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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3. 동경 대진과 마산 학생

by 허정도 2016. 7. 25.

103. 동경 대진(大震)과 마산 학생

 

 

192391일 오전 1158분 동경을 중심으로 근기(近畿)기방에 격심한 지진이 일어나서 시 전역은 불바다가 되어 덕천(德川)막부시대의 무장야(武藏野)를 방불케 하였다.

 

시민들은 불바다 속에서 시내를 관류하는 10여 처의 하천- 그 중에도 오(), 우전천(隅田川) 등 물 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지저(地底)에서 뿜어 오르는 열은 용광로와 같이 비자(沸煮)하므로 물에 투신한 수많은 사람은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여기 황혼이 짙어가니 시작할 무렵 누가 조작한 일인지 유언비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돌았다.

 

무정부주의자의 선동에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독약과 폭탄을 가지고 제도(帝都)의 폭파를 서둘고 있다’ ‘일본의 천황제를 전도(顚倒)할 혁명을 음모 중이다등의 내용으로 삐라가 살포되었다.

 

이 때의 내무대신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 박사였고, 계엄령 사령관은 육군대장 복전아태랑(福田雅太郞)이었는데 이때 모진 화로 인심은 극도로 흥분하여 백색 테러의 준동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요로(要路)의 신변보장 일책으로 만만한 조선동포에 적개심의 초점을 삼은 것이 불령선인 폭동설을 날조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소위 충군 애국자들의 국수파 대학생들로서 급조된 자경단(自警團)들은 마침내 죽창과 무사도를 휘두르게 되어 조선인에만 국한치 않고 평소 주목하던 흑표인물(黑表人物)은 닥치는 대로 모조리 학살하기를 수일간 계속하였으니 무법천지 그대로를 지상에 실연한 것이다.

 

이런 난중에 재동경 마산 유학생 대부분이 하기방학으로 귀향하였고, 잔류한 몇몇 학생들은 마침 점심시간에 회동되었던 것인데 천우신조로 일본인 모자작(某子爵)의 인도적 온정으로 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죽음의 화를 면한 학생 명단은 구연팔(당시 23), 박기수(17), 김순정(17), 김종신(20), 손기택(20), 김재곤(21), 박개오(23), 나병옥(21), 김영근(25) 14명 중 5명의 성명은 미상, 단 현존자는 구연팔, 김종신, 김순정 이상 3명이다.

 

이상과 같이 학생들 중에 마산 청년으로 동경에서 자유노동도 하고 때로는 깡패와 도박으로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 중에는 나중에 마산에서도 절도 전과 회수로 수위를 점했던 별칭 정짓개라는 김덕술과 씨름 잘한 송두인 두 사람은 조선인 학살에 공포를 느끼고 일본 나라시노(習志野)’ 연병장에 쌓였던 시체 속에서 2일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숨었던 덕으로 불행을 면하였으며,

 

그 후 동아일보사 이상협 특파원의 조사발표에도 생환자 이상 2명 외 마산인사의 희생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위 인물 중 김종신은 제8대 마산시장을 지냄 / 아래 사진은 관동 대지진 직후의 동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