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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13. 00:00

마산번창기(1908) - 4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2

 

■ 각국 거류지(各國 居留地)

월영동의 일부와 신월동 일부를 쪼개서 이루어진 해변의 신시가(新市街)이며 마산이사청 관내의 중심인 곳이다.

1898년(명치 31년) 2월 21일부 칙재(勅裁)로 개항되고 다음 해 1899년(명치 32년) 5월 1일에 거류지 구획이 정해졌다. 그 면적은 138,888평 남짓이며 이것을 A, B로 나누어 A는 일등지를 뜻하며 그것을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했다.

B호는 이등지이며 1호부터 47호까지 세분되어 있다. 그 일등지 전부는 이미지상권 경매가 종료되고 현재로서는 러시아인 소유자 중 몇 개 구획이 빈터로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식 기와집이 즐비해 있다. 이등지는 17호 및 39호부터 45호까지 여덟 구획을 제외하고는 경매가 끝나고 길도 가로 세로 개통되어 집도 띄엄띄엄 지어지고 있지만, 산기슭에 가까운 데까지 집이 들어서려면 아직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이 거류지에다 1902년(명치 35년) 즉 광무 6년에 당시의 영사(領事)인 사카타 주지로(坂田重次郞), 거류민회 이사인 센고쿠 간쿠로(仙石勘九郞), 박간지점 지배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 씨 등의 알선으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 시장은 마산포와 같이 매월 3번, 10일 20일 30일에 열리는 산호동 즉 고관(古館)의 그것을 옮긴 것인데 8월 3일이 음력으로 6월 30일이라 즉 10일이 붙는 날이라서 그날을 시장 첫날로 잡은 것이며 장소는 혼마치(本町)부터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에 이르는 데서 장이 열렸다.

이때부터 거류지는 신시(新市)라 불리게 되었으나 한국인 중에는 시장 복구 운동을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나와 그 시장은 불과 5~6번 열린 후 고관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월동에 새 시장을 개시하여 매월 16일에 열게 했으나 손님들과 출품이 적어서 이 또한 실패했다. 그래도 거류지에 대한 신시란 명칭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신시가 지역 명명에 관해서 당국자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으나 좋은 구획 안이 나오지 않아 시간만 흘러가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작은 한 구획에도 십여 채의 전셋집들이 들어오게 되어 우편물의 배달이나 결창의 호구조사에도 A 몇 호인지, B 몇 호인지 조잡한 이름으로서 불편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1908년(명치 41년) 4월, 각국거류지회 회장인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거류민단 단장 마에다 에이치(前田榮一), 경찰서장 경시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 우체국장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기타 민단 의원, 유지자(有志者)들이 모여서 한 글자로 된 좋은 이름을 골라서 쓰기로 했다.

남북으로 11개 구획에 동 이름을 붙이고 동서로 11개 구획은 중앙으로부터 분할해서 동명(町名)을 붙이고 동(町)은 반드시 마치라고 읽도록 하고 죠메(丁目)를 나눈 곳에는 죠메(정목)마다 호번(戶番)을 따로 하고 각국거류지회는 이와 함께 동마다 몇 간(間) 간격을 기준으로 벚꽃을 심기로 했다.

그 11개 동의 내역은 아래와 같다.

 

 

□ 혼마치(本町, 1정목에서 5정목까지) - 현 월남동

북쪽의 창원교(昌原橋)로부터 중부의 마산교를 지나서 진해교에 이르는 지역이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에 열렸으며 상가는 다음 해 연말부터 들어오게 된 가장 오래된 곳인 동시에 1906년(명치 39년) 말까지는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당시의 마산 정거장에 바로 통하고, 남쪽으로는 진해군(현재의 마산합포구 삼진지역의 옛 행정구역) 읍내를 거쳐 하나는 고성과 통영으로 하나는 진주를 거쳐 전라도를 가는 노선이었다.

교마치로(京町通)의 북쪽 끝이 정류장 사이의 왕복노선으로 개통되고 나서 그 번성이 모두 교마치 쪽으로 쏠리고 이제는 조금 기울어진 감이 있다. 그래도 앞의 바다와 관련된 시설이 있고 남쪽 끝의 일본전관지에 중포병영이 세위지게 되므로 그 경향이 만회된 셈이다.

혼마치 1정목은 동쪽이 바로 바다이기 때문에 건물이 적어서 한산한 감이 있으나 그 앞바다를 매립하려는 공사가 시작되리라는 소식이 있어 그때는 교마치로와 별 차이 없는 번화가로 둔갑할 것이다.

이 동네에 사는 고참인 시게무라 우리치(中村宇一), 다나카 츠루마츠(田中鶴松)씨에 의하면 자신들이 이주했던 1900년(명치 33년) 말까지 혼마치는 동네 양끝이 아직 개통되지 않았던 상태였다고 한다.

혼마치 2정목은 해안가 일대를 가리키며, 해관지(海關地)에 이르는 사이에 무학교(舞鶴橋)가 걸려 있다.

□ 교마치(京町, 1정목에서 3정목까지) - 현 두월동

북쪽의 완월교(玩月橋)에서 중부의 반룡교(盤龍橋)를 넘어 남쪽의 혼마치 모퉁이까지의 지역으로 1905년(명치 38년) 말부터 개통한 시가지이다.

1906년 초봄에 완월교 주변에 나가야(長屋)가 한두 채 세워진 후 초여름 때부터 건축공사를 보게 되었다. 그해 6월 20일 본 책 저자가 마산에 왔을 때는 동네 전체로 16~17채 밖에 되지 않았으며 특히 동쪽 일대에는 건물이 없어서 해면을 지나온 남풍이 바로 가게에 불어와 시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북쪽 끝은 한 길이 있을 뿐 가게의 번창이란 엄두도 못 내던 터였는데 같은 해 가을에는 혼마치로의 남쪽 끝 길이 닫히게 되고 그와 동시에 동네 북쪽 끝머리에서 마산포에 통하는 길이 열려 정거장 길은 이때부터 동쪽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 이래 혼마치의 건축공사는 아주 바쁘게 돌아가게 되고 그 공가 소리는 밤에도 들릴 정도였다. 같은 해 연말에는 동네 동쪽에도 기와집 건설이 시작되어 마침내 혼마치의 번영을 능가하고 마산 제일의 장소가 된 것은 1907년 초봄부터이다. 혼마치 2정목 위에 있는 야나기마치(柳町, 신창동)에 이르는 모퉁이는 하나미사카(花見坂)라고 불리기도 했다.

□ 사카에마치(榮町) - 현 홍문동

사카에마치는 대사교(大使橋)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와 동시에 개통된 시가지이며 경찰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교차점 사방은 양측에 요리점이 생겨서 마치 마산의 유흥가처럼 되어 버렸다.

□ 하마마치(濱町) - 현 창포동

혼마치와의 경계를 이루는 신월교 이남에 있으며 혼마치 5정목으로 나올 때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가지는 해안 매립과 동시에 개통된 곳이라 바다와 면하여 있어 길 한 쪽에 집이 있을 뿐이다.

그 1정목에서 2정목까지는 모두 해관 소유지이지만 1정목에는 해운업, 위탁판매업, 기타 해관에 연고가 있는 자가 땅을 빌리는 허가를 받고 거주하거나 창고를 지어서 해안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도 했다.

1907년(명치 40년) 7월에 해관이 창고를 건축할 예정이 있어서 그 터에 집과 창고를 없애도록 하여 그 꼭이 참으로 못 보게 되었다. 2정목은 애초부터 차지(借地) 허가를 내지 않아서 오늘날의 1정목보다는 아주 살풍경으로 자랑거리는 전혀 못된다.

3정목와 2정목이 이어지는 지역은 러시아인의 소유라 건축물이란 아예 없다. 다만 모퉁이 한 구획을 사이에 둔 구역에는 마산수산회사 및 부속어시장이 있기 때문에 상점들이 많이 덜어서고 있다. 가게 뒷 터에는 어부의 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빼곡히 줄지어 있다.

출선(出船) 후의 어부 집들은 다른 데와 변함없으나 배가 들어온 후에는 먹고 마시며 소란을 피우고 시끄럽기만 하여 여기저기서 노래 소리, 싸움소리가 이어진다. 근처의 상점들도 이때가 장사가 잘 되는 법이다. 출선과 입선은 매일 다소나마 있지만 출어기는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사흘 정도 걸린다.

이 뒷골목은 일본에서 말하는 빈민굴보다 더 열악하여 다타미 서너 장 넓이의 집에 부부로 세 가족이 살면서 줄판이 벌어질 때에는 아침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번갈아 들락거리기도 한다. 세상에 불경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양상이니 참 기운도 좋은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 악의 없는 어부들이 수산회사 소속의 에비스신사(惠美壽神社)를 중심으로 해업을 독점하고 그 기세가 높은 것도 마산의 꽃이라고도 하겠다.

□ 다이마치(臺町) - 현 대내동

다이마치는 이사청이 마산포에서 이사해 왔을 때 개척된 곳이라 이사청, 러시아영사관 소유지와 영국계약의 지계(地界) 일대의 총칭이다.

이사청, 이사청 관저, 이사청 직원 숙소 및 러시아 영사관이 있을 뿐 상가는 한 채도 없다. 다만 조망이 좋아 소나무가 울창한 일화산록(日和山麓)에 자리 잡고 있다.

□ 야나기마치(柳町) - 현 신창동

야나기마치는 북쪽의 웅천교를 꺾어 올라 교마치의 서쪽 위에 나란히 가면서 대사교(大使橋)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이며 교마치와 같은 시기에 개통한 시가지이다.

평탄하지 않은 비탈이 많은 동네라서 아직은 번화롭지는 못하다. 이름에는 버들 유(柳)자가 들어갔지만 버드나무는 없다. 집들이 이제야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 3년 내에는 변화가가 될 것이다.

□ 아사히마치(旭町) - 현 평화동

아나기마치와 나란히 월견교까지 이르는 지역

□ 사쿠라마치(櫻町) - 현 문화동

아사히마치의 서쪽 조금 높은 데로 아사히마치와 병행하는 지역으로 시중(市中)에서 가장 높은 시가지이다.

□ 토모에마치(巴町) - 현 대외동

마산경찰서가 있는 곳이며 그 서쪽 옆구리 지역 일대를 총칭한다.

□ 미도리마치(綠町) - 현 유록동

토모에마치의 서쪽에 위치하며 그와 병행하는 지역이다.

□ 아케보노마치(曙町) - 현 청계동

월견교(月見橋) 이남의 사카에마치와 토모에마치 사이에 있는 구역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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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6. 00:00

마산번창기(1908) - 3

 

 

제1장 마산의 대관(大觀) -1

 

한국에서 마산같이 산이 좋고 물이 밝은 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음양의 영혼인 대기(大氣)가 응어리져서 마산만의 물이 되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빛이 나는 아지랑이 속에 마산항의 땅이 굳어진 것이다.

구라파의 어떤 이는 이 항만을 가리켜 태평양 해안으로서는 호주의 시드니 항, 북 아메리카의 샌프란시스코 항에 다음가는 세계 세 번째 최우량의 산수(山水)라 하여 그 얼마나 군침을 흘렸는지 모른다.

러시아가 동양에서 얼어붙지 않는 항구로서 마산을 얻으려고 마산사건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짐작이 가듯이 얼마나 마산이 그 형세가 좋고 그 풍경 역시 보기 좋기는 누구나가 아는 바이다.

마산만은 부도수도(釜島水道)라 부르는 입구에서 9해리 거리를 두고 진해만에 붙어 있다. 진해만에는 가도(가덕도), 칠천도란 두 섬이 있으며, 거기에다 거제도를 으뜸으로 한산, 가덕, 미륵, 욕지, 장사 등 기타 수십 개의 작은 섬들이 외양(外洋)에 대해 보루를 서고 있다.

통로는 거제도를 중앙으로 해서 남쪽은 통영, 북측은 가덕이란 두 개의 좁은 물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게다가 통영수도에는 항만 입구의 수심이 얕아서 300톤 이상의 선박이 취항하기가 어려워서 큰 배는 반드시 가덕수도 쪽으로 가야만 한다.

마치 크나큰 호수를 이루고 있고 산과 물이 명승 같은 마산항만을 가지고 있음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하다. 1906년(명치39년) 한국 정부는 그 부근 일대를 구획하여 해군 군항 예정지로 지정하고 관보에 공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러일전쟁 때 연합함대 사령관인 도고 대장이 이 지역을 공방의 중요 거점으로 삼으며, 발틱 원정함대가 조선해(海)에 그 모습을 보이자 “국가 존망은 이 싸움에 달렸다. 제군 노력하시오”라고 무전을 보낸 곳이 현재의 군항, 현동의 앞바다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해군이 진해만방비대를 창설하고 그 사령부를 거제도 송진에 두고 육군도 역시 가덕도 기타에 요새를 배치하고 근해 경비에 전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진해만에 여러 규모의 선박, 함대가 때때로 입항하여 대표 시험 발사나 사격 연습을 할 때, 마산에는 청천벽력 같은 굉음이 울리곤 한다. 이 소리가 울릴 때 마산 상인들은 많이 기뻐하기도 한다.

마산만은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진해만과 한 줄기 수로로 붙어 있는 아름다운 항구여서 외해가 아무리 사나운 파도에 휩싸여도 만내의 파도는 아주 잔잔하고 사방 경치도 거울에 비친 듯하다.

또한 수심이 깊어 수십만 톤의 함선을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 바다, 육지의 생산물은 기차든 선편이든 자유로이 수출이 가능할 것이다.

실업의 실정으로 봐서는 개항 후 겨우 10년이므로 수백 년 전부터 개항된 부산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곳이 아니어서 부산에서 험한 날씨는 볼 적에도 마산은 마치 평상시처럼 고요하고 안전하다.

언젠가 세상과 민심이 안정되었을 때 천황이 순행을 바라는 곳은 한국 13도를 통틀어 오직 이곳, 마산뿐일 것이다.

마산의 위치는 경상남도 중부의 남쪽으로 북위 35도 10분 45초 동경 128도 34분 15초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10한리(韓里), 즉 일본의 1리 이내 권내를 총칭한다.

앞에는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한국 황실 의친왕이 관리하는 월영도가 있으며, 뒤에는 무학, 일화(日和, 각국거류지의 러시아 영사관과 일본영사관 뒤편의 높은 언덕의 이름으로 개항 이후 일인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운대 등의 봉우리와 가토커상관(加藤鬼上官-가토 기요사마 加藤淸正, 1562~1611-임진왜란 때 제2군 사령관으로 조선을 침략한 장군으로 ‘귀-幽靈-上官’으로 불리기도 했다)과 인연이 있는 장군산맥(將軍山脈)을 지고 좌측에 마을을 안고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세 번째 것이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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