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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06:00

도시문화의 혁명, 빠이올 극장


꾸리찌바 이야기 3 (건축물1)

빠이올 극장


130여 년 전인 1874에 건설된 탄약창 건물을 1971년에 개조하여 만든 아름다운 원형극장이다. 도심 외곽지역에 있었지만 이 연극관의 개조는 시내에 있는 기념물의 보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꾸리찌바 도시문화혁명의 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풍스러운 외형도 눈을 끌었지만 이 건물을 비껴간 듯 계획된 사방의 도로를 보면서 막무가내로 직선을 그어대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케 했다. 마치 마산의 삼각지공원과 같이 도로 속의 섬처럼 생긴 삼각의 잔디 공간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벽의 치장도 없었고 그 흔한 입구 캐노피조차 없었다. 관람을 마친 후 비가 오면 불편하지 않을까 라는 주장이 건물의 원형을 지킨다는 주장에 밀린 것 같다.

건물 관리인은 ‘공연은 3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하면서 부탁도 하기 전에 구경하라면서 실내 등을 켜주었다.



내부의 바닥과 벽도 새로 시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화장실과 복도는 추가로 만든 것이었으나 기존의 질감에 잘 어울렸으며 공간이용이 탁월하였다. 특히 관람석 뒤편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원형 철재 계단이었는데 내 한 몸도 겨우 오늘 수 있는 규모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필요한 통로로서의 기능을 잘하고 있었다.

무료 연주도 자주 있으며 유료일 때는 5리얄(한화 약 2,200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단순한 원형 건물인데 중앙부에 동심원 형태가 치솟아, 이단 원통형인 이 건물의 공간적 특성을 이용해 공연공간으로 개조한 건축적 제약에 따라 무대는 전형적인 아레나(Arena stage, 무대가 객석 속으로 돌출된 형)형이었다. 무대바닥은 원형으로 마루판만 깔려있었다.

객석은 가는 원형 철봉으로 엮은 후 검은 색 가죽을 씌워 만들었으며 좋은 가시선을 확보하기 위해 뒷자리로 갈수록 객석의 각을 심하게 치켜들었다. 공연자와 감상자가 서로 호흡을 느낄만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공간이었다. 중앙에 솟아 있는 원형 지붕의 벽 아치창의 유리에는 색이 칠해져 있어서 어두운 실내로 약하지만 형형한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입구의 작은 로비에는 출연진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안내하는 민군의 말로는 우리나라의 나훈아 패티김 수준의 유명 연예인도 있다고 했다.


얼핏 남루해 보이는 빠이올 극장을 나오면서, 천 석이 넘는 고급 문화회관과 수백 석의 공연시설에만 관심가지는 행정가들과 예술인, 그리고 건축가인 자신의 못남이 부끄러웠다.

건축적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문화는 무엇인지, 진정한 건축가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생각게 했다. 충격이었다.



 오페라 데 아라메 극장

 

                                                            


도시의 대표적인 랜드 마크 중 하나이다. 외국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며 시가 개최하는 대부분의 문화 이벤트가 열린다. 이곳은 원래 폐광지역이었지만 시가 광물회사로부터 저가에 구입해 주변지역을 자연 상태로 복원함과 동시에 오페라 하우스를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했다.


                    

                    

 

자이메레르네르 시장이 직접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230톤의 철강을 이용해 80명의 기능공들이 60일 만에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객석 규모는 약 1,000석이다.

꾸리찌바의 도시행정 철학은 경제성, 신속성, 단순성이다. 아라메 극장은 이런 꾸리찌바 시의 행정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쇠와 유리로만 지은 건물. 채석장으로 황폐해진 숲 속에 지은 건물. 채석으로 깊게 골이 페인 산 형상을 절묘하게 이용해 지은 건물. 경이로웠다. 
 











 

원형 파이프를 직선 혹은 곡선 가공하여 구조재로 사용하였는데 응력에 비해 부재의 사이즈가 모자랄 경우 큰 부재로 무겁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가는 파이프를 여러 가닥 이용함으로 투박함을 없앴다. 숲 속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의 외벽은 얇은 유리 한 장이었다. 숲 속에서 공연을 본다는 느낌을 극대화시킨 것이 설계자의 의도였다.


지붕은 폴리카보네이트(유리처럼 투명한 플라스틱의 얇은 판) 돔으로 되어 있어서 햇빛이 훤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잠시 건축적 의문을 가졌으나 비를 맞지 않는 야외극장이라고 생각하니 의문이 해소되었다.

 

무대의 규모는 적절하게 컸으나 기계장치를 갖춘 것 같지는 않았고 오케스트라 피트는 갖추어져 있었다. 공연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일 터.


외부의 숲과 내부의 극장을 구획하는 유리판은 긴밀성도 없었다. 사계절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고급공연을 안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국내외의 유명 음악인도 공연을 했다고 하며 꾸리찌바 시민들도 즐겨 찾는다고 했다.

건물 옆 절벽의 암벽에는 이곳을 찾은 유명인사들의 방문 기념패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맨 아래층에는 전시관이 있는데 시 홍보관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숲 속의 극장이라면 그저 건물로 접근할 때만 숲을 느끼지, 공연장 내에 들어서면 숲 속의 건물이든, 도시 한복판의 건물이든 동일한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아라메는 진정한 숲 속의 극장이었다. 다만 비를 맞지 않는, 소리가 흩어지지 않는 숲 속의 극장이었다. 숲과 하나가 되는 실내 공간 연출, 정말 그 절묘한 발상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극장 아라메는 그 자체로 좋은 관광지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라 공연도 없었는데 수많은 관광객을 만났다. 이 도시의 주요 관광자원이었다.

값비싼 대리석과 황동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극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성과라 할만하다.





돌아오는 도중 생각에 빠졌다. 만약 이런 시도를 국내에서 했다면, 브리지의 바닥을 뚫어 놓으면 위험해서 되겠느냐, 실내 벽을 유리로 하면 음향이 어떻게 되느냐, 지붕에 빛이 들어오면 여름엔 더워서 못하고 보름밤에는 달빛도 들어올 것인데 어떻게 하느냐, 2층 복도 밑이 트였는데 밑에서 보면 여자 속옷이 훤히 보일 텐데 등등 얼마나 많은 불만과 반대에 부딪쳤을까, 지어지기나 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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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9 10:32

생각이 도시를 바꾼다, 꾸리찌바의 거리와 광장


꾸리찌바 이야기 2 (거리, 광장)

24시간 거리

시침은 24시간 주기로, 분침은 60분 주기로 표식이 구분되어 있는 원형시계 (박용남 선생은 이 시계를 포스트모던 형이라고 했다)가 입구 상단에 높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골조는 노란 색 칠을 한 원형 파이프를 곡 가공하여 세우고 지붕에는 투명한 아크릴을 씌운 우아한 아케이드 형의 몰(Mall)이었다.

1991년 시작된 이 공사는, 원래 시민들이 별로 사용하지 않아 위험스럽기까지 했던 도시지역의 한 길을 반 옥외 공간 형태의 아케이드로 만들고 '24시간 거리'라고 명명했는데 이름처럼 24시간 활용되는 장소다.

                                                                                    
  밤새도록 놀기를 놓아하는 브라질 인에게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길이 120m 폭 12m의 작은 거리인 이 건물은 실내로 햇빛이 투과될 수 있다는 것과 이용자들이 비와 냉기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단순함과 경제성 그리고 신속성이라고 하는 꾸리찌바 시의 행정 철학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

내부는 약국, 선물가게, 은행, 빵집, 꽃집, 미용실, 서점, 기념품, 커피점, 주점, 식당 등의 작은 가게들과 경찰부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상점은 총 34개이다.



내가 갔을 때가 오후 2시 경이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Mall 중앙부 오픈스페이스의 많은 간이 테이블은 낮에는 패스트푸드 테이블로 이용되었지만 밤에는 전부 생맥주 광장으로 변했다.


밤의 분위기는 낮과 달리 매우 동적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간이 공연도 열렸는데 몇 곡을 들었지만 단 한곡, 비틀스의 ‘Let it be’ 외에 내가 아는 노래는 한 곡도 없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젊었으나 이용하는 세대는 남녀노소 편중이 없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과 함께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꾸리찌바 시는 시설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자체와는 달리 가게 주들에게 임대료와 세금만을 부과해 시설의 운영비용을 거두어들인다고 했다.



자유시장 터 오소리오 광장


자이메 레르네르는 ‘부자의 게토(Ghetto)이건 빈민의 게토이건 게토를 가진 도시는 이미 도시가 아니다’고 했다. 이런 지도자를 가진 꾸리찌바 시민이 부럽다.

그의 이런 도시철학은 꾸리찌바의 도시 변화 속에 단지 물리적인 부분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배려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하며 실제로도 그 사례는 많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역시 무주택자가 점점 늘어났으며 그 결과 작은 손수레에다 상품을 싣고 다니며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점상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들 노점상에게 시가 내린 최종 결론은 ‘떠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며 ‘만약 이 도시가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오소리오 광장이 자유시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고민의 결과다.

꾸리찌바 시에 있던 노점상들에게 합법적인 판매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공원이자 광장인 이곳에 주말 혹은 일정 기간 영업을 하도록 해주어 ‘자유시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공원에 나와 있던 한 시민은 ‘주말에만 영업을 하는데 주로 3월부터 시작합니다. 딸기와 꿀, 야채 등 계절 특산물들을 주로 팔지요. 꾸리찌바 시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은데 1월은 계절이 맞지 않아 장이 열지지 않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공원 안에는 많은 수의 나무벤치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지만 내가 찾았을 때는 이미 앉을 자리가 없었다.

눈길을 끈 것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어린이 놀이터와 농구와 미니축구를 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철책으로 영역을 구별해 놓은 이곳에는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으며 우리의 여느 아파트 단지처럼 일부에는 모래밭 위에 놀이기구가 놓여있었다.


미니 축구장에서 꾸리찌바 젊은이들이 하는 풋살(20m×40m 농구장 규모의 실내 축구, Futsal이라는 용어는 스페인어 또는 프르투칼어의 축구를 의미하는 Futbol 또는 Futebol과 실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인 Salon 또는 포르투칼어의 Sala를 합성한 것이다)경기를 볼 수 있었다. 펜스와 네트를 이용해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시설해 놓고 한 팀에 5명씩 출전하는데 브라질 인들이 매우 즐긴다했다. 우리의 동네 축구 같은 것은 주로 풋살로 경기한다면서, 사용하는 공은 축구공보다 조금 적지만 약간 딱딱하다고 했다.

풋살 경기도 월드컵이 개최되는데 여덟 번이나 브라질이 우승했다는 말도 들었다.

과연 축구의 제국 브라질의 청년답게 볼 콘트롤, 슈팅 등 축구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외한인 내 눈에는 우리 프로선수보다 발재간이 더 좋아 보였다.



공원 관리사무소 주변에는 붉고 화려한 꽃들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공원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넓은 공간은 인근 ‘꽃의 거리’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를 자연스럽게 공원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꽃의 거리


1970년께, 개발지상주의에 편승한 분별없는 도로 건설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던 때.

지금은 ‘꽃의 거리’로 불려지면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거리도 조성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많았다. 매상 저하를 우려한 상인들은 시장을 상대로 법률적 행동에 들어갔으며 자동차 클럽의 성난 회원들이 도로 복원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시위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공무원들의 계획에 의해 준비된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이 거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를 차마 방해할 수 없었던 성난 어른들은 어쩔 수 없어 그냥 돌아갔고 거리는 완성되었다. 보행자 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통으로 남아 매주 토요일 오전 10부터 12시까지 거리 미술제가 열리고 있다. 거리가 만들어지고 난 뒤 이 지역은 도시의 중심지역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건물의 상업적 가치도 매우 높아졌다.





 

꾸리찌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널리 알려진 ‘꽃의 거리’는 말 그대로 활기에 넘쳐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표정도 밝았지만 형형색색의 꽃들과 벤치, 길 양 옆으로 형성된 각종 가게와 키 큰 나무들, 여기저기 펼쳐진 노천카페, 거리는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 미술제가 개최되는 길바닥은 단순하며 실용적인 석편이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거리였다.


아이들의 탁아소로 사용된다는 붉은 색의 폐 전차는 사용하지 않는 듯 문이 잠겨있었다. 옆에 섰던 경찰에게 그 용도를 물으니 전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낡아 용도를 폐지하고 관광 상품으로만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 곳은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음’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은 ‘안전지대’에는 노인 몇몇이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며 거리로 밀고 나온 카페의 노천 의자에는 젊은이들이 맥주가 가득 찬 잔을 앞에 놓고 뭔가 큰 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연주, 마임 등 다양한 거리 공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거리를 처음 만들 때, 영업이 안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는 길 양옆의 상인들을 떠 올리며 이곳이 차 다니는 넓은 도로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행자 도로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이 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상념은 이윽고 왜 이런 공간을 우리는 갖지 못할까로 이어졌다.



‘꽃의 거리’는 동쪽으로 오소리오 광장, 북쪽으로 찌라덴치스(Tiradentes, 브라질의 독립운동가)광장과 역사지구, 서쪽으로는 빠라나 연방대학과 시민보행공원으로 이어지는 꾸리찌바의 심장이었다.

 

빠라나 연방대학 앞을 지날 때, 입구 계단에서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동일한 붉은 상의를 걸치고 옷과 얼굴에 온통 진흙 칠을 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다같이 외치고 있었다. 가운데는 교수로 보이는 곱게 늙은 여자도 한 사람 있었다.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것인 줄 알고 물었더니 요즘이 대학 합격자 발표 시기라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 전통적으로 하는 행사라고 설명해 주었다. 브라질의 모든 대학에 이런 전통이 있는데 시내로 나가 행사를 하기도 하고 교내에서 하기도 하는데 내용은 대학마다, 전공마다 다양하다고 했다.



과라나(브라질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만든 음료수를 마시면서 잠간 쉬는 동안, 안내를 맡은 민 군이 ‘꾸리찌바는 자신도 처음 오는 곳이지만 상 파울로에 비해 계층 간이 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이해가 잘 안되어 되묻자 ‘상 파울로 시내 공원에서는 여자 혼자 손가방을 들고 저렇게 다니지 못해요.


나도 길거리에서 손목시계를 채여 본 적이 있거든요. 이곳은 다르네요. 가난해 보이는 사람과 부자로보이는 사람이 모두 편안히 길을 다니잖아요. 같이 잘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 같네요. 상 파울로는 빈부 차가 심하면서 치안이 엉망이라 부자들은 백화점과 고급 레스토랑에만 모여 있고 도심의 공원과 거리에는 잘 나오지 않거든요’ 라고 했다.

이 청년의 말처럼 자이메 레르네르가 꿈꾸었던 ‘계층 간의 통합은 진정 이루어졌을까.



 역사거리


꾸리찌바 도시계획연구소는 도시변화의 계획과정과 그 결과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는 상호 유기적인 인과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 네 가지 변화는 물리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이들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역사거리는 위의 네 가지 발전 단계 중 마지막 단계, 즉 ‘도시의 문화적 혁명’ 결과인데 이는 물리적 변화의 산물이었고 경제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라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꾸리찌바의 도시문화정책은 이 역사 거리를 비롯하여 도시전역에 걸쳐 문화적 가치 및 민족적 다양성을 보존하도록 하는 일련의 사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련의 사업들이란 도심을 재생시키거나 역사적 건물과 문화유산을 보호한다거나 혹은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재활용하거나 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등을 말한다.


거친 숨결로 물을 뿜는 말(馬)이 조각된 아름다운 분수가 광장입구에 자리한 역사거리는 이 도시의 문화정책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는 깨끗하게 잘 간수되고 있었으며 건물들은 한 채 한 채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일요일 오전에는 벼룩시장이 열리지만 내가 갔을 때는 평일이라 벼룩시장 대신 우리의 포장마차와 흡사한 노점상 몇 군데에서 치즈와 햄, 과자, 과일주스 등을 팔고 있었다. 가게를 찾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에 비해 그 연조야 미미하지만 도시의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관리하려는 도시행정 당국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꾸리찌바 시가 '창조된 토지(created surface)'라 명명하여 채택한 도시정책의 결과물인  가리발디 하우스(Garibaldi House)가 광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조된 토지(created surface)'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민간소유의 토지와 건물을 공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소유주에게 다른 개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시가 필요한 것을 취하는 역사유적 확보정책이다.

가리발디 하우스도 꾸리찌바 시에 있는 이탈리아노 클럽(Club Italiano)이 소유하고 있던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이었지만 과거처럼 복원할 경제적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꾸리찌바 시는 이 단체에 다른 인센티브를 주면서 복원한 건물이다.


내가 찾았을 때, 마침 가리발디 하우스 내에는 무슨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지 정장차림을 한 남녀가 많이 모여 왁자지껄했다.


                                                                       


 

역사거리를 약간 비껴 나오자 뽀띠 라자로또(Poty Lazzarotto)의 ‘꾸리찌바와 그 사람들’이란 제목의 벽화가 여행자를 맞아주었다. 원통형 정류장과 식물원, 지혜의 등대, 그리고 ‘신선한 물 프로그램’ 등 꾸리찌바의 다양한 특징들을 형상화한 이 벽화는 약 30센티미터 정방형 타일로 모자이크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현장에서 페인트로 그린 것이 아니라 타일 한 장 한 장을 구워 만든 작품이었다. 아무렇게나 시공된 콘크리트 위에 원색의 상업성 칠만 보아 온 내 눈에는 그 자체로서 경이로웠다.


뽀띠 라자로또(Poty Lazzarotto)는 이 도시가 낳은 유명한 미술가인데 이 벽화 외에도 도시 여러 곳에 꾸리찌바의 풍물과 역사를 소재로 한 그의 벽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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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09:08

지구 반대편, 꿈의 도시를 찾아가다

꾸리찌바 이야기 1 (프롤로그)

‘꿈의 도시’로 알려진 브라질의 꾸리찌바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소개한다.

지구 대척점에 위치한 이 도시를 굳이 경험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박용남선생이 쓴 '꿈의 도시 꾸리찌바'라는 책 때문이었다.  그 책을 통해 우리의 도시가 꿈꾸어야될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경제’라는 명분아래 점점 사정이 나빠지는 이 도시가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 도시를 불과 며칠동안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그 내용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지만, 본 만큼 느낀 만큼만 소개하려 한다.





2002년,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창원에 온 박용남 선생을 직접 만나 꾸리찌바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고, 당시에 내가 칼럼위원으로 있던 경남도민일보에 ‘꾸리찌바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다.

2003년, 박용남 선생은 책의 그림을 흑백에서 칼라로 바꾸고 내용도 보완하여 증보판을 냈다. 이 책을 사서 또 한 번 읽었다. 꾸리찌바에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증보판을 읽고난 이후다.


이 글의 내용 중 객관적인 자료를 설명한 것은 모두 박용남 선생님의 책에서 옮긴 것임을 밝힌다. 글은 내가 경험한 각 시설 별로 정리하였다.



출발

김해공항에서 출발한 여행경로는 인천 - 런던 - 상 파울로 - 꾸리찌바로 이어졌는데 혼자 떠난 길이라 엄청 지루했다. 
런던까지는 대한항공을 이용했지만 런던에서 브라질 살 파울로 까지는 
BA(브리티시 에어라인) 항공으로, 상 파울로에서 꾸리찌바까지는 브라질 VARIC항공을 이용했다.

브라질의 1월은 한 여름이어서 날씨 적응이 쉽지 않았다.


꾸리찌바(Curitiba)

꾸리찌바 시는 상 파울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빠라나 주의 주도이다. 평균 고도 908m의 아열대 지방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총면적이 432㎢(대략 남북 35㎞, 동서 20㎞)로 우리나라의 대전시보다 100㎢ 정도 작지만 이용 가능한 토지는 대전보다 약간 큰 도시다. 인구는 270만 명(광역 도시권 인구)이다.


16세기 중엽 포르투칼 식민주의자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꾸리찌바는 원주민과 비싼 금속을 찾아 상 파울로 주에서 온 개척자들이 탐험을 하는 곳이었다. 그 후 1693년 남부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포르투칼 당국에 의해 소 도읍으로 분류되었다가 1842년 공식적인 시로 승격되었고 시의 인구가 6천여 명에 이르렀던 1853년에 빠라나 주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 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 인들에 이어 1915년부터는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뒤를 이어 레바논과 시리아인들도 들어 와 20세기 중반까지 경제가 호황을 이루었다. 자국인 이주는 1950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현재 시 인구의 약 31%를 차지하고 있다. 1950년 당시 인구는 18만 명이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이었던 1964년부터 1979년까지는 정권의 속성상 해외자본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도시지역에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때 대부분의 브라질 도시들이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자가용 통행을 위해 육교가 건설되는 등 자가용 이용이 조장되는 상황이었다. 꾸리찌바 역시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도심의 사적지까지 훼손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런 도시적 위기상황이 자이메 레르네르의 출현으로 1962년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는 꾸리찌바 도시의 산 증인이자 연출자이다. 한 도시를 보존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을 봉사했던 그의 헌신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은 현대 도시사의 빛나는 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세 번이나 시장을 역임했던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관료제에 물든 기존의 관행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언제나 시민과 함께 하려는 공직자들의 헌신과 꾸리찌바 시민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1998년 6월 8일자에서 꾸리찌바를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도시(Smart Cities)’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흔히 진보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1인당 소득수준이나 소득 분포를 이용하여 우리나라 도시와 비교해 본다면 꾸리찌바는 그다지 내세울만한 도시가 아니다. 게다가 꾸리찌바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처럼 아름다운 해변은 물론이고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꿈과 희망의 도시라는 애칭을 얻으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꾸리찌바에 대한 나의 질문이다.

 




도착

꾸리찌바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낮 12시 경이었으며 호텔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모든 도시경관이 낯설었지만, 한 가지 눈에 익은 광경은 책에서 본 파인 너트였다. 나무의 아래 부분은 몸통만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윗부분에만 가지와 잎이 달린 잘 생긴 나무다.


빠라나 주에 많이 서식하는 그랄라 아줄(Gralha Azul)이라는 까마귀 과의 새가 겨울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여름 내내 땅 속에 이 나무의 씨를 묻고는 정작 필요할 때 자신이 묻었던 위치를 찾지 못해 여기저기서 솟아 자라나는 나무다.

1971년 꾸리찌바 시장에 당선된 자이메 레르네르는 시민들에게 그랄라 아줄과 같이 행동할 것을 제안하며 시 전역에 6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면 시원한 그늘과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서 ‘그늘과 신선한 물’이라는 프로그램에 착수한 바 있다.


숙소는 도심 한 복판의 로얄그랜드 호텔로 정했는데 유명한 ‘24시간 거리’ 는 호텔 바로 옆  길이었으며 ‘꽃의 거리’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장을 푼 뒤 나의 꾸리찌바 도시여행은 바로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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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2 18:51

한일합섬 터에 아파트 대신 공원이 생겼다면?

2006년 11월 어느날.
마산 옛 한일합섬터
에 분양하는 아파트의 청약을 위해 담요는 물론 난로와 텐트까지 준비한 수 천명의 사람들이 밤새 줄을 서 있었다.
이 모습은 저녁 9시뉴스의 메인 소식으로 전파을 타 전국에 소개 되었고, 지역에서도 한참 화젯거리였다.
이러한 현상은 분양가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꾼과 수도권 아파트값 폭등을 지켜보면서 투기심리를 자극받은 지역민이 가세해  빚은 촌극으로, 웃돈이 예상 만큼 되지 않자 당첨자 3명중 1명꼴로 계약을 포기해 청약광풍이 사실상 거품임이 증명되었다. 

한일합섬 부지에 들어설 아파트단지 조감도 (출처:태영건설 홈페이지)



집이 주거의 목적이 아닌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이면서, 우리나라의 주거정책이 의도했건, 안했건 집을 필요로하는 사람에게 공급 되어야하는 삶의 본질과 많이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인해 아파트는 계속 짓지만,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미분양은 넘쳐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현재 마산은 노후한 주거지역 대부분이 재개발, 재건축을 진행하고 있으나, 줄어드는 인구는 고려하지 않은채 예외없이 세대수와 용적율에만 집착하여 공급과잉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렇다면,
국내 섬유산업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여 확장이 제한적인 소도시의 중심에 자리잡은 소중한 터에 굳이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일합섬은 1966년 당시 논밭이었던 양덕동 일대에 국내최초로 아크릴섬유 제조공장을 가동한 이후, 1973년 단일기업으로는 국내최초로 1억불 수출을 달성하였고, 2004년 부지가 매각될때 까지 국내 섬유산업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투영하는 섬유산업의 상징이었다. 
1970년대 섬유산업이 전체 수출액의 30%이상을 차지했음을 감안하면 산업화시대의 상징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산업건축물로서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마산 한일합섬 옛 전경 (출처:마산시청 홈페이지)



물론 부지가 기업이 소유한 사유지이고 (부지를 취득할 당시의 특혜와 수십년간 굴뚝연기를 참으며 살아온 시민을 생각하면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그 회사가 사경을 헤메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건물이 한번 지어지면 최소한 30년을 간다고 봤을때 현실에 급급해 더 큰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 근시안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때늦은 가정이지만, 만일에 한일합섬터에 아파트가 아닌 문화시설과 공원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과거 산업화시대의 상징과 앞으로 다가올 문화시대의 교량역할을 하는 매개공간이 되지 않았을까?
사방을 둘러봐도 마땅히 쉴 곳 없는 쇠락한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산소같은 공간이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만 보던 성공사례라며 각지에서 방문객이 찾아오는 관광자원으로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현실적으로 부지전체가 어렵다면, 무공해산업을 유치하고 공원과 공존하는 형태도 가능할 것이다. 


10여년전 대학 졸업설계를 하면서 한일합섬부지의 일부만이라도 그 땅이 가진 역사성과 장소성을 간직했으면 하는 바램에 기존 유류탱크를 리노베이션해 섬유박물관을 계획한 적이 있었다.
이후 여행을 하거나 책을 통하여 한일합섬과 유사한 사례임에도 시장, 전문가, 기업, 때로는 국가의 수장까지 나서 훌륭한 문화, 관광자원으로 변모시킨 경우가 해외의 사례가 더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경우 수명을 다해 방치된 화력발전소를 외형을 거의 유지한채 현대미술관으로 변모시켜
해마다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영국미술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테이트모던 미술관 (2004년 유럽여행)


비단, 한일합섬 터 뿐만 아니라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역의 근, 현대 유산들을 생각하며 해외의 성공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한다.

계속...

지금은 사라진 마산화력발전소와 구마산역 (출처:마산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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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urbandesign 2009.06.10 12:4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도시의 이전적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되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논의에 그쳐, 현재 주거지로 개발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외국의 경우, 경관에 대한 지침이 굉장히 까다롭게 되어 있으며, 도시기본계획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계획의 틀이 완성되지 않음으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이미 성장위주의 도시개발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2. 달팽이 2009.06.13 00:32 address edit & del reply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아프네요.
    그래요, 정말 그래요.
    사방을 꽉 매운 아파트를 보고난 뒤에 '아차' 해 보아야...
    이미 저지러진 일... 어쩔 수가 없네요.
    두번 다시 이런 오류가 없어야 할텐데...
    참..........

  3. 바람 2009.06.15 09:51 address edit & del reply

    이런 일이 한 두 건이 아니지요, 지난 10여년 동안, 혹은 민선 지방자치 이후에 마산에서 이루어진 도시계획과 관련된 주요한 결정에 대하여 10 ~ 15년이 지난 지금 관점에서, 혹은 막상 도시계획이 실행 된 후에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조사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4. 허정도 2009.06.17 23:17 address edit & del reply

    지금 돌이켜 보아도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멀쩡한 공장용지를 주거지역 상업지역으로 바꿔준 행정당국의 판단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값이 싼 공장용지를 주거지역 상업지역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빨리 공장 그만두고 택지 혹은 상업용지로 개발하여 돈 벌어라'고 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면서도 '산업시설이 없어서 이 도시가 쇠락해 진다'고 되뇌이고 있으니 할말이 없습니다.
    휴~~~

2009.06.09 14:41

건축이 도시에게 내어준 길


palimpsest [pǽlimpsèst] n. ; 거듭 쓴 양피지의 사본.
먼저 쓴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글을 쓴 양피지(羊皮紙)’를 뜻하는 것이다.

도시와 건축에 대해 고민하던 학창시절, 한참이나 골머리를 싸매고 염두에 두었던 단어이다.
장소성과 그 도시의 컨텍스트(Context)와 관련되는, 적어도 나에게는 지표와도 같은 단어였다.

산업화 시대, 386세대 이전의 기성세대에게 도시란 살기위한 기회의 터전으로, 각 개인의 시간의 궤적 그 자체이다.
노후된 주거지나 특정지역을 재개발, 재건축을 통해 싹 밀어버리고 새롭게 만드는데 익숙해진 우리들로선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분명한 주제이다.

예전에 인사동의 쌈지길을 찾은 적이 있다.



인사동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것을 보기위해 종종 찾는 너무나도 대중적인 길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이제껏 도시의 공간을 차지하여 섰던 건축이
이제는 도시에게 길(Promenade, 건축적 산책로)을 내어주기 시작한 건축물이 있었다.



연면적 1299평, 4층 규모의 이 길(?)은 2001년 인사동 터줏대감 격인 금속공예점 ‘아원공방’ 등 12곳의 가게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쌈지(천호균 사장)에서 이 터를 사들여 만든 것으로 현재 전통공예점, 생활용품점 등 72개 점포가 있다.
인사동의 거리풍경을 ‘오름길(ramp)’을 통해 입체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 있어서 12곳의 가게에서 일부 헐린 옛 건물의 목재와 주춧돌, 간판 등을 다시 가져와 인테리어에 이용되었으며,
옛날 인사동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인사동에 새로운 개념의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문화를 살리기도 한 것이지만  옛 길의 공간을 다시 내어준 것이기도 하다. 



입체화된 건물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쌈지길’이라는 분명한 길 이름을 가진 것은 그것이 가지는 거리풍경(Streetscape) 때문이다.
건물 안의 나선형 길은 늘어 서 있는 거리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인 천호균 사장이 처음 제안한 ‘쌈지공예골목’이라는 건물명은 건축가가 제안한 ‘쌈지길’로 개명되었다.
건축가 최문규 씨(가아건축)는 “쌈지길은 인사동의 멋을 담은 골목길을 나선형으로 연결해 쌓아올린 것으로 길과 길이 이어진 ‘수직적 골목길’ 개념의 개성 있는 건물입니다. 작고 정겨운 가게를 천천히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하늘정원이 보이는 옥상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쌈지길’이 이름처럼 건물이기보다는 길의 의미, 즉 사람들이 걸으며 만나고 이야기 하며 느끼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설계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오름길은 ‘건축적 산책로(Promenade)’라 할 수 있는데, 이 각각의 꺾어진 산책로는 내부로 향해 있는 72개의 상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그 가운데 중정을 통해 하나로 융합된다. 명절에는 문화공연이 펼쳐지고 주말에는 입주자 위주로 야외장터가 생긴다.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Community) 공간으로 사회적 교류의 장이 되는 길이 건축에게서 제공받은 것이다.

옛 시절 우리네 동네에서 크고 작은 골목길은 아이들에게는 주된 놀이공간이 되고, 청년들에게 완력기 등을 이용한 운동의 공간, 남자 어른들에게는 장기나 바둑을 두는 여가의 공간이 된다.
동네 아줌마들에게는 길에 선채로 대화를 나누는 커뮤니티공간으로서 인근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더 많이 이용되는 장(場)이었다.


건물에 길의 개념을 관입함으로서 더욱 비중이 큰 공간으로 전이시켰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도시민들에게 공동체적 개방공간(Community Open Space)은 ‘길’이 아닐까 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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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7:00

하천 옆 카페에서 커피 마실날 올까?

지난달 마산의 광려천, 삼호천, 산호천, 교방천, 회원천 등 마산의 대표적인 5개 하천에 대한 생태하천 조성이 정부 사업으로 확정돼 추진중이라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중 교방천 도심하천 생태복원사업은 교방동~오동동까지 2.8킬로미터 구간에 걸쳐 2010년~2014년까지 사업이 진행되며 수질정화습지조성과 식물식재, 생태탐방로 등을 갖추게 되고, 회원천은 하천재해예방사업으로 오동동아케이트 부터 마여중 입구까지 3km 구간에 걸쳐 사업이 진행된다고 하네요.

여러 하천 중 회원천은 별다른 놀이시설이 없던 어린시절 저와 친구들의 훌륭한 놀이터였기에 반가운 마음에 옛 추억도 되살려보고,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 구상도 한번 해봤습니다.

어린시절 여름이면 '엔지밭골'이라고 부르던 회원천 상류에서 가재 잡고 멱도 감고, 겨울이면 썰매도 타곤 했습니다. 가끔은 하드아이스크림 스틱을 세로로 쭉세워 고무줄로 엮어서 배랍시고 물에 띄어놓고 경주를 벌이곤 했습니다.
한번은 하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까지 나무배를 따라갔다가 넘어져서 그만 신발을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하류라 수심도 약간 깊었지만 심하게 오염된 물에 들어갈 엄두가 안나 신발을 포기하고 맨발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된 이야기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수질이 안좋은건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렇게 도시에 있는 하천의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공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몇 해 전 안도타다오라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을 따라 일본 여행을 간적이 있습니다.
교토의 타카세가와 강변에 TIME'S라는 상업시설을 방문했을때 멋있는 건물도 좋았지만 건물앞을 흐르는 물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명칭은 강이지만 회원천 정도의 규모에 도심을 흐르는 하천의 물이 이렇게 맑을수가!   악취는 커녕 아예 물옆에서 쉴 수있게 자리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다지 생태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심의 하천을 잘 관리하면 이렇게 활용 할 수도 있구나하는 인상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생각한 김에 주말에 짬을내어 회원천을 따라 걸어 보았습니다. 회원천이 시작되는 마산여중 옆에 주민들이 풀어놓은 붕어와 잉어가 살고 있습니다. 맑은 물에 사는 고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생물이 살만한 곳인가 봅니다.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가니 의외로 맑은 물에 사는 다슬기와 피라미가 제법 많이 보입니다. 수량이 풍부해 보이지는 않지만 돌틈으로 맑은물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 하천주변의 절, 주택, 백숙집, 밭, 과수원등의 오염원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하천으로 유입됩니다. 조금 더 올라가보니 하천이 아예 마른바닥을 드러냅니다. 요즘 가뭄이 심하다 하더라도 어린시절 멱감을땐 물이 허리춤까지 오는 웅덩이도 몇 개 있었는데, 아마도 식수나 농사용으로  지하수를 과다하게 뽑아써 하천으로 흘러 들어야 할 물이 고갈된 것 같습니다.
 

하천을 따라 쭉 내려오다 중류쯤 이르자 오염은 심해지고 악취도 약간나며, 어릴적 신발을 빠뜨렸던 하류부분은 복개를 해 확인은 안되지만 별로 다르지 않을것으로 예상되며 그 물이 그대로 바다로 유입됩니다.



이번에 발표한 생태하천조성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면 좋을까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앞서 교토의 타카세가와 강변의 사례에서 보듯이 거창하게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건 어떤 시설을 설치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맑은물을 유지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맑은 물이 집앞을 흐르면 그곳에 어울리게 주변도 변화할 것으로 믿습니다.

생활오수와 산업폐수의 하천유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하는것은 물론이고 비점오염원[非點汚染源]의 정화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용어도 생소한 비점오염원은 도시노면배수나 농경지배수와 같이 불특정한 배출경로를 통해 하천으로 유입되는 오염원을 말하며 생활오수나 산업, 축산폐수 못지 않게 수질오염의 원인이 됩니다.

오염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도시지역의 노면배수는 저류조를 설치하여 초기에 내린 비로 인해 발생한 오염물질을 침전시킨 후 방류하도록 하고, 농경지에서 배출되는 비료·농약성분이 다량 함유된 농업배수는 하천으로 직접 유입되지 않도록 저류조, 습지정화시설, 수초대 등을 설치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산도심의 많은 지역이 재개발을 시작했거나 준비하는 상황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재개발지역 중 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은 새로 조성될 하천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하천도 살고 주민도 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도록 해야합니다.
청계천처럼 인공적으로 물을 퍼올리는 반환경적인 방식으로 취하고 겉으로는 생태복원이라고 떠드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안도타다오가 청계천을 두고 '도로로 덮여 하수만 유입되던 더러운 하천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복원'된 것은 건축가의 입장에서 감동 그자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환경이 이미 건축의 큰 화두가 된 마당에 이런 시각은 자칫 보여주기식의 토목공사를 합리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한 공론을 거쳐 시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모쪼록 회원천 수변카페에 앉아 차한잔 나눌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시절 추억이 깃들어있고 앞으로 누군가의 추억이 될 회원천의 변화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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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urbandesign 2009.06.10 12:5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서울에선 각종 르네상스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강르네상스사업을 통해 친수공간을 새롭게 하고, 남산르네상스로서 예술적 문화공간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뉴스에선 동북권 르네상스에 복격적으로 착수하겠다는 내용을 보도하였습니다.
    인간성의 재발견을, 도시재생을 위한 사업으로 은유하여 브랜드화 하여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창하여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내용의 하나 하나가, 드디어 도시디자인의 틀이 성숙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의 생명줄인 하천에도 르네상스가 찾아올까요.

  2. 곽영순 2010.12.23 00:08 address edit & del reply

    죄송하지만 마지막 지도사진에 표기된 엔지밭골은 앵기밭골이 아닌지요

  3. 곽영순 2010.12.28 00:32 address edit & del reply

    앵기(약초의 종류라고합니다)밭이 많은 골짜기라서 앵기밭골이라 불린다고 동네어르신께 들은 기억이 납니다 앵기밭골은 제가 태어나고 26년간 살던 고향이거던요

2009.06.07 23:36

건축은 도시의 자랑거리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모 광고에서 인용된 주거에 대한 긍지를 표현한 문구처럼 도시에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도시의 자랑거리를 만들고 특정한 장소이미지를 구현함으로써 박제화된 도시공간을 브랜드 상품화 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의 자랑거리를 만드는 것은 도시의 외관뿐만 아니라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더욱이 현대 도시공간에 대한 세계화(Globalization)차원의 접근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을 단순히 해당 도시의 시민적 만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도시의 경제적 차원만으로도 제한될 수도 없다.


시민에게 현재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는 것으로 도시의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설령 문화적 활동을 직접 하지 않더라도 대․내외적으로 도시의 역량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최근에 들어 건축의 디자인적인 것으로 도시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키워드로 삼고 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 도시만의 대표적인 자랑거리가 되는 건축물의 등장이 지금시대에 과연 어떤 징후를 보일 것인지, 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를 통해 독특하고 눈길을 끄는 자랑거리를 창조하며 장기적인 이익에 주안을 두어야 하므로, 이를 고려해 볼 때 건축에 있어서도 기획능력과 아이디어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예술품과 같은 건축물로 도시를 살려낸 대표적 사례는 바로 영국의 버밍햄을 들 수 있다.
70~80년대 철강 등 버밍햄의 주력 산업이 몰락하면서 도시 버밍햄 도심에 위치한 800년 전통의 재래식 시장 불링도 슬럼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3년 불링은 셀프리지 백화점·주거·오피스 등으로 구성된 복합건축물로 재개발되면서 버밍햄 경제 부활의 견인차가 됐다.
1만5000개의 둥근 알루미늄판으로 장식한 외관 등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불링의 셀프리지 백화점은 개관 첫 해에만 3000만 명이 찾았을 정도로 영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됐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셀프리지 백화점은 에딘버러 성과 타워 브리지를 제치고 ‘런던 아이’와 ‘빅 벤’에 이어 영국의 랜드마크 3위에 랭크됐을 정도다. 이에 버밍햄시는 디자인 건축물을 통한 도시경쟁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급호텔과 200채의 아파트가 들어서는 ‘더 큐브’, 중앙도서관 리모델링 등 새로운 디자인 건축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 중이다.

좋은 건축물의 디자인으로 건축물 주변지역의 개발뿐만 아니라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끌어 올린 것이다.




                                        ▲ 버밍햄의 불링 쇼핑센터




스페인의 빌바오시도 마찬가지로 전통산업의 몰락을 건축물을 통한 선도사업으로 극복한 대표적인 도시이다. 1997년 10월 개관한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은 세계적 건축가인 프랭크게리의 독특한 건축물로 인해 매년 전세계에서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있다. 빌바오시는 미술관의 성공에 자극받아 다양한 도심 재개발사업을 추진 중이다.


                                      ▲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버밍햄과 빌바오의 성공은 다른 대도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파리시는 내년으로 개발 50주년을 맞는 ‘업무 중심지역’인 ‘라데팡스’의 재개발을 본격 추진 중이다. 50층짜리 초고층 빌딩을 포함, 10여 개의 빌딩을 재개발하거나 신축한다.

런던시도 최근 800여가구의 아파트 및 오피스로 구성된 44층 규모의 ‘웰리시 스퀘어’를 착공한 데 이어 10여 개의 빌딩을 재개발하는 등 런던 전체에 재개발 개발 붐이 불고 있다.


전쟁이 자본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듯이, 건축 디자인을 통한 도시 자랑거리를 만드는 것이 도시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많은 투자를 유치하면 결국 나는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 앞서 소개된 도시정부의 입장이다.


‘9·11테러’로 파괴된 뉴욕 무역센터의 새 건물 디자인을 맞은 세계적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은 칸 국제부동산박람회에서 연설에서 “전세계는 건축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고 강조했다.

훌륭한 건축물 하나가 도시를 먹여 살릴 수도 있다.

도시의 자랑거리가 되는 건축물이 도시 경쟁력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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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urbandesign 2009.06.12 17: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국제공모 또는 국제지명설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강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 건립에서 프랑스 건축가 장누벨의 작품이 선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건축설계비를 350억 요구하였지만, '엔지니어링 사업대가 기준'에 의해 130억원 밖에
    지급할 수 없어 설계비 교섭에 실패하여 무산되었습니다.
    현재는 정림의 박승홍 건축가의 '춤'이라는 작품으로 설계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대문 운동장 재개발 국제현상설계(디자인플라자)에서도 영국 건축가 자하하디드의 작품이 선정되었습니다.
    자하하디드의 설계비로 79억원을 책정했으나 설계자의 요구로 136억원에 계약했다고 합니다.

    유명건축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유익하고 자랑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대문 현장에 한번도 방문해 보지않은 자하하디드의 작품을 136억원에 산다는 것은
    무언가 의아스런 생각이 안들수가 없습니다.

    스타 건축가의 유명세를 돈으로 사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2009.06.05 09:55

과감할수록 더 아름다워진다, 건축은 패션

건축은 패션이다. "ARCHITECTURE =  FASHION"

한 CF광고에서 경쾌한 한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내용이다.

지금까지의 건설이 구조적으로 안전하며, 실용적인 측면이었다면, 이제부턴 유행이나 스타일 등의 속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어져, 마치 패션처럼 유행하고 변화해 간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특히 도시 건축에서의 변화는 더욱 그러하다.

바야흐로 도시에서 공공시설물을 비롯한 각각의 건축물에 디자인의 유행과 변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디자인”.

‘디자인’.  말만 붙여도 통(通)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마치 “○○산업”이나 “○○공학(테크)”가 통하던 그 시절처럼 말이다.


도시디자인, 공간디자인, 공공디자인, 시설물디자인, 간판디자인, 브랜드디자인, 디자인코리아, 디자인서울총괄본부, 디자인행정, 디자인시범사업, 디자인CEO, 디자인비즈니스 ...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변화무쌍한 각각의 건축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패션”, “건축+패션=건축”, “건축+디자인=패셔너블 건축” 등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위 건물은 1995년에 지어진 작품으로 체코 프라하 몰다우(the Vltava) 강변에 위치하며, 네덜란드 보험회사 빌딩(Nationale Nederlanden, 1992-95)이다. 일명 '춤추는 빌딩'(Dancing House)으로 불리고 있으며,   견학 당시(2001년) 워낙 튀는 외모(?)덕분에 찾기에 무척 쉬웠던 기억이 난다.

프랭크게리(Frank Gehry)가 설계[크로아티아 출신의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밀루닉(Vladimir Milunic)과 공동설계]한 이 작품은 1996년에 TIME이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몰다우강변의 이색적인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체코 프라하의 카를교나 프라하성 만큼이나 명물이다. 

            


2005년 9월. 스웨덴에서 덴마크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스웨덴에서 덴마크로 가기 위해서는 말뫼를 지나야 한다. 오순랜드 해협에 면해있는 말뫼를 지날 즈음에 해안풍경에서 유독히 눈에 띄는 건물 하나가 있다.

‘어! 저 건물 꽈배기 모양이네’.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지나는 기차 안에서의 본 풍경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서 나중에 다시 웹문서를 뒤져보았다.

스페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tiago Calatrava)가 설계한 것으로 ‘비트는 몸통(Turning Torso)' 의 이름을 가진 아파트 건물이었다. 54층(약 190m)의 높이로 90도 가량 비틀어져 있는 랜드마크 다운(첫눈에도 그 형태가 돋보였으니 말이다) 건물이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가 자연발생적 유형으로 뚜렷한 정주기반이 무력하여 도시이미지의 틀이 단단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도시정체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도시의 틀을 갖추기 위한 시스템적이고도 체계적인 방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시민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체감적인 내용(Contents)이 필요하기도 하다.
즉, 패셔너블(?)한 건축디자인을 만들어 가는 것.

이는 도시의 상징(Landmark)이 될 뿐만 아니라 도시의 매력으로 주목받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패션쇼 무대위에서 워킹(Walking)을 하고 있는 늘씬한 미인에게 시선을 빼앗겨 본 것처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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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4 10:15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고급 수산업기술은 당시에 전파된 것이다.

마산어시장에 멸치가 입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당시 이순란, 김성칠씨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그 그 기원이 된다. 일본상인으로부터 수입된 멸치는 중개상인을 거쳐 대구, 김천 등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남해안에서 생산된 멸치의 대부분은 하관(시모노세키)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다.

해방전까지 일본사람들로 구성된 '히로시마 온망조합'에서 멸치의 9할 이상을 생산하였다 하며 해방  5년후 한국인 최초로 온망어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제의 진정률이었다고 한다. 이후 멸치의 주생산은 통영을 중심으로한 기선권현망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마산의 어업이민
마산의 율구미 해안마을(지금의 가포동 일부)은 일본 지바현 어민들이 집단이주해 와서 살던곳으로, 일본 어민촌을 지바무라(千葉村)라고 불렀다. 1905년 1월 지바현의 수산조합 이사 吉野文吉은 어민 20명에게 보조금 4,000원을 보조금으로 주며 어업이민을 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어민들은 모두 어획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멸치 권현망, 도미 연라망, 수조망어업등에 종사하였다. 현재 가포의 장어구이로 유명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과 그 일대에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안의 죽방렴 사진)

멸치의 일상성.
멸치를 두고 회자되는 얘기들이 많다. 하챤고 짜잔한 대상을 두고 멸치도 생선이냐?는 얘기도 더러한다. 그건 멸치의 실상을 잘모르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구조상, 아가미, 지느러미 심지어 이빨까지 일반생선과 다를바 없이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이다.

멸치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선이다. 각종 국물맛을 내는데 멸치를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김장의 멸치젓갈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가장 만만한 술안주로 마른 멸치와 고추장 그리고 갓 잡은 굵은 알배기는 회 무침으로, 멸치쌈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몸값은 어떤가? 
키로당으로 치자면 일반 생선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보통 키로당 2-3만원 정도이며, 죽방멸치인 경우는 30만원선이라고 한다. 이 만한 가격대의 생선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죽방멸치는 우리들에게 죽을때 잘죽어야 몸값이 제대로 나간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멸치를 만만케 보아서는 않될 듯 싶다.

멸 치     

죽방멸치의 똥은 쓰지 않다고 한다
비늘 한점 떨어지지 않도록

대나무 통발로 몰래 가둬

끓는 솥단지까지 곱게 모셔와

그 숨이 똑,

한번에 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똥이 쓰다는

아랫배 쪽에 흉터가 생긴

일반멸치는

그물에 몸이 걸린 채

온몸으로 苦悶死하므로

비늘도 상하고 속은

썩은 쓴 맛을 우려낸다는 것이다

종이그물에 몸이 얽힌 채

온몸으로 너무 고민한 잘 쓴 시들은

일반멸치의 맛이 난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게 관건이다

여러 번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만 못하여

비늘도 상하고 내장에 쓴 맛이 들어가는

일반멸치가 되는 것이니

시는 아무래도 말짱한 죽방멸치로 태어나야 한다


(정준영)

* 정준영시인은 죽방멸치를 멸치를 비유해서 죽기직전까지 살아있는 작가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정신과 죽방멸치, 멸치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대상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멸치의 어원
한자로는 멸치(蔑致),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 불리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멸치란 이름에 얽힌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인지라 한자어로는 수어(水魚)라 하며, 고유어로는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로 음운변화하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를 합성하여 멸치로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산물 검사법에 의하면 건조품 중 전장 7.7cm 이상을 대(大)멸, 7.6~4.6cm를 중(中)멸, 4.5~3.1cm를 소(小)멸, 3.0~1.6cm를 자(仔)멸, 1.5cm 이하를 세(細)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멸치의 어획방법
멸치를 어획하는 대표적인 어업은 권현망이다. 멸치는 기선권현망, 유자망, 정치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다양한 어업에서 어획되고 있지만 주로 기선권현망어업에 50~60%이상을 어획하고 있다. 이 권현망(權現網)이란 명칭은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의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따온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어살(漁箭)이다.  수심이 별로 깊지 않은 바닷속에 길이 5~10m 가량 되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이처럼 부채꼴로 박은 말뚝을 ‘살(삼각살)’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한 변은 길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 그리고 살 안쪽의 뾰족한 부분에는 참나무 말뚝을 둥그렇게 박은 다음,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서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짝이 매달려 있다. 이 문짝은 밀물 때에는 조류의 힘으로 활짝 열려 있다가 썰물 때에는 축 늘어져서 꽉 닫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불통 안으로 들어온 고기들은 다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죽방렴에는 날씨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가 드는데,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것 보다 곱절이나 높은 값에 팔린다. 그물로 잡은 멸치는 금세 숨이 끊어지는 데다 비늘이 다 벗겨지고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맛이 떨어진다. 반면, 조류를 따라 자연스레 죽방렴 안에 들어온 멸치는 산채로 곧장 삶아서 말리기 때문에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멸치잡이는 멸치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끌어 직접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대개 5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통해 이뤄진다. 본선 2척과 어로장이 탄 어탐선이 같이 항해하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 한척마다 길이 500m가량의 그물을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두척의 배가 그물을 끌면서 걸려든 멸치를 그물자루 끝쪽으로 모으고 한쪽으로 몰린 멸치들은 굵은 호스와 연결된 펌프로 빨려들어가 곧바로 가공.운반선으로 자동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선 2척은 다시 투망준비를 하면서 어탐선이 어군을 발견할 때까지 대기하고 가공.운반선은 펌프를 통해 보내진 살아 펄떡이는 멸치들을 즉석에서 대나무 발에 담은 후 팔팔 끓는 솥에서 3~4분 가량 삶는다. 배위에서 삶아진 멸치들은 곧바로 육상의 건조장까지 운반된 뒤 13~14시간동안 말려진 다음날 바로 시장에 판매된다.

- 이학박사 황선도님 글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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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이 2016.05.09 13:36 address edit & del reply

    지식인에 담아갑니다
    출처는 남깁니다

2009.05.29 09:12

노무현의 추억

 



최근에 용산 재개발문제로 참극이 빚어졌습니다만, 이런 사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이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 난장이들의 꿈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18년 전, 1991년이었습니다.
건축가였던 나는, 세입자이기 때문에 재개발의 혜택은커녕 어디론가 빈손으로 쫓겨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끝에, 기존의 재개발방식과 달리 세입자도 입주 가능한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정말 아무 방법이 없는지, 집을 지어주지는 못하지만 집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도 제시해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산에서 펴낸 이 책을 읽고 공부하시겠다고 직접 전화를 한 후 보좌관을 보내 받아간 그 책 입니다.


일 년간의 시간을 들인 뒤 ‘세입자의 입주가 가능한 재개발’을 주제로 책을 한 권 펴냈습니다. 집 주인만 혜택을 받았던 기존의 방법과 전혀 다른 재개발이라 언론의 관심도 높았습니다. 비매품이라 구입할 수 없으니 보내달라는 요청을 여러 곳에서 받았습니다만 모두 도서관이나 주택정책연구자들이었습니다.


국회의원 노무현의 전화를 받다



실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될 정치가와 행정가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당시 13대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허정도 선생님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저는 국회의원 노무현입니다. 허 선생님께서 재개발에 관한 책을 펴냈다고 이야기들었습니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 책을 한 권 구해 읽어보고 싶습니다. 파는 책이 아니라서 이렇게 직접 연락을 드렸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아, 예…, 그렇게 하시죠.”
“보좌관을 마산으로 보낼 테니 그 친구 편으로 한 권 보내주기 바랍니다.”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도 있는데…”
“아, 아닙니다. 그 친구가 부산에 갈 일이 있으니 마산에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 1991년 당시, 연구 대상 지역이었던 곳 입니다. 사진의 스레이트 지붕이 지금은 콘크리트 스라브지붕으로 바뀌었습니다. 최근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데 세입자를 배려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마산에서 만난 보좌관의 말.


“지역구의 가난한 세입자들이 집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기 위해 노무현 의원께서 직접 책을 읽어보려는 것입니다”


저의 짧은 ‘노무현의 추억’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이런 정치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의 모색을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노무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한국정치에 대한 희망을 그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가 떠난 지 나흘째 되던 날, 불현듯 그 때 일이 생생히 떠올라 이 글을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같은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 정치가 노무현…,
그가 정녕 아깝습니다.

 


윤민석님이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님 추모 노래 '바보 연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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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isters 2009.05.29 09:23 address edit & del reply

    부디 편안한 곳에 가셨길

    • 허정도 2009.05.29 10: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해주어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 무탄트 2009.05.29 09:51 address edit & del reply

    아~~가슴 시리도록 마음 아프게 하는 인간 노무현...정말 아깝습니다..그와 잡았던 손의 온기를 절절한 그리움으로 안겨주고
    떠났기에 정말정말 억장이 무너지도록 가슴이 아픕니다..면복이 없습니다..당신을 사랑한 한사람으로서..부디 좋은곳에서 편안하시길 두손모아 기원합니다.

    • 허정도 2009.05.29 10:12 신고 address edit & del

      참 가슴이 아프네요. 좋은 지도자 한 분을 잃은 것 같습니다.

  3. 구름 2009.05.29 16:44 address edit & del reply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이 열리는 바로 그 시간에 깡패 용역들이 용산에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문정현신부님이 깡패같은 용역들에게 끌려 나오셨다고 하는군요.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서울광장에 몰리고, 언론이 모두 서울광장에 몰려간 동안 철거민들을 끌어낸 것 입니다.

    이명박 정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네요.

  4. 야무진 2009.06.02 09:53 address edit & del reply

    사람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5. 푸른옷소매 2009.06.02 18:24 address edit & del reply

    너무 소중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6. 등산길 2009.06.03 16:03 address edit & del reply

    서민을 위해 . 서민과 함께 할수 있는 분이 서민들 곁을 떠나셨습니다. 고인을 명복을 두손모아 빕니다

  7. 자연 2009.06.14 15:22 address edit & del reply

    초보연구자로서 위의 선생님의 책을 읽고싶습니다..
    jin21s@dreamwiz.com 이메일 입니다..

    • 허정도 2009.06.15 17:14 address edit & del

      너무 오래된 책이라 여분이 없습니다.
      참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내용이 별로 없어서 볼만한 책은 아니지만, 혹 필요하시면 몇몇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것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출판 당시에 서울대도서관, 한양대도서관 등에서 연락이 와 보내준 기억이 있습니다.

  8. 수잔 2009.06.30 17:16 address edit & del reply

    즐겨찾기를 해두고 보고 또보기를 몇번...
    흐르는 노래가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언제까지 노짱님을 그리워하며 뒤로 뒤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현시대를 가슴 아파해야 하는지...
    허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같은 분들이 모여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겠죠?
    우리사는 세상이 노짱님 희생의 값으로 사람사는 세상이 빨리 다가오는 오는 날을 간절히 바래봅니다.

  9. 박주언 2009.10.22 13:06 address edit & del reply

    님을 지지 합니다. 노무현님도 허정도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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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에스코바르-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 이하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메데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성적은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 마약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

꽃과 미녀의 도시, 콜롬비아 메데진(Medellin) - 1 / 세계가 주목하다

-그들의 변화- 한 때 전 세계 마약 시장의 80%를 주물렀던 세기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milio Escobar Gaviria / 1949. 12. 1~1993. 12. 2). 그의 일대기는 최근에까지 영화..

토지주택박물관 관람과 의령 자굴산 산행

이 포스팅은 학봉산악회 회원들이 진주혁신도시에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 내 토지주택박물관과 의령 자굴산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글은 회원인 손상락 박사가 썼습니다. - 일시 ; 2019년 5월 31일&sim;6월 1일(금, 토) 5..