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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항지(1926년) - 21 - 건권(乾卷) / 제6장 개항사(開港史)

by 운무허정도 2022. 10. 31.

제6장 개항사

 

1. 각국거류지의 정리

광무 3년(1899) 5월 1일 마산 각국거류지의 수수(授受)를 완료한 부산세관은 바로 마산출장소를 창원감리서의 별실에 설치하여 거류지 사무의 정리에 착수하였다.

이때 우리 일본 정부도 역시 마산에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을 두고 외무(外務) 서기생(書記生) 가와마치 다츠이치로(川上立一郞, 1888년부터 부산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일본 외교관. 마산포 개항이 결정되자 1898년 4월 마산포로 와서 영사관 부지 선정 등의 조사를 했다. 1899년 마산포 개항 후 부산영사관 마산분관 주임이 되어 마산분관이 영사관으로 승격될 때까지 있었다. 1900년 10월 원산영사관 성진분관으로 옮겨 1902년 9월에 대리영사가 되어 1906년 1월 영사관 폐지 때까지 있었다) 씨를 분관 주임으로 사무를 대행케 했다.

그의 부임에 앞서서 부산영사관은 순사부장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에게 구로키(黑木) 순사를 배행케 하며 마산에 파견, 분관 사무를 위탁하기도 했다. 또한 부산세관 마산출장소 주임으로는 독일인 아노스(아르노스, H. G. Arnous, 생몰년미상. 독일인으로 1889년경부터 부산해관에서 10여 년간 실무자로 근무하다가 1900년 4워ᅟᅧᆯ부터 1903년 6월까지 마산해관지서의 책임자로 있었다)에게 맡기고 후지모토 쇼타로(藤本種太郞), 다카하시 가키치(高橋嘉吉)의 두 세관리(稅關吏)를 그 밑에 두게 해 거류지구획사무에 노력케 했다.

A호지를 196구획으로 나누는 동시에 해변의 매립 및 부두 제방 건축 등에 종사토록 했다. 당시의 교통 상황은 스시마에서 출입하는 땔감, 숯 운반선이나 어선과 일본 우선(郵船)회사의 에치고마루(越後丸)가 수시로 미곡 운반을 위해 내항했을 뿐이었으니 마산포의 어항에서는 한국 배의 출입은 오늘과 변함이 없었다. (참고자료-마산포각국조계도, 아래)

 

2. 영사관 터(基地)의 측정

애당초 각국거류지를 수수하자 가와카미(川上) 주임은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로부터 영사관 기지를 선정하라는 훈령을 받고 거류지 모퉁이의 언덕 즉 현재의 다이마치(臺町)에 마산부청 소재의 터를 상정하여 주한 하야시(林) 공사에게 측량기사의 파견을 외무부에 알아보도록 품신하였다.

한국 외부에서 개항 당초부터 거류지 측정에 종사해온 세관 관리 기사 스타텐(스태든, Steden, 대한제국의 해관업무를 관장하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백리비 브라운, (J. M. Brown)의 휘하에 있던 네델란드인 측량사)을 고용토록 통지해 옴으로 가와카미 주임은 보수를 하루 25원으로 약정하고 측량을 마쳤다. 8월에 스타덴은 경성에 돌아가 우리 공사관에서 히오키 에키(日置益) 서기관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로 가와카미 주임을 중상(中傷)하였다.

 

1. 가와카미 씨는 영사관 토지를 8만 평방미터(平方米)를 요구해 여러 번 가감의 교섭도 했는데 나를 의심해 예정을 밝히지 않아서 측량할 수가 없다.

2. 가와카미 씨는 거류지의 묘지 선정을 소홀히 해 그 예정지는 다 러시아에 매수 당했다.

3. 각국거류지는 신속히 경매에 참여해 당해국의 수입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고 거류지회를 조직해 행정을 정리함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가와카미 씨는 단 한 벙의 경매도 행하지 않았다.

 

하야시 공사로부터 이와 같은 요령을 적시한 주의 환기를 받고 가와카미 주임은 즉시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다.

 

1. 영사관의 대지에 대해 스타텐은 1만5천 평방미터를 측정하여 스스로 네 곳의 경게에 표석을 세우고 이것을 B호지로 감리서에 보고하고 떠났다.

2. 거류지 묘지는 스타텐으로부터 까치나루 언덕을 선정하도록 교섭을 있었으나 이 땅은 러시아와 매수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며 그 대분이 하자마(迫間) 명의의 땅이다. 이곳을 묘지로 결정하면 훗날 사용상 지장이 있을 것으로 보여 이 교섭에는 응하지 않았다.

3. 거류지 경매가 지연된 이유는 스타텐의 태만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는 금년 5월 말 측정을 위해 왔는데 오자마자 착수했더라면 모심기 전에 거류지 측량을 거의 끝내고 9월에는 얼마간 부분적으로 경매를 추진할 수 있었을 텐데, 밭에 물이 있느니 등 핑계로 며칠을 공연히 허송하기도 했다. 체류는 석 달에 이르는데 겨우 35개의 소구(小區)를 측정했을 뿐이다. 그동안에 농민은 계속 경작을 하고 있었으니 자연히 추수가 끝난 뒤라야 경매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조리명석하게 회답하기에 하야시 공사는 처음으로 스타텐의 무고, 중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거류지 측량 차 오자 지시, 명령에 반하여 직무를 유기하고 러시아를 위해 토지 매수에 분주히 움직이면서 그간 일본정부로부터 과분한 주선료를 탐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지주를 자기 집에 불러놓고 팔아넘길 것을 협박하거나 응하지 않는 자는 구타하거나 감금하곤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러시아의 주선마저도 거절당할 정도의 파렴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2021년에 번역한 『馬山港誌』(1926) 중 21번 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港誌』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앞서 게재한 『馬山繁昌記』와 같은 스와 시로(諏方史郞)이다. 본 포스팅은 비영리를 전제로 창원시정연구원의 양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