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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1. 05:3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5

3. 주민 열 분의 이야기

 

8)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요" ------------------------- 이○○

1937년생

마산회원구 회원동 670-3

날짜 : 2015년 1월 9일

장소 : 자택

 

- 반갑습니다. 옛날 동네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이 동네 사신 지도 오래되었지요?

= 나는 별 이야기거리가 없는데...

본 고향은 의령인데 거기서 면서기 하다가 막살하고 부산에 내려가 있다가 마산으로 왔어요. 내가 서른일곱 살 때 여기로 왔어요.

자유수출에 있는 일본 사람 회사인데 고모 아버지가 동업한다고 회사 차릴 때 왔거든요. 그러니까 사십년 전에 이리 왔지요.

- 예. 수출자유지역에 어느 회사였습니까?

= 마산강관이라고 파이프 만드는 회사였지요.

일본 회사인데 고모부가 사장을 잘 알아서 나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근무하다가 거기서 정년퇴직 했어요. 육십두 살까지 있다가 퇴직했지요.

- 일본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셨네요.

= 그런데 일본말 하는 거는 대강은 알아들어요. 하라고 하면 못해요. 왜 그렇노 하면 일학년 때 해방이 되어 나니까 일본말도 어중간코 조선말도 어중칸고 그렇구만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잠깐잠깐 이야기 하면 무슨 소린지 알아 듣지만도 쭉 말을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아메가 후로 데스네... 하면 비가 온다는 말이고... 하하.

- 지금도 그 회사가 있습니까?

= 매미 태풍 때 회사에 물이 들어서 철수를 하고 지금은 없습니다.

그 삼만삼백 볼트 전기가 지나가는 공장에 기계가 여러 수십 대 있는 거기가 소금물에 팍 담겨버렸으니까 하나도 못쓰는 거죠. 피해를 많이 입었을 겁니다.

거기다가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거고 하니까 철수한 거겠죠. 나는 그 일년 전에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그 뒤에 얘기 들으니까 남아 있던 직원들은 퇴직금으로 보상을 많이 받았던 갑더라고요. 그래 퇴직금 가지고 화물차 사가지고 운전하는 애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 그 당시에 직원은 어느 정도 됐습니까?

= 한 오십 명 정도 됐습니다. 나는 거기서 천장 크레인 타고 댕기면서 크레인을 몰았거든요.

그 일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물건에 기름칠을 해 놓으니까 미끄럽고 떨어뜨리면 밑에 있는 사람은 바로 즉사하니까요.

그동안에 내가 여남번 떨어뜨렸는데 사람이 없는 데라서 다행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게 된 것이 처음에 사무실 보다 이게 낫겠다 싶었거든요.

그래 일주일을 밤에 남아서 배웠습니다. 파이프에 기름을 발라져 있으니까 크레인으로 이동시키다가 균형을 잘못 잡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밑으로 쏟아져 버립니다.

 

천장 크레인(참고자료)

 

- 주로 어디에 사용되는 파이프입니까?

= 여러 군데입니다. 주로 배관용 파이프인데 욘부, 인치, 2인치, 전부 다 만들었어요. 또 스텐레스 파이프도 만들었어요.

- 그 크레인 운전이 상당히 뛰어난 감각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까?

= 그렇죠. 한참에 세 가지 네 가지를 움직여야 되거든요. 기차나 전동차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거는 가고 서고 이러지만, 이거는 서고 가고 올리고 옆으로 가고 옆으로 보내면서 올리고... 여러가지를 한참에 다 해야 돼요. 내가 한 이십오 년 동안 사고를 안냈거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를 더 필요로 해서 더 있었던 겁니다. 오십오세가 정년인데 나는 칠년이나 더 연장해서 근무를 했어요.

- 완전히 배테랑 기술자였네요.

= 그래 내가 나올 때는 애들한테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내한테 배워가지고 삼화나 이런 큰 공장에 취직해 갔어요.

- 제자들을 많이 길렀네요? 하하. 그러면 임금도 좀 괜찮았겠습니다.

= 그때 연말 되면 오백만 원씩 가져 왔거든요. 한 이십 년 전에 연말 되면 연차 월차 보나스 합해서 한 오백만 원 넘게 가져왔으니까 요새 돈으로 치면 상당할 겁니다.

연말 말고 평소에는 한 이백만 원씩 가져왔어요. 그때 돈으로 이백만 원씩 가져왔으면 많이 가져왔지요.

우리 집 사람도 우리 회사 식당에서 밥을 해주고 이래가지고 전세로 있다가 돈을 모아서 이 집을 샀지요. 그때가 서른일곱 살 땐가 마흔 살 땐가 확실히 모르겠어요. 서류를 봐야 알지요.

원래 전세 얻을 때 이 밑에 교원동에다가 얻었어요. 집안 사람들이 있고 해서 여기로 왔어요. 여기 의령댁이라는 사람들 많아요.

- 처음 이 동네 오셨을 때 동네 풍경이 어땠습니까 주변에 집들이 다 들어차 있었습니까?

= 그때도 동네가 다 형성이 돼 있었는데 전부 기와집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빈집이 많아요. 개발 된다니까 사서 비워놓은 집이 많습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쓰러져가는 기와집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여기가 일차로 개발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몇년인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 그때 여기 오셨을 때 이 동네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 여기는 그냥 회원2동 둥구나무 있는 데라 했지요. 둥구나무 동네라 그랬어요. 누가 물으면 둥구나무 있는 데 산다 하고 그랬지요.

저 둥구나무도 나무가 썩어가지고 가운데에 시멘트를 발라서 메워놓은 겁니다.

- 이 동네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사시면서 동네에 큰일은 없었네요?

= 큰불도 안나고 별 그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밤으로 도둑놈이... 절도가 심했어요. 우리 농 하나 성한 게 없어요.

회사 나가고 사람 없으면 들어와서 저거 마음대로 뒤져가고... 텔레비는 안가져가도 사진기니 뭐 돈 될만한 거는 싹 다가져갔어요. 몇번이나 도둑들었어요. 도둑놈들이 우굴우굴하이 그랬어요.

- 그런데 이제는 근 사십 년을 사셨으니 제이의 고향 아닙니까?

= 이제는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요. 그때는 객지라서 정이 안들었어요.

매일 하는 게 밥 먹고 회사 가고... 육십두살까지 그 짓을 했으니 동네 사람들 하고도 안어울리고 이 동네 이야기도 못들어보고...

- 그럼 요즘은 어떻게 소일 하십니까?

= 저 앤지밭골 쪽에 경남대학 땅이 있거든요. 거기 한 천 평 되는 걸 개간 해가지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거기서 세월을 보내고 있지요.

겨울에만 여기 있지 아니면 계속 밭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가 산인데 그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겁니다. 내놔라 하면 언제든지 내주겠다고 하는 서약서를 경남대학에 써넣고...

- 그럼 주로 뭐를 재배하십니까?

= 뭐 필요한 거는 다하지요. 콩, 배추, 깨, 고추, 무시... 뭐 여러가지 심어요.

며느리 하고 딸이 이웃에 살거든요. 그래 갈라먹고 그러지 뭐. 내 나이가 있으니까 농사 짓는게 이제는 힘들지요. 전에 한 칠십대까지는 펄펄 했는데... 지금도 내가 일은 잘해요.

- 연배에 비해서 아주 건강해 보이십니다.

= 목욕탕 가면 젊은 사람들이 내보고 놀래는데요?

팔도 만져 보고 다리도 만져 보고 놀래는구만요. 젊은 사람들 다리나 같아요. 쭈글쭈글 안하고... 밭에서 일을 하니까 그런가 봅니다.

- 지금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데 감회가 어떠십니까? 이 집이 다 헐릴 거 아닙니까?

= 내가 칠십아홉이거든요. 정축생이거든요. 이거 개발해도 내가 볼 때는 오년은 걸리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때 내가 팔십대엇살 되는데... 요새 백세라 하지만도 팔십댓 되면 맥 못춥니다.

나는 이것 해도 그렇고 안해도 그래요. 딴 사람이 하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거지요. 내 하고는 별 관계 없는 겁니다. 사람이 늙어면 죽는 거지 뭐 그걸 갖다가 애착을 가지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시 살면 오래 못살아요. 공기도 나쁘고 스트레스 받고 말이지요. 촌에서 짐승같이 사는 거 같으면 오래 살런가 모르지요.

나도 칠십아홉에 살만치 살았는데 뭐 애착을 가지겠나... 하면 하고 말면 말고 그렇지 뭐 이렇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옛날에 이 집을 사실 때 얼마에 주고 사셨습니까? 집이 몇평입니까?

= 이게 사십 평인데 한 이천만 원 줬지요. 그런데 안집을 샀어요. 안집이 차도 못 대고 가치없는 집이라고 그래요.

이 안에 있는 집들은 다 등급이 낮아요. 낮아도 보통 낮은 게 아니죠. 바깥에 칠팔백 할 거 같으면 여기는 이백도 안해요. 여기는 그만치 낮아요.

그때는 그런 것도 모르고 헐타고 덤벙 산 거죠. 하하. 차가 갈 수 있는 큰길 가에 있는 걸 사야 값이 있는데... 차소리도 안들리고 조용해서 옛날에는 안에 이런 데가 좋다고 했거든요.

- 그때는 이사할 때도 리어카에 담아 싣고 옮기고 그랬으니까요.

= 그렇죠. 그러니까 골목에 살 수 있었지요.

- 예.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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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31.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3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1) 사업구역 내 삶터의 흔적 - 1

 

국가기록원, 동리구역변경지도, 1913

 

● 회원동(檜原洞)

회원동의 회원(檜原)은 의창현(義昌縣)의 별호(別號)였던 회산(檜山)의 회(檜) 자와 회원현(檜原縣)의 원(原) 자를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 교방동(校坊洞)

회원현의 향교(鄕校)가 있었기 때문에 교방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회원현은 고려 충렬왕 8년인 1282년에 의안(義安)이 의창(義昌), 합포(合浦)가 회원(會原)으로 개칭되고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되었다.

그후 조선 태종 8년인 1408년에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會原縣)을 합해 창원부(昌原府)를 만들면서 독자적인 행정단위로서의 회원현은 사라졌다.

회원현으로 발족한지 126년만의 일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 존속했던 회원현의 치소(治所)는 추산(騶山)의 회원현성지(會原縣城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회원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1604년에 처음 지어진 관해정(觀海亭)이 뒤에 서원의 역할도 했는데 바로 회원서원(檜原書院)이다.

회원서원은 1871년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질 때까지 존속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 일대 골짜기를 서원골(書院谷)로 부르게 되었고, 교방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연유된 게 아닌가 한다.

 

● 교원동(校原洞)

교원동의 교원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방동과 회원동의 일부 구역을 분리하여 새로 교원리(校原里)를 만들면서 교방동의 교와 회원동의 원을 합성해 만든 명칭이다.<<<

 

1950년 12월에 촬영된 회원동 일대의 항공사진 (국토지리정보원, 1950)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 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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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24.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2

1.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변천 - 2

 

순조 말기인 1832년경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따르면, 창원도호부는 부내면(府內面), 동면(東面), 북면(北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5개 면을 두었다.

() 아래에는 운()을 두었는데, 창원도호부에서는 방()을 운이라고 하였으며 모두 16개의 운을 두었다.

부내면(府內面)에는 일운(一運)과 이운(二運)을 두었고, 남면(南面)은 도하일운(道下一運), 도하이운(道下二運), 도상일운(道上一運), 도상이운(道上二運), 도상삼운(道上三運) 5개의 운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동면(東面), 북면(北面), 서면(西面)은 각각 일운(一運), 이운(二運), 삼운(三運) 3개의 운으로 되어 있었다.

한편 남면 관할의 운에 나타나는 '도상(道上)', '도하(道下)'라는 명칭은, 창원도호부에서 안민고개를 넘어 웅천현의 보평역으로 가는 역로를 기준으로 남쪽을 '도하(道下)', 북쪽을 '도상(道上)'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이중에서 서면삼운(西面三運)에는 구강리(舊江里), 회원리(檜原里), 교방동리(校坊洞里), 상남리(上南里), 오산리(午山里), 성산리(城山里), 서성리(西城里), 완월리(翫月里), 월영리(月影里), 두릉리(杜陵里), 내포리(內浦里) 11개 동()이 속리(屬里)로 속해 있었다.

서면삼운의 회원리(檜原里), 교방동리(校坊洞里)가 오늘날의 회원동, 교원동, 교방동 일대이다.

다음은 본 재개발 구역의 위치와 회원동, 교원동, 교방동으로 나누어져있는 현황도이다.

 

 

회원리(檜原里)는 일제강점기인 1910101일부로 창원부가 마산부(馬山府)로 개칭되면서 마산부 외서면(外西面) 회원리로 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통합으로 창원군 내서면(內西面)에 편입되었다.

1943101일부로 내서면 교방리, 산호리, 석전리, 양덕리, 창원면 봉암리, 구산면 가포리와 함께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인 1947720일에 마산시 고시로 회원동으로 개칭되었고, 마산시 조례 제393호로 197011일부로 회원1동과 회원2동으로 분동되었다.

199071일에 구제가 실시되어 회원구 회원1, 회원2동이 되었다가 20001231일에 합포구와 회원구가 폐지되면서 마산시 회원1, 회원2동이 되었다.

201071일에 창원시, 진해시와 통합하면서 마산회원구 회원1, 회원2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방동리(校坊洞里)191431일 마산부 외서면 교방리(校坊里)가 되었으며 1943101일 마산부 내서면 교방리로 편입되었다.

1949815일 마산시 내서면 교방동로 개칭되었다.

1958815일 시 조례에 의해 교방동이 행정동이 되었다.

199071일 구청제 실시로 마산시 합포구 교방동이 되었다가 200111일 구청제 폐지로 마산시 교방동으로 되었다.

201071일 통합 창원시 출범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교원동(校原洞)1913927, 외서면(外西面) 관할 리()의 구역과 명칭을 변경하는 경상남도의 도령에 따라 교원리(校原里)가 새로 설치되면서 출범하였다.

즉 당시 회원리(檜原里)의 일부(회원천을 건너서 교방리(校坊里)에 돌입한 부분) 및 교방리의 일부(중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성호리(城湖里)로부터 회원리로 통하는 도로 동쪽 부분)를 포함한 일대를 교원리(校原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따라서 교원리는 교방동의 교와 회원동의 원을 합성해 만든 명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마산부 교원리가 되었다.

1917년 발간된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도 교원리가 나온다.

1949년 지방자치제 실시로 마산부가 마산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 마산시 교원동이 되었으며, 1990년 합포구 신설로 마산시 합포구 교원동이 되었다.

1997512일에 교원동과 상남1동을 통합하여 행정동인 노산동을 신설하였다.

20011월 구제 폐지로 다시 마산시 교원동이 되었으며, 201071일 통합 창원시의 출범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원동이 되었다.

교원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노산동 관할 하에 있다.<<<

 

이 글은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 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2017)’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이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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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17. 00:00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지역 이야기 - 1

오늘부터 포스팅하는 자료는 창원 소재 '도시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펴낸 창원시 마산 회원1지구 재개발 사업 ‘마을흔적보존사업 실행계획서’ 중 발췌한 것이다. 지금은 이미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본 재개발 지역의 변천과정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글이다. 위치는 다음과 같다.

 

 

재개발사업의 명칭은 회원1지구이지만 이곳은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 등 3개 동에 걸쳐있다.

포스팅할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변천

2.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생활공간의 역사와 흔적

1) 사업구역 내 삶터의 흔적

2) 사업구역 인접 동일생활권 내의 삶의 흔적

3) 인접 지역의 기업과 공장들

4) 인근 지역의 역사 유적

3. 주민 아홉 분의 이야기

1) "새로운 희망의 터전을 꿈꾸며" ------------------------- 유○○

2) "동네 지킴이, 칠원쌀상회"------------------------------- 이○○

3) "삼십 년 넘게 한 자리에서 콩나물을 길렀다" ---------- 권○○

4) "한 집에서 46년을 살아오면서 " ------------------------ 김○○

5) "서민들 사는 보통 동네에서의 조용한 기쁨" ----------- 최○○

6) "사십 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 -------------------------- 조○○

7) "여기가 제2의 고향이지요" ------------------------------ 이창○

8) "서민들 살기좋은 동네" ---------------------------------- 심○○

9) "진짜 본토박이" ------------------------------------------- 배○○

 

 

1.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의 변천 - 1

현재 회원1구역은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 등 2개의 구와 회원2동, 교원동, 교방동 등 3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원동과 교방동은 마산합포구에 회원2동은 마산회원구에 속해 있다. 각 동별로 행정구역의 변천 과정을 간략히 정리한다.

현재의 회원동, 교방동, 교원동 일대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골포현(骨浦縣), 합포현(合浦縣), 회원현(會原縣)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會原縣)을 통합해 창원부(昌原府)를 설치함으로써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창원부에 속한 지역이었다.

 

<행정지명변천일람표, 마산시사, 2011>

 

조선시대에 지방 군현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면리제(面里制)가 시행되었다.

면리제는 중앙권력이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체제로서 부(府), 군(郡)과 현(縣)에 면이 소속되어 있었고 면을 또 여러 개의 리로 나누어 관할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면리제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의 근간으로서 지금도 그 기본틀이 유지되고 있다.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의 경우에도 5개 면(面)을 두었다.

면의 명칭은 대개 동서남북의 방위면(方位面)을 사용하였는데 창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정조 13년(1789년)에 간행된, 한성과 각 도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통계기록인 '호구총수 戶口總數'를 보면 창원부의 서면(西面)에 24개 방리(坊里)가 소속되어 있는데 그중에 회원리(檜原里)와 교방동리(校防洞里)가 이 지역의 옛이름이다.

교방동리(校防洞里)는 교방동리(校坊洞里)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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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기를 때우고 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과 백여 미터 떨어진 싸구려 객사엔 여러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러 우리들 이야기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동네 구장집에 있었던 머슴방엔 거의 매일 밤 머슴자리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냇들 북동쪽에 있은 벽돌공장 북동쪽엔 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귀환동포들이 주로 거주한 신포동과 해운동, 회원동 등 난민들 거주지는 변두리 동네들 거의 모두에 형성되었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불거졌던 소소한 절도사건들이 화제에 오를 땐 그 지역들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복어 내장을 끓여 먹고 중독사한 비극적 얘기도 그 마을들 얘기로 종종 들려왔다.

우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이었음에도 뜨네기 좀도둑들에 많이 시달렸었다.

광을 따로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집들에선 방이나 마루 한녘에 곡식자루를 두기 일쑤였는데, 들에 일하러 간 녘에 이것을 털리고나면 부잣집에서 거금 털린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은 당장 굶주림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고된 농사일로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툇마루에 둔 곡식자루가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나 일 나간 대낮에 감쪽같이 없어졌더라는 이야기, 심지어 낼모래 벨 벼나 보리를 세워둔 채 낱알을 훑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엿판 실은 리어카 아래쪽에 곡식자루가 있더라는 말도 들었고, 방물장수 함지도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솥을 떼어갔다는 말도 들렸고, 낡은 옷도 없어졌다 했다.

어쨋든 지금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도 한, 실소를 머금을 정도의 소소한 사건, 그러나 당자들에겐 상당한 타격이 되는 이런 사건들이 10년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런 사고들을 막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자율방범대를 만든 일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좀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구장집, 술도가, 방앗간에서 얼마씩 내고 여러집에서 곡식되씩 내어 교대로 번을 서는 청년들 야식비나 난방비를 감당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넘어가면 꺼려했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고 밤에도 잠을 설치게 되니 지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변두리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공권력은 제 살찌우기에 바쁘니 도회지 부자들 돌보기에도 바빴던 셈이다.

한편, 마산부두엔 며칠에 한번씩 구호곡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우리동네 몇몇 형들은 그 하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다.

품삯도 당시로선 쏠쏠했거니와 그에 못잖은 부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대꼬챙이를 다듬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작업때 곡식부대에 찔러 흘러나오는 곡식을 위 내복 안에 담고 있다가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 말이 새어 몸 수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형들로부터 아구찜 먹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 전엔 못 먹는 생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부두 근처에 있는 아구찜집에서 막걸리안주로 먹어보고서 집에서 해 먹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여러 사람들이 따라 먹었던 것 같다.

뒤에 들으니 그때 오동동 바닷가 아구찜집 중에 내 초등학교 동기 집도 있었는데 그가 지금 오동동 할매아구찜이다.

그 외, 양덕 미군부대 군용식품 절취해내는 속칭 도꾸다이이야기도 들었고, 청수들 저수지 으슥한 바닷가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으나 직접 본 일은 없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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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 09:34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바닥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민얼굴이기도 했다. 내내 참담했고 암울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시개발로 버림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한과 눈물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성남시가 된 광주대단지 철거민의 실상(1971)이 가장 먼저 터진 사건이었다.

압권은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6)’이었다. 영희의 다섯 가족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개발독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었다. ‘난쏘공이라 부르며 숨어서 읽었던 불온서적(?)이기도 했다.

9년 전에 일어난 용산철거민진압은 잔인한 사건이었다. 개발에 눈먼 권력의 폭력에 무고한 생명들이 죽고 다쳤다.

다시 세월이 흘렀고 국민소득도 높아졌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난쏘공 영희의 다섯 가족은 아직 도처에 그대로 있다. 아니, 오히려 좀 더 교묘해진 수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내치고 있다.

정부가 공공임대주택건설에 주거복지의 방점을 찍긴 했지만 가난한 이들이 체감하기에는 길이 너무 멀다.

 

거가 시작된 회원동 재개발구역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미 떠난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이들도 많았다. 남은 이들은 조여 오는 철거장비의 굉음을 들으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보상금이 6~7천만 원으로 정해진 가구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3천만 원이 채 안 되는 집도 있었다.

재개발 후 들어 설 아파트의 분양가는 대략 3억쯤이다. 이들이 새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2억 넘는 돈이 필요하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돈 없으면 재 입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현실이고 법이다.

골목 한 쪽에서 말쑥한 차림의 청년과 한 아주머니가 마주서서 승강이를 하고 있었다. 보상금을 받아가지 않으면 강제철거 당합니다. 그게 법입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하소연하는 여인을 향한 청년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방송사 카메라를 본 주민 몇 사람이 다가왔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한 여성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 돈으로 어디로 가야됩니까?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기나 합니까?”  말이 좋아 이주지 사실상 법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법치국가, 민주국가, 국민소득 3만 불을 말하는 나라에서 오늘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쫓겨나는 이들이 투표해서 뽑은 공직자 누구 한사람도 이들의 아우성에 귀기우리지 않는다. 진즉 해결할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처음부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개발 후 조감도뿐이었다.

 

<조감도>

 

을 파멸시키는 야만적인 재개발은 이제 끝내야 한다. 건설 패들이 벌이는 폭력적인 개발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는 우리 삶의 그릇이다. 돈만 탐하는 건설시장에 도시를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공공이 나서야 한다.

안상수 시장께 바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철거민의 눈물진 목소리를 듣고 문제해결에 나서시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야만적인 재개발이 없도록 하시라. 그것이 시민이 뽑은 시장의 진정한 소명이다.<<<

 

<이 글은 지난 2월 26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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