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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30.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2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1)

 

이교재(사진)는 1887년(고종 24년) 7월 9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578번지)에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부농의 아들이었다는 기술이 있지만(삼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삼진독립운동사, 2001, 234쪽) 어느 정도의 부농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서리 578번지의 대지 규모를 보면 적어도 중농 이상의 농가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세 필지로 구획된 이곳에는 1931년 당시 목조 초가 본채 건물 3평과 부속의 목조 초가 3평, 그리고 물건적치용 건물 각각 1평 5홉, 1평 2홉 등 모두 4채가 있었다.(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등기계 발행, 폐쇄등기부 증명서 고유번호 1901-1996-359486, 2017년 10월 21일 발행) 평수가 작은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기보다 축소해서 신고하는 당시의 관행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서리 중에서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동대 마을이었다.

오서리는 조선시대 진해현 서면에 있던 다섯 개 마을, 곧 동대, 서대, 회동, 탑동, 월안이라는 마을을 행정적으로 통합하여 만든 동리이다.(진전면과 오서리라는 행정구역명의 탄생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이후의 일이다. 창원군 진서면과 진주군의 양전면이 통합되어 창원군 진전면으로, 서면에 있는 다섯 개 마을을 통합하여 오서리가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창원문화대전 오서리 참조. 그러나 1872년에 편찬된 진해현지에는 서면 10개리 중에 월안리, 탑동리, 회동리, 대곡리가 각각 병기되어 있으며, 1992년에 펴낸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의 「진해현지편에는 진전면 13개리 중에 오서리가 있으나 이에는 竹谷, 虎山, 月安, 塔洞, 檜洞, 牛色 등의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금란계편집위원회, 창원 웅천 진해부읍지, 4~8쪽. 그러므로 죽곡-혹은 대곡-이 언제 동대와 서대로 나누어졌는지, 또 우색과 호산이 언제, 왜 빠져나갔고, 오서리라는 행정명이 탄생하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다. 우색은 현재 울빛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이곳의 한글 지명이 대실[竹谷]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오서리의 전체 인구는 345세대에 957명이고, 남녀는 각각 486명과 471명이었다.(진전면지편찬위원회, 진전면지, 2001, 31쪽. 이 수치는 약간 줄기는 했지만 현재에도 비슷하다 - 동대리 이장 권오익과의 인터뷰, 2018.4.12. 동대마을회관.  호수/인구, 남/녀 = 동대 176/530, 272/258   서대 76/204, 105/99   회동 40/94, 48/46   탑동 22/57, 29/28   월안 31/72, 32/40  총계 345/957, 486/471)

이 마을은 대개 동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대에는 안동권씨가, 서대마을에는 밀양박씨가 세거지로 삼았으며, 회동과 탑동, 그리고 월안에도 권씨와 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곧 오서리의 동성집단은 권씨와 박씨가 다수이며, 나머지는 다른 성씨가 뒤섞여 있는 양성 중심의 농촌이라 할만하다.

성주이씨인 이교재가 동대리에서 출생하여 왜 이곳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성주이씨의 세거지는 오서리에서 북쪽의 진전천과 뜰을 건너 자리하고 있는 곡안리이다.

그럼에도 이교재의 선대들은 오서리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이조년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 성주이씨문열공파보에 따르면, (星州李氏文烈公派譜 권지2, (대구:고전출판사, 1991),  825쪽. 물론 이 족보는 1990년대에 편찬된 것이라서 이교재의 거주지를 곡안으로 기록하였다.) 그의 증조부인 應斗(1753~?. 9. 15)의 묘가 竹谷 兩岩間인 곧 오서리이며, 부친인 鳳華(1852~ ?.11. 5)의 묘지도 진전면 오서리 앞산 선영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조부인 亨愚(1827~1904. 6.17)의 무덤을 고성에 쓴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여하튼 부친이나 이교재가 오서리에서 살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랫동안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생활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동족 마을이 우세한 이 지역에서 이교재의 출생과 생업, 그리고 사회 활동은 조금 독특한 부분이며, 특히 동대 마을에서도 안동권씨들이 진사를 많이 배출하였다고 하여 ‘진사골목’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뿌리를 내렸던 사실도 앞으로 궁구해 볼 과제이다.

그가 홍순영의 딸인 洪泰出(이 이름은 김형윤의 기행문에 출현한다(H생, 「삼진기행, 이교재선생 묘지전배기(2)」, 마산일보 1954년 4월 15일)과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홍태출은 정해(1887) 8월 14일에 출생하여 계축(1973) 9월 19일에 사망한 것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교재와 동갑이다.

부부 사이에 아들은 없고 1928년 11월 6일 생의 泰淳이란 이름의 딸이 한 명 있다. 나이 40을 넘어 첫 딸을 본 것이다.

이교재가 통영군자금 사건으로 4년형을 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옥한 것이 1928년 1월 28일의 일이니, 그 해 말쯤에 딸을 얻은 셈이다. 딸의 출생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들의 결혼 연도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또 사망 이후, 언제인지 역시 알 수 없으나 李正淳을 양자로 두었고, 딸인 태순은 韓禎鶴과 결혼하였다. (태순의 자녀인 한철수는 창원에 소재한 고려철강의 회장이자 현재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1930년대의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동대리는 특색 있는 동족 중심의 연하 마을로 분류되어 있다. 멀지 않은 동쪽에 창포 바다가 있지만, 연하 촌락으로 구분한 이유는 진전면 최북단의 여양리에서 발원한 진전천이 이 동네의 외곽지대를 흘러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으면서 진전면 시락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평탄한 지형의 남쪽은 상당 부분 광활한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 초에 동대 마을에는 안동권씨가 102호, 417명, 동성 이외의 호수 및 인구수는 39호와 122인으로서, 권씨는 총인구의 약 77%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이들은 19세기에 진해현의 행정치소가 있던 동면에는 한 명도 살지 않았다. 동면에는 김해김씨와 완산이씨가 대성이었다(武田幸男, 學習院大學藏 朝鮮戶籍大帳の基礎的硏究 –19世紀, 慶尙南道鎭海縣の戶籍大帳をじて-, 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 1983, 56쪽).

마을 내의 주된 직업은 농업이었다. 같은 시기의 토지를 기준으로 한 소유형태는 지주 6호, 자작 12호, 자작 겸 소작 28호, 소작인 80호, 기타 직업 15호였다. 기타는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였다.

세족인 안동권씨는 대략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경북의 안동에서 이곳으로 와서 뿌리를 내렸고, 숙종조(1674~1720 재위)에는 이조참판 권용견을 배출하면서 100여 년만에 타성을 압도할 만큼 번영하였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1933, 862쪽)

이 점에서 오서리, 특히 동대 마을은 권씨 중심의 비옥한 농업지대였고, 그를 바탕으로 지주 소작제도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최씨들이 집거하고 있는 고성군 하일면 학동에서도 문중 자산을 비교적 빈곤한 동족에게 유리하게 소작토록 하고, 그 수익은 문중 자산 이용법 및 동족 구제 시설, 조상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 - 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81쪽).

1930년대의 마을 내 자치 상황을 보면 다소 특이한 점들이 보인다.

당시까지도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門罰이라 칭하는 공동제제가 작동하였으며, 융화성이 많고 단결 역강하는 예절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朝鮮總督府, 朝鮮の聚落(後篇), 878~879쪽)

또한 문중 재산이 있어서 자산의 경우 동족에게 대부를 해주는 방식으로 이식을 도모하였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사설학술강습회의 경비, 조상제사 비용, 동족 구제에 필요한 경비 등에 사용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일제 당국은 오서리에 부업장려회를 조직하여 가마니짜기와 양잠을 장려하면서 산업진흥을 꾀하였는데, 이를 통해 마을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

이 글은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사진)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한 논문이다. 본문 중 푸른색은 논문의 각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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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3. 00:00

창원 진전 출신 이교재의 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 1

앞서 9회에 걸쳐 1954년 김형윤 선생이 마산일보에 기고한 '이교재 선생 생가 기행문' 「삼진기행」을 포스팅했다.

오늘부터는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위 사진)의 생애사를 연구한 유장근 경남대 역사학과 명예교수(아래 사진)의 논문을 11회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이 논문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99 No.- [2019]」에 게재되었다. 

독립운동사에 남긴 이교재 선생의 발자취에 비해 아쉽게도 본격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유장근 교수의 이번 연구는 가치가 크다.

(논문의 각주는 본문에서 푸른색으로 표기하였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성장 환경 및 3.1운동 때의 독립활동

Ⅲ.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과 통영군자금 모금사건

Ⅳ. 임시정부 발행 9개 문건의 국내 반입과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 창원군 진전면이라는 행정구역명칭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의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명은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이다. 이 글에서는 이교재가 주로 활동하였던 1910년대 이후의 지명인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를 사용한다.) 출신인 이교재는 창원시에서 운영하는 애국지사 사당에서 이윤재, 주기철과 함께 독립장을 받은 3인 중 한 사람으로, 봉안된 위패에서도 최상위에 올라 있는 항일독립지사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여한 군자금 모집 임무나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에도 헌신적으로 일을 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의 감옥 생활을 겪었고 결국 신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변지섭이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경남독립운동소사, 삼협인쇄, 1966, 176~178쪽)에서 그를 소개한 이후 이를 기초로 쓴 몇 편의 짧은 글과 신문기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조차도 단편적이거나 종종 오류(변지섭의 경남독립운동소사는 많은 이들이 활용을 하지만, 더러 구체적인 사실에서 착오를 보인다고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합천군 초계면 3.1운동 서술에서 4월 5,6일경 창원의 변상태가 초계를 심방하면서 4월 20일에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초계 시위는 3월 21일에 일어난 까닭에 전후 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회면의 주도자도 정확하지 않다 / 이정은, 「경남 합천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 234~235·238쪽 참조)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이교재의 독립운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도 그의 공적을 1) 3.1운동 때 경남북 일대에 선전문배포, 피체되어 3년 복역(진주형무소),  2)상해로 망명, 임정의 밀령으로 입국 피체되어 5년간 복역(대구형무소), 3) 다시 상해로 망명 도중 신의주에서 피체 2년간 복역(서대문형무소), 4)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재입국 사명 수행 중 피체, 1933년 2월 부산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 등으로 열거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검색어 ‘이교재’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do?goTocode=200014)

이 공적조서 또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여 우선 당대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몇 단계로 나누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의 성장터였던 진전의 지리적· 인문적 환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3.1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어 수감되는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상해 망명 이후 1923년 9월에 있었던 통영군자금 모금사건의 실체와 관련 인물들을 통해 그의 활동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1931년 말 이후에 국내에 입국할 때 휴대하고 온 9개의 상해 임정 문건, 곧 ‘이교재임정문서’를 통해 그의 임무가 무엇이었고 이 문서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몇 단계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그의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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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6.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9 / 1954년 4월 23일 (금)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3

 

이 황교전투로 말하면 삼진방면의 만세의거로서는 제3회째라고 하는데 제1회가 현동 제2회가 진북의 순으로 황교전이야말로 규모를 확대하였든 만큼 피해가 우심(尤甚, 정도가 더욱 심함)하였던 것이다.

당시 헌병의 총탄에 부상하여 현재 불구자가 되어 시내 부두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권녕민씨와 진전면 곡안리(谷安里, 원문에는 안곡리) 이몽출씨가 현존하여 있을 뿐 기여(其餘)의 많은 부상자는 이미 우리들과는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일반의 기억에 사라진지도 오래라 한다.

권녕민씨는 우안(右眼)의 수정구(水晶球)로부터 좌(左)콧구멍으로 적탄이 관통되어 삼십수육년 정부터 척안(隻眼, 외눈)으로 지내왔고 이몽출씨는 생식기에 적탄이 적중되어 귀두와 불알을 잃고 종생불구의 생활을 한다고 한다.

여담이지마는 직접 삼진의거에 불가분의 인연을 갖고 있는 분을 소개하면 우리 일행 중 삼성병원장 김형철씨라고 할 것이다.

씨는 1918년 가을에 강산의전(岡山醫專)을 나와 현재 자리에서 개업을 한 것이 동포로서는 마산서 단일인이요 최초이었던 것이다.

익년 삼일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전항과 같이 삼진방면의 수다(數多)한 부상자 중 일부는 진주 배돈병원으로 일부는 마산의 삼성병원으로 수용하여 물질을 떠나 진심(盡心, 마음을 다함) 갈력(竭力, 있는 힘을 다해 애씀) 치료한 청년의사가 즉 김형철 씨이니 그 때 치료받은 기다(幾多, 수효가 많은 것)의 열사가 거의 전부 이작(以作)고인이 되고 김형철 씨 또한 물환성이근서O성재어(物換星移近西O星載於)(?)언 백발노경(白髮老境)에 들었으니 유위전변(有爲轉變, 세상사가 변하기 쉬워 덧없음을 이르는 말), 무상한 인세(人世)인가? 그의 음덕과 공로는 과연 길이 표현할 일이다.

다행이라 할까 우연이라 할까.

금반 이교재 선생의 묘소 전배자 일행이 직접 황폐한 봉분과 유족을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이를 열사들은 영영 사회에서 망각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로 잡히고 모진 바람도 자고 사나운 물결도 쉬면 선열이 삼천리 천지에 피로써 뿌린 씨는 반드시 견고한 지각을 뚫고 싹트고 꽃피어서 열매를 맺을 것을 굳게 신념하는 바이나 이 신념을 항상 잊지 않고 선열에 대한 정중한 보답을 할 맹서(猛暑)가 있음으로 비로소 온누리가 복을 받을 것이며 사리(私利)에 눈이 뒤집혀서 선열을 저버리고 조국의 은혜에 화살을 들어 반역하는 자 있다면 반드시 정의의 신이 진노함을 받고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쥐꼬리만한 지위에 앉아서 고양이 눈 같이 변하는 위정자의 무절조한 가면애국자(假面愛國者)를 배격하여 정의 앞에 용감히 자기희생을 하는 선인(先人) 제열사(諸烈士)가 얼마나 숭엄한 애국자이며 혁명가이냐?

진정한 여론과 애국학(學)은 지하에 있는 이 분들에게 무릎을 꿇고 참회하며 듣고 배워야 할 것이다.

피어린 황교의 비극! 오고 가는 수없는 행인이 덧없이 지나가는 황교다리여!

선죽교의 정포은의 피는 보수와 개혁의 피지만 황교 팔열사가 뿌린 피는 전 국가 민족을 해방코저 흘린 피다.

논개도 의기로서 제(祭)를 올렸건만 어찌 팔열사 전적지는 이렇게도 무심하고 냉담할고?

전횡(田橫)의 부하 오백 명이 자문(自刎,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함)한 것은 지휘자 일인에 대한 의리이요,

페르시아의 테르모필레! 산곡(山谷)에 삼천오백명이 옥쇄(玉碎)한 것은 협격(挾擊)을 당한 때문이며 독군(獨軍) 이십만이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러시아의 볼가 강 서안에 있는 도시)에 몰살한 것이나 알슈안군도(群島)앛츠(島)(?)에서 오천여 명의 일군이 전사한 것은 국가와 국가 간에 상당한 장비를 한 근대전쟁이요, 자본주의 국가의 알력(軋轢)에서 생긴 제물이지만,

우리 동포가 봉기한 독립의거야말로 무기 없는 애국 열정으로 주권을 탈환코저 일어선 순수한 해방운동인 고로 근대국가 전쟁보다 수천 배로 숭고하고 장엄한 것을 다시 한 번 말해 두며

끝으로 이교재 선생의 정혼(精魂)의 뼈에다 팔열사의 행동미의 살을 붙여 후세에 독립정신의 자료가 되어 유의미한 사업이 있기를 빌며 일행은 일로(一路) 귀로(歸路)에 올랐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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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9. 00:00

김형윤의 <삼진기행> 8 / 1954년 4월 22일 (목)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2

 

논둑 받아(?) 둑아 날 살리라 심의중(沈宜中)이 불콩이 날 죽인다!

이것은 누구의 창작인지 미상이나 지금도 산야엘 가면 나물 캐는 촌새악씨나 나무하는 목동이나 또는 소먹이는 어린 목동의 애절한 목소리와 가련한 입에서 구(舊)아리랑 곡으로 처량히 흘러내리는 민요라 한다.

이 민요는 누가 들어도 직해(直解)할 수 있는 것이니 삼진부락민이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러 진주(進駐)하여 가는 도중 황교교각에서 잠복하였던 일인 헌병과 협력한 보조헌병 심의중이라는 악도가 있었는데 일본헌병이 처음에는 공포(空砲)로 위협하고 일보 더 접근되자 적두(赤豆)로 유인하여 사정 내에 애국용사가 돌입하였을 때 최선두에서 제1발을 쏜 자가 심의중이라는 자라고 한다.

적탄은 간발도 없이 난사되었으나 맨주먹과 곤봉만 휘두르던 앞선 용사는 쓰러지고 용사의 시체를 넘어 다시 돌진하던 동지도 일보 더 전진하지 못하고 또한 비참하게도 전사의 시체 위에 쓰러져 열렬한 애국청년의 선혈은 대지에 물들었으니 김수동 김호현 고묘주 변갑석 김영환 홍두익 변상복 이기봉 씨 등이 즉 8열사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이교재 선생이나 이들 팔열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초개에 파묻혀 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분들 대개가 순박한 농민이며 기이한 운명을 약속한 것 같이 순국 후 겨우 무덤에 벌초 정도나 해줄 양자들이 대부분이니 일가친척들인들 백사지(白沙地)같은 세도인심(世道人心)이라 오비(吾鼻)도 수삼 척에 순사(殉死)한 이들에게 마음만으로 어찌할 것인가?

일정시대에는 친일파와 밀정이 횡행하므로 자기신변이 위태로워 도와주지 못했고 8·15 후는 유상무상(有象無象)의 군맹(群盲)이 매관매직과 모리(牟利)에 분망하였으니 사욕에 실명한 자들이 이해득실이 없는 남의 일에 관심될 리가 만무하다.

총탄과 백인(白刃)에 몸은 사력(砂礫)에 폭쇄되어 지하삼 척(尺)에서 묵묵히 묻혀있고 혼백은 백학을 타고 구만리 장천으로 등(登)히 선(仙)하였으나 허구한 세월에도 시냇물은 유유자류(悠悠自流)하며 산용(山容)은 의구하니 팔열사의 고전장(古戰場)에 오고가는 나그네가 뉘라서 발을 멈추리요?

삼진방면의 애국열사가 사파(沙婆)를 떠난 지 근 사십년. 생시에는 조국광복에 일편적심이요, 몰(歿) 후에는 호국의 충혼이 되었으나 사자(死者) 이미 입을 굳게 닫았으니 은수(恩讐, 은혜와 원한) 가 누구인가 알 길이 바이없다.

이화(李華)의 글을 차용하면

鳥無聲兮山寂寂(조무성혜산적적 : 새들은 우짖지 않고 산은 고요하다)

夜正長兮風淅淅(야정장혜풍석석 : 밤은 참으로 긴데 바람 소리만 쓸쓸히 들린다)

魂魄結兮天沈沈(혼백결혜천침침 : 혼백이 서로 엉키어 하늘은 자욱하고)

鬼神聚兮雲冪冪(귀신취혜운멱멱 : 귀신이 모여들어 구름이 뒤덮인다)

日光寒兮草短(일광한혜초단 : 햇빛이 차가우니 풀조차 자라지 않고)

月色苦兮霜白(월색고혜상백 : 달빛은 처량한데 서리가 하얗다)

傷心慘目(상심참목 : 상처난 마음 처참한 눈이)

有如是耶(유여시야 : 이와 같은 곳이 또 있을까)

-(중략)

布奠傾觴(포전경상 : 마침내 제사상을 차려 술판에 술을 붓고)

哭望天涯(곡망천애 : 통곡하면서 하늘 끝을 바라보니)

天地爲愁(천지위수 : 하늘도 땅도 그를 위해 슬퍼하고)

草木凄悲(초목처비 : 초목도 처량하고 비통해 한다)

弔祭不至(조제불지 :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가 지극하지 않으면)

精魂無(본문은 何)依(정혼무의 : 혼령도 의탁할 곳이 없으리니)

-(하략)

실로 혼신을 울리던 8열사의 장렬한 최후. 공민(公民)된 자 누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소냐?

누가 그 공적을 그대로 방치하고 묵살할 것인가?

그들 유족은 거의 산지사방(散之四方)하여 실낱같은 로명(露命,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겨우겨우 이어간다는 풍문만 들리니 선열에 대한 예의는 빠졌으나 후손이라도 찾을 수 없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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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 20:34

김형윤의 <삼진기행> 7 / 1954년 4월 21일 (수)

황교 교반의 전적지 / 장렬히 순국한 8열사 - 1

 

우리일행은 이교재선생의 묘소에 정중한 전배식(展拜式)을 마치고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사양(斜陽)이 부락에 빚칠 때이다.

일행은 노부인과 작별인사를 할 때 굵은 눈물방울이 양 볼에 흘러내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양친을 일찍 여읜 기자의 가슴속에 형상할 수 없는 만감이 충격한다.

기자는 다시 노부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후일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떠나면서 고개를 잠시 돌려보니 아직도 동구(洞口)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서있다.

마치 자식을 먼 길로 보내는 자모(慈母)와도 같다.

일행은 급급히 회로(回路)를 달리며 다시 한 번 황교 좌우를 돌려보며 1919년 삼일독립전투시를 회상해본다. 1919년이면 지금부터 손꼽아서 삼십육 년이라는 옛날이다.

그때 이 태황께서 승단하시고 인산(因山)을 기회로 국내외 동포들은 분연히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절규하자 그 위세는 요원의 불길같이 급속도로 전토(全土)에 미만(彌滿, 널리 퍼지어 가득 참)하자 일부 호농(豪農)과 일본인에 아부하여 재산생명을 보호 받는 무리들 외 일제봉기(一齊蜂起)하여 방방곡곡이 타도일본 독립만세 소리가 하늘을 질렀다.

그때 도시에서는 단순한 비밀삐라 산포가 아니면 만세절규에 그쳤지마는 농촌에서는 이와 같은 서당 샌님들의 미온태도에 만족치 않고 감연(敢然)히 일헌(日憲)에게 직접 행동을 가하였음으로 그 때문에 피해정도가 극히 참혹하였다고 한다.

수원교회 학살 사건도 국내에서 가장 으뜸 될 일이니 이것은 불의의 피습으로 말미암아 하가(何暇, 어느 겨를)에 대항은 고사하고 피난할 겨를조차 없어 비참한 희생을 입었지마는 그 최후의 장렬함에 있어서는 삼진방면의 황교전투보다 오른편에 내세울 비극은 드물다는 것이다.

도시나 농촌이 모두 마찬가지지마는 음모 행동은 대부분이 시일(市日, 장날)을 택한 모양인데 삼진의 전투로 최고의 희생을 당한 날이 음력 2월 3일의 진북의 시일(市日)을 기하여 인근 부락민의 대거출동으로 일헌(日憲)에 일격을 가하고자함에 그 정신과 그 기세야말로 장할 지고!

그러나 어찌 꾀 하였으리요, 무기 없는 불행한 약소민족으로 범 앞에 둥지개 바람(?)이니 어찌 통분함을 금할 수 있으리오.

그 의지는 장하고 용(勇)하였으나 결국은 비극의 씨를 뿌리게 되었으니 후일의 민중운동에 커다란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겼다고 할 것이다.

그때 누구의 말인지 모르나 유아동포 유진무태(唯我同胞 有進無退) 라는 「모토」대로 이를 애국청년에게는 오직 전진이 있었을 뿐이고 조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든 것이니 서반아(西班牙)혁명 때 부인(婦人)이 가슴을 내밀고 적의 권총 앞에 돌격하던 것을 연상케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으냐?

비극의 황교 동편에는 일헌과 그의 주구되는 헌병 보조원이 총부리를 들고 대진(對陣)하고 있었고 오서리 방면에서 합류한 청년들은 이것을 격퇴코저 진군할 때 별안간 적측(敵側)에서 탄환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그 탄환은 팥(赤豆)이었으므로 그들이 유도작전을 하는 흉계에 속아서 일제히 선풍지세(旋風之勢)로 헌병을 포위하려고 할 찰나에 실탄은 소낙비와 같이 애국청년의 머리 위에 쏟아져서 유탄(流彈)으로 어린애가5명 청장년 8명이 일시에 절명되었든 것을 일행은 다시 한 번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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