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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9. 00:00

도시 한복판에 동굴이?


도시 한 복판에 동굴이 있다면 믿어집니까?
최근 마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산 창포동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중 땅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5m 지점에 폭 3m, 높이 2m, 길이 20m 정도되는 반원형 동굴이었습니다.
벽이나 기둥, 지붕 등 동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인력으로 흙만 파내 뚫은 것이었습니다.
마사토와 황토가 섞인 토질이었는데 매우 견고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1899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마산이라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의 해관(현, 세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조계지를 조성 때 최초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부지였습니다.
사정(査定)토지대장의 기록에, 일제강점기 내내 이 터의 소유주가 국가(일본, 조선총독부)였던 걸로 보아 해방될 때까지 계속 공공시설로 사용된 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위치입니다.



연세 높은 이웃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동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어렸을 적 이 동굴 안에서 놀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원래는 동굴 양쪽으로 입구가 트여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까지 사람들이 이 동굴을 지나 다니기도 하고 무언가를 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일본인들이 방공호로 팠던 굴 같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평양1개소를 고시했습니다. 
그러다 6월 14일에는 전국의 중소도시 20 곳에 소개공지(
疏開空地)를 고시했는데 신의주 함흥 여수 대구 원산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마산에도  소개공지 1개소가 고시되었습니다.

소개관련 공지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는 중요시설 주변 30m∼50m내에 있는 기존건축물을 철거·소개하여 공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때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일제기의 '소개공지대'와 '소개공지'에 대해,
'도시계획의 눈으로 보면 소개공지대는 방공법에 의한 새로운 계획가로의 설정이었고 소개공지는 새로운 계획광장의 설정이었다'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굴이 '소개공지'와 직접 상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방직전의 급박했던 전황을 생각해보면 이 동굴은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 미공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던 그 때 팠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쟁흔적이니까 말입니다.

시청 관련부서에서 신속히 조치를 취해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폐쇄하지 말고 식민지시대 유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다 싶었지만 주변상황이 워낙 위험해 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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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습니다.


지하 1.5m 지점이었습니다.


입구 폭은 2.4m 정도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3m 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어 행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꽤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동굴을 막기 위해 준비공사를 시작합니다.
아래 큰 놈은 콘크리트 주입구이고, 위 작은 놈들은 공극을 없애기 위한 조치입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와 시멘트만 섞은 모르타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났습니다.
동굴 위에 2층 건물이 두 채나 있던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도시 한복판 땅 속에서 긴 세월 잠자고 있었던 이 동굴을 보며 지난 세기 이 도시 마산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조용했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밀고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신작로를 뚫고, 이 도시를 제 멋대로 삼켰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과 귀환동포에 도시가 북적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민들로 이 도시가 다시 들끓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지만 이 도시에 사연을 남기고 간 그 많았던 사람들,,,,,
그들의 음성이 귓전에 돌고,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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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2. 00:00

건축가 정기용과 '진해 기적의 도서관'

한가위 즐겁게 보내십시오! ^^

며칠 전, 어린이전용도서관인 '진해 기적의 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MBC '느낌표'가 탄생시킨 '기적의 도서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시민단체에서 주관한 도시문제토론회 당일, 진해도시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건물도 훌륭했지만 건물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작은 도서관이 사용되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도서관 내부에 흐르는 짙은 사람냄새에 놀랐습니다.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낡은 흑백사진처럼 기억에만 남아 있는 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장면을 '기적의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컴퓨터와 TV  앞에만 앉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내 기우가 편견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기뻤습니다.
진해의 한 언저리 '기적의 도서관'에서 기적이 솟고 있었고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서관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정기용 선생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개인적 인연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나의 존재조차 모릅니다.
나는 그와 관계가 있지만 그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정기용을 처음 알게된 것은 저널에 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기용이라는 이름이 내 머리에 각인된 것은 한 권의 책 때문입니다.
열화당에서 출판한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라는 번역서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이야깁니다.

그 책은 '구르나'라는 작고 가난한 마을에 바친 이집트 카이로 대학 건축과 교수이자 세계적인 흙건축가 '하싼 화티'의 자서전입니다.
두 번 읽었고, 이집트를 여행할 때 직접 '구르나 마을'을 찾아 가보기도 했으며, 대학원 세미나 때 요약해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건축을 공부한 정기용은 역자서문에서 이 책을 일러 '70년대 유럽의 건축학도들이 마치 건축성경처럼 읽었던 책'이라고 했습니다.
내용도 철학도 없이, 그저 크고 사치스러운 것들만 쫓는 한국 대학의 건축교육을 비웃듯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싼 화티는 나에게 건축가가 사회 속에서 존재해야할 가치를 심어주었습니다.
건축가의 존재이유와 건축가의 사회적 사명에 대해서 가르친 그는, 젊은 건축가였던 나를 깊은 감동에 빠뜨렸습니다.
모든 것이 건축가 정기용, 그의 덕분이었습니다.

'진해 기적의 도서관'을 찾아간 것도 이 도서관의 설계자가 정기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건축세계를 음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대했던대로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잘게 잘라 놓은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좋았고, 자유롭게 앉고 누워 책을 잡을 수 있도록 유도한 장치들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자연광을 받되 직사광선을 피했고, 권위와 형식 대신 호기심과 편안함이 흐르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씁쓸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건축가에 대한 이야깁니다.
도서관을 소개하는 자료에도, 홈페이지에도, 도서관을 구경한 뒤 쓴 여러 글들에서도, 이 아름다운 도서관을 디자인한 건축가가 누군지 말하지 않은 점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도서관 홈피였습니다.
아래 표가 홈피의 도서관 연혁부분입니다.

                           
도서관 홈피에서 건축가를 꼭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건설회사는 밝히면서 건축가를 말하지 않는 무지한 현실이 너무 씁쓸했습니다.
내가 건축가라서가 아닙니다.
'앙드레 김' 대신 봉제사를 알리는 무지가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소문에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투병 중이라 합니다.
가까운 김해에 그가 설계한 '김해 기적의 도서관'이 건축 중입니다.
지난 봄 착공식에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참석했는데 매우 수척해보이더라는 말을 전해들었고, 그 후로 한 번도 직접 내려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는 '자연과 인간의 상생'에 자신의 건축을 던진 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남긴 그의 작품들에서 내가 받은 메시지입니다.
최근 들어 생태건축이 각광 받는 현상을 보면,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의 건축가입니다.

위대한 건축가가 오래 머문다는 것은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크게 유익한 일입니다.
그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Trackback 1 Comment 8
  1. 포세이동 2010.09.23 17:22 address edit & del reply

    추석 잘 쇠셨는지요.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10.09.23 22:13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추석 잘 지내셨죠?
      날씨가 선선해져 참 좋습니다.
      좋은 계절에 좋은 일들 많이 생기시기 바랍니다.

  2. 김종국 2010.10.01 13:52 address edit & del reply

    공감합니다.
    우리와 동떨어진 디자인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진실함이 사라지고 있어 슬픕니다.

    • 허정도 2010.10.01 18:48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정기용 선생의 건축가정신은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3. 연희 2010.12.31 20:32 address edit & del reply

    일민미술관에서 정지용선생님의 <감응>전시를 보고왔어요. 넘 넘 좋은 전시였답니다. 이렇게 한번도 글을 남겨본적이 없는 저였는데....너무 좋았기에 그 분의 이름과 건축에대한 생각을 생각하며 몇자 적어봅니다. 그 어떤것 보다 삶이 우선이라고...나무는 많이 배우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맺고 곤충들의 놀이터가 되고....정지용선생님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작품을 통해 그 분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려구요...

    • 허정도 2011.01.01 11:22 address edit & del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정기용 선생의 책을 읽어 보신다니 반갑군요.
      '사람 건축 도시'를 권하고 싶습니다.

  4. 안상범 2012.03.13 13:35 address edit & del reply


    우연히 ........
    뭐, 다 인연이 있어서이겠지요마는
    정기용선생의 작품을 써핑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아는 허정도 건축가님이 맞으신다면 제이름도 아실것이기에
    설명 드리지 않습니다.

    자는 캐나다에 있습니다.
    마침 제가 조선일보에 블러그를 하나 가지고 있지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아뭏턴 반갑습니다.
    부디 좋은집 많이 설계 하십시요.
    세월이 좋아 지면 뵈올날 있겠지요?
    그날 만 기다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http://blog.chosun.com/blog.screen?userId=arkitect

    • 허정도 2012.03.13 13:51 address edit & del

      안 형, 이게 얼마만입니까, 건강하시죠?
      캐나다 있다는 이야기는 풍문에 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내려온 뒤부터 지금까지 고향 마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 형, 늘 평안하십시오.

2010. 9. 15. 00:00

거꾸로 보는 그림, 건축 그리고 도시


얼마전 이태리 작가인 쥬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작품을 접했습니다.
건축가, 무대설치가, 엔지니어 등의 일도 겸직했던 그는,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뛰어넘는 기교와 사람살이의 모습을 독특한 관점으로 꿰뚫어 보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가장 주목했던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종 야채가 담긴 그릇의 정물화를 그린것 같지만, 거꾸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지없는 사람얼굴의 또다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또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작가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윗그림은 한 젊은이의 못습인데 비해, 그 그림을 거꾸로 놓으면, 아래와 같이 나이든 노인의 모습니다.


이러한 맥락의 풍자는 또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그림이지만, 웃는 모습과 찡그린 모습을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앞서의 그림들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눈매의 모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도시의 건축에도 적용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폴란드의 거꾸로 하우스입니다.



지붕. 아니 바닥(?)에서 음악연주회를 하는 모습입니다.

일본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파주에 있는 유비파크입니다.



거꾸로 세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그림들과 집(House)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단순한 흥미만의 의미는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지도를 이렇게 돌려서 보면 어떨까요.
바다가 중심이 되나요?




마산 위성사진도 돌려놓고, 도시가 아니라 바다를 중심에 놓아보겠습니다.
마산만을 중심에 두고 마산시내와 두산중공업 등 공업지대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보니 "마산만이 살아야 마산이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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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 21. 13:00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청주는 일제강점기때 지금의 양주못지 않은 고급술로서 주당들의 사랑을 받았던 술이다. 최근들어 젊은층에서 일본수입산 청주, 본토말로 사케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마산이 청주 생산의 원조도시로서의 아픈(?)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시기에 마산은 청주주조장의 집산지에 해당되었다. 마산에 존재했던 청주공장들을 찾아서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료의 한계로 내용상 명료하지 않은 부문과 오역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혹 관련자에 대한 제보를 주시면 내용을 보완해 정리할 계획이다. 블로거님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일제 강점기의 주세령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장 먼저 실시하였던 일이 토지조사와 주류조사였는데. 그 이유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이전 까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집에 한 집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며, 조선조에는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 집에서 다양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문화가 그 특징이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세령이 강제집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통주는 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전통주류는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양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체가 정비되면서 자가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한 반면 일본의 청주는 마산에 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부터 청주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세법에 의해 가양주의 전통을 전면 금지한 반면 일인들에 의한 청주공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마산을 청주의 도시로 변경시켰다.

청주의 도시 마산
마산에서 청주산업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면 1924년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마산의 공장통계에서 보면 주조공장이 6개, 장유양조장 1개, 정미소 2개, 제면소 1개, 철공소 2개로 나타나 있다. 개항이후 약 10년에 걸쳐 제법 규모 있는 공장을 분류하였을 때 청주 주조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조계지를 설정한 구역 내에 제일먼저 조계지 끝 지점에 해당하는 일성펌프자리에 아즈마 주조장(1905)을 시작으로 하여 원마산까지 청주주주장을 만들었다.이후 설립된 공장은 1920년대에 13개의 공장에서 4천 400석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1928년에는 12개 공장에서 1만 1천석을 생산하여 조선의 지역별 청주생산실적에서 부산업계를 제치고 제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변천과정
1900년도에 설립된 청주주조장은(상공회의소 100년사, 마산시사 1996 참조) 최초의 주조장은 신마산 일성펌프자리에 1904년에 설립한 아즈마(東) 酒造場이 있으며, 원마산 서성동에서 1905년에 설립된 이사바시(石橋) 주조장, 장군동에 06년에 설립된 五反田 酒造場,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永武 주조장, 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08년 상남동의 岡田 주조장, 지시마엔(千島園) 酒造場은 장군동에 09년에 설립되었다.
이미 1900년대에 7개의 청주주조장이 신마산, 중앙마산, 원마산 등지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설립연도가 중복되는 공장이 2개 있는데 이시바시 주조장과 지시마엔 주조장은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과 1925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우 년대가 앞선 자료를 기원으로 보아서 정리하였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석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가뭄으로 인한 쌀 수확의 흉작으로 사용량을 제한하여 당초량 보다 20% 즐인 1만 7천 여석만을 제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통제령에 의해 생산량을 제한받아 생산품도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지정하여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동란기에 불하를 받은  공장들은 12개의 공장들은 운영부실로 60년대 초반에는 7개의 주조장만 남아 생산을 하다가, 다시 5개의 공장이 없어지고, 3개의 공장이 생겨나서 5개의 공장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 지방의 중소주류업체 통합법에 의해 백광청주만 홍문동에 남아 있다가. 70년대 후반에 하나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역사

1. 아즈마(東)주조장(1904) - 하라다(原田)주조장(1923) - 동화주조(정기운)(1946-60? )
 마산에서 최초로 생긴 청주주조장이며 마산의 4대 양조장의 하나이다. 개항기인 1904년 마산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던 아즈마(東) 양조장을 1923년 하라다(原田淸一)가 매수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연간 양조량은 1천석 내외이고 상호는 명주「한목단」(寒牧丹, 간보단)이었다. 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1,000석 내외였다. 월남동 5가 1번지에 위치하며 해방이후 구.일성펌프(46.7.1, 최성주)공장이 일부 설립되었으며, 하라다 주조장은 미군정청에 접수된 이후 정기운이 불하를 받아서 동화주조라는 상호로 청주를 생산하였다. 이후 1955년 공장명부에 등재되어 있었으며, 1961년 상공회의소의 공장명부에 없는 점으로 보아, 50년대 후반쯤에 청주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조장 부지는 일성펌프 공장과 유남상가로 지속되다가 2000년에 신축건물 일성프라자가 공장부지에 들어섰으나, 얼마 후 소유권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현재 상가도 폐가처럼 비어있다. 특이 이 땅은 개항초기에 마산 최초의 러시아 호텔이 있었던 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로 유명세를 가진 땅인데, 땅도 주인을 잘만나야지, 옛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최초의 청주 아즈마(東)주조장의 현재의 모습)

 2. 이시바시(石橋) 酒造場 (1905.10)- 대흥주조(문삼찬) (1946-60년대?)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2천엔으로 1905년 10월 서성동 16번지에서 석교시태랑(石橋市太郞)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 이시바시(石橋市太郞)가 설립하여 1926년 아들에게 계승된 이후 마산부 幸町(현 서성동)에 공장을 신축해서 연간 500석 가량의 청주를 생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상표「大典正宗, 다이덴 마사무라」이었다.
해방이후 이시바시(石橋)주조는 문삼찬이 불하를 받아 상호를 대흥주조로 바꾸었다. 당시 직원은 6명이 소규모 공장이였으며, 1970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6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상호를 芙蓉으로 사용)

*우리가 흔히 정종이라하는 것은 일본의 청주 상호중에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유명한 청주가 많아서 고유명사화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은 올바른 표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호 예 : 대전정종, 학정종 등)
(현재의 위치는 서성동 덕천상가아파트 필지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시 공장의 위치는 덕천상가아파트에 포함됨)

                                                                 
3. 고단다(오반전/
五反田) 酒造場 (1906.10)
장군동에 06년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청주주조장으로 마산야화에 의하면 사입(仕入)에 부주의한 탓으로 파산하였다고 함. 파산시기는 해방이후 귀속주류업체 현황(1953)에 없으므로 해방 전후 시기로 판단된다.
(위치는 마산야화에 의하면 96년에 관광센터가 있던 '푸른집'자리라고 한다.)

3. 엔무(영무/永武) 주조장(1906.11)
신마산 조계지내 청계동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주조장으로 인접한 부지에 적문장유양조장(1906)이 있었다. 당시 생산한 정종은 학정종(鶴正宗)이었다. 마산야화에 의하면 종전(52년) 당시까지 정종을 생산하였다고 하였으며, 1953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지번은 없지만 청계동이 몇필지 않되는 적은 동임을 감안하여 추정할 때, 공장의 위치는 현재 문화동 주민센터이거나 인접 주택필지로 보인다.

4.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7)- 삼성주조(신봉희)(1946) - 백광주조(이우현/이성훈)(60-79?)
마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하나이다. 창업주 일본인 니시다(西田木摠市)에 의해 자본금 2만엔으로 1907년 11월 설립되어 마산부 영정(榮町: 현 홍문동9)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양조량은 1926년에 600석에 불과했으나 3년후인 1929년에는 2배가 넘는 1천300석의 실적을 올렸다. 생산한 청주상표는 「鷄林」(계림, 게이링)이였다. 해방이후 신봉희가 불하를 받아서 삼성주조로 상호를 바꾸어 청주를 생산하였다. 종전(1952년)까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1961년 쥬류제조업체 현황에 의하면 동일 위치에 백광주조장으로 상호가 변경되어 백광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때 대표자는 이우현이었으나 1973년 주류업체의 통폐합에 따라 73년 10월 18일 백광주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으며, 대표도 이성훈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직원이 33명이었다. 한편 인접한 지역 홍문동 6번지 상의 염록주조장 인수하여 동시에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백광양조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하나만 남아 있다가 연생산량이 3,500kl 내외에 지나지 않아서 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산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청주를 생산한 마산 최후의 공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공장건물은 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서 롤러스케이트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다가. 90년대(?)에 신동아 빌라 공동주택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조장의 조감도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전경,중앙상단이 서전주조장, 하단의 공장은 녹수주조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주장은 현재 신동아빌라가 들어서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백광청주 상표)

5. 강전(岡田) 주조장 (1908.9 - ?)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나타나는 공장이다. 상남동에서 자본금 1만2천엔으로 설립된 기록만 남아있으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해방 이전 양조장이 폐업했거나 용도변경(탁주, 소주, 장유)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위치확인은 불가능하다.

6.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1909.10) - 삼광주조장(손삼권)(1946-73)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5천엔으로 1909년 10월 마산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서 엔도우(遠騰豊吉)에 의해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25년 창립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생산한 청주는 명주 「彌生」(미생, 야요이)의 상표로 연간 500석 정도를 생산 판매했다.

해방이후 지시마엔(千島園)주조는 손삼권씨가 불하를 받아서 그대로 천도원주조로 했다가 뒤에 삼광주조로 변경하였다. 이후 손삼권씨는 인접필지에서 염국모가 운영하는 칠성주조장을 인수하여 삼강주조로 변경하고 2개 공장 삼광, 삼강을 동시에 운영하다가. 19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엽체 통합조치에 의해 폐업하였다. 다행히 공장건물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창고 및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공장의 규모는 삼강주조장이 더 컸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주조장의 60년대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삼광청주 상표)

7. 이데(井手) 주조장(1911.10) - 칠성주조장(염국모) - 삼강주조장(손삼권)(1946-197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강주조장의 현재모습, 삼광주조장과 같이 운영되었다.)

 1911년 10월 井手倬次郞에 의해 창업, 마산부 개정(신흥동)에서 연간 500석 정도의 청주 ‘總督’을 생산.1930년부터 상표를 朝乃灘(조내탄, 아사노나다)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이데(井手)주조는 칠성주조(염국모)로 바뀌어 청주생산을 계속하였으나 1961년 이후 인접필지에 있는 삼광청주의 권삼문에 의해 상호를 삼강으로 바꾸어 유지되다가 73년 폐업된다. 공장건물의 외부원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칠성/삼강주조장과 현재의 후면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생산된 삼광청주, 삼강청주)


8. 미요시(三好) 주조장(1913) - 삼일주조장(이우식-정명갑-문병대)
(1952-196?)
마산부 부정(富町: 현 부림동 103)에서 미요시(三好彌三郞)가 1913년에 설립했다. 연간 생산량은 400석 내외이고 상표는 松乃色. 해방이후 - 미요시(三好)주조는 휴전 이후에 삼일주조(이우식)이후 정명갑으로 바뀜 (三一주조장/ 鄭明甲/ 부림동103/ 7), 당시 생산한 청주의 상호는 觀海였으며, 1961년 이후 폐업되었으며, 위치는 부림시장 아래편쪽에 1969년 설립된 백광소주(문삼찬)과 인접한 공장이었다. 지금은 위치는 부림동 구.화남상사건물이 있던 위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일주조장의 50년대 모습)



9. 히라이(平井) 주조장(1914.4) - 조해주조(서준보)(1946-196?)
1914년 4월 히라이 (平井政太郞)에 의해 창업되었다.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공장을 갖고 명주「취향」(醉香, 스위꼬)을 생산했다. 연간 양조능력 2천석의 대형 양조장이었다.
해방이후 히라이주조는 조해(朝海)주주식회사로 서준보에 의해 불하되어 운영되었다. 위치는 중앙동 2가6번지로 그 터에 현재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1961년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마산역옆의 조해주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의 모습, 마산역은 아파트로 변하였고--)

           
10. 합자회사 시미즈(淸水)
(1927.6) - 대동주조(이병진)(1946-60) - 무학주조(최위승)(1973-84)
마산에서 제일 큰 규모의 양조장이었다. 1921년 시미즈(淸水篤行)에 의해 창업되어 1927년 6월 사원공동 출자15만엔(円)의 법인체로 바꾸었다. 시내 야나기마찌(柳町:신창동13)에 자리한 이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1만 3천500석 1928년에는 당시의 마산의 양조업계 총생산량인 1만석의 25%에 해당하는 2천500석을 생산했다. 이 회사 생산품인 청주 「대정앵」(大正櫻, 다이쇼 사꾸라)과 <井筒平>은 만주와 중국대륙에까지 판매했다.

해방이후 시미즈 :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해방이후 대동주조(대표 이병진)로 명의가 변경되었다. 당시 대표 이병진은 중앙동에 마산주조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온다. 마산주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공장을 가동하였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 진주 가도변으로 판단되며, 현재 위치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주조도 같은 기간 동안 생산을 하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후 1973년에 무학주조가 경남지역 36개 소주회사를 통폐합하여 본 대동주조공장으로 이전하여 무학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1984년 무학이 봉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무학빌라 공동주택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미즈(淸水)주조장의 흔적은 인접한 창원천의 다리이름 청수교(淸水橋)에서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장, 대동주조장, 무학주조로 변경된 공장의 과거와 현재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에 인접한 청수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주조, 1945-60, 이병진)


11. 하마다(濱田) 주조장 (1923) - 옥포주조(이태익)(1946-60)
마산부 신정(新町 : 현 추산동)에서 하마다(濱田慶治)가 1923년에 설립, 연간 양조량은 500석이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청주 金盃濱鶴
(금배빈학, 긴빠이 하마쯔루)의 명성은 꽤 높았다.
해방이후
하마다(濱田)주조는 옥포주조(이태익)로가 인수
1961년 당시 공장등록대장에 없으므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는 중앙극장 우측 내림길에 있다고 전하며, 현재 지번이 없어 찾을길이 없다.
 
    
12. 무라자끼(村崎)주조장(1925) - 염록주조(김상현)(1946-60)
1925년 당시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있던 다무라(田村) 주조장을 무라자끼 (村崎仁三郞)가 인수하여 영정(營町: 현 홍문동6)에 새 공장을 세워 이전했다. 옛 상표 摠富士였는데 새로「艶綠」(염녹, 쯔야미도리)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무라자기(村崎)주조는 엽록주조(김상현)로 되었다. 인접한 홍문동 9번지에 백광주조장을 가동하던 이우현에게 인계하여 두 공장에서 백광청주를 1970년대 후반까지 생산하였다. (염록은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주조장의 현재모습)

00 녹수(錄水)주조장/ 李雨鉉/ 홍문동3/ 8-(1950?-1965)
녹수주조장은 53년 공장등록명부에는 없으며, 61년 주류업체 현황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5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장위치는 홍문동 3번지로 백광주조장과 인접한 위치에 있다. 이후 1965. 11. 10에 청주공장은 최계정에 의해 백광장유양조장으로 전업하여 영업(마산 홍문동 3-4, 최계정)을 개시하여 간장, 된장, 식초를 생산하였다. 당시 직원은5명이었다. 이후에 공장부지에 배진아파트가 들어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녹수주조, 백광양조 공장터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3. 마쯔모도(松本) 주조장 (일제말기 -1945) - 금포주조?(김행도)(1950?-1960)
마산에서는 가장 늦게 생긴 양조장이다. 일제말기 마쯔모도(松本通)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 새 공장을 세우고 명주 月乃浦를 생산했다. 이외 특별한 기록이 없으며, 해방이후 쯔기노우라(月浦)주조가 김행도에게 불하되어 금포주조로 바뀌었다. 둘 다 장군동인 점을 감안하며, 월내포가 월포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허나, 금포주조 역시 5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61년 주류업체현황에 보이지 않는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으로 추정한다.

00 이 외에 나타나는 주조장은 중앙동에 동성주조(주)가 이만희에 의해 해방이후 설립되어 60년도 이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14. 야마무라(山邑)주조 마산공장- 동양주정(1952)-무학주정 -유원산업 창업(동양주정과 합병, 1960)
일본에 본사를 두고 청주 櫻正吉」(앵정길, 사꾸라 마샤요시)을 생산하는 야마무라(山邑)주조 주식회사가 1929년 4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월남동)에 마산공장을 세워 만주와 중국에 수출할 청주를 생산했다. 해방이후 야마무라(山邑)주조는 무학주정으로 개칭하며 주정과 소주를 생산하였으며, 65년이후 주정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15. 쇼와(昭和) 주류공업사
일본 야마무라(山邑) 주조의 계열사로 1929년 4월 10일 자본금 50만엔(円)으로 설립된 종합주류회사이다. 1929년 9월부터 본정(本町 :현 월남동) 해안 매립지에 신축한 공장에서 주류생산을 시작했다.
창업 초기에는 년간 청주 1천석정도 생산했으나 1935년부터 청주는 야마무라주조에 넘기고 기타주류(소주, 미린주, 포도주,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하였다. 이외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였다. 해방이후 유원산업으로 변경, 1952년부터는 증류주만을 생산하였으나 이후 1965년부터 희석식 소주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해방 직후 주조장 현황
시내 13개 청주양조공장들도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에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 청주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새로이 출발한 청주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청주의 원료인 쌀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청주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 되었다.
6·25사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던 마산의 청주업계는 휴전이 되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이 결과 업자들은 서로 합의하여 서울지역에의 진출을 위해 서울지역 출고분에 한해서
銘花라는 한가지 상표로 공동 판매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업자 서로간의 이해에 얽힌 불신과 갈등으로 공판제 실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업자들의 과잉 경쟁으로 덤핑판매가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低質酒가 나돌아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경영적자가 누적되면서 문을 닫는 업체도 생겨 1961년 겨우 7개 양조장이 조업하고 있었다.

60년대 이후 현황
1971년 마산의 청주생산량은 청주86만2,100L 이고, 합성청주는 17만1,790L였다. 69년의 생산량 청주 125만2천L, 합성청주33만 1,560L에 비하면 크게 감량된 것이었다. 그 후 1974년 생산량은 더욱 감소되어 청주 71만6,470L, 합성청주 29만4,789L를 생산했는데 70년대 하반기에는 더욱 줄어들어 마산 청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설립된 청주주조장
1. 寒牡円/한목단 양조장 : 하리다 주조장의 상호를 사용(최태수, 산호동 17-3, 62. 11. 28) : 원조격에 해당하는 하라다주조의 '한목단'상호명을 패러디하여 설립되었으나 73년에 통폐합되어 없어졌다.
2. 신광양조장 (최동렬, 산호동 128, 65. 12. 13)
3. 성광주조장 (손정길, 신포동 2, 69. 1. 3)
상기 3개의 공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백광청주에 의해 통폐합되어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광청주 역시 70년대 후반에 세태의 기호변화에 의해 공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외 알아내지 못한 청주공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쉬운 것은 생산하였던 청주들의 상표 및 상호라도 수집되어 정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혹시 이러한 자료를 가진분이 계시면 협조 보완하여 잘 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로서 마산의 청주생산은 1904년 시작하여 1979년(?)까지 75년간 세월의 영욕 속에 사라졌다.
그나마 장군동과 신흥동에 인접해 있는 삼광청주, 삼강청주 2개의 공장은 원형이 점차 삭아져 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의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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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유림 2010.01.22 11:39 address edit & del reply

    와....
    논문같아요..멋집니다.
    이런 자료들 다 어디서 찾아요 ㅎㅎ
    사진속 건물들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은 정말 신기합니다.
    더 삭아지기전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좋겠구만..
    잘 보고 갑니다 신선생님 ^^

  2. 옥가실 2010.01.22 17:23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했습니다.
    거의 다 찾아낸 셈이네요.
    마산의 술만 연구해도 박사논문은 거뜬하겠는걸요..^^

  3. 삼식 2010.01.22 20:27 address edit & del reply

    불확실한 부분이 아직 많은것 같읍니다.
    지역 어른들의 협조를 받아서
    어찌 해볼까 합니다.
    술을 좋아한 죄로
    시간나는 대로 자료를 보완할 계획입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4. 감사 2013.10.09 19:05 address edit & del reply

    저희 할아버님 이름이 보이는군요 잘보았습니다

    • 허정도 2013.10.09 21:01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조부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2010. 1. 12. 07:30

잊혀진 마산의 소주공장을 찾아서(1)


주도마산 (酒都馬山)
마산은 술의 도시, 주도 마산으로 왕년에 유명한 도시였다.
대략 연세가 50을 넘긴 어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마산은 개항이후 전국 생산량 1위를 차지한 청주주조장들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서 청주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게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 탐방시 의문을 남긴 여러 건물들을 찾아서 과거 술공장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고자 한다.
순서는 소주, 청주 그리고 막걸리, 맥주 순서로 소개할 계획이다.

일제 강점기의 소주공장
최초의 청주공장이 1904년에 세워진 이후, 일제는 근대식설비를 동원한 대규모 소주공장을 1929년 9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창포동 1가 20번지, 현재 창포 한백아파트 위치) 해안 매립지에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소화(小和)주류에 의해 시작되었다.

소화주류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두고있는 야마무라(山邑)주조의 계열사 형태로 지어졌으며, 인근부지(창포동 1가 1번지, 현재 창포동성아파트 위치)에 소주공장과 거의 동시에 지어졌다. 야마무라 주조는 청주 櫻正宗(앵정종, 사꾸라 마사무네)을 생산하여 만주와 중국에 수출용 청주를 생산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소화주류는 창업 초기의 소주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청주, 미린주, 포도주 및 기타 위스키와 브랜드 등을 생산한 종합주류회사 형태였으며, 규모가 상당히 큰 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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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창포동성아파트자리가 야마무라주조, 우측 창포한백자리가 소화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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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전경: 해안가에 큰 굴뚝이 있는 건물과 뒤편에 낮은 굴뚝이 있는 공장 전경)

 당시의 생산량은 청주 1천석, 소주 1만석, 미린주 150석, 포도주 30석,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키로 했다. 1935년 야마무라(山邑) 주조계에서 독립하여 자본금을 150만엔(円)으로 증자했다.
새로이 발족한 이 회사는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고, 청주 양조는 야마무라(山邑) 마산공장에 넘겨 주었다. 당시 사장은 마쯔무라 (松村茂三郞)라는 일본인이었다.

이후에 설립된 소주공장은 1937년 1월 1일 중앙동3가 2-4번지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로 소주를 전문적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산근재길(山根才吉)이라는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장이다.
이 공장은 소화주류에 비해 소규모 공장이였다.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은 해방이후 탁응조(卓應朝)가 불하를 받아서, (합)마산중앙소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60년대에 문을 닫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청주 및 소주공장은 한국인들에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재래식으로 생산하는 막걸리 공장만 허용해 주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세원확보를 위해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하여 면허를 발급하였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매우 영세했다.
일제 강점시기의 마산의 소주공장은 거의 소화주류에 의한 일사 독점체제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소주공장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들은 미군정청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만 바꿔서 기존을 시설을 이용하여 가동하였다.

새로이 출발한 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되었다.

한편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의 불하에 의해 탄생된 소화주류와 야마무라 주조 외에도 1951년 강남소주(장군동 5가7, 대표 김행윤)가 장군동에서, 1961년 마산양조공업사(장군동 5가1-3,대표 남병주)에서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하였다.
1961년에 有元, 舞鶴, 마산, 江南 4개의 소주공장에서 소주를 제조하고 있었으나 소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1970년에는 무학, 강남, 백광 삼천리, 永進등 5개 공장으로 늘어 났다.
후발업체인 백광소주(부림동 104-8,대표 문삼찬)가 1969년에, 삼천리와 영진소주는 구순기에 의해 회원동과 오동동에 설립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림동 백광소주공장 1973년전경(좌측철길 하단 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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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소주공장터 현재모습 (원래의 공장부지는 새길이 나면서 분리됨)


백광소주는 당시 유명했던 백광청주와 동일상호로, 공장과 사장은 다른 동명이사로 백광청주의 유명세를 활용하기 위해 상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천리소주와 영진소주는 구순기가 같이 경영한 공장으로 공장소재지만 달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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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소주, 삼천리 소주공장터의 현재전경(오동동 4거리 아래편)


(이승기 마산영화자료관장의 말에 의하면 오동동에서 삼천리 소주를 취급했다는 얘기로 보아 상호만 달리하고 소주생산은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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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 주조 해방이후 연고자인 한범석이 맡아 있다가 이병각(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형)에게 넘어갔다. 상호도 무학주정으로 개칭하고 소화주류와 경쟁관계에 들어섰다.
이후 1952년에 이병각은
최재형에게 운영권을 인계하고, 서울의 삼강유업을 인수하여 상경하였다.

원래 청주를 생산한 공장이었으나, 한국동란 중 양조 원료인 미곡의 절대적 부족으로 소주를 생산하게 됨에 따라 소화주류와 경쟁구도가 되어 심각한 대립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1960년에 동양주정(소화주류의 상호변경)과 합병을 통해
유원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60년대 초반에는 소주 백매(白梅)
를 생산하였다.
1965년부터 유원산업은 주정회사만 운영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는 속에 마산항 서항지구매립사업이 완공되어 공장앞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공장주변이 주택지 등으로 변모하자 80년대 후반
함안군의 칠서 지방공단에 이전하여 주정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현재 확인해 본 바로는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유원산업은 마산에서 가장 큰 그룹형태의 회사였었다. 유원연료산업에서 유원연탄을 만들기도 하였고, 부산의 대선주조도 인수하고, 경우상호신용금고와 유원개발에서 부곡골프장 건립공사를 하기도 하여 70년대 마산을 주름잡았던 기업인데 지금은 명맥을 찾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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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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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주류 해방과 함께 김종신(4대총선 자유당 국회의원)이 관리를 하였다.

 1949년 김종신은 동양주류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였다. 이후 무학주정과의 경쟁과 경영난 속에 1952년 김상용에게 법인을 넘기면서 상호를 동양주정주식회사로 다시 개칭하였다.
김상용은 당시 대동제모 사장을 역임한 능력있는 경영인이었으나, 이후 경영권이 김봉재(당시 국회의원으로 김상용과는 동서지간), 지달순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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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주류(1929)

1960. 3. 24일 무학과의 출혈경쟁으로 회사형편이 어렵고, 탈세조사를 받던중 무학 최재형에게 공장을 넘기게 되었다. 이후 동양주정의 운영권은 1959년 민주당에서 변절하여 자유당으로 간 국회의원 허윤수에게 정치자금 수수 댓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60년 무학주정에 인수되어 유원산업에 포함되었다가, 1965년. 現 무학그룹 최위승회장이 다시 인수하여 무학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포동 13번지에서 희석식 소주인 「무학」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 1월부터 시행된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소주의 원료 대체가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증류식소주 업체들이 희석식소주로 전환하여 생산하였다.
그 후 필요이상으로 난립상태였던 소주제조장을 국세청은 1973년 7월부터 본격적인 통합작업에 착수하였다.
각도에 1사씩 전국 10개 업체만 존속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학주조는 경남지역 36개회사를 통폐합,
무학주조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신창동으로 이전하였다. 

신창동 무학주조 공장은 원래 일본인이 경영한 淸水라는 청주공장이 있던 자리인데 해방과 함께 대동주조로 상호를 변경한 뒤, 73년 무학이 경남소주공장을 독점하면서 무학주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무학공장이 봉암동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공장부지는 무학아파트가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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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신창동 무학주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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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봉암동 이전후 현재 무학빌라가 들어서 있다.)

뿐만 아니라 창포동부지와 신포동의 공장부지에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소주공장과 아파트,
대체로 공장이 이전한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도심내 주거지부족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 별 개념없이 지나쳐 온 것 같다

우리는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하게 지나쳐 왔다.
가급적 보존하는것이 우선이지만, 차선으로 기록이라도 제대로 남겨야 할 것이다. 한일함섬이 있던 자리도 기록관하나 없이 깡그리 아파트만 지어서, 후회막급하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지역에서 기록에 남길만한 공공시설이나 중요 산업시설에는
반드시 기록표지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땅은, 어느 시기에, 어떠한 용도로, 어떤 사람들이 사용 했노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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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생산한 무학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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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무학소주 상표


※ 참고자료 :
- 마산시사 (1996),
- 마산개항 100년사,
- 마산 상공회의소 100년사
- 마산야화 (김형윤),
- 학초 최재형 평전 (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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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삼호 2009.12.14 17: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소주는 지금 소주와 비교가 않되죠,
    엄청 독해서 턱 부르르 돌아갈 지경이였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회상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군요
    요즘 순한소주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 하구요!
    됫병을 놔두고 잔술을 구멍가게에서 사 드시던 어른들 생각이 나는군요!

  2. 이진규 2010.01.12 12:21 address edit & del reply

    물좋은 마산의 술 역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저 술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한 잔 하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 삼식 2010.01.12 12:57 address edit & del

      술을 통해 옛추억들이 떠올라
      그런 추억을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겠죠

    • 이진규 2010.01.14 10:12 address edit & del

      삼식님은 뉘신지요? 혹시 신삼호 선배님 이셔요?

  3. w저팔계 2010.01.12 13:51 address edit & del reply

    저 정도는 하루에 한 2-3병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지금은 아니지만, 마산의 술 거리를 재현하여 상품화 시키는것도 좋을것 같은데요, 일본의 탄광촌이나, 맥주공장거리,여관촌 등 옛것을 재현시킨 상품들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는 것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 삼식 2010.01.12 17:34 address edit & del

      한창때 얘기겠죠,
      지역사의 산업분야에서라도 잘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읍니다.

  4. 옥가실 2010.01.13 10:16 address edit & del reply

    예전부터 궁금하던 부분이었는데,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허정도 2010.01.13 11:03 address edit & del

      삼식 씨가 고생했네요.
      평소에 술 좋아하더니만 결국 술에 대한 연구를,,,,

  5. 백은석 2010.01.13 11:57 address edit & del reply

    잘보고갑니다

  6. 허태윤 2010.01.14 15:26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추억에못살든시절이생각이남니다,,

  7. 삼식 2010.01.15 17:32 address edit & del reply

    닉네임이 촌스럽죠

2009. 11. 26. 07:30

마산 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 장군동 주조장의 정체 ?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청주 공장전경 (출처 : 마산시청 포토자료실/역사)

-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가 1차 탐방시 장군동 양조장의 실체를 몰라서 답답해 하다가,  유대장님이 저에게 조사를 한번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듣고 그냥 지나쳤었다.
그후 마산 역사사진을 정리하다가 혹시나 해서,
대조해보니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굴뚝과 건물의 지붕선을 보면 정확히 동일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빙고',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위 사진에서 모서리 가로수를 지우면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본 사진이 된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유장근대장 촬영 (09.10.24)


- 이건물은 1925년에 청주양조면허를 얻어 마산부 통정(장군동)에서 창립한 千島園 주조장으로, 창업주는 遠勝豊吉, 명주 彌生의 생산량은 연간 500석 내외였다고 한다.
(마산상공회의소 100년사)

- 천도원 주조장은 옛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삼광청주로 바뀌었으며,  해방이후 적산 청주공장들은 연고자들에게 불하하였는데, 손삼권씨가 인수하여 운영하였었다.
삼광 청주는1962년 기존 업체들이 문을 닫아 삼광과 백광 2개 양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을 생산하였던 양조장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청주 상호 (사진출처 : 마산문화원 전시사진)


- 1971년도에 청주 제조업체는 백광, 신광, 삼광 등을 비롯한 5개의 양조장이 향토 명산의 청주를 제조하였으나,
1973년 정부의 군소 주조업체의 통합조치 이후 삼광주조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백광 양조장 하나만 생산을 계속 하다가 이마저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게 되어 酒都馬山의 명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99년 경남신문에 인터뷰한 손삼권씨는 45년 10월 지시마엔 양조장을 당시 일본인 사장이던 엔도(遠藤豊吉)로부터 인수, 합포구 장군동 3-13번지 공장에서 삼강(三江)양조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공장 이름을 그대로 쓰고 술 이름도 「무궁화」로 정했으나 「나라 꽃을 마시면 되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공장은 「三江」(대동강 한강 압록강), 술 이름은 「三光」(해 달 별)으로 바꿨다. 45년 11월부터 청주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광복이후 한국사람으로서는 가장 먼저 청주를 만들었다 한다.



-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자료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45년에 건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공장은 블록조 단층건물로 중앙에 벽돌조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주변의 주택은 2층 목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중정으로 열린 마당과 그 둘레에 2층의 주택들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경남신문 인터뷰 시기인 1999년 에서 경남의 근대문화유산리스트 정리시기인 2004년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 같다. 그래서 목록화리스트에서 건물의 소유는 작고한 손삼권씨 앞으로 되어있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손삼권씨가 해방이후 적산가옥을 인수한 것을 감안할 경우,
1925년 천도원주조장 설립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현재 이건물은 개축되어 다가구 형태의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그나마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이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경남의 근대문화유산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것을,
 이번 도시탐방대를 통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건물은 없어지더라고 기록은 남겨져야 된다.
물론 이 건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 개인의 기억에 남아있기도 하고
어느 신문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지역사에서 이러한 양조 변천사와 근대 건축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소홀히 취급하기 쉬운 미시사 부분의 정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문화시설 인프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


본 건물은 진주가도변에 있는 건물로 주소는 장군동3가 1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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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6 12:57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또 그 당시에 사진을 찍던 이와 최근에 사진을 찍은 이의 생각과 구도가 같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게 누구라고는 말 못하겠구요^^

    한가지,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974년 마산상공회의소 인명록에 보니, 백광(이성훈, 마산시 홍문동 9, 1973.10월 설립, 종업원 33명), 신광(최동연, 마산 산호동 128, 1965.12.13일 설립, 종업원 10))은 있는데, 삼광은 없어요.

  2. 삼식이 2009.11.26 13:32 address edit & del reply

    삼광이 73년에 문들 닫고, 백광만이 남았다가 곧 없어졌다고 합니다.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탐방사진은 우리카페에서 복사를 했는데, 촬영자는 미처 확인을 못했읍니다. 확인후 수정하겠읍니다.)
    가능하면 개항이후 주조장의 위치 및 흔적들을 한번 정리하다보면
    그 실마리가 풀릴것 같습니다.

    • 옥가실 2009.11.26 20:23 address edit & del

      아고고... 괜히 찍사 이야기를 했네. 농담인 것을..^^
      (제가 찍어 올린 것이라우)

  3. 이은진 2009.11.26 13:33 address edit & del reply

    노고에 감사드리고,
    이 사이트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배우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기대합니다.

    • 신삼호 2009.11.26 13:42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장근대장님 명령을 따르다 보니 ㅅㅅ
      이런 내용까지 나오게 되었읍니다.

  4. 허정도 2009.11.26 13:59 address edit & del reply

    어때요?
    이 건물은 원형도 크게훼손된 것 같지 않은데 '마산주류박물관'으로 하는 것이.
    즉석에서 청주 만들어 판매도 하면 수입금도 꽤 짭짤할 것 같은데.

    • 옥가실 2009.11.26 20:20 address edit & del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짭잘 정도를 넘어서야 할 텐데...^^

  5. 유림 2009.11.26 18:17 address edit & del reply

    긴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버린다고만 생각했는데..
    흔적은 어디에도 남게 되는 모양입니다.

    신기합니다.

    • 삼식 2009.11.26 19:11 address edit & del

      그 흔적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이 누군가 해야할 일이겠지요, 도시탐방대를 하는 큰 목적중에 하나이지요!

  6. 노치환 2009.12.01 14:06 address edit & del reply

    회장님,,,
    요사이 지역 특산물로 곡주가 많은 인기를 얻는 것 같은데
    정말 말씀처럼 주류 박물관 너무 괜찮을 듯 합니다...

    • 허정도 2009.12.01 16:19 address edit & del

      반갑네요.
      곡주라니 술 한잔 생각나네.
      언제 함께 한잔합시다.

  7. 최정건 2010.01.13 01:04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님 제가 그 건물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예전에 철도청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 허정도 2010.01.13 11:05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예, 저도 얼핏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09. 10. 9. 11:32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산호동 효자각이 도심 골목속에서 발견되고 난 뒤 관심이 있는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다시 방문 하였다.
비문의 해석과 비각건립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는 경남대 유장근 교수와 팀 블로거 허정도 박사를 통해 앞에서 대략 정리를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판단을  통해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본다.
우선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 양식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았다.

정려(旌閭)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많이 건립된 유교건축물이다.
정려를 받는 절차는 고을의 관청이나 대상자의 직계후손이나 고을 유림들이 중앙의 예조에 정려를 내려주기를 청하면 왕명에 의하여 명정을 받게 된다.
선조때 부터 고종 년간에 가장 많이 건립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에 엄청나게 많은 정려가 건립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신흥부호로 부상한 집안에서 가문 과시용으로 많이 건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려각의 종류
효자각 ;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
효열각 ; 부모에 대한 효행과 부인의 정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

열효각 ; 남편에 대한 부인의 열행과 자식 효행을 기리기위해 건립
효부각 ; 남편에 대한 부인의 정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
충효각 ; 임금에 대한 충절과 부모에 대한 효행을 기리기위해 건립
열녀각 ; 남편에 대한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

산호동 효자각의 건립 시기
1927년으로 확인되었으며, 원래 석전동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1975년에 이전하였다.
이는 장소성이 가지는 가치는 부족하다 하드라도 목구조가 이축이 가능함 점을 감안할 때 구조의 원형은 원래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정려각의 배치 및 형태
아무런 장치 없이 비만 서있는 기본유형과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설치한 유형이 가장 많으며, 특수한 경우 정려 앞에 홍살문이나 일주대문을 설치한 경우가 있다.
산호동 효자각은 일주문을 설치한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며 이는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유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평면은 주로 정면과 측면 1칸인데 반하여 정면 2칸 측면 1칸의 평면 형태이다.

정면을 2칸으로 한 것은 기둥상단에 공포장식을 설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벽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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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4면 모두 홍살(붉은 살대)을 설치하는 경우와 정면만 홍살을 설치하고 주변을 판벽으로 막는 경우가 있는데, 산호동의 경우 4면 모두 판벽과 홍살을 혼합하여 배치한 특수한 형태이다.
그로 인해 비문을 읽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는 판벽 장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판벽과 홍살의 혼합식 벽면)

가구구조와 공포형식

공포는 장식을 최소화한 초익공식 또는 이익공식이며, 더욱 간략화된 민도리 방식도 있다.
기둥 위나 주간에 공포를 설치한 주심포식이나 다심포식 공포형식은 거의 사례를 찾기 힘들다.
공포는 주로 사찰이나 궁궐 등 대규모 건물에 설치하는 양식인데 산호동의 경우는 소규모 건축에 공포를 설치한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

지붕형식과 처마양식
지붕은 주로 용마루를 전후로 경사진 간단한 맞배지붕이 주를 이루고, 우진각 지붕과 팔작지붕으로 된 경우는 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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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비각의 경우 건물처마는 겹처마 보다는 서가래만 있는 홑처마형태가 많이 사용되는데 반하여, 산호동의 경우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설치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경우에 해당된다.
         
                               
                                                                
(선자형 서까래의 얼금단청)


단청

단청은 부재의 양끝에만 머리초문양을 그리는 모로단청이 많으며, 다음으로 기교 없이 가칠로만 마무리한 가칠단청, 그리고 가칠단청에 부재의 단획긋기를 한 긋기단청 순으로 나타났다.
산호동 효자각의 경우
모로단청보다 단계가 높은 얼금단청을 한 화려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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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자수선생효자각: 팔작지붕, 홍살벽면과 홑처마, 가칠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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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호동 효자각: 팔작지붕, 판벽+홍살벽, 주심포+다포식, 겹처마)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전통 목구조 양식이나, 전통적 비각의 규범을 벗어난 예이다. 그리고 유교건축물은 일반적으로 별도의 장식 없이 간결하게 설치하는데 반해, 인방 중간에 설치된 소로의 장식(거북이와 도깨비 얼굴)은 전통양식 규범이 와해되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형태로 보여진다. 
비석 비문의 경우 정밀 감정이 필요한 별도의 부분이라 하드라고, 비각의 경우는 전통 목구조의 구성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존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호동 효자각을 보존하기 위해서
전문가 집단에서 상세한 감정을 통해서 시도 지정문화재로 등록을 하는 방법과 혹 중요도는 부족하다 하드라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 자료로 인정받는 방법을 통해 보존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목구조의 경우 보수시기를 놓치면 원형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72년간의 묵은때를 씻어내고 길이 보존되길 바란다.

● 시·도지정문화재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이하 '시·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지방자치단체(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로서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 4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 유형문화재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

- 무형문화재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

- 기 념 물
패총·고분·성지·궁지·요지·유물포함층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큰 것. 경승지로서 예술상,관람상 가치가 큰 것 및 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를 포함한다),
식물(자생지를 포함한다),광물,동굴로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

- 민속자료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 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기구·가옥 등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

● 문화재자료
시·도지사가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시·도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를 지칭한다.

- 등록 문화재
지정 문화재가 아닌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을 말함.

- 근대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
‘개화기’를 기점으로 하여 ‘해방전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된 것일지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포함될 수 있음.

- 비지정문화재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지칭한다.


● 마산의 지정문화재 및 문화재 자료

- 시도유형문화재
합포성지, 의림사 3층석탑, 진해현 관아 및 객사, 만력34년 진해현 호적, 마산 광산사 목조보살좌상, 법성사 목조보살좌상

- 등록 문화재

구 마산 헌병분견대, 마산 봉암 수원지

- 문화재 자료
관해정, 몽고정, 위암 장지연묘, 경행재, 제말장군묘, 마산 성요셉성당,
마산 법성사 신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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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09.10.09 17:39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연이은 포스팅이 문화재등록으로까지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신삼호 2009.10.09 17:57 address edit & del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2009. 10. 6. 17:12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팀 블로거인 건축사 신삼호 씨의 권유에 따라 추석에 마산 산호동 용마산 기슭에 있는 효자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역사학자 유장근 교수와 지역사에 밝은 박영주 선생이 동행했고 신삼호 건축사도 함께 했습니다.

2009/09/29 - [도시 이야기] - 추석엔 산호공원 옆 효자비 한 번 둘러보세요

자동차에 내리는 순간 우리 일행은 비각 처마를 받치고 있는 공포의 현란함에 놀랐습니다.

이미 신삼호 건축사의 글과 사진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는 감동과 놀라움에 전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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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비각의 건축적 가치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신삼호 건축사에게 맡기고 저는 비각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효자비의 주인공인 그 효자는?-

한문에 능통한 유장근 교수가 읽어 내린 비문과 각기(閣記)에 의하면,
이 효자각은 일제시기였던 1927년에 건립하였으며 두 개의 비석에 새겨진 김해 김씨 선문(善文)과 중여(重呂)는 부자지간으로 현종(재위 1659-1674)기와 숙종(재위 1674-1720)기를 살다간 분이었습니다.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며 완월리(현 완월동)에 묻혔다는 걸로 보아 대대로 마산에서 살았던 분인 것 같았습니다.

선문(善文) 씨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원인을 알기 위해 어머니의 똥을 먹어보기도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어머니를 살려낼 정도로 효심이 극진한 분이었습니다.

비석의 주인공과 비각을 세운 이 사이에는 200여 년의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일제시기에 크게 성공한 어느 집안에서 선조의 덕을 기리면서 가문을 은근히 내세우기 위한 정려각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성행했던 일로, 전국적으로 약 1,500개소 이상 건립되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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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각이라 적힌 비각의 현판>



비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이웃에 사는 통장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보고 비각으로 올라온 통장 아주머니는

“비각을 관리하는 자손이 창원에 살고 있는데 가끔 비각에 찾아온다”
“명함 받아 놓은 것이 있으니 나중에 전화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저녁식사 자리로 이동하던 중,
통장 아주머니가 비각을 관리하는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 왔습니다.
이름이 '김기석'이라고 했으며 나이는 나와 비슷해보였다고 했습니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바로 전화를 했더니 현재 창원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과의 통화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산호동 효자각에 얽힌 내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각은 원래 석전동 삼거리(현 석전사거리)에 있던 큰 은행나무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은행나무와 비각을 자주 본 탓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1975년에 회산다리에서 석전동으로 가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산호동으로 이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축할 때 건물을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조립했는데 해체한 분량이 작은 트럭으로 열대 정도의 분량이었으며, 지붕부분 해체가 안 되어 경주불국사에서 전문가 한 분이 내려와 해체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김기석 씨의 말에 의하면,

비각을 건립한 이는 자신의 조부님들인데 일제기 마산 어시장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번 김두영, 한영, 기영, 준영 네 형제였다고 합니다.

전화통화에서 ‘어시장’과 ‘준영’이란 말이 나오자 함께 앉았던 박영주 씨가

“오래 전에 김준영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이었으며 마산 어시장의 마지막 객주였던 분이다. 혹시 그 분 아닐까?” 라고 했습니다.

확인하고 싶어서 즉각 마산상공회의소 윤종수 부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준영이란 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밤에 이메일로 알려왔습니다.

- 해방 후 마산상공회의소 초대회장 김준영 -

지금의 마산상공회의소는 1900년에 발족한 ‘마산상호회’가 기원입니다.

해방이 되자 마산상공계 유지들은 일본인이 장악 주도하던 경상남도 상공경제회 마산지부를 접수하고, 해방직후인 9월5일 마산상공경제회로 조직 개편을 서둘렀습니다.

마산상공경제회는 김준영, 손성수(전 마산시장), 김종신(마산MBC사장), 이만희 등이 발기하여 10월5일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마산의 상공업자 1,348명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의원57명을 선출한 후 회두(지금의 회장)에 김준영, 부회두에 손성수를 선임하여 발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준영 선생은 마산상공회의소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1946년까지 회장을 지냈으니 사실상 일제 후 우리 자력으로 설립한 마산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인 셈입니다.

거기다가 네 형제 중 둘째인 김한영 선생은 1940년 12월 1일에 17명의 해산물 도매업자들이 자본금 13만 엔을 투자해 합동으로 설립한 마산해산주식회사의 사장이었으며 앞의 김준영 선생이 전무이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 전설적인 무용가 김해랑 -

김기석 씨의 친조부인 맏형 김두영 선생은 어시장에서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다는 것 외에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두영 선생은 바로 본명이 김재우(金在宇)인 마산출신의 전설적인 무용가 김해랑(1915-1969) 선생의 부친이었습니다.

김해랑 선생은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현대무용과 고전무용을 두루 섭렵한 한국근대무용 1세대입니다.

우리나라 신무용 70년사를 뒤적이다 보면 빼놓을 수 없는 분으로, 6.25동란 직후 한국무용 예술인협회(현 한국무용협회 전신)를 창설하여 초대이사장과 회장을 지낸 한국무용계의 대들보였던 분입니다.

마산지역 혹은 전국적으로 그의 예술에 관한 연구발표와 추모공연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년 문예회관에서 열린 김해랑 추모공연 포스터>


그는 일제시기부터 마산에 무용소를 개설해 평생 마산에서 후진양성을 했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마산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던 분입니다.

한 기록을 보니 그에 관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춥고 배고팠던 시절 어려웠던 상황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 이갑선씨 사이에 1남 1녀(기석, 영선)를 두었던 김해랑은 춤을 사랑한 춤꾼이었을 뿐.........’

내가 통화한 분은 여기에 나오는 ‘기석’ 씨였습니다.

추석 지난 다음 날,

한 비각을 통해 밝혀진 마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효자비의 주인공들이 묻힌 완월동 무덤들은 마산고등학교에 편입되었다는 이야기와 선조들이 만날재 아래 월영리(현 월영동)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얼핏얼핏 해주는 김기석 씨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먼 나라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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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6 18:5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09.10.07 08:45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천부인권님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에 대해 존중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비각은 김해랑 선생이 열두살 때 아버지의 형제들이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저런 정려각은 그 시기 전국에 수도 없이 세워진 시대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너무 예민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기석 씨는 1951년 생이며 장애을 가진 분으로 가문의 명예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같습니다.
      제가 더 상세한 정보를 확보해보겠습니다.

  2. 괴나리봇짐 2009.10.07 08:58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관심 하나로 여러 이야기들이 살아나네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관심들이 하나둘 모여 더 큰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면,
    마산의 새로운 명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09.10.07 15:06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우연하게 알게된 마산사람들 이야기라 정리해 본 것입니다.

  3. 2009.10.07 09:50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4. 김재현 2009.10.07 17:07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되살리면 지역문화가 더욱 풍

    성해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 10. 1. 08:50

추석엔 산호공원 옆 효자비 한 번 둘러보세요

골목 효자비에서 발견한 건축적 장식의 화려함

얼마 전 산호공원에 산책 갔다가 내려오면서 우연히 건물 틈 사이로 기와지붕 용마루가 눈에 띄었다. 골목에 면하여 귀퉁이만 조금 보였다.
“도심 속에 웬 한옥이 있지 ?”하고 내려가 보았다.


▲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일주대문

정면에 일주문이 위용을 갖추고 서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솟을대문에 붙혀져 비각이 있는데 그 건축적 디테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내부에 들어가서 비문을 읽어보니 효자비를 보호하기 위한 정려각 임을 알게 되었다. 정려란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를 칭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던 문이나 비로서 이 동네에서 유명한 효자를 기리는 비각이었다.

보통 시골의 마을 어귀에 신도비나 효자, 열녀비가 서있는 경우는 많이 보았는지라, 도심 속에 효자비가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그 건축적인 용모 또한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려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만 있는데 반하여 산호동의 정려각은 앞에 일주대문 추가로 설치함으로써 후손들이 정성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 것 같았다.

건축적 장식의 화려함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먼저 일주문은 기둥이 1열인 대문의 형식으로 폭은 한 칸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공포(기둥 위나 기둥사이에 지붕면을 떠받히는 구조재 역할과 장식을 겸한 부분)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 연꽃 모양의 화려한 공포장식


처마를 내미는 면이 기둥간격 보다 서너배 되는 지붕면을 받치기 위해 방사형으로 4단 내민 구조로 되어있었다. 지붕처마는 원형의 굴도리와 네모난 민도리를 내민 2단 겹처마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내민 부분은 화려한 연꽃모양과 줄기부분을 상세하게 깎아서 단청이 칠해져 있으며 서가래와 처마 밑판에도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이 아주 화려해 보였다.


▲ 공포와 화려한 단청의 서가래 장식


특히 기둥위의 공포사이에 있는 소로(기둥사이 보 중간에 설치되어서 지붕의 중량을 받혀주는 장식재)는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위에 귀여운 도깨비 얼굴로 장식되어 아주 재미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 인방보위에 얹혀진 거북이 등을 탄 도깨비 얼굴


정려각은 정면2칸, 측면 1칸으로 되어있었고 현판/편액은 孝閣이라고 적혀있었다. 내부에는 2개의 비석이 놓여있었다.

▲ 정면2칸 측면1칸의 정려각


▲ 비각 내부의 효자비

내부 두 개의 비석에서 하나는“孝子 金海金公重呂彰積碑”으로 적혀있고, 다른 하나는 “孝子金海金公善文彰積碑”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고 배면에는 상세한 치적내용이 적혀있었다.

공포는 정면과 측면에 세 개씩 설치되어 대문에 비해 훨씬 화려하게 장식되어있었다. 코너부분의 공포형태는 연꽃 문양 상단에는 닭머리 모양의 장식과 대각선 방향으로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조각하여 단청칠이 되어있었다.

▲ 공포상단에 여의주를 물고있는 용과 닭머리 장식


아쉬운 점은 정려각 주변에 담장이 쳐져 있어서 일부러 들어가기 전에는 목조구조의 화려한 장식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하여 관리상의 아쉬움이 남았으며, 비각 뒤편에서는 불을 지핀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자칫하면 화재의 위험도 있을 것 같았다.

▲ 주변의 담장과 무성한 잡초는 효자비 관람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혹시 하는 마음에 해당 동사무소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현재 지방 문화재로 등록되어있지 않아서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문중의 소유라도 문화재로서 보호할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일주대문 앞에 약간의 자투리 공간이 남아있었다. 가능하다면 이 부분을 쌈지공원으로 만들고 담장을 투시형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즐겁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대문 용마루의 훼손된 기와도 보수하고, 비문을 해석하여 정문 앞에 조그만하게 설치 해둔다면 효자비의 원래 목적인 교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효자비의 위치는 용마고등학교 뒤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소는 산호동 530-1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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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09.10.01 09:58 address edit & del reply

    전문가적 시각이 확연히 드러나는 포스팅이네요.
    일일이 전화해서 확인하는 기자정신까지!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쌈지공원도 만들어지고,
    반듯하게 잘 관리된다면 명소가 될 것 같습니다.^^

    • 신삼호 2009.10.01 11:19 address edit & del

      잘 관리만 한다면 좋은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듭니다.

  2. 김주완 2009.10.01 11:48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걸 발굴하셨습니다. 저도 꼭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아차! 이 아까운 글을 비로그인 상태에서 추천하고 말았네요. 나중 집에 가면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 신삼호 2009.10.01 11:53 address edit & del

      잘 가꾸어서 보존되도록 김기자님이 힘좀 쓰십시오

  3. 허정도 2009.10.01 13:17 address edit & del reply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틀리지 않네요.
    앉으나 서나 건축과 도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는 신삼호 씨의 눈에 이 보물 덩어리가 띄었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말입니다.
    재미 있었습니다.
    더 세밀히 조사해봐야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필자 말처럼 문화재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 같네요.

  4. 2009.10.01 17:4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신삼호 2009.10.01 22:48 신고 address edit & del

      현재 비문 내용 해석을 부탁해 놓았읍니다. 내용은 차후에 소개할 예정입니다.
      건축적으로는 규모나 용도에 비해 너무 화려한 장식을 사용한 특이한 유형인 것 같읍니다.
      그리고 정려각의 건물 년령이 최소 1세기는 넘어보입니다. 목구조와 단청의 상태로봐서는요---
      암튼 비문세운 시기와 내용이 확인하면 구체적인 상황이 파악될 것 같읍니다.

  5. 林馬 2009.10.01 21:30 address edit & del reply

    어릴적 시골에서 많이 봐왔던 비석이지만 설명을 곁들어 감상하니
    정말 아름답고 웅장합니다.

    요즘은 이런 건축물 정말 보기드물지요.

    고건축 용어도 새롭고요.
    여기와서 건축관련 공부도 좀 해야겠네요.

    유심히 보지않으면 놓치기쉬운 것을 세삼 그 의미와 함께
    보게되어 새롭습니다.

    즐겁고 풍요로운 한가위 되십시요.

    • 허정도 2009.10.01 22:42 address edit & del

      林馬님 반갑습니다.
      한국 고건축에도 관심이 많으시네요.
      말씀하신대로 상당히 가치 있는 건축물 같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기 바랍니다.

2009. 6. 4. 10:15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고급 수산업기술은 당시에 전파된 것이다.

마산어시장에 멸치가 입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당시 이순란, 김성칠씨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그 그 기원이 된다. 일본상인으로부터 수입된 멸치는 중개상인을 거쳐 대구, 김천 등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남해안에서 생산된 멸치의 대부분은 하관(시모노세키)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다.

해방전까지 일본사람들로 구성된 '히로시마 온망조합'에서 멸치의 9할 이상을 생산하였다 하며 해방  5년후 한국인 최초로 온망어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제의 진정률이었다고 한다. 이후 멸치의 주생산은 통영을 중심으로한 기선권현망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마산의 어업이민
마산의 율구미 해안마을(지금의 가포동 일부)은 일본 지바현 어민들이 집단이주해 와서 살던곳으로, 일본 어민촌을 지바무라(千葉村)라고 불렀다. 1905년 1월 지바현의 수산조합 이사 吉野文吉은 어민 20명에게 보조금 4,000원을 보조금으로 주며 어업이민을 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어민들은 모두 어획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멸치 권현망, 도미 연라망, 수조망어업등에 종사하였다. 현재 가포의 장어구이로 유명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과 그 일대에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안의 죽방렴 사진)

멸치의 일상성.
멸치를 두고 회자되는 얘기들이 많다. 하챤고 짜잔한 대상을 두고 멸치도 생선이냐?는 얘기도 더러한다. 그건 멸치의 실상을 잘모르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구조상, 아가미, 지느러미 심지어 이빨까지 일반생선과 다를바 없이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이다.

멸치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선이다. 각종 국물맛을 내는데 멸치를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김장의 멸치젓갈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가장 만만한 술안주로 마른 멸치와 고추장 그리고 갓 잡은 굵은 알배기는 회 무침으로, 멸치쌈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몸값은 어떤가? 
키로당으로 치자면 일반 생선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보통 키로당 2-3만원 정도이며, 죽방멸치인 경우는 30만원선이라고 한다. 이 만한 가격대의 생선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죽방멸치는 우리들에게 죽을때 잘죽어야 몸값이 제대로 나간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멸치를 만만케 보아서는 않될 듯 싶다.

멸 치     

죽방멸치의 똥은 쓰지 않다고 한다
비늘 한점 떨어지지 않도록

대나무 통발로 몰래 가둬

끓는 솥단지까지 곱게 모셔와

그 숨이 똑,

한번에 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똥이 쓰다는

아랫배 쪽에 흉터가 생긴

일반멸치는

그물에 몸이 걸린 채

온몸으로 苦悶死하므로

비늘도 상하고 속은

썩은 쓴 맛을 우려낸다는 것이다

종이그물에 몸이 얽힌 채

온몸으로 너무 고민한 잘 쓴 시들은

일반멸치의 맛이 난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게 관건이다

여러 번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만 못하여

비늘도 상하고 내장에 쓴 맛이 들어가는

일반멸치가 되는 것이니

시는 아무래도 말짱한 죽방멸치로 태어나야 한다


(정준영)

* 정준영시인은 죽방멸치를 멸치를 비유해서 죽기직전까지 살아있는 작가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정신과 죽방멸치, 멸치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대상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멸치의 어원
한자로는 멸치(蔑致),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 불리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멸치란 이름에 얽힌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인지라 한자어로는 수어(水魚)라 하며, 고유어로는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로 음운변화하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를 합성하여 멸치로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산물 검사법에 의하면 건조품 중 전장 7.7cm 이상을 대(大)멸, 7.6~4.6cm를 중(中)멸, 4.5~3.1cm를 소(小)멸, 3.0~1.6cm를 자(仔)멸, 1.5cm 이하를 세(細)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멸치의 어획방법
멸치를 어획하는 대표적인 어업은 권현망이다. 멸치는 기선권현망, 유자망, 정치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다양한 어업에서 어획되고 있지만 주로 기선권현망어업에 50~60%이상을 어획하고 있다. 이 권현망(權現網)이란 명칭은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의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따온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어살(漁箭)이다.  수심이 별로 깊지 않은 바닷속에 길이 5~10m 가량 되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이처럼 부채꼴로 박은 말뚝을 ‘살(삼각살)’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한 변은 길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 그리고 살 안쪽의 뾰족한 부분에는 참나무 말뚝을 둥그렇게 박은 다음,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서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짝이 매달려 있다. 이 문짝은 밀물 때에는 조류의 힘으로 활짝 열려 있다가 썰물 때에는 축 늘어져서 꽉 닫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불통 안으로 들어온 고기들은 다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죽방렴에는 날씨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가 드는데,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것 보다 곱절이나 높은 값에 팔린다. 그물로 잡은 멸치는 금세 숨이 끊어지는 데다 비늘이 다 벗겨지고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맛이 떨어진다. 반면, 조류를 따라 자연스레 죽방렴 안에 들어온 멸치는 산채로 곧장 삶아서 말리기 때문에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멸치잡이는 멸치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끌어 직접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대개 5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통해 이뤄진다. 본선 2척과 어로장이 탄 어탐선이 같이 항해하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 한척마다 길이 500m가량의 그물을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두척의 배가 그물을 끌면서 걸려든 멸치를 그물자루 끝쪽으로 모으고 한쪽으로 몰린 멸치들은 굵은 호스와 연결된 펌프로 빨려들어가 곧바로 가공.운반선으로 자동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선 2척은 다시 투망준비를 하면서 어탐선이 어군을 발견할 때까지 대기하고 가공.운반선은 펌프를 통해 보내진 살아 펄떡이는 멸치들을 즉석에서 대나무 발에 담은 후 팔팔 끓는 솥에서 3~4분 가량 삶는다. 배위에서 삶아진 멸치들은 곧바로 육상의 건조장까지 운반된 뒤 13~14시간동안 말려진 다음날 바로 시장에 판매된다.

- 이학박사 황선도님 글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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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이 2016.05.09 13:36 address edit & del reply

    지식인에 담아갑니다
    출처는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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