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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25. 00:00

마산번창기(1908) - 10

마산의 관공서 - 4

 

□ 마산거류민단역소(馬山居留民團役所)-신시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 소재

1899년(명치 32년) 7월에 조직된 일본거류민회의 총대(總代) 사무소가 진화한 것이며 그 후 총대를 이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사무소의 명칭은 그대로이다.

1904년(명치 37년) 5월 총대사무소는 처음으로 민간사무소 즉 민역소로 개정되어 이사는 민장(民長)으로 개명되었다. 이때 가고시마(鹿兒島) 현(縣) 사족(士族) 출신으로 한해어업조합(韓海漁業組合) 마산지부장인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가 민장으로 추천, 선임되었다.

1906년(명치 39년) 9월 1일, 일본한은 통감부의 고시에 따라 거류민 단체를 만들고 미야하라 씨를 거류민단 민단장 대리로서 사무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민단제도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은 부산거류민단사무소의 제1과장인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를 민장으로 영입할 것을 의결하였다. 마에다 민장이 착임(着任)함으로써 마산의 발달을 진심으로 도모하고자 하는 자치제도는 크게 진보한 점이 있지만 거류민이 납부하는 민세(民稅)는 더욱 증대된 것이다.

1908년도(명치 41년)는 우선 호별세, 상업세, 공업세, 잡종세의 4개 종목이었으나 다음 해부터는 가옥세도 부과하게 되었다. 마에다 민장은 효고(兵庫) 현 출신으로 영리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자치기관의 수장으로서는 다소 침착한 태도가 결여된 감이 있다.

침착성이 부족한 것이 평민들과 사귈 때는 무난하게 지나가지만 감독관청이나 다른 관리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비굴하기까지 하다. 좀 더 오기를 가지고 버틸 때는 버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종종 나온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마에다 민장은 극장장인 좌장(座長)으로서의 관록이 부족한 점이 보인다고나 할까. 이것은 결국 그 사람의 학식이 모자라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좌중을 다스리는 힘이 있으면 숨기고 있던 일이나 정체를 드러내는, 마각을 드러내 놓고 자신의 역할 정도는 감당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 마산거류민단장 / 사진은 『마산과 진해만』(1911) 에서 가져옴>

 

오로지 자기 자리에만 연연하여 주의 주장과 의리 인정 등의 교제에서 너무 글 읽는 식의 일방적 방식을 집어치우고 거류민의 행복을 위하여 또한 마산의 발전을 위하여 결연한 의지와 여론을 모으고 만약 이것을 철저히 해내지 못할 때에는 그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겠다는 용맹스러운 정신과 기상이 있으면 마산의 동정을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회계역(會計役)은 다수미 소지(田角宗治)로 많은 사무는 그의 수완에 의해 결정되니 민장 이상으로 더욱 노련한 사람이란 평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는 바로 판정하기 힘들다. 다수미 씨는 성실한 정신에 명석한 두뇌를 갖고서 사무를 처리하과 교제 면에서도 온화한 호인이라 하겠다. 현재 민단 사무소에 대한 여론의 일반(一斑)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민장은 고관대작인 양 집무실에 처박혀 있지 말고 창구로 나와 원활한 사무 처리를 도모할 것

* 민단 직원들은 위생의식이 확실한 자를 채용할 것

* 일본 및 한국의 관보, 통감부보(統監府報) 등도 대기석에 비치하고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할 것

* 거류민이 직접 관계된 규칙이나 공시 서류는 마치(町)마다 혹은 각 구(區)마다 대표를 정해 그 집에 교부하여 비치하도록 할 것

쓸데없는 인원과 경비를 줄인다는 것은 상투적인 말일뿐더러 말은 해도 쉽게 실행되지 않는 사정도 있을 줄 한다. 거류민의 행복과 마산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부과되는 세액이 지금의 배가 되어도 쓴 소리는 나오지 않으리라. 민회 의원도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안 된다.

장식적인 조각 같은 기관에 아무리 많이 인형 같은 인원을 앉혀 놓아도 인형 같은 의원을 몇천 개 가져다 놓아도 그야말로 경비만 증대할 뿐 마산과 거류민을 위하기에는 개똥만도 못한 것이다.

어쨌든 민단 직원이든 민회 의원이건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비열한 생각은 깨끗이 씻어 버리고 친절이란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직함의 명예는 자랑하되 그것을 이용하려는 허영적인 욕정일랑 불길 속으로 던져 버리고 일본혼(日本魂)이라든가 무사도(武士道), 공정함, 도의와 인덕, 예절 등의 간판은 양 어깨에 달고 여론을 따르게 된다면 민단 사무소의 훌륭한 건축이 가능해질 것이며 민회 의사당도 세우질 것이다.

거류민이 민세가 높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인원과 경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설치한 기관이 아무리 기름을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기관이 원만하게 운전되어 간다면 다소 이치를 아는 일본인이라면 민세가 높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 변두리 지역에 요리집으로 임차된 세집이 바로 민단 역소 맞은편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거류민으로서는 참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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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9

마산의 관공서-3

 

□ 마산경찰서-신시 토모에마치(巴町, 대외동) 소재

각국 거류지회 조직과 더불어 각국 경찰 사무를 보기 위해 설치된 것이며 새로 신축할 곳은 마산정차장 앞 철도관리국 소관지를 예정하고 있다. 아마 1909년(명치 42년)에 기공할 것으로 보인다.

영사관 소속의 경찰관은 애초부터 그 사무를 겸무하고 있었고 경부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생몰년미상, 개명 전 이름은 사카이 에키타로 境益太郞. 1899년 4월부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 주석경부로 1900년 9월까지 근무 후 같은 해 11월부터 1906년 1월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관 주석경부로 근무했다)가 서장이었다.

그 후 서장은 엔도 다다오키(遠藤忠興), 사카이 요시아키(재임), 경시(輕視)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로 교대했다. 1908년(명치 41년) 6월 미야가와 경시는 전라남도 경찰부장 겸 전주경찰서장으로 전임하고 목포 결창서장이었던 미치노 요시키치(道野能通) 경시가 후임자로 들어왔다.

착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시정(施政) 방침은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관권평민(官權平民) 절충주의(折衷主義)를 중시하는 모양새이다. 나가사키(長琦) 현 쓰시마(對馬) 출신인데 오랫동안 후쿠시마(福島) 현, 아오모리(靑森) 현에서 경찰관 생활을 해서 그런지 동북지방의 기풍에 물들여져 단호하고 늠름한 기상을 지녔다.

차석 경부는 후쿠야마 쵸베에(福山長兵衛)로 가고시마 현 출신이며 민완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 경찰서의 부속기관인 마산포 경찰관 주재소에는 한인인 경부 전태홍을 비롯하여 일인 순사부장 이하가 주재하고 있다.

주재소에 경부와 순사부장이 동시에 주재하고 있는 데는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점이 바로 마산포의 인구가 많으면서 융성하고 있는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산경찰서. 1909년 초 순종의 마산순행 때 촬영한 사진>

 

□ 마산우편국-신시 혼마치(本町 4정목, 월남동 4가) 소재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부터 마산포에 설치되어 1900년 4월에 신시의 민간 가옥을 임차하여 사용하다가 같은 해에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여 입주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국장은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씨로 적은 도쿄에 두고 있지만 원래는 후쿠시마현(福島縣) 출신이라 활발하고 민첩하다는 소문이 있다. 따라서 직원들도 평민주의를 취하고 만사가 잘 흘러간다고 한다.

당국도 신축 이전지를 마산정차장 앞 바로 마산경찰서 신축지의 북쪽에 예정하고 있어서 예산이 성립되는 대로 기공될 것으로 보인다.

 

<마산 우체국>

 

□ 각국거류지회-신시 아케보노마치(曙町, 청계동) 소재

마산경찰서의 동쪽에 인접해 있고 각국 거류지 및 거류민의 이해득실을 연구 심리하는 곳이다.

회장은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씨이며 현재 회원은 러시아 영사 바실리예프(러일전쟁 이후인 1907년 새로 부임해 온 마산 주재 러시아영사관 영사), 창원부윤 신석린 및 지주의원(地主議員)으로서 제일은행 대표자인 니시카와 다로 이치(西川太郞一) 씨 등이다.

 

□ 마산해관(馬山海關)-신시 혼마치(本町, 월남동) 소재

부산세관의 지서이며 지서장 이하 집무자는 거의 일본인이지만 한국 정부에 고용된 관리자 중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나 외국에 나갈 수출품을 검사하며 정규 과세를 수행하려는 한국 정부에 충실히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사복(私服)을 채우는 자들이 있어 거류민의 동정을 얻기 힘든 경우도 있다.

현재 지서장은 아시이 히코조(石井彦三)란 사람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아홉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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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8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2

 

□ 러시아 영사관(露國領事館)-신시 다이마치(臺町) 소재

마산이사청의 구청사를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벽에 유리창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것이 러시아 영사관이고 지금은 영사 대리인 한 명과 한인 주방장이 있을 뿐이다.

1901년에 지어졌는데 당시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나 지금은 찾아올 사람도 별로 없고 사무도 뜸하여 찬적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경내에는 소나무가 우거지고 초록이 깊어서인지 냉랭한 분위기조차 감돌고 있다.

 

<러시아 영사관>

 

□ 창원부청(昌原府廳)-마산포 소재

왕년에 조창 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수리해서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가 쓰고 있던 곳이다.

 

<창원부청으로 사용된 조창 건물의 유정당>

 

감리서는 광무 2년 즉 1898년(명치 32년) 2월 마산개항 칙재(勅裁)에 의해 설치되어 주로 개항 준비를 위한 사무를 보던 곳이며 그 우두머리를 서리(署理)라고 불렀다. 감리서의 서리는 창원군수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군내의 사법, 행정 사무가 같이 처리되었다.

그러다가 광무 10년 즉 1906년(명치 39년) 말에 폐지되었다. 동시에 창원군은 창원부(府)로 승격하여 부윤(府尹)을 두게 되었고 마산이사청을 상대로 한인(韓人) 및 한일인(韓日人) 관계의 행정사무를 보게 했다.

또한 창원항재판소를 두고 법무보좌관보로서 이토(伊藤)한 사람이 그 임무를 맡게 되고 주로 한인의 민형사 사무를 종사케 했다.

당시의 부윤은 이기(李琦, 1855~?.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친일관료. 1906년에 창원부 감리 겸 창원항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이어 경주군 군수가 되었고 1908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에서 충청남도 평택군 군수와 은진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씨인데 1908년(명치 41년) 이 부윤은 경주군수로 전근하고 웅천군수 신석린(申錫麟, 1865~1948. 일제강점기 경남 참여관, 충남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1906년 경상남도 진해만 군항지 조사위원을 시작으로 1906년 웅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 창원부윤을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10월 경상남도 참여관이 되었다.) 씨가 후임으로 승진해 왔다.

같은 해 7월까지 재판권은 모두 진주구재판소(晉州區裁判所)로 이관되어 지금은 행정사무만을 본다. 웅천, 진해(구 진해현 지역)의 양 군수도 겸하고 있어서 신 부윤은 다망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신 부윤은 경기도의 인간 개진주의(改進主義)의 인맥으로 친일파에 가까워 일본인들의 평도 좋다. 일본 말도 다소 아는가 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여덟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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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7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1

 

□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신시(新市) 다이마치(臺町) 소재

언덕 위의 조망이 좋은 데에 있으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 부산 영사관의 분관으로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로 하여금 건축하게 했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규모가 작고 그 위치가 놓은 데 있어서 사람들이 불편해 하니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1861~?. 1901년부터 서울 일본영사관 영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계속 이사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초대 마산부윤으로 임명받은 뒤 1919년 11월까지 부윤으로 있었다) 씨가 1908년(명치 41년) 5월 그 북쪽 위치에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공사는 아직 낙성을 못 보았지만 그 건축물의 수려함은 마산에서 으뜸이라 한다. 아마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 1896년에 제정된 메이지 일왕의 탄생 축일로 날짜는 11월 3일이었다. 1927년부터 1947년까지는 명치절로 불렸다)이란 좋은 날을 잡아 낙성식을 거행할 예정이라 생각한다.

이사관 관저는 이사청 뒤의 언덕에 있으며 1907년(명치 40년) 9월 중에 신축이 시작되고 미마스 이사관이 스스로 위치를 정하고 설계한 것인데 조망 좋은 터에 수려하게 세워져 있다.

 

<1908년 말 준공한 마산이사청(현 경남대 평생학습원). 뒤쪽 건물은 미마스 이사관이 살았던 관저(현 마산종합사회복지관)>

 

미마스 이사관은 야마구치(山口) 현(縣) 옛날 하기번(萩藩) 출신이며 1860년(명치 17년) 생이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농학사이며 열정적이며 호걸 같은 사람이다. 거기에다 성결이 강직하고 쉽사리 자기 소실을 꺾지 않는 점은 무사의 기질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미마스 씨는 1887년 외무성에 들어가 1888년 7월에 독일 브레멘 영사관에 부임하고 그 후 함부르크와 베를린 영사관에 근무하며 후쿠시마(福島, 후쿠시마 야스마사 1852~1919. 일본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육군대장) 장군이 필마단기도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했을 때에 성심껏 도움을 드리기도 했다.

1895년 9월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바로 하와이 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임되었고 1898년 귀국하여 5월에 마닐라 영사도 전임되었다. 당시는 때마침 미국-스페인 전쟁(米西戰爭) 중이었다. 1900년 4월까지 거기서 근무하였다.

같은 해 7월에 한국 경성 주재 영사가 되어 러일전쟁의 비상한 시기에 공로를 아끼지 않았다.

1906년 7월에 한국통감부제의 실시로 마산주재 영사였던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1872~1941, 1902년부터 1906년 1월 31일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로 근무하였다. 영사관이 페지되고 이사청이 설치되자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잠시 근무 후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통감부 서기관을 겸임하면서 1910년까지 경성 이사청 이사관으로 근무했다.) 씨가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전직하게 되자 미마스 씨가 그 후임으로 경성 영사에서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미마스 씨는 이렇듯 외교관의 경력만을 가진 사람이라 교제가로서는 평민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의 동정은 얻지 못하는 편이다.

문필을 업으로 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개방적이며 위세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소박하고 솔직한 점으로 관리에 딱 맞는 사람이라 하겠다. 단도직입적인 면도 있으나 세평에서 말하는 관권(官權) 만능주의자라는 지적은 맞는지 모르겠다.

부이사관인 와다 시로(和田四郞)도 역시 야마구치 출신이며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서 지방재판소 판사를 지낸 사람이다.

온건한 성격으로 자만심을 드러내 놓지 않는 사람으로 현재는 민형사(民刑事)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공명정대한 수완을 발휘하여 교제 석상에서도 원활한 자세로 칭찬받는 진지한 서생(書生)과 같은 사람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일곱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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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관공서 - 5 □ 민의소(民議所)-마산포 소재(전 마산보통학교 터) 이것은 한인(韓人) 측의 자치기관이며 마산포 읍내 6개 동의 하급 행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이 사무소에도 역시 민의소장과 부소장이 있고 의원도 있지만 ..

마산번창기(1908) - 10

마산의 관공서 - 4 □ 마산거류민단역소(馬山居留民團役所)-신시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 소재 1899년(명치 32년) 7월에 조직된 일본거류민회의 총대(總代) 사무소가 진화한 것이며 그 후 총대를 이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

마산번창기(1908) - 9

마산의 관공서-3 □ 마산경찰서-신시 토모에마치(巴町, 대외동) 소재 각국 거류지회 조직과 더불어 각국 경찰 사무를 보기 위해 설치된 것이며 새로 신축할 곳은 마산정차장 앞 철도관리국 소관지를 예정하고 있다. 아마 1909년(..

마산번창기(1908) - 8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2 □ 러시아 영사관(露國領事館)-신시 다이마치(臺町) 소재 마산이사청의 구청사를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벽에 유리창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것이 러시아 영사관이고 지금은 영사 대리인 한 ..

마산번창기(1908) - 7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1 □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신시(新市) 다이마치(臺町) 소재 언덕 위의 조망이 좋은 데에 있으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 부산 영사관의 분관으로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로 하여금 건..

마산번창기(1908) - 6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4 ■ 마산포 - 2 □ 월영동(月影洞) 신시의 서쪽부터 남쪽 일대를 포함하는 큰 마을이다. 그 일부는 일본의 전관지(專管地)이기 때문에 1908년(명치 41년) 7월 퇴거령으로 인해 서쪽의 산 ..

마산번창기(1908) - 5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 3 ■ 마산포 - 1 신시(新市)의 북쪽 약 2km 거리에 있는 본래의 마산이다.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간행한 조선의 해안, 항로, 도서 등의 지리정보를 망라한 수로지로 동..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

마산번창기(1908) - 3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1 한국에서 마산같이 산이 좋고 물이 밝은 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음양의 영혼인 대기(大氣)가 응어리져서 마산만의 물이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빛이 나는 아지랑이 속에 마산항의 ..

마산번창기(1908) - 2

서언 마산의 진상(眞相)을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으로 세상에 알리는 일은 오직 스와교도(諏方去洞) 씨가 편찬한 『마산번창기』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시찰이나 관광 명목으로 수많이 관민에 의한 수기가 잡지, 신문 등에 기술되었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