉지대에 군데군데 나무들이 서 있다.

 

 

그중에서 광고나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진 나무들을 찾아가서 사진도 찍고 주변 경관을 감상한다. 떡갈나무 ‘세븐스타’, ‘켄과 메리의 나무’라 불리는 포플러나무, 이름은 없지만 차도에 일렬로 늘어선 자작나무 군 등이 대표적이다.

 

호쿠세이노오카(北西の丘) 전망공원에 갔다. 이 구릉지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비에이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날씨가 쌀쌀해져 따끈한 커피들이 생각났는지 카페를 찾는다. 카페라는 팻말을 보고 살펴보니 장사를 안 하는 것 같다. 누군가 옆에 있는 작은 슈퍼에 따뜻한 캔커피 판다고 해서 우루루 들어갔다. 몸 좀 녹이면서 커피는 캔으로 때웠다.

출발하려고 차를 탔는데 허원로와 임대장이 안 보인다.

누군가 카페 팻말이 붙은 쪽으로 옆길로 더 들어가보니 비닐하우스 안에 카페가 있고 거기에 있다는 전언이다. 아니 카페를 찾았으면 다른 사람들도 불러 같이 가지 않고 둘 만 가다니 꽤심하지 아니한가.

우리도 혼내주자는 음모가 저절로 꾸며진다. 차를 숨기자는 것이다. 가이드 기사 한술 더 뜬다. 안 그래도 차에 주유를 해야 하는데 비에이 시내에 갔다 오자는 거다. 대충 근처에 숨어있다 놀래켜 주자는 생각이었는데 일이 커진 것이다.

언덕 밑으로 내려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다들 맴들이 약해져 반대편 길을 따라 원위치한다. 마침 주차장에 다시 도착하는 순간 저쪽에서 두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나온다. 다들 어디 있었냐며 오히려 나무라는 눈치다. 음모는 자백으로 곧 밝혀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추워져 더 이상 구경을 포기하고 일단 카미후라노(上富良野)에 있는 숙소 ‘스텔라’ 펜션에 짐 풀어놓고 온천목욕하려 가기로 하다.

시각은 오후 5시 경. 눈 덮인 자작나무 산길을 구비구비 거슬러 올라가니 프랑스 유학 시절 그르노블 외곽에 있는 샹후쓰(Chamrousses) 스키장 올라가는 길이 겹쳐 보인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눈 덮인 산길 경치인가. 어언 강산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세월의 흐름은 실감나지 않지만 과거는 생생하다.

토카치다케 밑에 있는 후키아게(吹上)온천 백은장(白銀莊)이다.

산장 같은 건물이 주변과 어울려 보인다. 산속 외딴 곳, 등산로 입구도 있다. 들어가니 노천탕을 멋지게 꾸며놓았다. 온천물이 고이고 또 흘러가도록 시내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 잤으면 하는 말에 가이드가 이 건물에는 숙소도 있다 한다. 지자체가 관광객을 위해 운영해 다른 온천숙소보다 약간 싸다고 한다.

아깝다. 가이드상 좀 쓰지 그랬소. 혼자 생각이다. 노천탕은 남탕과 여탕 중간에 남녀혼탕이 있다. 발꿈치만 들면 가리게 너머로 안이 다 보인다.

청춘남녀 한 쌍이 어쩌고 있다는 둥 수영복이 없어 혼탕에 못 들어가는 한도 풀고 사라져버린 청춘들을 안타까워들 한다. 나 혼자만 그런가. 진눈깨비 같은 눈발도 흩날리고, 분위기 죽인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

이게 일본 집밥일까. 일본 소주와 정종은 무엇이든 맛있어.

 

 

TV 방영되었던 주인장 스토리가 녹화로 재생되고 있다. 6년 전 은퇴 후 이곳에 정착했다고. 사설 천문대도 운영 중이라고, 그제야 펜션 이름이 스텔라인 까닭을 짐작한다.

식사 내내 젊은 부부가 시중을 들더니 딸과 사위라 한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차 안에서 가이드 왈 젊은 남자는 일종의 데릴사위라 한다. 도쿄 유학 보낸 딸년이 졸업도 하기 전에 남친을 데리고 왔다나. 그래서 여기 와서 같이 살면 결혼을 허락한다고 했단다... 이거 부모 갑질 아니여...

3인용 방인 이층 다다미방에서 술 마시고 돌아가며 생노래를 부른다.

 

 

유일한 예비회원인 김 전 구청장. 몸 ‘조시’ 안 좋다며 노래를 안 한다. 어쩌다 내가 예비회원을 비정규직에 빗대는 바람에 논란이 되었다. 결국 돌아가며 노래하기로 한다.

걸핏하면 M고를 걸고 넘어지는 허 원로, 이번에도 C고가 헐 잘한다며 차별한다. 이거 자격지심(自激之心) 아니여. 내가 M고를 대변한다. C고가 노래 잘 한 것은 맞지만 창의성들이 없지 않나, 즉 음정 박자 잘 맞추면 뭐 하나 감정 넣어 자기 식으로 불러야지 하며 억지논리를 끌어댄다.

마지막으로 김 전 구청장이 결국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노래자랑은 막을 내리고 잠들 자러 가다. 밤 10시밖에 안 됐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내일 날씨들 걱정에 내가 내일 오전 중으로 날씨 개일 것이라고 예언한다.

다음날 진짜로 그리 되니 가짜 서 도사가 진짜 서 도사로 공인되는 순간이다.

일급비밀! 가이드가 일기예보를 보고 나에게 언질을 주었다. 근데 그게 딱 맞아떨어지다니, 이것도 일본의 실력인가?<<<

글 / 서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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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00:00

홋카이도(北海道) 여행기 1 – 아사히카와(旭川), 다이세쓰산(大雪山)

6월 1일로 10년을 맞은 학봉산악회의 회원들이 10년 된 기념으로 홋카이도를 여행했다. 열 명의 회원 중 아홉 명이 함께했다. 명칭은 거창하게 ‘산악회’라 붙였지만 매주 토요일 오전에 만나 무학산 둘레 길을 걷는 소박한 모임이다.

참가자 : 김용운, 김재현, 김흥수, 서익진(글쓴 이), 신삼호, 신성기, 임학만, 정규식, 허정도 9명

일시 : 2019. 4. 25(목) – 4. 28(일) / 3박 4일

 

2019. 4. 25 (목, 첫째 날) - 흐리다가 맑음

한 팀은 새벽 6시, 다른 팀은 새벽 6시 반부터 서둘렀다. 두 대의 승용차로 나누어 공항으로 간다.

우리 팀은 김재현 회원이 네 사람이나 픽업하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고맙기 짝이 없다.

차를 장기주차장과 민영주차장, 어디다 주차할 것이냐로 옥신각신 하다가 공항 앞 가장 가까운 민영 ‘현대주차장’에 주차한다.

주차장에서 제공한 셔틀 봉고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다른 팀을 만나 모두들 무사 도착을 확인하고, 자동 체크인 기기로 좌석을 배정받은 후 트렁크들을 화물로 부친다.

신삼호 총무가 일본과 한국에서 사용할 공동경비로 1인당 내기로 한 엔화 1만 엔(한화 10만 원으로 대신 납부 가능)과 한화 5만 원씩을 거둔다.

아침식사 할 짬들이 없었고, 저가항공사는 기내식 안 준다 하니 국제공항청사 1층에 있는 부산어묵집에서 어묵으로 때우다. 내가 추천했는데 다들 별로 음식에 감동하는 눈치가 아니다. 내가 원체 어묵을 좋아하다 보니... 허허.

9시 30분,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해 11시 30분경 삿포로의 신치토세(新千歲) 공항에 무사히 착륙한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비행기 탈 때마다 이착륙에 신경이 쓰이는 걸 보면 나도 나이 좀 먹었나보다.

짐 찾아 나와서 로비에서 좀 기다리니 우리의 명 가이드 정창훈 씨 등장. 몇 년 전 야쿠시마 단체산행 때도 우리 일행 가이드 했던 양반이다.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에도 여행일정 전반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사이에 이 양반, 여행사 직원에서 사장이 됐다나. 작은 일본 전문여행사를 차렸고, 중요 고객에겐 직접 가이드 역할도 한다고. 솔직히 회사를 혼자 하는지 다른 직원은 있는지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10인승인가? 자리가 꽉 찼으니 10인승으로 짐작한다. 초 미니버스를 타고 아사히카와(旭川) 시를 향해 출발한다.

가이드는 점심시간이니 근처에서 먼저 점심부터 먹자고 한다. 공항 구역을 벗어나 얼마 안 가서 대형마트 건물 안에 있는 회전스시 집에서 식사를 한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반주가 왜 여행만 오면 생각나는지 알 수 없다.

생맥주와 청주로 반주를 곁들이는데, 청주 이름이 국사무쌍(國士無雙). 이름에 반한 허정도 원로대원, 한 병 사가야겠다고 하더니 귀국할 때 공항에서 살짝 국사무쌍 1병을 보여준다. 도대체 언제 샀지?

가이드상, 점심 먹었으니 맛있는 커피 맛보게 해준다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으로 데리고 간다. 100엔짜리 자판기 커피인데 그런대로 괜찮다는 중평이다.

 

 

커피 마시며 세븐일레븐이라는 상호가 일본이 원산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만물박사 ‘네이버’씨에게 물어보니 1927년 미국에서 오전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문 여는 세계 최초의 편의점으로 출발했고, 나중에 일본에 진출해 미국보다 더 큰 대박을 터뜨려 2005년에 일본 자회사가 미국 본사를 합병했다는 역사를 알려준다.

롯데를 앞세워 한국 편의점 시장에도 진출했지만 일본에서만큼 쪽을 쓰지는 못한다고. 다른 나라들에서와는 달리 한국 시장에서 맥도날드가 롯데리아에 맥을 못 추는 꼴과 같은 것인가.

한국 소매 유통시장의 특수성은 프랑스계 까르푸와 미국계 월마트 등 외국계 대형유통업체들의 한국 진출 실패 사례도 머리에 떠오른다. 지금은 또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다시 아사히카와를 향해 출발한다.

삿포로 시 외곽을 어디론지 한참 가더니 드디어 고속도로로 진입. 좀 가다가 오른쪽 아사히카와 방향으로 진격한다. 북해도라 하면 눈덮힌 높은 산들로 즐비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어진다. 도대체 산은 어디 있는 거야. 가이드 상, 좀 가면 나온다고. 하하.

목적지까지 2시간 넘게 달려야 하니 운전자 가이드 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일본의 지리와 문화는 물론 정치, 문학, 경제까지 박식하기 짝이 없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까지 얘기하길래 가이드의 대학 때 전공이 궁금해진다. 기회를 잡아 물어봤다. 짐작대로 국제경영학과 일본학을 했다고. 그리고 일본 여행업에 종사한 이후로 항상 일본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직업에 대한 자세가 되었고, 명품 가이드를 아무나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스나카와(砂川) 휴게소에서 휴식한다. 화장실 들르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고 다시 출발. 차 속에서 허 원로, 기행문 누가 작성할 거냐고 추궁하듯 묻는다.

일본서 짧지만 방문교수도 했고 이번 여행일정 조율도 맡았던 김재현 대원이 적합하다는 중론인데, 이 양반 할 수 없이 쓰기는 하겠지만 자기는 뼈만 작성할 테니 나보고 살을 붙이라며 나를 물고 들어간다.

나는 백산 산행기 담당자이지 해외 산행기 담당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경주 남산 산행기도 아직 완성 못했는데... 아, 뼈를 발라 살을 만드는 밤을 두 번이나 더 새워야 한다니.

10명 회원을 가진 산악회 아닌 산악회에 이미 회장, 보급대장, 백산대장, 해외원정대장, 산행기 담당이 있는데, 이번 원정에서 총무, 부총무, 부총무보까지 생겼다. 전 대원의 간부화가 멀지 않았다.

 

후카가와(深川) JC에서 빠져나와 아사히카와의 외국 수종 시범림(소설 ‘빙점’의 무대) 안에 있는 미우라 아이코(三浦綾子, 1922-1999) 기념문학관에 4시 반 경에 도착한다.

 

 

가이드 왈, 시간도 좀 남고 문화적인 것 좋아들 하실 것 같아 이곳으로 모셨다고. 나야 당근 만족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만족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한 시골마을의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이 문학관은 작은 2층 건물과 더 작은 단층 별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을 들어서자 벽에 “이 문학관은 작가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공익재단을 만들어 세웠다”고 적혀 있다.

1층 벽면에 장식된 작가 연보에는 주요 연도마다 그 해의 중요 사건을 병기해 놓았다. 그의 작품들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나는 ‘빙점’이라는 소설을 알고는 있지만 읽었는지 여부는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가이드의 설명으로 스토리의 뼈다귀는 알게 되었다. 웬 남자 사진이 걸려 있어 누굴까 했는데, 2층에 마침 모범부부 기획전을 하고 있어 살펴보니 남편이다. 몸이 불편한 작가의 구술을 받아 적는 등 외조를 많이 했고 금슬이 좋았기 때문이란다.

2층 반대쪽에는 자유도서관이라 이름 붙은 문 없는 작은 공간이 있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전시해놓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한국의 어느 문학관에서 이런 도서관을 본 적이 있나? 물론 1층 카운터에서는 작품은 물론 관련 소품들도 판매한다.

별관에는 작가의 생전 서재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표찰이 붙어 있어 작가의 앉은뱅이 탁자 앞에 앉아볼 수는 없고, 대신 마루에 걸터앉아 사진만 찍었다.

임 보급대장 건축전문가답게 별관 입구의 자동 닫힘 장치를 보고는 탄성을 발한다. 우리도 이런 거 도입하면 좋겠다면서.

 

5시 20분 경 다시 출발해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간다.

드디어 멀리 눈덮힌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댐이 나타나고 저수지를 따라 서서히 올라간다. 어디서 사진 찍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자말자 가이드 기사 즉시 차를 되돌린다. 전망이 좋은 곳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사진들 찍고 경관을 감상한 후 호텔로 직행하다.

 

 

6시 20분 목적지 호텔에 도착한다. 다이세츠잔(大雪山)의 아사히다케(旭岳, 2291미터) 중턱 1,050미터 높이에 있는 아사히다케 온천호텔이다.

정문 상단에 ‘bearmonte’라는 호텔명이 붙어 있다. 곰의 산이란 뜻인데 이 산에 곰이 많나? 주차장에 차들도 없고 로비도 한적해 영업 중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카운터 옆 좌측 공간에 페치카가 있고 주위에 소파들이 놓여 있다. 로비를 둘러보다 반가운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름 하여 ‘喫煙室’. 국립공원 내 호텔이어서인지 건물 내부에 ‘흡연실’을 만들어둔 것일까.

왜 일본은 끽연실이라 하고 우리는 흡연실일까. 끽연실이 더 정확한 것 같은데, 일본 따라 하기 싫어서...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도 ‘흡연실’이라 부른다.

점심 먹을 때 허 원로, 맨날 원로들끼리만 합방하기 싫다며 회장에게 방 배정 방식을 고민해 보라고 지시(?)했었다.

충직한 김 회장 작은 종이조각들에 숫자를 적어 접은 후 탁자 위에 놓고 선택들 하라 한다. 강제 조정권을 가진 조커까지 넣어서 재미를 한층 돋우었지만, 조커의 권한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실제로 행사 가능한지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한다.

어쨌든 허 원로와 내가 같은 1번을 뽑았다... 허 원로 왈, 나 하고 같이 안 자려고 꾀를 냈는데... 내가 대꾸하길, 날 버리고 가는 사람 안 잡어... 다들 웃음보를 터뜨리고, 누군가 이를 두고 천생연분이라 한다.

어쨌든 사흘 밤을 같이 지냈다. 제비뽑아 갈라져도 조커들이 합쳐놓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게 원로들 대접한다는 핑계로 사실은 원로원 왕따 시킨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렇게 방을 배정한 후 짐들을 넣어놓고 호텔 부설 온천사우나를 한다.

노천탕이 있다고 가이드가 자랑해서 노천탕에 갔더니 바깥쪽 벽 위로 하늘이 길게 보일 뿐이다. 내가 들어가니 신씨 성을 가진 두 명의 회원이 뭔가 얘기하던 끝에 건물 층수 매기는 문제가 나오자 내가 개입한다.

건축에 문외한으로 도대체 경사지에 지은 건물의 층수 매기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했더니 일제 때부터 내려오는 건축법에 관련 규정이 있다고. 내가 그게 일반인으로서는 불편하고 이해가 잘 가지 않으니 상식에 맞추어 법을 개정하는 게 맞지 않나 하고 쎄우니, 건축 전문가들 왈 규정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며 일축한다.

설명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결국 건축주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겠다. 다른 분야들도 아직 그렇지만 건축 분야에는 일본식 용어가 유독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법률마저 그렇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것도 행정 및 관행 편의주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건축가 양반들은 벨시리 문제되는 건 아니라는 식이다.

사우나를 마치고 식당 앞 휴게실에 앉아 있는데 정규식 전 회장대원이 게르마늄 목걸이 하나를 목욕탕 바닥에서 주웠는데 아무래도 내 것 같다고 묻는다. 나는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목욕탕 옷 바구니에 넣어두고 옷 입을 때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다.

몇 년 전 대마도에 교수연수회 갔다가 마눌님에게 아부하느라 비싼 값 주고 샀는데, 몇 번 착용해보더니 무겁고 불편하다며 사용을 안 한다. 차라리 팔찌가 나았나 싶었다. 값도 헐 쌌는데. 그냥 집안에 돌아다니는 게 아까워서 내가 착용하고 다닌 지가 근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무감각하다니...

다음날 아침에 보니 우리 김 회장도 나하고 같은 걸 하고 있네... 가이드 왈 정작 한국 관광객들에게 팔았던 일본 사람들은 잘 사지도 착용하지도 않는다고 하니 ‘호구 잡힌’ 기분이다.

호젓한 분위기 있는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두 서너 팀이 더 있다.

 

 

드디어 삿포로 맥주를 마신다. 바깥은 어둠 짙은 산속이고 주위에는 이 호텔만 덜렁 있어 올 데도 갈 데도 없다. 술 마시며 얘기꽃들 피우는데 식당에는 우리만 남아 있다. 내가 보니 종업원들 눈치가 빨리 안마치고 뭐 하냐는 것 같아 대충 마무리하고 방에 모여 한잔들 더 하기로 한다.

원수 같은 원로 두 사람이 자는 방에 다들 모여 술추렴을 더 한 후 일찍들(?) 자러갔다. 이렇게 일본 홋카이도에서의 첫날밤을 맞았다. 뒤편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눈빛을 느끼며...

이 대목에 뼈다귀를 추렸던 김 교수 원고에 대설(大雪)の 장(藏)이라 적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지 몰라 본인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른다나? 어허 이럴 수가. 자기가 써놓고도 모른다니... 호텔 건물 어딘가에 적혀 있던 글은 아닐까? 아무도 모른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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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00:00

경주 남산 산행기

2019년 2월 23일(토) 산행 친구(서익진, 김재현, 신삼호, 김용운, 임학만, 손상락, 신성기)들과 경주 남산에 올랐던 기록이다. 서익진(경남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의 글이다.

 

오전 7시 30분, 3.15아트센터 주차장에서 차량 2대에 분승하여 경주를 향해 출발했다.

신삼호 대장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다. 허 원로 요즘 ‘스도쿠게임’을 즐긴다며 휴대폰으로 하는 숫자 맞추기 퍼즐게임을 소개하자 퇴직 후 시간이 남아돌 것으로 남들이 착각하는 김재현 회원이 덥석 관심을 보였다.

결국 허 원로의 노회한 술수에 걸려 10분 내 퍼즐을 풀면 커피 사주긴가 뭔가를 걸고 내기가 붙었다. 그런데 김 회원이 이에 성공하자 김이 빠졌다. 허허, 철학박사를 돈 주고 딴 게 아니라 바둑 같은 게임하면서 땄음이 증명되었다. 사실 김 회원은 한 때 프로기사 지망생이었고 경남대 최고 고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깜빡 하시지 않았나 싶다.

진영에서 새로 난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나는 처음 가보는 길이다. 터널들을 지나고 계곡들이 이어진다. 좁은 계곡들에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차량 속에서도 역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탁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 공장들이? 우리나라에서 공장은 입지선정에 사실상 아무 제약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들판 한 가운데, 산 중턱에, 계곡 속에 어디든지 어떻게든 허가가 난다. 공장과 자본의 유치는 정부의 과업이자 지자체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이지만 경제가 사회와 정치는 물론 문화예술까지 지배하는 세상이니 가히 ‘경제의 시대’에 걸맞는 나라꼴이 아닐까. 그런데 왜 ‘경제학’은 인기가 없을까?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언양휴게소에서 쉬면서 우동으로 못 먹은 조식을 때웠다. 어묵우동과 해물라면 두 가지만 시켜 놓고 하나를 골라 먹으라 한다. 나야 당근 어묵우동이지. 그러나 항상 선택하지 못한 게 더 좋아 보이는 건 인지상정. 해물라면이 갑자기 맛있어 보였다.

언양 휴게소 건물은 최근에 전면 신축한 것이다. 수도권 휴게소들에서 신축 건물들을 이미 상당수 본 적은 있지만 영남 일대에서는 처음 보았다.

다시 출발한 차 안에서 나는 김 회원이 가져온 경주 남산 소개 책을 살펴봤다. 동승자들을 위해 중요한 것은 소리 내어 읽었다.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남산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재확인했다.

남산이나 앞산 같은 산 이름은 전국에 산재한다. 대도시라면 거의 다 있다. 그만큼 산이 많고 거주지들과 함께 있다. 우도나 저도가 전국 바다에 산재해 있듯이. 그만큼 섬도 많은 나라다.

하지만 도시 근처에 있는 작은 산이라 해서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삼릉 앞 국도변에 조성된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준비물을 갖춘 후 도로 건너 등산로 입구로 갔다.

남산은 국립공원이다. 산 자체보다는 이 산이 가진 보물 덕분이리라. 공원 관리원들이 입구에서 주의사항도 주고 안내도 하고 사진도 찍어준다. 모두 여자들이다. 무등산 국립공원에서는 관리인들이 모두 남자였던 게 문득 떠올랐다. 우리도 관리인한테 단체사진을 찍었다.

 

 

등산로로 들어서자말자 바로 울창한 송림이다. 그 속에 삼릉이 있다.

삼릉 앞에 30명은 족히 될 만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뭐 하나 보니 시산제를 지낸다. 아직 2월이니 그럴 만하다. 엄청난 자태를 자랑하는 금강송들을 감상하면서 계곡을 향해 올라갔다.

삼릉곡 초입에서 ‘석조여래좌상’을 알현했다. 그런데 머리가 없다.

사실 머리 잘린 부처님이나 보살상이 남산에는 수없이 많다. 그 이유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일본인들이 그랬을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에도 상당히들 공감한다.

‘선각육존불’,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터’를 연이어 감상하고 올라가는데 갑골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바위가 길 가에 나타났다. 거북등이다 자라등이다 논란이 분분하다. 몸체 전부를 보더라도 분간하기 어려울텐데 등만 보고 자란지 거북인지 우예 알겄노. 그것도 흐릿한 문양 밖에 없는데, 다 사람들이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

‘선각보살상’을 거쳐 올라가니 ‘바둑암’이다. 남산 전체의 북쪽 끝에 해당한다. 북쪽으로 경주 시내가 보이고 서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단체사진을 찍고 다들 가는데 엽서가 비치된 우체통이 있다. 남산 관련 사진이 새겨진 엽서다. 주소와 사연을 적어 널어놓으면 1년 후에 배달해준단다. 가장 젊은 신성기 회원이 한 장 써 넣길래 나도 따라 한 장 써 넣었다. 마눌님 귀중! 아까운 주말 자기와 함께 안 보내고 나간다고 불평하시는 마눌님 달래는 돈 안 드는 방법으루다가. 사실은 무릎이 안 좋아 같이 등산 다니는 건 포기한지 오래다.

남쪽을 향해 능선을 탔다.

얼마 안 가서 남산의 주봉 금오봉이었다. 학봉산악회 플랭카드를 앞에 펼치고 단체증명사진을 찍었다. 이건 반드시 필요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단체는 사진을 남긴다. 명언이 아닌가. 아니라꼬?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 ‘상사바위’와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곳에 왔다.

표지판에 남근석이 있다는데 모두들 어느 것인지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다. 누군가 상상력을 너무 발휘한 것은 아닐까? 우측 멀리 산중턱 암벽에 현신한 ‘마애석가여래좌상’ 한 분이 삼릉계곡을 내려다보고 계신다. 육안으로 잘 안보이시길래 줌을 당겨 사진을 찍어보니 그런대로 잘 나왔다.

조금 후 펑퍼짐한 바위가 나왔다. 논란 끝에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사실 잘 한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여기부터 줄곧 내리막이었으니 말이다.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 했던가. 배부르고 노곤하니 노래 생각이 났던가. 벌써 오래 전부터 학봉 가수로 추대되신(?) 김용운 회장에게 모두들 노래를 주문한다. 좀 빼던 김 회장, 갓바위 노래를 열창한다. 가사도 안 보고 하는 것 보니 가수가 맞기는 한데, ‘신라의 달밤’은 엇다 두고 웬 팔공산 갓바위인가.

이어 메들리를 구성지게 부르는 가수는 임학만 대장이 가져온 이동식 스피커로 증폭된 사이버 가수 ‘레몬’이다. 바위에 기대어 남산의 계곡과 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듣고 있으니 따스한 햇살이 잠결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하산해 목욕탕으로 직행할 것이냐 애초의 계획대로 맞은 편 ‘고위봉’을 공격할 것이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사실 지도상으로는 능선으로 이어진 길인 줄 알았다. 와 보니 계곡을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전체가 남산이지만 고위봉은 전혀 다른 산이나 다름 없다.

상대적으로 젊은 회원들은 공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무 험해 보이고 멀어 보인다, 이미 많이 걸었고 돌아가는 길도 상당하다며 안 가려고 하는 원로들을 이길 방법은 없다. 언제는 안 그랬나? 속으로 투덜대며 내려들 간다.

내려와서 보니 다들 잘 내려왔다며 다시 공격했더라면 고생 좀 했을 것 같다는 데 모두들 동의한다. 거 봐, 원로들의 천리안과 선견지명을 실감했으렸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역방향으로 오는 등산객도 많다. 정오 무렵이니 등산객이 가장 많을 시점이긴 하다.

웅장한 자태의 ‘용장사 삼층석탑’이 계곡을 내려다보는 지점에 절묘하게 서 있다. 탑의 층수를 셀 때는 좌대가 몇 층이든 아무리 높든 지붕 개수로 따진다는 원칙을 되새겼다.

 

 

단체사진을 찍어준 웬 중년 여인의 애교에 모두들 반한 것 같았다. 애교가 아예 없거나 부족하거나 이젠 더는 없다고 생각하는 마눌님들을 모시고 사는 사내들의 본능이다.

탑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에게 예배를 올리고 내려가니 바로 ‘용장사지’다.

절 구경할 생각을 했었는데 웬 걸 절터만 있다. 터의 생김새로 보아 규모는 작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을 가진 명찰이었을 것이다. 제법 내려 왔나?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설잠교’를 건너니 삼거리다. 왼쪽 오르막길이 ‘고위봉’으로 간다고 팻말이 가르쳐 준다. “으잉, 여기서부터 고위봉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고, 우와 포기하길 잘 했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제부터는 거의 평평한 계곡길이다. 이름하여 ‘용장계’다. 계곡 입구 거진 다 온 곳에 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에 관한 소개 패널이 길가에 늘어서 있다. 올 때 차 안에서 읽었던 내용을 복습하는 시간이다.

이어 다리를 건너니 동네가 시작되고 아줌마들이 토마토 등을 팔고 있다. 먹음직해 보였고 값도 싸 보였지만 그냥 지나쳐왔다.

동네를 따라 내려오니 국도다. 작지만 주차장이 있고 화장실도 있다. 여기서 문제의 사진사 여인을 다시 만났다. 이 여인이 친구 한 명과 함께 토마타를 먹으면 맛있다 한다. 아까 아줌마들한테서 산 것이다. 우리도 아는 체 하면서 한 개씩 얻어먹었다. 기꺼이 준다. 얼굴이 예쁘장하니 마음도 고우스레한 걸까! 이건 법칙일까 착각일까!

이제 국도변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산길보다 포장도로가 훨씬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안다. 뜨뜻한 목욕탕을 에 노곤한 육신을 담굴 것을 생각하며 다리 아픈 걸 참고 간다. 기사 회원 두 분은 계속 걸어가서 차를 가지고 오기로 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단체가 돌아가고 사회도 돌아가는 법이지. 그런 사람이 제대로 대접 받는 세상이 되기를!

갈 때는 통도사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마산에 도착해 파도횟집에서 도다리 회를 실컷 먹었다. 4월 일본 북해도 대설산행을 기대하면서 헤어졌다.

이렇게 천년의 왕국, 황금의 유토피아, 불국토의 한 자락을 건성으로 다녀왔다. 백산(百山) 리스트 꽉 채우기를 갈망해 마지않는 신 대장에게 경주 남산은 25번째 백산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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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00:00

등록문화재 제198호 '옛 마산헌병분견대'의 건립연대 오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 (월남동3가 11)에 소재한 등록문화재 제198호 '옛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에 대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에 있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

[개설]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로, 일제 강점기 중반인 1926년에 붉은 벽돌로 지었다. 일본 군대의 마산 진출은 1905년 5월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건설될 때 시작되었다. 1909년 12월에 대구 주둔 일본군 헌병 분견소가 신마산에 설립되었고, 3·1 운동 후인 1920년에 이르러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어 경찰이 치안을 맡도록 했다.

1921년에 지금의 마산 중부 경찰서 자리에 있던 헌병 분견대 건물을 증축해 마산 경찰서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 건물을 경찰에게 내어 주고 1926년에 지금 자리에 헌병 분견대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했다. 신축 시 대지가 넓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폭 축소되어 건물 주위로 한정되어 있다. 건물 인근에는 분견소장 관사(官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위치]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월남동 3가 11]에 있다. 남해 고속 도로 서마산 나들목으로 진입하여 마산회원구를 거쳐 국립 3·15 민주 묘지 방면으로 3·15대로[국도 2호선]를 따라 내려가다 3·15 의거 탑과 마산합포구청을 지나 경남 대학교 방면으로 약 13㎞ 정도 이동하면 도착한다.

[변천] 구 마산 헌병 분견대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마산 지역 독립 운동가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었던 근대사의 질곡을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으로 일제의 탄압과 무단 통치를 상징한다. 1945년 광복 후 군 정보기관인 옛 보안 사령부[현 국군 기무 사령부]의 마산 파견대가 ‘해양 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이 건물을 사용하면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인사들을 사찰했던 곳이기도 했다. 1990년에 보안 사령부가 폐지되고 군 정보 요원들이 철수하면서 건물만 남게 되었으며, 그 후 기무사 출신 퇴역 군인들의 친목 단체인 ‘충호회 경남 지부’와 보훈 자녀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주변에는 상가가 밀집해 있고, 한 블록 뒤에는 저층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택지 외곽에는 중고층 높이의 공동주택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마산항 및 지금은 폐지된 된 마산항역이 자리 잡고 있다. 2005년 9월 14일 등록 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구 마산 헌병 분견대는 벽돌 조적조 건물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규모이고, 연면적은 175.21㎡이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 놓인 현관 출입 부를 중심으로 양측에 3개씩의 세로 창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외벽에는 회흑색 벽돌을 사용하여 다섯 줄의 수평 띠를 둘렀는데, 이는 단조로운 벽면을 분할하여 수평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붉은 벽돌의 물성과 세로로 긴 창은 일제의 통치 보조 기관이었던 헌병대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요소이나 벽면에 넣은 여러 줄의 수평 띠는 이를 다소 완화하는 어휘로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가운데 복도를 둔 중복도 형식으로 되어 있었으며, 현재의 출입부 우측편의 사무장실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관 출입부와 창의 위쪽의 인방은 평아치에 가까운 약한 곡률의 아치 형태로 만들었으며, 창 하부의 흰색의 창대는 외벽 밖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치형 창 상인방의 중앙에는 사다리 모양의 흰색 석재를 끼워 넣어 창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벽돌로 이루어진 외벽은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번갈아 가며 쌓는 영식 쌓기 방식으로 시공한 것이다.

지붕은 단정한 형태의 우진각 지붕으로, 목조 트러스 위에 일식 기와를 덮었다. 정면 현관 출입 부 상부에는 본래 작은 삼각형의 박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철거되었다. 지면에서 4단의 계단을 올라온 지점에 1층 바닥이 있으며, 그 하부는 지하층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물 우측면의 대지가 좌측보다 낮아 지하층의 우측면은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현황] 2008년에 지붕을 해체하여 수리한 후 최근 건물의 원형 복원을 위한 수리를 했다. 보수 전 건물의 창은 본래 목제 오르내리창이었으나 미서기창으로 바뀌었다. 고증과 외벽에 남아 있는 흔적을 고려할 때 건물의 우측면에는 지하층으로 통하는 복도각과 원형창이 시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일제가 마산에 헌병을 파견하여 치안을 확보함과 동시에 독립 운동가를 탄압했던 역사적인 건물이다. 일제의 강권 무력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당시 외래 건축의 영향을 받아건축된 서양식 건축이라는데 역사적·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다음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록문화재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에 대한 설명 중 일부다.

1926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잔악한 일본의 대명사였던 헌병대가 민중을 억압하고 독립투사들에게 가혹 행위를 자행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벽면 전체에 돌림띠를 둘러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등 관공서 건축물로서의 권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마산헌병 분견대는 1905년 일식의원 건물을 빌어 사용하다가 1909년 12월 2일, 관할이 대구로 옮겨지면서 현 소재지로 이관하여 사무를 개시하였다. 현재의 벽돌조 건물은 1926년에 신축되었으며, 당시 근무인원은 8명이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두 공식 기록에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 포스팅은 그에 대한 글이다.

 

필자가 아는 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가장 먼저 추정한 이는 한상술 씨다.

한상술 씨는 2000년 「마산의 근대건축에 관한 연구」라는 경남대학교 석사논문 54쪽에서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이라고 밝혔다. 

한 씨가 이 논문에서 각주를 달아 근거로 제시한 문헌은 일본인 스와 시로우(諏方史郞, 추방사랑)가 쓴 『마산항지』(1926년) 155쪽이었다.

한 씨가 인용한 『마산항지』 155쪽 '마산헌병분견소' 항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간략한 번역문도 함께 올린다.

 

馬山憲兵分遣所

本町四丁目に在り、明治三十八年中晉州より派遣せられ、現都橋畔にて水上医院なる建物を借充し、其その後管轄は大邱に移り遂ついに馬山憲兵分隊となり現建物は此この時、建築せられしものにて分遣所の建物として比較的広大なるは夫それ之こか為ためなり、幾干もなくして分隊は鎭海に移り建物は分遣所に於て其の儘そのまま之これを使用し別室に郷軍馬山分会事務所を借設せり、本町五丁目角に分遣所長官舎の新築あり、現時の所長は曺長片桐文三氏なり。

마산헌병분견소

본정 4정목(현 월남동 3가)에 있다. 1905년 진주에서 파견되어, 현 중앙동 다리 근처 수상의원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하였다. 그 후 관할이 대구로 이관되어 마산헌병분대가 된 현 건물은 그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분견소 건물로서는 비교적 광대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 후 분대는 진해로 옮겨가고 건물은 분견소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별실에 향군마산분회사무소가 임대 사용하고, 본정 5정목 모퉁이에 분견소장 관사를 신축하였다. 현재 소장은 상사(曺長) 가다키리 분조(片桐文三. 편동문삼) 씨다.

 

그런데 내용을 아무리 봐도 이 글에서는 건물의 건립연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무슨 연유인지 한 씨는 이 부분을 인용하며 1926년으로 확정하였다.

한상술 씨가 논문에서 밝힌 건립연도 1926년은 이후 여러 후속연구에서 인용되었다.

필자의 글에서도 별다른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하였다. 필자 뿐 아니라 이런 저런 문헌 여러 곳에서 인용되었고, 강의 자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등록문화재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에 대한 설명문에서도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26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두 공식기록의 건립연도 역시 한상술 씨의 논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근 이 건물의 건립연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나왔다.

도시 건축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는 신삼호 건축사가 이 건물의 건립연도를 1912년이라고 했다.

 

신삼호 건축사가 제시한 자료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도를 소개하며 이 건물의 건립연도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1) ‘조선주차군경리부’에서 1914년 발간한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에 의하면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명치45년 즉 1912년 건립되었다.

이 문건의 ‘마산헌병분대청사 및 부속건물’ 항목을 보면 마산헌병분견대 건물은 ‘1912년 2월에 기공하여 같은 해 7월에 준공하였다'고 적혀 있다.

축척 1/300 ‘마산헌병분대배치도’까지 첨부(아래 그림)되어 있고, 아래에서 보듯이 도면 내용도 실재하는 건물과 동일하고 정확하다.

 

<배치도>
<평면도>
<정면도>

 

2) 1913년 마산부가 발간한 『마산부세일람』의 '마산헌병분대' 편에도 이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1909년(명치42년) 12월 2일 마산 본정 3정목(현 월남동 3가)에 대구헌병분대분견소로서 설치되어 1910년 7월에 편재개정의 결과 마산분대로 개칭되어 김해, 웅천, 진해, 진동, 배둔역, 고성, 장목포의 7분견소를 관할하고 있으며 지금의 청사는 1912년(명치45년) 7월에 낙성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1/10,000 지도 「마산」 에서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지도를 확대(아래 그림)해 보면 '헌병분견소'라고 표기된 건물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 위치도 정확하고 건물의 배치형태도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의 ‘마산헌병분대청사및부속건물’에 첨부된 축척 1/300 ‘마산헌병분대배치도’의 도면과 동일하다.

 

 

이 세 자료, 즉 1914년 조선주차군경리부에서 발간한 『조선주차군 영구병영, 관아 및 숙사건축 경과개요』 기록과 1913년 마산부가 발간한 『마산부세일람』의 내용, 그리고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발행한 지도 「마산」 등이 이 건물 건립연도가 1912년임을 말하고 있다.

도 「마산」은 1912년이라고 확정 짓기보다는 1916년 이전에 지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적어도 건립연도가 1926년은 아님은 확실히 보여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제 제198호 구 마산헌병분견대의 건립연도는 1926년이 아니라 1912년로 추정된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 자료만으로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립연도는 재고되어야 하고 이에 대해 다시 정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 지위를 보장 받는 '등록문화재 제198호'의 건립연도에 대한 문제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사과드린다.

논문에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은 온전히 제 잘못이다. 잘못된 글을 읽은 모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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